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우드워드

너는 정말로 그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2022.12.22

직접적인 혐오 표현이 등장합니다. 커뮤니티 수위 기준에 맞추어 다소 순화했음을 밝힙니다.


“폴란드 계집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하늘은 유달리도 맑고 화창했으며,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산했다. 막 성당 미사를 끝마친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고 있었다. 나는 읽다 만 책의 다음 장이 너무 궁금하다는 이유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두 분의 옷자락을 끌었다. 어색한 미소와,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대 나의 대결은, 언제나처럼 나의 승리였다. 오른손에는 할아버지, 왼손에는 할머니, 나는 그렇게 집을 향해 들뜬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온통 책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날은 특별한 것이라곤 하나 없는, 평범한 일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툭. 우리는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아마 할머니였을 것이다. 어깨를 부딪힌 사람은, 남자였던가? 여자였던가?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검고 흐릿한 인형 뿐. 그러나 그 말만큼은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침범하듯, 파고들 듯 단숨에 뇌까지 들어와버렸던, 그 두 단어.

 

“폴란드 계집애가.”

 

오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선명한 발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단지 어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뒤에 들리는 선명한 목을 긁는 소리까지. 손 하나가 나를 떠나갔다. 할아버지였다. 이내 들리는 고함 소리에 할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았고, 나는 다른 손으로 귀를 막았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우리를 스칠 뿐이었다. 한 번의 눈길. 그것만이 전부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투명해지는 약물을 먹은 사람처럼.

 

“썩을 것들. 누가 너희들을 지켰는데. 빌어먹을 것들.”

“미안해 아가, 놀랐지? 이제는 괜찮아. 다 끝났단다. 다 끝났어….”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 사람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았다. 씩씩거림과 포옹. 한 사람은 분노를, 다른 한 사람은 위로를. 그 사이에서 나는 단지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궁금증과 감정들은 뒤로 한 채.

 

“저는 괜찮아요, 할머니. 아무것도 못 들었는걸요.”


경험은 그렇게 쌓이기 시작한다. 우그러진 번호판에서, 깨진 창문에서, 지껄이는 말들에서, 날카로운 시선에서 나는 깨닫는다. 저것은 나를 향한 것이다. 나의 가족을 향한 것이다. 나의 집단을 향한 것이다. 나의 뿌리를 향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느냐고? 그 또한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했고, 신문이 말했다. 사람들이 말했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이, 때로는 부자가, 때로는 정부가, 때로는 노동조합이, 때로는 기업이, 말했다.

너희는 남의 땅에 들어와, 남의 세금을 축내고, 남의 일자리를 빼앗고, 남의 일상을 약탈하고 있어.

너희는 범죄를 저지를 것이고, ‘우리’의 규칙을, ‘우리’의 문화를 따르지 않을 거야. 너희는 달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협을 느껴. 

그러니 떠나. 네 땅으로 돌아가. 거기서 너희가 어떤 취급을 받든, 어떤 처지가 되든 ‘우리’가 신경쓸 문제는 아니야. 눈 앞에서 사라져. 그러면, 너희를 문제삼지 않을게.


히틀러를 기억한다. 나치를 기억한다. 2차 세계대전 역시 기억한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는 아니나, 내가 물려받은 이야기였다. 내가 밟아보지 않은 땅을 침략당한 이야기. 그 안에서 죽고, 끌려가고, 맞서 싸우고, 그래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승리했으나 거기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남겨진 것은, 또다른 공포와, 또다른 폭력과, 또다른 차별.

할아버지는 늘 말했다. 연합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땅이 군화 앞에 무너지고, 유린당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적을 두었으니 함께 싸웠다. 그들을 믿으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기념식에서 배제당하고, 길 가다가 욕설을 듣고, 언론에서 심심할 때마다 까내리는 대상이 되는. 일을 하려 하니 조합에서 막고, 그게 아니면 싼 일자리만 주어지고, 거기서도 무시만을 받는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고국도, 명예도, 그 무엇도.

차별과 폭력, 배제와 죽음의 역사.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 그리고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알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럼에도, 긍지를 가져야 한다. 마리아야. 너는 폴란드인이다. 악에 맞서서 싸웠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 모든 사람들의 후손이야. 나는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네 뿌리를 후회하지 말거라.”

그러나 사람은 긍지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말했다.

“입을 다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우리는 받아들여질 수 있어. 네가 폴란드라는 티를 내지 마. 언어도, 풍습도, 종교도, 전부 이 집 밖을 나가면 금지야.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마. 알겠지? 메리.”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동류를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타자의 냄새 역시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익숙한 폭력. 시선 속에서, 내뱉어지는 언어 사이에서, 때로는 물리적인 수단 속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본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본다. 내가 무엇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러므로 나는 안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나도 알아.”

이곳의 차별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언제나 이유는 있는 법이야. 명분도 있는 법이지. 사람들은 언제나 미워할 대상이 필요해. 자기들의 불만을 풀 대상을 찾아 헤매이지. 

그러니 네 말이 맞아. 양심의 목소리 한 두개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어. 어차피 다들 희생양을 원하거든. 그건 광기가 아니야. 그냥 사람들 안에 항상 있는 악의일 뿐. 모든 것은 얘 때문이야. 그러니 얘만 없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몰아내자. 내쫓자. 괴롭히자. 누구는 그걸 이용하고, 누구는 거기에 그냥 넘어가버려. 그렇게 무시하고, 위협하고, 모욕하지. 좋았던 것은 깡그리 잊고, 나빠진 것들만 기억해. 그리고 그걸 전부 다시 돌려버리는 거야. 너희 탓이야. 너희가 먼저 잘못했어. 항상 그런 식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전쟁을 위해서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다는 거. 너는 우리 할아버지가 왜 영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 이 땅에서 살면서 왜 이 나라를 싫어하는지도. 그건 바로, 연합군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아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사람들도 너처럼 생각했을 거야. 내가 ‘폴란드 계집애’라고 불릴 때, 반 애들이 나를 놀리고 괴롭혔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른들도, 다른 애들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어차피 나서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그냥 보지 말자. 듣지도 말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나는 모를 것 같아? 순수혈통우월주의는 바꿀 수 없어. 이 차별의 시작은 국제비밀법령이 제정된 시기까지 올라가고, 우리가 갓 태어난 그 순간까지도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지. 힘을 가진 쪽은 차별을 받지 않으니 바꿀 이유가 없고, 차별받는 쪽은 힘이 없으니 바꾸지 못해.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웃고 있어. 어차피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예전에 너는 무엇을 해야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물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네 어떤 점이 나를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지.

네 이런 행동이 싫어. 싱클레어 시클라멘. 네 그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미소가 싫어. 네가 겪는 게 아니니까 나오는 그런 태도가 싫어. “나 또한 그러고 있을지도 몰라” 라면서도, 여전히 너는 깨끗한 척, 뭔가 다른 척 구는 모습이 싫어.

그러니까 확실하게 말해줄게. 너는 하나도 다르지 않아. 네가 악습이라고 말하는 그 순수혈통우월주의자들과도, 하나도 다르지 않아. 아니, 오히려 더 나빠. 왜냐면 그 사람들은 대놓고 나쁘기라도 하는데, 너는 겉으로 보기엔 좋은 사람처럼 보이거든. 어차피 나를 돕지 않을 건 똑같은데도.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악의 때문이야.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리고 악의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무관심 때문이지. 결국 내 일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널 싫어하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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