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Re:quiem

아이나나|오리카사 유키토 x 스노하라 모모세 No doubt AU

포스타입에서 유료로 공개했던 내용을 펜슬로 이동하면서 무료로 공개합니다.

포트폴리오에 사용시 본문은 내려갑니다.

2024년 4월 어나스테에 본문을 실은 양장본이 판매될 예정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 2019년 모두의 온리에서 발매된 유키모모 No doubt AU 구간입니다, 지난 아이나나 온리전에도 참여했습니다. 2022년 4월 15일 리바레 기념일을 축하하며 재업로드 했습니다. 구매해주시고 좋은 말씀 아끼지 않고 남겨주신 많은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사망소재 주의, 이야기는 분기점을 통해 3가지 엔딩으로 나뉘는 게임북 형식으로, 각각 노멀엔딩/진엔딩/배드엔딩으로 구분됩니다. (3가지 엔딩을 전부 읽어주세요!)

· 장르 자체가 스포일러가 되므로 모쪼록 스포일러는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세계관에 의해 캐릭터 붕괴 요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예민하신 분들은 구독에 유의해주세요. 감사합니다.


 

Triangle|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잠과 현실을 잇는 길목에 쌓인 몽롱함을 한 겹씩 들춰가다 보면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고 꼭 이런 식으로 눈을 뜬 날엔 한참이 지나고서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남자는 으레 있던 날과 같으리라 여기며 뽀얀 안갯속을 헤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적막이 이어진다.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는데 돌이켜보니 하나의 꿈을 꾼 것 같더라. 앞으로 30초는 더 지나야 정신이 들겠거니 했지만, 그의 예상을 찢어발기며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누군가의 울음소리였다.

유키, 유키…… 숨이 넘어갈 듯 끅끅거리는 목소리에 오리카사 유키토의 눈이 번쩍 뜨인다. 모모, 왜 그래. 어디 아파? 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내자 트이지 않은 것이 성대를 따갑게 긁어내렸다.

스노하라 모모세의 숨결은 일정하지 못했다. 힘겹게 뱉어내고 힘겹게 들이마신다. 잔뜩 꼬인 호흡을 어쩌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던 그는 유키토의 품에 몸뚱이를 끼운 채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입을 벌리고 꺽꺽였다. 모모, 구급차 부를게. 덜컥 겁을 먹은 손이 침대 옆에 붙은 협탁 위를 분주하게 더듬는다.

“유, 키가, 날 죽이는, 꿈을 꿨, 어…”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듯 다급히 도리질 치자 유키토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첫 번째는 안도였다. 악몽을 꾸었을 뿐이란 사실에 바닥까지 추락했던 속이 침착해진다. 두 번째는 착잡함이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모모. 유키토는 안도의 반동으로 튕겨진 불만이 입 밖으로 쏟아지려는 것을 어금니를 물어 참아냈다.

“……모모, 꿈은 반대야. 내가 널 죽일 리 없잖아.”

들썩이는 모모세의 어깨를 감싼 유키토는 격앙된 심정을 억눌렀다. 현실이 아니다. 그저 꿈일 뿐이다. 모모가 아픈 게 아니라 다행이야, 속으로 그리 곱씹으며 모모세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럼, 내가 유키를 죽이게 된다는 소리야?”

“……죽일 거야?”

“아니!”

황당한 질문에 넋이 빠진 물음이 새자 대답이 퍼뜩 달려든다. 유키토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모모세와 눈이 마주치자 불안으로 펄떡이는 가슴을 짓눌렀다. 눈물로 엉망이 된 연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제멋대로 군답시고 간밤에 잔뜩 울렸기에 깨어서도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게 시달리다 잠든 탓에 악몽을 꾼 것이 아닐까, 유키토는 허공으로 비켜낸 시선을 되돌렸다.

“어제, 내가 너무 심하게 했어?”

“어?”

“간밤에.”

훌쩍이느라 빨갛게 상기되어 있던 코와 뺨이 한층 더 붉어진다. 무언갈 기억해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에 유키토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모세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자 유키토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헤에, 그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오래 해도 괜찮다는 소리?”

“엑, 오늘도!? 무리, 무리! 모모쨩 허리 부서질 거야.”

