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이해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남에게 기력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다. 동정심은 사치다. 그가 겪은 모든 것들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자기파멸적 행위의 업보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말하신다면 들어드릴 거예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은 아니다. 아량이나 시혜도 아니다. 온정 따위와는 실은 거리가 멀다. 이것은 외면이다. 선을 긋고 당신과 나를 구분짓고, 네게 어떤 위로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선고하는 것이다.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선언이다. 단지 지금 당신을 발견한 것이 나였을 뿐이었다. 저는 당신의 문제를 책임지지도 돕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엉망이 된 순간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떠나기에도 어설픈 성정이다. 결국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다. 어설픈 도덕심. 사회에 섞여살기 위한 최저한선. 도태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인의.

두 눈을 끔뻑이며 올려다보는 얼굴이 엉망이다. 뺨은 긁혀있고 광대뼈 부근에 멍이 들어있다. 터진 입술엔 완전히 굳지 못한 피딱지가 맺혀있다. 예준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반창고는 필요하겠다 싶어 근처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서시우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곡선을 그려냈다. 그 눈. 입꼬리가 올라가며 호선을 그려낸다. 그 표정. 뻗은 손이 예준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더니 금새 반대쪽 팔로 제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예준이 휘청거리며 끌려왔다. 순식간에 거리감이 0이 된다. 그 태도. 서시우는 예준의 배 언저리에 뺨을 맞댄 채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리며 한껏 불쌍한 척을 한다. "그럼 어디 가지말고 그냥 옆에 있어주라..." 그 말... 서시우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몸짓과 행동, 언어에서 인위적이고 기만적인 냄새가 풍겨온다. 그러한 일들은 제게도 일상이므로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다만 가면이란 벗겨지기 때문에 가면이 된다. 예준은 필요에 의해 그것을 이용했고, 벗고 쓸 줄 알았다. 다시 말해 가면이 내가 된다거나, 내가 가면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예준은 감상을 멈췄다. 서시우의 손이 제 허리근처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마주본 얼굴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했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충분히 그와의 관계는 복잡했고, 여기서 더 얽혀드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안 할 겁니다. 돌아가죠. 가는 길에 편의점도 들리고요. 집에 남아있는 반창고가 없을 거예요."

옅은 한숨으로 사고의 흐름을 끊어낸 예준은 허리춤의 손을 밀어냈다. 생각보다 순순히 떨어지는 손이 그래도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은 아는 듯 싶었다. 말 없이 그를 떠나고, 그 역시 말 없이 자신을 따라온다. 두 사람 분의 발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얌전한 태도가 오히려 불안하다. 예준은 편의점까지 가는 도중 몇 번 그를 힐끔거리며 뒤돌아보았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예의 그 미소와 그 직전에 한순간 존재하는 무감각이다. 그는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난기를 품고 있지도 았았으나 오늘따라 멍하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이런 모습이 처음인 것만은 아니다. 예준은 이따끔 형태 없이 스쳐치나가는 수십가지의 얼굴 속에서 무표정을 목격하곤 했다. 오롯이 그가 혼자일 때만. 다시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무방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보이는 틈새는 그마저 계산된 기만일까? 도무지 예측이 어려운 사람이다.

편의점에 도착하고 반창고가 있을 위치를 찾아갔다. 얌전히 뒤를 쫓던 이가 자리를 이탈했으나 그건 오히려 예상범위 안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상처의 크기를 가늠하며 여러 사이즈의 반창고를 챙겨들곤 계산대로 향했다. 바코드 소리가 울려퍼지는 사이로 서시우의 손이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물건을 확인한 예준의 표정이 기가 차단 듯 일그러지나 여전히 상대는 뻔뻔하리만치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다. "같이 계산해 주실래요?" 웃어보이기까지 하며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알바가 일행임을 가늠하듯 시선을 힐끔거렸지만 도무지 좋은 표정이 지어지지 않았다. 어… 저기…. 일행이시죠? 알바생이 머쓱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네에, 저희 친구 맞아요. 진짜로. 서시우는 능글맞게 제 어깨에 팔을 올리고 답했다. 결국 어이가 사라진 예준을 이끌고 물건들을 받아들고 나오는 건 서시우였다. 문 밖으로 나서니 찬바람에 머리가 식는 느낌이었다.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던 말은 취소다. 분명 뇌에 섹스밖에 없는 게 분명하다. 놀라울 정도로.

“아까 거기서 안 한다는 거지 집에서도 안 한다고 한 건 아니잖아?”

이젠 먼저 걸음을 떼 앞서나가는 서시우가 예준을 돌아보며 산뜻하게 미소지었다. 예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수도 없이 새어나왔다. 서시우는 이마를 쓸어내리는 예준을 보며 이전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얼굴이 가짜였단 듯 마냥 즐겁게 웃었다. 제가 아무리 거절한다 하더라도 분명 염치없이 제 침대에 기어들어 올 결과를 알았기에 예준은 입을 다물고 가기로 했다. 예준은 생각의 회로를 차단한다. 그에 관해서는 생각이 길게 이어지면 결국 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를 앞질러 걸음을 옮기니 몰염치스럽게도 방긋거리는 얼굴이 옆으로 붙어온다. 예준은 내일의 일정과 지금의 시각을 떠올렸다.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오전과 오후에 알바 일정이 있었다. 한 번으로 끝내주면 좋겠지만, 아니 굳이 따지자면 시작도 안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상대는 서시우다. 예준은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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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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