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레오]장난감
장난감이었다. 주인과 노예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건방진 황제의 손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보잘 것 없는 장난감. 이미 패가 다 결정 난 체스판 위의 권력 없는 왕이었고 더 이상 단물을 뺄 수 없는 질겅거리는 껌 한 덩어리. 주인은 버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장난감이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면 언제든 자유를 줄 수 있다는 듯 구는 시건방진 태도로 방종. 아하. 주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에도 가증스럽지. 자신은 친구라는 호칭으로 그에게 다가갔었고 상대도 친구라는 이름에 기쁨을 느꼈다. 꽤나 나쁘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라는 거 그리 많은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수평적 관계잖아. 그런데 어째서 너는.
제 주변에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아아, 사랑해! 좋아하는 이들에게 매일 사랑고백을 외치고 다녔던 츠키나가 레오였으니까. 저들이 제 곁을 지키고 있는 것도 자신과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팔이 부러져서 참혹한 영감을 떠올리고 음표들을 무수히 그려나가는 순간까지도 아직 괜찮으리라 자위했는데. 오히려 이런 상황도 생겨서 더 많은 망상들을 그려나가는 것이라 좋아했는데. 텐쇼인 에이치. 건방진 황제가 자신의 신념을 전부 무너뜨려 버렸다. 자신을, 견고하고 단단했던 자신을 일순 파도 한 번에 스러지는 모래성으로 몰락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지켜낸 나이츠를 학교에 홀로 남겨두고 학교를 떠나있던 이유도 그 빌어먹을 황제 하나 때문이었다. 고고한 옥좌에 앉아 스스로 일어나는 대신 남의 손을 빌려 살인마라는 이름과 선악과의 색만큼 붉은 피를 다른 이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우는 악마 같은 존재. 천사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살인을 저지른 존재니까- 텐시라는 별명은 그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별명이 되어버렸다. 신의 명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살육을 정당하게 저지른 끔찍한 것들. 텐쇼인 에이치. 너랑 너무 똑같네. 쓰레기를 처리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고름과 핏덩어리들을 만들어 냈잖아. 안 그래? 레오는 숨이 점점 막혀오기만 했다. 심장이 아픈 그 사람처럼.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나이츠가 이 학원에 현존하고 있었음에도 레오는 등을 보인 채로 매몰차게 돌아섰다. 전이라면, 그 나이츠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이자 더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기에 마음 놓고 영감을 찾으러 떠나 있을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 나이츠마저 자신의 어깨에 올려버리면 자신이 부식된 쇳덩어리처럼 파스스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훌륭한 기사들, 그들의 가장 선두에 고고하게 서 있는 왕이 누군가의 한낱 장난감으로 전락했다는 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쉬이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적장의 칼을 맞아 죽어 기사들을 지키다 숨을 멎은 왕이 된다면 그 기사들에게 눈물을 머금은 새빨간 장미 한 송이를 받으며 달가운 추앙이라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지금의 자신은 그저 몰락한 왕국의 왕좌만 지키고 있는 고독한 왕이었다. 이제 나이츠는, 마음 놓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아. 정말 벌거벗은 임금님이네. 멈춰버린 오선지를 바라보면서 레오는 낄낄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었다. 청소라는 깔끔한 명분을 걸고서 손에 대신 피를 묻히게 하고 내가 기뻐하는 걸 보며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듯 웃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구경거리로 삼은. 불 하나 들어오지 않는 검은 방에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에 겨우 쥐고 있던 볼펜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오는, 제 심장이 깎이는 것만 같았다. 흘러넘치지 않는 음표들. 떠오르지 않는 망상.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는 자신. 도대체 왜 살고 있는지 모를. 이 전부가, 텐쇼인 에이치. 빌어먹을 황제. 친구라고 달콤하게 현혹하지나 말지-
펜이 뚝,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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