허리 부서지면 앞으로 영영 엣찌 못하니까 절대 안 돼. 으름장을 놓듯 다소 엄한 목소리였지만 유키토에겐 연인의 귀여운 앙탈에 지나지 않았다.

“네, 네. 알겠어요. 오늘은 참을게.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달링, 변태.”

그런 변태를 나는 너무 사랑하지만. 곱게 휘어지는 눈매에 유키토는 모모세를 끌어당겨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나도 사랑해, 모모. 낮게 깔리는 속삭임에 모모세가 웃으며 목덜미를 끌어안자 유키토는 아이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모모세는 꼭 자기 손으로 돌봐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많은 것을 해내는 그였기에 자신이 나설만한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난 모모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입 밖으로 내면 잔소리를 들을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다. 모모세에겐 유키토가 필요하고 유키토에겐 모모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가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 때가 부쩍 늘었다. 같은 회사 동료인 오오가미 반리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최악을 상정하고 불안해하는 거라고 위로했다. 지금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 역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건 인간이 종종 하는 짓이란다. 티를 낸 적은 없다만 꽤나 신뢰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말인지라, 유키토는 반리의 말을 떠올리며 억지로 걱정을 덜어냈다. ‘행복한 만큼 불안하다.’ 그 명제를 쉽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유키가 홀딱 벗기고 재우니까 그렇잖아, 치사하게 혼자만 옷 입고 자는 법이 어딨어! 잠든 줄 알았던 연인의 징징거림에 유키토는 모모세의 목덜미를 받치고 폭 끌어안았다. 얇은 잠옷 위로 모모세의 맨몸이 닿자 오프랍시고 실컷 ‘좋은 시간’을 보냈던 사실이 와 닿아 눈치도 없이 덜컥 흡족해지고 만다.

“미안. 다음엔 기절해서 잠들어도 꼭 옷 입혀 줄 테니까.”

“나 기절했어?”

“응, 했어.”

“유키는 변태야! 기절한 모모쨩을 이렇게 저렇게 해버린 거지!?”

“응, 했어.”

“……정말?”

안한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는지 유키토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간다. 엑? 장난이 아니라 진짜야? 달링, 변태~! 장난스럽게 한껏 목소리를 높인 모모세는 유키토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문질렀다. 정말 감기인 건가, 모모세의 말꼬리가 거칠어진 것을 감지한 유키토는 제가 덮고 있던 이불까지 거두어 그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달링.”

“응.”

“사랑해.”

“목소리 야하네. 나도 사랑해.”

“사랑해.”

“…? 응, 사랑해.”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 이대로 모모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가슴이 죄어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주고받았던가. 어리광 섞인 고백을 오래도록 받아주던 유키토는 안심하고 자라는 듯 그의 이마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끝도 없는 애교에 기분은 좋았다만 형태 모를 슬픔이 덮쳐와 속이 울렁였다. 자다 깨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모세는 분명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분 탓이겠지, 반리의 말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유키, 몇 시에 출근해?”

“오늘은 오프.”

분명 오프니까 실컷 데이트하기로 약속해서 긴 밤을 보낸 건데. 작은 물음표 하나가 돋아났지만 곧 악몽에 시달려 정신이 없겠거니, 하고 넘긴다.

“그럼 오늘 반지 맞추러 갈까? 우리 약혼반지.”

“……그래, 그러자. 현관 이그프리도 저장하고.”

“엇! 나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역시 유키, 좋아!”

이 또한 간밤에 나눴던 이야기다. 마치 기억을 통째로 날린 것만 같은 반응에 유키토는 모모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다시 재우는 쪽이 좋겠지. 자고 일어나면 조금은 나아질 테다.

“날 밝으면 바로 가자.”

모모세가 그리는 작은 호선 위로 유키토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12월 20일 새벽. 아침까지 가는 길목이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오리카사 유키토에겐 백화점 특유의 시원한 향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모모세 이전에도 애인은 있었지만 전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으니 커플링이라든가 약혼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어색한 탓이라고 지레짐작한다. 유키토는 모모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이상한 긴장감이 피부 위를 두드리며 넘어간다.

