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증명애정론

체온이 교차하는 지점을 사랑이라 하자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침대 커버의 촉감이 싸구려 그것의 느낌이었다. 낯선 체취와 고개를 돌리면 모르는 얼굴이 보이는 일련의 상황은 제게 익숙했다. 그것은 여자였다가, 남자였기도 했고 하나, 혹은 둘이기도 했다. 그게 누구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털고 일어나니 아직 해가 채 덜 뜬 새벽이었다. 불투명한 커튼 사이로 짙은 새벽이 스며들었다.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지워지는 기분이란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허공으로 피어올라 사라져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유독 색이 옅은 눈동자가 막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헤이즐넛 색상으로 넘실거렸다. 그리 어둡지 않은 색상임에도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닮았다. 많은 것들이 머무르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간다. 새벽이나, 연기 같은 것. 살결이나, 머리카락, 눈동자, 체온 같은 것들. 사람과 사람과 사람이. 시우는 담배 끄트머리를 잡고 난간에 불을 지져 껐다. 반도 태우지 않은 장초가 손 안으로 떨어진다. 남들은 한 번 담배를 입에 대면 없이는 죽고 못 산다고들 하던데 저는 한 개비도 다 태우는 일이 적었다. 하지만 상념이 머리를 배회할 때면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고는 했다. 생각해봤자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쁠 건 없었다.

지나치게 내버려 두는 것이 많다. 눈에 담는 것이 없으니 그러했다.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그랬다. 특히나 사람이 그렇다. 관계가 그렇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란 두 글자를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역겨움부터 울컥 치밀었다. 그 단어만큼 저에게 불쾌함을 가져오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 단어를 사탕을 입에 담은 듯 부드럽게 굴려 발음하곤 황홀한 표정을 짓는데, 저는 고작 두 음절밖에 되지 않는 글자를 읽을 때마다 입꼬리에 걸리는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나온 삶에서 겪은 사랑이란 게 전부 그 모양이라서 그렇다.

사랑은 재미 없다. 사랑을 하면 따라오는 애정, 노력, 신뢰, 속박, 갈등, 감정 노동. 죄다 따분한 것밖에 없다. 제가 원하는 것은 몸과 온기면 되었고, 딱 그만큼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제게 정의되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얻을 수 있는 일회성 사랑. 구속하는 사랑은 사람을 힘들게만 했고 귀찮을 뿐이다. 하룻밤, 잠깐의 온기, 순간의 쾌락 정도면 적당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수많은 사람들과 보냈다. 제 얼굴은 꽤 반반했고, 그건 사람을 끌어모으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이 넘쳐났다. 잠깐의 변덕이었는지, 늘 온기를 갈망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잠시 온기를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완벽한 타인이다. 그날의 그들에게도, 저에게도,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었고 나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는 사람을 막지 않으며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를 내어주었고 손에 붙잡히는 대로 남을 붙잡았다. 어제의 밤과 오늘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하루의 연장선이었다.

서시우의 인간관계는 유별났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매일같이 바뀌었다. 여자고 남자고 가릴 것 없이 사람이 넘쳐났으며, 좋은 의미로도 나쁜 쪽으로도 유명했다. 전화가 끊이질 않았으며 부르는 이도 넘쳐났다. 어느 자리를 가도 그에게는 자리가 내어졌으며, 그가 원한다면 어느 자리도 찾아갈 수 있었다. 어떤 시선은 시샘을, 어떤 시선은 질투를, 어떤 시선은 소문을, 어떤 시선은 사욕을, 어떤 건 또 탐욕을, 선망을, 욕정을. 서시우는 일찍이 시선을 읽어내는 데 도가 텄다. 그건 시우에겐 하나의 유희 거리였다. 숨기지 못한 시선을 애써 모른 척 할 이유가 없었다. 시우가 한 걸음 다가가 상대를 떠보면, 상대는 곧잘 반응하곤 했다. 먼저 다가오는 이에게도 굳이 물러서지 않으니, 유별나고 난잡할 수 밖에 없었다.

