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된 사실
부정형 관계 中
-주의: 6.0 효월의 종언 결말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포함 / <부정형 관계> 이후 시점
새벽의 혈맹이 해산한 뒤, 처음으로 다시 모인 건 사베네어 지역의 어느 유적지 앞이었다. 선발대는 아실과 혈맹의 원년 멤버인 세 현자, 후발대는 에스티니앙과 쌍둥이, 그라하 티아로 나뉘었다. 링크셸이 먹통일 경우를 대비해 어떤 식으로 신호를 주고받을지 정했다. 그런 뒤 아실은 다녀올게, 하고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에스티니앙에게 가볍게 키스한 뒤 휙 자리를 떴다.
알리제와 알피노는 방금 맞닥뜨린 충격적인 광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알리제가 눈을 의심하다 무슨 일이냐고 왁왁 떠든 반면, 알피노는 눈 뜬 채로 굳어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작별 키스를 하는 순간까지도 이상한 걸 몰랐다. 늘 하던 거라서 새삼스레 다른 사람들이 의식되지 않았다. 그들이 호들갑을 떤 뒤에야 누구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게 생각난, 딱 그 정도였다.
‘사귀는 사이 비슷한 것’이라는 답변을 들은 알리제는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뻐끔뻐끔 벌렸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에스티니앙을 유심히 훑었다. 이런저런 평가가 바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 눈이 온갖 방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사실 내가 애 딸린 홀아비라도 꼬셨나? 에스티니앙은 고민했다.
한편 알피노는 고장 난 자동인형 같았다. 알리제가 뭐라도 한마디 해보라고 옆구리를 쿡 찌르자 ‘어? 뭐?’하고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할 말을 잃는다는 점에서 똑 닮은 쌍둥이였다.
“뭐야, 알피노. 할 말 있으면 해.”
에스티니앙이 등을 떠밀어주지 않으면, 알피노는 말을 고르다 끝내 삼킬 터였다. 이 도련님의 문제는 늘 그거였다. 신중하게 굴다 적절한 때를 놓쳤다. 에스티니앙이 해줄 수 있는 건 말할 때를 놓치지 않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정도였다. 말을 기다리는 분위기가 된 것은 알피노에게 조금 부담스럽겠지만.
“그냥….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뜻밖에도 에스티니앙은 안도했다. 그는 알피노의 말에 마음을 놓고 나서야 자신이 주위의 반응이 어떨지를 걱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이유가 됐든, 아실과의 관계가 남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보일까 싶어 긴장했다는 것을.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가 민망해 입가를 문지르다가, 에스티니앙은 문득 그라하 티아에게 신경이 쏠렸다.
1세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다. 에스티니앙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수정공의 행적은 그런 종류의 믿음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신도는 자신의 신을 구원하려 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하는 일이므로.
눈이 마주쳤다. 에스티니앙이 눈치 보는 것을 알았는지, 그라하 티아는 미소를 지었다.
“알피노 말이 맞아. 보기 좋아, 두 사람.”
그러고는 노아 프로젝트 시절의 얘기를 꺼냈다.
“그때 아실은 제국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거든. 솔직히 걱정했어. 타워에서 나왔을 때, 그 사람이 제국군과 싸우다 허망하게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에스티니앙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캐물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안, 그라하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다행이라고.
한편 아실 일행은 잡담을 나누며 유적의 함정과 마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작은 산크레드였다. 한때의 바람둥이 동지로서, 아실에게도 마음 둘 곳이 생겼다는 건 축하할 일이었다. 취향이 맞지 않아 잠자리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둘은 술친구였다. 그런 만큼 들은 얘기도 많았다.
“이제 애인도 생겼으니, 위험한 일에 뛰어들진 않겠지?”
이를테면 우주선을 목적지로 설정해둔 전송 장치를 작동시키고 혼자만 쏙 빠진다거나, 뭐 그런 거 말이야. 자식 둔 아빠가 된 탓인지 잔소리가 많았다. 아실은 대충 대답하며 답을 뭉갰다.
“이젠 둘이 뛰어들 걸 걱정해야죠. 그렇게 놔두진 않을 거지만.”
야슈톨라가 말을 받았다. 애인이 있다고 밝힌 뒤에 듣기에는 역시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쨌든, 축하할 일입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도, 그에 걸맞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요.”
평소 사회성 없던 위리앙제가 이번에는 가장 상황에 맞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조금 섭섭하네요. 며칠 전에도 얘기는 할 수 있었잖아요? 이렇게 밝힐 게 아니라.”
거기에는 지은 죄가 있어서 아실은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다시 모였을 때는 이렇게 밝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습관이 무서워 들키긴 했지만.
“웃는 것 봐. 사실 말할 생각 없었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마녀 마토야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야슈톨라는 아실을 놀려댔다. 산크레드는 간간이 장단을 맞췄고 위리앙제는 때때로 앞길에 집중하자며 파티를 다잡았다. 아실은 말을 얼버무리다가, 침묵하다가, 웃었다.
유적 수색이 끝난 뒤 일행들은 모두 합류했다. 아실에게 찰싹 붙는 알리제를 보고 에스티니앙은 눈치껏 걸음을 재촉했다. 알리제는 놀란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제가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아실이라서 그런 것일 테다.
아실은 알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즈음엔 질색했지만, 이제 알리제는 자신을 어린애처럼 대하는 태도와 그의 인정은 별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알피노가 아무리 독립적으로 굴든 간에 할아버지와 부모님께는 귀여운 아이들인 것처럼. 그렇기에 에스티니앙과 아실이 연인 관계라는 걸 드러냈을 때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애인이나 부모님의 연애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미리 얘기해주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알리제.”
이런 식으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는 아실의 말에, 알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충분히 이해됐다. 알리제 자신도 이런 기분인데, 아실 본인은 상당히 난감했을 것이다.
“가족이어도 거기까진 신경 안 써. 사랑에 빠져서 이상한 짓 하는 거면 몰라.”
“우리 아가씨, 너그럽기도 하지.”
아실은 알리제가 질색하는, 예의 할아버지같은 태도로 말을 받았다. 알리제는 한숨을 쉰 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곤 아실의 태도에 대한 반동으로 눈치껏 빠져 준 에스티니앙에 대한 평가를 조금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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