매장 안에 있는 웬만한 반지는 전부 훑었다. 모모세는 기본적인 디자인은 물론, 다이아나 진주와 같은 보석이 박힌 화려한 쪽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10분만 있으면 쉬지 않고 돌아다닌 지도 두 시간째다. 아무거나라도 좋으니 이만 쉬고 싶었던 유키토는 손끝으로 모모세의 손등을 가볍게 긁어내렸다.

“아, 유키. 힘들지…?”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모모세는 미안한 듯 입꼬리를 늘리며 애인과 눈을 맞췄다.

“통 고르질 못하네. 찾는 제품이라도 있어?”

“으응, 그냥. 평범한 건 싫어서.”

지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모모세의 시선이 제 어깨 뒤로 넘어가는 걸 본 유키토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펑키한 이미지의 악세사리가 진열된 작은 매장은 얼핏 보기에도 취향 타게 생긴 물건만 가득했다. 커플링은 대체로 금이나 은으로 맞추는 게 아니었던가. 의문은 들었다만 모모세가 원한다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입구엔 붉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검은 거미줄 장식 여기저기엔 보석으로 만들어진 은색 물방울이 반짝였다. 브랜드가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니악한 장식물과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유키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키, 이거 어때.”


모모세가 가리킨 것은 흔히 알려진 약혼반지와는 전혀 다른 디자인이었다. 두 개의 링이 하나로 이어진 반지의 바깥쪽엔 작은 흑진주가 두 개 붙어있었다. 조금 장난감 같지 않나, 유키토는 점원에게서 반지를 받아 끼워보는 모모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꼭 도돌이표처럼 생기지 않았어? 유키랑 나랑 영원히 이어진다는 느낌이잖아.”

이거랑, 응. 이렇게 끼우면, 봐. 반지 하나를 뒤집어 유키토의 손에 끼워주고 손가락을 맞대자 도돌이표의 시작과 끝이 나란해진다. 약혼반지니까 엄청 특이하게 하고 싶었거든! 모모세가 조그마한 덧니를 드러내며 웃자 유키토의 입매도 따라 올라갔다.

“영원히 이어져야지. 절대 떨어지지 말고.”

좋아해, 모모.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저기, 누나. 이걸로 주세요! 이그프리도 설치할 거니까 기능 추가도 해주시고……”

모모세는 반지에 이런 저런 옵션을 붙이기 시작했다. 조금 귀찮다는 생각은 들었다만, 작은 일로 한껏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유키토는 별다른 핀잔 없이 다른 악세사리를 구경했다.

“뭐 보고 있어?”

어느덧 제 곁에 바짝 붙어 말하는 모모세의 목소리에 유키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냥. 손목시계.”

“맞다. 유키 손목시계 오래된 거잖아. 수사관으로 진급했으니까 그거 기념으로 바꿔줄까?”

“됐어. 취직이나 해.”

“윽, 아픈 데를 찌르고…”

유키토가 손끝으로 진열장 위를 가볍게 두드리자 유리 위로 조그만 삼각형이 두어 개 깜빡이다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균열’의 표식에 흠칫 놀라 손을 뗀 유키토를 바라보던 모모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점원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이쪽 이그프리 고장인가 본데요!”

“네?”

“균열이 보여서요, 1단계.”

그럴 리 없는데, 애초 이그프리의 균열 자체는 흔한 현상이 아니었기에 점원은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보세요, 이쪽에 연두색 삼각형…”

“…정말이네요. 보안 팀에 연락해볼게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점원의 물음에 모모세는 유키토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관리국 입사 준비 중이라, 공부하고 있거든요.”

 

*

 

알록달록한 색깔의 포장지마저 마음에 든 건지, 아니면 그 안에 든 내용물이 마냥 좋은 건지 모모세는 작은 쇼핑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넘어지겠어. 유키토의 말에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이그프리 저장은 내가 할게!”

“내가 해도 되는데.”

“유키가 만지면 아까처럼 반응할지도 모르잖아~?”

이그프리도 꼬셔버리는 유키, 멋있어! 장난스러운 말투에 유키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반응이라, 어쩐지 날이 갈수록 균열 신호가 잦아지는 것 같아 찝찝했던 참에 모모세의 장난으로 마음을 놓았다.

“난 이그프리에게도 사랑받는 건가?”

“무리도 아니지! 하지만 역시 곤란하다구. 유키는 내 애인이니까!”