연애라는 틀에 스스로를 끼워 넣는 일이 적긴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곤 했다. 그 기간이 끝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좋아? 나 사랑해? 물론이지.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건 너무나도 쉽다. 한껏 다정한 척, 오로지 한 사람만이 제 삶의 전부인 척 하는 것도 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끔씩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을 받곤 했다. 온갖 허례허식으로 꾸며진 관계는 금방 깨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굳이 이어 나가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미련 같은 건 없었지만 이별은 늘상 상처를 동반했다. 심리적 고통이라거나, 우울함, 그런 거 말고 말 그대로의 물리적 상처 말이다. 열이 홧홧하게 퍼지는 뺨에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면 아는 얼굴들이 지나가며 한 두마디씩을 던지곤 했다. 그럼 그럴 줄 알았지. 이번엔 얼마나 걸렸는데? 그러면 서시우는 실실 웃으며 답하는 것이었다. 가두기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었나 보지 내가. 안쓰럽니? 네가 위로해줄래? 눈꼬리가 휘어 접힌다.

그런 삶이었다. 어느 때건, 어디서건. 일종의 관습 같은 거였다. 언제나 별 볼 일 없는 나날들이 이어질 뿐이었건만. 시우는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이를 뒤로 하고 옷을 챙겨 나왔다. 새벽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손가락에 걸린 차키를 빙빙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내디딘다.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경쾌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곳엔 주인 아닌 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사코 그는 자신의 공간과 제 공간을 분리하려고 들었지만 순순히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일이 있다고 했었던가. 잠에서 깨자마자 제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침대에 기어들어 가줄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상쾌한 아침을 선사해 줘야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까지 튀어나왔다.

안예준은 일종의 특이점 같은 존재다. 어째서 그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실은 잘 모르겠다. 따지자면, 그는 그다지 재미가 있다거나 특별한 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극만으로 따지자면 서시우의 일상이 몇 배는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안예준에겐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연민이나 동정심 같은 걸 건드리는 건 아니었고... 그냥, 너무 단조롭고 무감해서 온갖 유희와 자극에 점철된 서시우에게 있어선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그의 무관심, 단절, 냉담한 태도 같은 것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치열하지 않은 적 없음을 증명하듯 계속해서 고요히 요동치는 무언가를 보고 있자면... 안예준을 집에 들이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으나 놀랍게도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같이 살게 되며 느낀 점이 있다면 그는 생각보다도 더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시우는 그를 볼 때면 지루하다는 감각을 잊을 새 없이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곤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응이 거기서 거기였다. 저 얼굴에는 누구보다 삶을 초월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세속에 찌들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떠오르는 것들을 잡아채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호이든, 불호이든. 표면 위로 옅게 피어오르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재밋거리였다. 그 짧은 자극을 위해 시우는 남들보다 안예준에게 유독 성큼 다가가곤 했으며, 밀어내는 앞에 버티고 서선 괜히 지분거리며 신경을 긁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저만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안예준 역시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 어떤 선을 그어 놓더라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의 영역을 침범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를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외면하거나, 말뿐이 전부였다. 어쩌면 단순히 체념의 경지였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적극적인 방어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떨쳐내려면 단호하고 모질게 구는 게 좋을 텐데. 안예준은 정 같은 건 모르고 사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무른 면이 있었다.

안예준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같이 살며 생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정 때문이라고는 사실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기에 두 사람에겐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둘의 관계는 정이라기 보다는... 그만큼의 가치나 무게도 갖지 못했다. 어떤 정의가 필요했다. 그럴듯한 이유가.

돌아온 집은 새벽이 마저 거둬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 공간이 아닌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서는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한다. 아마 깨어있었다면 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겠지. 이불을 걷고 들어가 누워있는 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시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숨을 내쉬며 자는 예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곧 시간이 다 됐는데, 라고 생각하면 시간에 맞춰 예준의 눈썹이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가만히 그걸 구경하면, 안예준은 어느덧 느릿하게 눈을 끔뻑인다. 코 앞에 타인의 얼굴이 놓여있는데도, 그는 놀람이나 경악도 없이 저를 바라보았다가 옅은 한숨을 쉬곤 눈을 비적비적 비비는 것이다. 시우는 일련의 행위들을 가만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오지 않는 이를 붙잡고 떠나려는 것을 놓아주지 않았던 적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아득하여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의 대화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무심하며, 오로지 온기만이 교차했던 종종 있던 어느 밤의 일이었다. 그날도 안예준은 한껏 지쳐있었으나, 서시우의 일방적인 몰아붙임으로 인해 결국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직후였다. 서시우는 안예준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었다.

