어떤 권리는 의무에 선행되지 않는다.
줄리아 라이네케가 레이먼드 메르체에게, 1학년 | 2024.07.08
보호자의 우울에 대한 암시, 보호자를 돌보는 아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존재합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닫힌 창문 너머로 푸르른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호그와트의 입학식은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인 9월. 신록이 푸르르게 물들다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았다. 가을의 햇살이 창문을 타고 너무 덥지 않을 정도로만 따스하게, 칸 안을 감싸안았다. 초록색,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
의자는 녹갈색, 벽은 누런색. 광택이 도는 문 가장자리는 빨간색. 차가 때로 선로 위에서 덜컹거릴 때면, 그 색들은 춤을 추듯 가볍게 흔들렸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머리는 다갈색, 뺨에 얹은 두 손은 하얀색. 그리고, 그리고― 눈앞, 시야의 정중앙에서 그를 마주한 것은, 다시 선명한 초록색.
기차가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만을 제외하면 칸 안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저 밖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왁왁 소리치고, 한 판 붙어 나뒹구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 양. 그렇기에 너의 목소리는 그 어떠한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또렷이, 그의 귓가에 가닿았다.
“줄리.”
자신을 쓸어내리는 너의 엄지손가락에서, 아이는 슬픔을 느꼈다. 초록빛 시선 안에는 그 자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오롯이 그를 보았고, 그렇기에 그의 형상은 너의 눈동자 안에, 그대로 붙박여 버렸다. 불안했다. 어째서 너는, 나를 이리도 슬프게 바라보는지. 꼭 실수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잘못 말한 것 같았다.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너무 많은 것을 너에게 털어놓아 버린 걸까.
너는 말했다. 조금 전의 상기된 듯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낮고도 조용한 목소리였다. 마치 달래는 듯한,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 그것은 그 역시도 자주 쓰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기대서 살아가.”
그럼에도,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는 그로서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달랐다. 너는 말했다. 마치 그의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그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공포, 가장 깊은 불안, 가장 깊은 혐오, 가장 깊은 죄책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 사람이 네게 기대어 행복할 권리가 있다면, 너 또한 그 사람에게 짓눌려 압사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네 머리는 다갈색.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은 하얀색. 그러나 네 초록색 눈은 그의 아버지의 헤이즐빛 눈과는 달랐다. 하나는 그를 붙들었고, 하나는 그를 위로했다. 두 눈에는 똑같은 슬픔이 담겨 있었지만, 하나는 그 슬픔이 자신의 안으로 향했다. 네 슬픔은 자신이 아닌 바깥을 향했다. 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를 향했다.
“어른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해. 당장에는 우리가 없으면 무너지고 쓰러질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줄리, 너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 네 아버지를 두고 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권리. 아니, 너는 너보다 한참은 큰 어른을 두고 왔다는 사실로 고통 받지 말아야 해. 나는 그 사실을 알아.”
빗방울에 서서히 젖어들 듯이, 네 말이 그의 작은 가슴 사이로 스며들었다. 너는 그것을 ‘권리’라고 표현했다. 그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격. 힘. 권리. 너는 말했다. 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는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 누구도, 그것을 그에게서 뺏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슬픔을 겪은 사람이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 건네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언령이었다.
“레이…….”
그는 자신의 손을 꼭 쥐었다. 우물거리는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
첫 마디는 이러했다. 이곳에 와서 자주 내뱉게 된 말이었다. 아이들이 자꾸만 물어보는 것들. “줄리아는 뭘 좋아해?” “하고 싶은 건 뭐야?” “원하는 역할 있어?” 그것은 그로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왜냐면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눈가에 남은 새빨간 자국이, 어딘지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 너머로 들리는 울음소리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들이 있었으니까. 너를 포함한 마법 세계의 친구들은 ‘나’에 대해 물었다. ‘내’가 행복해야 했고, ‘내’가 좋아해야 했으며, ‘내’가 원해야 했다. 그것은 그로서는 너무도 낯선 관점이었다. ‘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 나도 정말 네 말을 믿고 싶어.”
진심이었다. 그는 알았다. 너는 다를지언정 분명 어떤 면에서는 그와, ‘동류’였다. 아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슬픔을 일찍이 깨달아 버린 사람들. 그래서, 밝게 행동하면서도 우울에 익숙한 사람들. 고통에 친숙한 사람들. 네 말이 너의 진심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네가 입 밖으로 언어화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는 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믿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너의 말을. 네가 말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언어와 비언어를 통해 전해져온 너의 진심을.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헤이즐색 눈동자는 그와 닮지 않은 녹색의 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내 시선이 빗겨가고,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 어른은 강하지 않아.”
그것은 그가 일찍이 깨달아버린 세상의 잔혹한 진실이었다. 어른은 강하지 않다. 결코 강하지 않다. 어른도 지친다. 어른도 슬퍼한다. 어른도 무너진다. 어른도 비명을 지른다.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리고…….
“너는 몰라.”
너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알지 못했지만, 그 눈은 여러 면에서 그의 ‘어른’과 닮아 있었다.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너는 몰라, 레이. 우리 아빠는 강하지 않아.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
그의 작은 품에 안겼던 거대한 몸을 기억한다. 그의 귓가에 들렸던 물기 어린 목소리를 기억한다. “내 줄리아.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빠는……, 네가 있어서 비로소, 행복해.” 왜 그 말을 들을 때 그의 가슴이 그토록 답답했는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는지. 꼭, 그래. 네 말처럼 ‘압사당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우리 아빠는 괜찮지 않을거야. 언제나 괜찮지 않았으니까. 내 행복은 중요하지 않아. 아빠마저 사라지면 어차피 내 행복은 떠나고 말 거야. 이미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제 두 손을 꼭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그래서 나는 아빠가 없으면 안 돼, 레이. 정말로 없으면 안 돼. 나는 알아. 아빠는 약해. 나보다도, 약해. 아빠는 언제나 날 필요로 했어. 내가 없으면, 아빠는 무너져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그가 참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빠를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사람을 위해서. 때로 이유 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휩쓸고 가더라도, 그것이 그를 괴롭게 하더라도, 짓눌리게 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눈물은 점차 커지고, 많아졌다. 너의 두 손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하늘은 푸른색. 신록은 초록색. 열차의 문은 광택이 도는 붉은 빛이었고, 녹갈색 의자 위의 벽지는 누랬다. 네 두 손은 하얀색, 흘러내린 앞머리는 다갈색. 그리고, 나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는 또다시 초록색. 그 모든 색이 눈앞에서 뭉그러지고 뒤섞였다. 그렇게 방울이 떨어지고, 차올랐다. 맑아지고, 흐려졌다.
“미안해.”
그는 네 손 안에서 축축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그가 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미안해, 레이…….”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단어 잘못 배운 고얀놈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