모모세는 유키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에 반지를 연결했다. 그의 집 현관 잠금장치 이그프리 정보에 ‘스노하라 모모세’의 데이터가 저장된다. 설치 작업 자체는 아주 간단했기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바로 우리 집으로 갈까?”

유키 정보도 저장하고 우리 집에서 놀 겸 해서! 냉장고 가득 채워놨어. 백화점에서 혹사당한 탓인지 바닥에 늘어져 있던 유키토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내일 해도 되잖아… 모모의 집, 너무 머니까…”

“바로 옆인데 뭐가 멀어~! 자, 자!”

모모세는 유키토를 질질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0분 후에나 도착한 그는 현관 이그프리에 ‘오리카사 유키토’의 정보를 저장했다. 계속 왔다 갔다 할 바엔 동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유키토가 귀찮다는 듯이 건넨 말에 모모세는 흠칫하며 팔을 교차시켜 제 가슴 위에 얹었다.

“그럼 나, 매일 위험해지는 거지?”

“살살 할 테니까.”

“정말?”

“거짓말.”

“너무해!”

누드 에이프런 보고 싶어, 모모. 유키토의 낯간지러운 속삭임에 모모세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키득였다.

“그런 건 결혼하고 해줄 건데요, 달~링.”

“결혼식은 어디서 할까, 허니.”

“엄~청 높은 빌딩 위에서! 있잖아, 옥상정원 결혼식장.”

“후후, 로맨틱하네.”

“그치?”

모모세는 유키토와 나누어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빙긋 웃었다. 도돌이표. 두 사람을 이어주는 두 개의 기호. 오래도록 반지를 내려다보던 모모세는 유키토의 손을 맞잡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두 사람은 매 순간이 행복했다.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 아니. 사람을 경멸하고 싫어하던 유키토에게 모모세는 구원이었다. 그가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모모세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영원한 함께가 불가능하다면 같이 죽는 쪽이 나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까. 아주 작은 목소리가 입안을 헤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후였다. 아직 자고 있는 모모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출근한 유키토는 키보드를 두들기다가도 반지를 내려다보곤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 딴엔 커다란 의미를 담고 산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모세가 끼우고 있는 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자니 괜한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커플링은 꽤 좋은 거구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실린다.

호시카게 관리국의 수사팀 수사관 오리카사 유키토. 그는 민간인 실종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실종된 인물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역의 이그프리를 검토하고 있었다. 반복해서 화면을 돌려보던 그는 눈이 아파오자 일을 잠시 다른 직원에게 맡기곤 옥상 휴게실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조그마한 정원이 꾸려진 휴게실을 보니 모모세가 말한 결혼식장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가운데 손가락에 낀 반지를 약지로 옮겨본다. 모모와의 결혼이라, 생일을 몇 시간 앞두고 나온 곱디고운 상상에 양 뺨이 옅게 붉어진다. 생일 선물로 청혼해 주면 안 될까. 역시 취업 준비 중인 애를 붙잡고 결혼하자고 재촉하는 건 좀 아닌가. 답지 않게 깊은 생각을 후벼가던 그는 내내 연락이 없는 휴대폰 액정을 켜고 끄길 반복했다.

처음엔 공부에 집중하느라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줄 알고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연락 한 통 없자 공포와 불안이 뒤섞여 속을 괴롭혔다. 2019년 12월 23일 오후 6시. 날짜를 확인한 그는 모모세가 못된 서프라이즈 파티를 궁리하고 있을 거라 여기며 답답한 호흡을 풀어냈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까, 대답 없는 연인에게 약간의 원망을 보낸다.

조급한 마음과 달리 예상치 못한 업무 증가로 9시에나 퇴근한 유키토는 회사를 나서자마자 모모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다 끊어진다. 모모, 전화 받아. 래빗챗도 여럿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대로 모모세의 집으로 간 유키토는 현관에 달린 전자식 패드에 반지를 끼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방바닥엔 옷가지를 비롯한 온갖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평소에도 정리를 잘 안 하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정도도 모르고 헤집어두는 이가 아니었기에 불안은 가속되었다.

“모모, 안에 있어?”

문이란 문은 다 열어봤지만 모모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집에 들어오긴 하겠지, 그렇게 믿고 기다렸지만 12시를 가리키는 시침과 분침에 참을성을 잃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 사이에 부쩍 추워진 날씨에 피부가 얼얼하다. 시린 공기에 아직까지 조용한 휴대폰까지, 유키토로서는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모모.”