예준아, 나 좋아해?

아뇨...

난 너 좋아하는데.

턱을 괴고선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웃어 보였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게 맞다. 긍정적인 대답이 이어질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물어본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짧고 명쾌했다. 예준은 제 말이 꾸며낸 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 별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제 눈두덩이만 두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무시야? 그래도 이거 나름 사랑고백인데? 실없는 이야기 하지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세요. 예준의 말에도 시우는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결국 포기하는 건 안예준이다. 시우의 시선이 안예준에게, 허공을 맴돌았다가, 다시끔 그에게 닿았다. 문득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준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네?

갑자기요? 응. 문득 궁금해서, 그냥. 시우는 눈만 끔뻑끔뻑거리며 안예준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는 듯이, 예준이 해답을 내어줄 거라는 듯이. 드물게 예준이 허공에 눈동자를 굴렸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으나 결국 그는 어떤 답도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예준이 그 어떤 답을 내어놓았더라도 만족하지 않았을 걸 안다. 시우는 예준이 답하지 못 할 것임을 알았다는 듯 짧게 웃어 보였다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체온과 체온이 맞닿는 지점이 사랑인 거야. 고작 그 정도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거야. 우습고도 값싼 정의지.

말을 내뱉고 나니 무언가 위화감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는 너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리곤 내뱉었던 문장을 다시끔 곱씹는다. 재정의된 사랑의 의미. 그러게, 고작 그 정도면 되는데. 나는 누군가에게선 그 값싼 사랑조차 얻어낼 수 없었구나. 어느 지점까지 생각이 이르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가를 가렸으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작게 흘리던 소리가 결국 터져 나왔다. 푸훗. 고개를 떨구고 몸을 웅크렸다. 푸흡. 훕. 하하. 아하하핫.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혼자 폭소를 하는 모습은 꽤나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거다. 나는 마음껏 웃고 나서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겨우 숨을 골랐다. 고마워, 덕분에 오랜만에 웃었어. 너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큰일 났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지. 한없이 가벼운 말투는 이내 흩어진다. 기가 막힌 듯한 네 얼굴을 보다 허리춤을 껴안고 이불 속으로 잡아당긴다. 따뜻하다. 졸려. 빨리 잠이나 자자. 내일도 알바일 거 아냐 어차피. 아니면 나랑 한 번 더 하고 싶어졌다던가? 예준이, 엉큼해!

제 헛소리에 안예준이 버둥거리며 손으로 제 몸을 밀어냈으나 그의 귓가에 나즈막히 쉿, 하며 낮은 음성을 내뱉는다. 예준아 자꾸 그렇게 보채면 나 못 참는데... 목덜미에 닿는 열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움직임이 멈췄다. 시우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눈을 감고 다시 그에게 기댔다. 일방적으로 오간 대화의 내용이 다시끔 떠오른다. 놀랍지 않아?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시우는 안예준의 등허리를 더욱 끌어안았다. 미약한 심장 소리를 타고 온기가 전해져서, 그건 사랑이라고 속여도 좋을 법했다. 우스운 꼴이었다. 이 모양 이 꼴을 하고서도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제 팔을 떨쳐내려 바르작거리는 예준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알 바인가. 결국 포기하는 것은 상대였다. 지워지는 기분은 별로다. 온기가 맞닿으면, 여기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니 이 값싼 지점. 딱 이만큼만으로도 사랑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든 사랑이라는 단어엔 어떤 무게도 실리지 않고 가벼워서 나는 태평하게 그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 존재 증명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밤도, 오늘의 밤도, 지금까지도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온기는 순간이고 우리는 교차하여 헤어질 사람들이니까. 모든 것이 순간이고 퇴색되어 흩어진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