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 양하여

1.

다운은 가장 온전한 다정을 받았던 때를 기억한다. 최초의 다정은 씨앗이 되어 다운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고 그것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심장을 옥죄어 왔다. 다정이란 그러했다. 제 허락도 없이 침범하고는 제 자리를 내놓으라며 아우성을 외쳤다. 비대해진 다정은 저를 짓누르면서도 황홀하게 아름다웠고 다운은 자라나는 다정의 줄기들을 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정이란 그러했다. 다운은 숨이 막히면서도 고개를 들어 올리면 보이는 찰나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저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운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한다. 세상에 제 연인만큼이나 다정한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 명치 한 구석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몇번의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유리문 너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수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친절함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할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다운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4월의 밤은 여전히 추운 편이었다. 얇게 걸친 가디건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기에 약간의 후회를 품고 애꿎은 땅만 운동화 코로 푹푹 찔러대고 있자 따스하게 스며오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춥지. 벌써 4월인데도 꽤 쌀쌀하구나.” 다운은 발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무리에서 빠져나온 수한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수한은 허리를 한번 쭉 피며 어둠이 드리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뻗었다. “좀 오래 걸렸네. 많이 기다렸어?” 다운은 느릿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오늘은 그렇게 오래 걸린 건 아니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수한은 눈썹을 한번 까딱거리곤 잠깐 제게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다운은 수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봄밤의 냄새와 약간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풍겨왔다. 다운은 수한이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과하지 않게 달아오른 볼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미소가 그랬다. 수한은 밤바람을 만끽하듯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갈까. 네.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사람은 항상 바쁜 법이었다. 수한의 곁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수한의 다정은 언제나 사람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가끔은 수많은 관심이 지치는 날이 있고 다운은 그것을 이해한다. 여보세요. 선배, 전화를 주시다니요. 무슨 일이에요? 별 건 아니고, 많이 바빠? 바쁘면 미안해. 괜히 전화해서. 아니에요. 바쁘지 않아요.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혹시 나 여기서 빼내 줄 수 있어? 전화기 너머로 울리는 시끌벅적한 소리 사이로 수한의 무색한 웃음이 작게 흩날렸다. 안 되면 미안해. 괜찮아요, 갈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

다운은 이런 방식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게 용한 일이었다. 그만큼 수한은 너무, 정말로 바빴으니까. 다운은 조금이라도 더, 한번이라도 더 수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연인 사이에 이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다운은 공책을 덮고, 마시던 라떼를 전부 마셔 버린 후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집에 일찍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조금 덜 힘들었으면 좋겠으니까. 서두르자는 생각이 들어 조급하게 굴다 발을 헛디딜 뻔했다. 하필 카페 직원과 눈이 마주친 탓에 멋쩍은 웃음으로 트레이를 돌려주어야 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휘젓고 지나간다. 봄바람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다운은 수한이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다운이 수한을 바라보면 그의 머리칼 역시 공기중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허전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수한은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있었다. 다운은 제 손과 수한의 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저 제 손과 손을 맞잡았다. 그뿐이었다. 달이 밝았다. 수한은 제 연인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충분했다. 따뜻하진 않지만 바람이 부드러웠고, 달은 밝게 빛났으며, 수한은 꽤 기분이 좋아보였고, 저는 그런 그를 볼 수 있었다. 제가 건네는 실없는 말에도 수한은 웃으며 대답해주었고 집에 가는 동안 꽤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수한의 자취방 근처였다. 아쉬웠다. 통학을 위해서는 학교와 가까운 게 좋다지만, 지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 도착했어요. 벌써? 아쉽네.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기뻤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조금 다급하게 말한 탓에 약간 삑사리가 났다. 깜짝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수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절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웃겨. 뭘 그렇게 놀라면서 그래. 웃는 수한에 눈을 꿈뻑거리다 저도 웃어버렸다. 마냥 웃음이 새어나왔다. 수한은 잠깐 그런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다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깐 몸이 굳었을지도 모르겠다. 수한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정말로 귀엽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수한의 표정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운은 이해했다. 사실일 테니까. 다운은 수한에게 분명 좋은 사람였고, 귀여운 후배일테다. 그렇게 시작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다운은 그 속에 담긴 어떤 선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다운은 마주 웃어보였다. 조금 부족할 수 있었다. 괜찮았다. 차근차근 나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분명 그러면 되는 일이다. 다운은 수한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밤이 깊었다.

2.

다정의 무게를 생각한다. 다정의 무게는 어느 정도이길래 이렇게나 숨이 막히는 걸까. 다정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한번의 눈 깜빡임에 스며들어 있고, 텍스트의 자음과 모음 사이에, 온점과 호흡사이에 조금씩 숨어있는 다정은, 스치듯 흘려보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닐 다정이, 어째서 한번이라도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면 냇물이 불어나듯 자꾸만 거대하고 무거워지는 건지. 다정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저 다정은 다정으로 남았다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이의 품에서만 크기를 키우니 결국 아프고 힘들어 하는 것도 그걸 붙잡고 있는 사람의 탓이었다. 다정은 단지 다정이기 때문에. 다정하시네요 선배. 다정은 잘못이 없었다.

시험이 끝났다. 벚꽃이 다 져갈 무렵이었다. 다운은 제 성적의 미래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가 이내 지웠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라면 미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마음 편했다. 떨쳐내듯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차라리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하자. 종종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애초에 도서관은 타인이 많았고 대화도 영 나누지 못 한다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장소였다. 오늘에서야 정적을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운은 조금 들뜨는 느낌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일찍 도착해 버린 것은 그 탓이다. 마음이 설레서 도통 잠을 못 이룬 탓에 아침에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잔뜩 고양된 기분은 여전했다. 스멀스멀 웃음이 피어 올랐다. 이제 막 시험을 끝낸 시점에서 선배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분명 지금이 아니라면 또 다시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을까봐 선배를 보챈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선배랑 구경하고 싶었다고 말한다면 너그러이 봐 주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이 아니라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선배를 먼저 채 갈지도 모르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다운은 별 것도 아닌 일들에 가끔 이렇게 혼자 변명하곤 했다. 문득 바라본 신발 앞 코가 조금 더러워져 있었다. 멍하니 있을 때면 땅을 파고 드는 습관이 있어서 그랬다. 다운은 조금은 이 습관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발이 금방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공기는 나름 선선하고 부드러웠다. 데이트,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금방 볼에 열이 올라 다운은 양 손등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과하게 반응하는 일이 있었다. 봄바람을 타고 풀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선배는 보통 약속시간에 맞춰 나왔다. 아직 시간이 꽤 남은 탓에 다운은 잠깐 주변을 걷기로 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잎이 눈꺼풀을 스쳐 콧등에 닿았다. 간지러워서 재채기가 나왔다. 시선을 위로 향하니 이미 듬성듬성해진 가지가 보였다. …이런 풍경은 봐도 재미없어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운은 함께하는 시간에 의미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풍경보다 수한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부실해 보이는 벚꽃나무나 너무 일찍 나와버려 혼자 기다려야 하는 시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운은 어서 수한이 왔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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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 소리에 다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가방을 뒤져 폰을 찾았다. 핸드폰 화면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찍혀있다. '수한 형.' 다운은 전화가 끊길까 급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선배!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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