 


2020년 12월 24일. 모모세가 없는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키토는 죽음을 기원했다.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는 나날이 지겨웠다. 한동안은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벽녘에 온 골목을 뒤지기도 했다. 모모가 없어졌어, 잔인한 현실이 머리통을 후려갈겨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수사팀 팀장 오오가미 반리는 그에게 휴직을 제안했지만 유키토는 거절했다. 어쩌면 이그프리에 찍힌 모모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멋대로 기대한 탓이었다. 그는 실종자 수색 업무를 주로 삼은 덕분에 쌓인 성과와 경력을 인정받아 유사한 업무에 곧잘 배치되었고, 사건 현장을 보다 상세히 확인할 수 있는 등 일반 경찰보다 높은 권한을 가졌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근 1년간 모모세는 어디에도 찍혀있지 않았다. 눈을 감을 적에도 그를 생각하고 눈을 뜰 적에도 그를 생각했다. 요코하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떠난 걸까 싶어 잠시 파견 근무도 고민했으나, 어째서인지 유키토는 요코하마를 떠날 수 없었다.

이그프리 관리국 호시카게와 츠쿠모는 모두 요코하마에 ‘중심 관리국’을 두었다. 이그프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자료를 응용해 이듬해인 2021년도엔 다양한 상품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그프리를 작게 조각내어 칩의 형태로 개량했는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투명한 칩에 색깔 코드와 모양 데이터를 삽입하면 의류와 악세사리에 부착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조각이 디자인적인 의미까지 갖게 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 이그프리를 둘렀다. 녹색 칩과 갈색 칩을 설치하고 공기 정화 기능을 삽입해 나무를 만들고 숲을 만들었다. 탈착이 자유롭고 부작용이 없어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칩을 이용한 범죄 발생이 염려되자 관리국의 업무는 점점 늘어갔다.

 

*

 

“…가 있으니, 그쪽 먼저 수사를…”

“…담당자… …지역…”

오리카사 유키토에겐 중요한 회의도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스노하라 모모세. 그를 잃은 후로 유키토의 세계는 멈췄다. 흐름을 잃은 세계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했지만 모모세를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유키토의 목숨을 붙잡았다. 그는 모모세의 단서를 잡기 위해 관리국의 온갖 업무를 도맡아 했다. 덕분에 관리국 사람들은 오리카사 유키토를 성실한 인물로 오해했다.

“오리카사.”

내가 성실하다니, 모모가 알면 웃으려나. 입꼬리가 들썩인다. 인정받았다면 수사관이 아니라 임원급으로 진급하지 않았을까. 조금 과한 욕망을 담은 생각이 꽁무니를 물고 딸려왔다. 입원 급에 필적하면 관리국에서 특별 취급하는 자료까지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없는 사교성을 짜내어 상사들과 어떻게든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꼰대들의 징징거림을 두어 번 받아내다 험한 말을 내뱉어 쌓아온 것을 날려 먹기 일쑤였다. 대충 이런 상황이었으니, 상사들이 유키토에게 일을 맡길지언정 곁에 두려 하지 않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오리카사, 듣고 있나.”

“예.”

듣고 있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콧수염을 매만지던 상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다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시카게 소속 수사팀 수사관 오리카사 유키토. 그의 옷깃엔 관리국을 상징하는 삼각형 모양의 은색 뱃지가 붙어있었다.

“현장엔 폭발물을 사용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건물 외벽엔 세큐리티가 켜져 있는 상태였고 해당 지역 이그프리도 정상적으로 작동중이였습니다. 누가 작정하고 해킹하지 않는 이상은…”

“해킹해서 백화점에 폭탄 파일을 심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주변 건물에까지 피해를 끼칠 수 있었던 겁니까?”

