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헌] 너란 아이러니

쌍팔년도

백업 by 은월
1
0
0

너란 아이러니

w. 은월

  이재현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정한 걸 넘어 존나게 다정한 사람. 어찌나 사람이 다정하고 착하던지 주변 사람들, 남녀노소 주변 동급생 그리고 어른들을 불문하고 천사라 칭찬했다. 하긴, 이재현은 정말 다정해서 누가 '재현아'하고 부르기도 전에 달려가 남을 돕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재현은 남들에게 잘 웃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웃을 때는 입가의 점이 더욱 밝게 빛난다고들 말했다. 물론, 이재현의 친구인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주변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재현은 모범생이었다. 그것도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 잘 하고 운동 잘하고 키도 크고 다정하고... 장점을 말하라 하면 하루 종일 말하고도 남는 그런 사람. 그런 말도 안 되는 장점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이재현이었다.

  그런 이재현은 나의 옆집에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 있는 작은 동네의 작은 골목의 파란 대문 집. 이재현의 집은 그냥 평범한 집이었다. 겨울에 연탄도 적당히 준비해두고, 아빠는 적당한 크기의 회사에서 일하고, 엄마는 집에 있으면서 동네 아줌마들이랑 얘기하는 그런 집. 그런 이재현은 공교롭게도 외동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더라. 이재현은 인사도 어찌나 잘 하던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는 어른마다 허리를 딱 90도 숙여 인사했다. 지가 무슨 인사하는 장난감인 줄 알아. 딱 누르고 인사하는 시늉을 보이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런 애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 그런 장난감이 나에게는 인사를 전혀 안 했다.

  저렇게 완벽한 이재현의 옆집에 사는 나는 너무나도 평범한 학생이었다. 머리는 길게 땋아보려고 길렀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는 두발 규정 때문에 짧게 자른 그런 애. 남자애인데 예쁘다고 소문난 애. 그리고 이 골목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 그것도 맞벌이여서 부모님 둘다 여덟 시는 되야 들어오시는 부잣집 아들, 그래 이 수식어 말고 도헌을 대표하는 말은 딱히 없었다. 진짜 그냥 부잣집 아들 말고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이런 평범한 나와 특별한 이재현은 친구였다. 그것도 불알친구. 

  나와 이재현의 첫만남은 더러웠다. 구렸다. 속된 말로 좆같았다. 일곱 살 그 언저리였던 나는 이 골목에 제 또래가 온다는 말에 신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그렇게 사흘 정도 손꼽아 기다린 날 이 골목에 온 사람이 바로 이재현이었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순하게 생긴 눈과 입가의 선명한 점이 딱 봐도 어른 말을 잘 들을 것처럼 생겼었다. 내가 이재현에게 손을 흔들자 여덟 살 밖에 안 되던 이재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내가 저기 길가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보다 못 한 놈을 보듯이. 나는 그런 이재현을 보고 느꼈던 것 같다. 저 놈이랑은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재현과 지독하게 엮였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에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해가 흘러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갈 때도. 내 옆에는 언제나 나보다 한 뼘이나 큰 완벽한 이재현이 있었다. 나는 그니까 재현과 친해지고 싶지 않아도 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 존나게 지독한 운명.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이재현은 등교와 하교를 같이 하고 있었다. 언제 만나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시간이 되면 집 앞에 나와 같이 버스 정류장에 걸어 가 학교까지 가는 그런 사이. 말이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이. 이따금씩 이재현이 말을 걸 때 성의없이 대답해도 별 문제 되지 않는 사이. 갑자기 나의 방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바닥에 앉아 만화책을 봐도 이상할 것 없는 사이. 서로의 집을 제 집 마냥 사용하는 그런 놈. 이재현과 나는 딱 그런 이상한 사이었다. 아, 거기에 내 집은 맞벌이여서 항상 재현의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는 그런. 남들이 보기엔 사이가 좋은 오래된 소꿉친구, 서로가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붙어다니는 뭣 같은 불알친구.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재현이 내 앞에서만 인격을 갈아끼운다는 것이었다. 이재현은 평소에 잘 웃고 다니면서 내 앞에서는 웃음끼를 싹 뺀 채, 딱딱하고 날이 선 어투로 나에게 말했다. 말 끝마다 씨발 씨발 거리고 나를 부를 때는 멀쩡한 이름인 박도헌을 놔두고서 병신아 등신아 라고 불렀다. 그나마 새끼야 하고 부르면 다행이었다. 그런 이재현 때문에 나도 욕을 쓰게 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저 놈 때문에 미치겠다고. 이러면서 주변 애들한테 하소연하면 돌아오는 말은 뻔했다. 야 너가 아무리 재현 선배하고 친하다 해도 그런 거짓말은 작작해. 너 재현 선배 캡 인기 많은 거 모르지?

