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 로그 타입 커미션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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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B 1

커미션 by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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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B의 성은 좁고 견고했다. 그는 그 성에서 평생을 자랐으며, 성에게 지켜지고 성을 지켰다. 성은 'B'이기도 아집이기도 했으나 결국은 V.B 그 자체였다. 그러니 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V.B에게 B도, V도 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존재를 정의하는 단어를 하나씩 걷어낸 후에 남는 것은 고작 구멍난 외롭고 초라한 인간이므로. 그렇기에 V.B는 오늘도 성을 지켜야만 했다. 분노로 성벽을 높이고 조소로 성벽을 덧댄다.

"하, 그래. 너와 난 다른 세계를 살지. 너희 부모가 우리 가문과는 다른 세계를 산 것처럼."

그러니 V.B는 영영 A의 세계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해를 위해서는 성이 부서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V.B의 성에 그런 용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 밖의 잔인한 세계, 반짝이는 황금이 지배하는 세계를 보는 너의 눈을 마주할 용기도. 그 눈에 담기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곳엔 외면했던 세계가 들어있었고, 초라한 성의 모습이 훤히 비쳤다. 그런 것들이 가득 담긴, 황금처럼 빛나는 눈을 하고서 A가 V.B에게 선언한다.

"그러니 너도 그만 고개 숙이고 순순히 복종해. 그 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말고."

그 선언에 맞서 V.B는 성벽을 굳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킨다. 두려움, 비참함, 수치 같은 것들을 분노로 덮고서 그렇게 쏘아붙인다.

"꼭 혁명이라도 할 것처럼 말하잖아. 네 그 계산 빠른 머리로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나 봐?"

분노한 평민이 성벽을 두드린들 성벽이 부서질 리는 없지. 그렇기 때문에, V.B는 평생 이 성 속에 갇혀 살 것이다. 성 밖의 목소리를 묵살한 채. 자신의 무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란 핑계로 무장하고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외면하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성 밖에 밀어내며 모른 척한다. 성 안에 가득한 부와 명예로도 바깥 세계는 가질 수 없는데도, 눈을 꾹 감은 채 그저 제 성을 끌어안는다. 그렇기에 자유를 말하는 네 목소리가 무엇보다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이 성벽을 공격한다. 네 솔직함도, 현실적인 날카로움도, 진실을 꿰뚫는 말들도 전부 싫다. 그것이 성벽을 두드려 결국엔 'V.B'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해!"

네 멱살을 굳게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것이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다. 네 말이 한바탕 태풍처럼 성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분노로 덮어둔 감정들이 불쑥 올라오는 탓이다. 나는 'V.B'인데, 그 몇 자 안 되는 글자로 이루어진 성벽이 감추고 있는 초라함을 보면 나는 그만 무너져버릴 텐데. 네게 쏟아부은 분노도 조소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인데. 이런 질척한 생각들을 하고 싶지 않다. 좁은 성에 가둬둔 추한 모습에서 눈 돌리고 싶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너를 보면, 그곳에도... 여전히 내가 모른 척한 것들이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가득 담은 눈이다. 내가 모르던 세계, 추한 나의 모습 같은 것들을. 그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고통스러워서, 혹은 너무나 짜증 나서... 시야가 흐려진다.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의지와는 다르게 삐져나오는 눈물에 더욱 짜증이 치민다. 그래서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시큰한 눈을 감지 않고자 부릅 떴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고 승자와 패자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지지 않고자 했다.

"최악이야, A."

내뱉는 말에는 더이상 조소가 담기지 못한다.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최악인 것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초라한 것은, 성벽 너머가 두려운 자신이겠지. 그런 주제에 두려움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같잖은 자존심 탓에 화를 내며 남의 멱살이나 잡는. 난 정말 최악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도 여전히 내 무지는 감추고 싶어서.

"...그러니까 너 같은 친구도 필요없어."

그러니까 난 세상에게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 성벽을 높게 쌓아 세상을 끊어낸 것뿐이다. 네가 나를 거부한 게 아니라 내가 너를 거부한 것이라고. 성벽만큼이나 높게 쌓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 무서워 그런 말을 뱉는다. 의도와는 다르게 아주 초라한 말. 당연한 일이었다. 그 좁은 성에서 나고 자라 가진 것이라곤 허상 뿐인, 모르는 세계를 엿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의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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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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