  그리고 지금 '캡 인기 많은' 이재현은 나의 방에 드러누워있었다. 마침 오늘이 여름방학이어서 학교가 일찍 끝났다나 뭐라나. 학교가 끝나자마자 내 어깨에 익숙하게 팔을 두르고는 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재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오는 내내 내게 말을 걸었다. 귀찮게. 나는 말을 가만히 듣다 어이가 없어 이재현한테 말했다. 형 친구들이랑 안 놀아? 그 새끼들이랑 왜 놀아. 그럼 내 집에는 왜 가냐? 비디오 보게. 비디오 이 지랄 한다. 형한테 지랄이 뭐야 지랄이 새꺄. 알겠어. 나랑 만나자마자 욕은 또 어휴, 남들이 보면 아주 좋아하겠다. 밖에서도 조온나 다정한 놈이라고.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인사는 왜 하냐? 하여간 존나 특이해요."

  이재현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정작 제일 특이한 놈은 지라는 걸 모르는 듯이. 이재현은 익숙하게 내 방에 들어가 가방을 툭 던져놓고는 비디오를 하나 골라 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방에서는 비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재현은 동시에 책을 읽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화책. 나는은 그런 이재현을 보고 한숨을 쉬고는 이재현의 반대쪽에 앉았다. 이재현은 방 주인인 내가 앉자마자 갑자기 불쑥 물었다.

  "황사 있냐?"

  "황...사?"

  내가 황사가 뭐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재현은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문제의 황사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홀한 사춘기 새꺄. 웬열, 범생이도 황사는 알 줄 알았는데. 있으면 빌리려고 물어본 거니까 잊어라. 아, 잊지는 말고 나중에 생기면 빌려줘. 읽게."

  "형 학교에 친구들 있잖아."

  "야 미쳤냐? 학교에서는 이미지 관리 해야 돼."

  "형 좋아하는 여자 선배들 많아. 근데 그런 거 봐도 돼? 나였으면 존나 싫어진다. 그리고 형 친구들 아직 모르지? 형 여자에 존나게 미친 놈인 거."

  "어쩌라고. 아니 근데 남자애가 황사 안 읽는 게 더 신기하네."

  이재현은 진짜 어쩌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저 범생이 새끼 어떻게 혈기왕성한 고1이 황사를 모르냐 어휴. 재현은 책을 펄럭펄럭 넘기며 편한 자세로 있었다. 나는 이재현을 째려보고는 제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나도 쉬려고 하던 참 이재현은 또다시 나를 귀찮게 만들었다. 

  "야 박도헌."

  "뭐."

  "내 가방에서 마이마이 꺼내 줘."

  "형이 꺼내."

  "등신아 니가 더 가깝잖아."

  "어린 동생을 존나 부려먹어요."

  나는 투덜대면서도 제 옆에 놓여져있는 이재현의 가방에서 뒤적거려 마이마이를 찾아냈다. 오, 완전 새 거. 내가 마이마이를 스윽 보며 말했다. 나는 이재현에게 마이마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웬열 결국 샀네? 전에 돈 없다고 나한테 존나 찡찡대더니."

  "당연히 샀지. 캡 좋아. 마이마이 없는 새끼는 너밖에 없을 거다. 돈도 많은 놈이 돈을 안 써요. 하여간 존나 특이해... 범생이 새끼..."

  나는 재현의 마지막 말은 무시한 채 이재현 옆에 누웠다. 여름이라서 그런가, 축축 쳐지는 느낌이었다. 이재현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나의의 귀 한쪽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나는 흘러나오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또 소방차 들어? 노래가 좋은데 어쩌라고 빙신아. 마이마이에서는 도대체 몇 번을 듣는 건지 모를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재현을 째려보고는 그냥 얌전히 노래를 들었다. 그래, 나도 어젯밤에 너가 미워졌다 이재현. 

  그렇게 비디오도 보고 방에 뒹굴며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지나자 이재현은 내게 배고프다며 찡찡거렸다. 나는 그런 이재현을 바로 툭 찬 뒤 무시했다. 아아, 도헌아아아 뭐 좀 먹자아. 이재현은 평소에 부르지도 않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징징거렸다. 저거 봐라 저, 지 배고프다고 멀쩡한 집 가지도 않고 남의 집 와서 밥 타령 하는 거. 나는 그런 이재현을 보며 짜증내려던 마음을 가다듬고 이재현한테 소리쳤다. 아아 알겠어 라면 끓여오면 될 거 아니야 진짜!

  "오~ 박도헌 라면은 캡 기깔나게 끓여."

  "내가 진심 형보다 훨씬 요리 잘 한다."

  "그건 아닌 듯."

  "참나."

  이재현은 라면을 후후 불어 먹더니 온갖 칭찬을 쏟아냈다. 쟤 18살 맞냐. 하는 생각은 어려가지고. 우리 둘은 한참을 정신없이 먹다 이재현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박도헌의 책장으로 가서 비디오 하나를 꺼냈다. 이번에는 그냥 분위기 내는 용이 아니라 진짜 볼 거. 이재현은 비디오를 틀며 말했다. 야,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간다? 

  이재현이 가져온 건 탑건이었다. 도대체 몇 번째 보는 건지 가늠도 안 될 정도로, 내 방에 오면 보는 그 영화. 이제는 영어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대사를 거의 다 외웠을 정도였으니까. 둘은 어느새 입가심으로 냉장고에 있던 주스까지 마신 뒤 비디오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나는 웬일로 말없는 이재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마 처음 생각했을 거다. 이재현이 잘생겼다고. 그렇게 한참을 이재현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재현이 중얼거렸다.

  "뭘 봐."

  "어?"

  "내 얼굴 왜 보냐고."

  이재현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있었다. 내가 이재현을 왜 봤는지,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려고. 그러게, 왜 봤을까.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이재현인데. 항상 짜증나던 이재현인데. 나이값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재현이 곧이어 말했다. 

 "야, 사람들이 그러더라?"

  "뭐라고."

  "키스할 때 설레면 그거 더이상 친구 아니라고."

  "...그래서."

  "지금 확인해보려고. 그거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해보려 할 때 이재현은 말도없이 입을 맞췄다. 첫 키스를 불알친구 이재현이 가져갔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설렜다. 그냥, 그 모든 게. 비디오에서 나오고 있는 로맨틱한 노래도, 제 눈앞에 보이는 눈을 감고 있는 이재현도. 그리고, 그 앞에서 멍하니 있는 나도. 이재현은 입술을 떼고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 이제 친구 못 하겠다."

  "뭔 소리야."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갑작스레 들린 이재현의 고백은 당황스러웠는데, 또 설렜다. 말없이 계속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와 그 사이에서 눈치없이 계속 흘러나오는 영화에서의 말소리가 어우러지는, 80년대의 밤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