‘물리적 피해는 이그프리에 손상을 입힐 수 없다.’ 이그프리는 이 명제를 필두로 많은 이점을 취했던 시스템이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누군가는 이그프리에 접속 자체가 불가능한데 어떻게 해킹이 가능하냐며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기에 바빴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회의실을 채우는 고성에 유키토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그래. 테러로 의심되는 사건이 있다고 했지. 번화가 중심에 있는 백화점이 오늘 새벽 한 시경에 무너졌단다. 백화점 이름을 확인한 그는 열 두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그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왔던 사실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백화점 인근에 살던 주민들 중엔 다친 사람은 많았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보안을 더 강화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미 최상의 보안인데 여기서 뭘 더―”

“누가 최상이랍니까? 이그프리는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자료가 방대하잖습니까. 아, 설마 그것도 모르고 회사 다니십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또 싸운다. 유키토는 시끄러운 회의실 내부를 돌아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라쿠라 백화점 테러 사건’. 굵은 글씨로 인쇄된 종이를 들춰 대략적인 개요만 훑고는 지급받은 태블릿 PC에 있던 현장 사진 자료를 확인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찌그러진 차량 몇 대.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페이지를 몇 장 넘겨 근처 차량 블랙박스에서 복원시킨 영상 세 개를 차례대로 돌려본다. 각도의 문제인지 무엇인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원된 백화점 이그프리를 열어 녹화된 CCTV를 확인한다. 새벽 1시, 그보다 더 앞으로 당겨본다. 용의자 선에 둘 만한 사람은커녕 떠돌아다니는 짐승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키토는 턱을 괸 채 화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백화점 이그프리 기록 파일을 확인했다. 시스템상으로 이그프리의 상태는 ‘양호’였다. 해킹일 거란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도 불구하고 아닐 거라 단정하고 싸우는 상사들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자신들의 ‘아이템’에 대한 신뢰도를 잃고 싶지 않아 떼를 쓰는 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그프리에 접속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손댄 흔적조차 지울 수 있을 만큼 노련한 해킹. 이그프리에 직접 폭탄 파일을 설치했다면 이그프리의 기능은 무효화 되어 백화점이 ‘무너지는’ 일도 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주변까지 피해가 생긴 거지? 의문을 덧그리던 그는 말 같잖은 소리를 한다는 상사들의 꾸지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그프리 시스템은 츠쿠모와 호시카게의 합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두 계열사의 작품은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기능했다. 각자 자기 회사 작품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던 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중앙 정부는 서로를 견제하여 신뢰도 높은 시스템의 기능을 하라는 의미로 공동 관리 체제를 시행하도록 조정했다. 이그프리가 안정적으로 보급된 지 몇 년 후, 옷에 무늬 따위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자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람을 지배하는 내용의 괴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이런 취급이었으니,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권리를 가진 관리국이 이그프리에 대해 욕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회의는 싸움만 주고받다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내일은 츠쿠모 관리국 임원들과의 합동 회의를 진행한단다. 츠쿠모라는 이름에 유키토는 대놓고 불쾌함을 표출했다. 모모세는 츠쿠모 관리국 보안팀 입사를 지망한다. 츠쿠모의 관리국장 아들과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냈고 여전히 사이좋은 친구 관계라고 했지만, 유키토는 그런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호시카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키. 오늘 끝나고 시간 있어?”

반리의 물음에 유키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모 찾아야 돼.”

“어김없구나.”


어쩌면 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나무 밑동에서 작은 삼각형이 깜빡인다.

“테러당한 백화점 근처 이그프리도 복구해서 모니터링할 생각인데, 복구해야 하는 이그프리 중에 츠쿠모가 관리하는 은행이 있거든.”

그쪽 보안팀 인력이 부족하대서 이쪽에서도 돕기로 했어, 잘하면 거기서 모모를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반리의 말에 유키토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야도 불사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집착할 줄은 몰랐다. 보안팀 팀장 니카이도 야마토는 유키토에게 복구를 재촉당해 은행에서 밤을 새웠다며 맥주 일곱 캔을 굴렸다. 쫄딱 지친 모양인지 ‘왜 하필 오리카사 유키토였냐’는 가여운 불만에는 힘이랄 게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야마토의 불만을 면전에서 들은 반리 또한 난처한 입장이긴 마찬가지였다. 유키토는 노골적으로 은행 주변만 훑었다. 용의자를 찾기 위한 단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모모세―을 찾고 있는 의도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런 식으로 혼자 모든 자료를 끌어안고 있으니, 방해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저기, 유키. 범인도 찾아야지.”

“……어.”

“내 말은 안 들리는구나…”

반리가 컴퓨터 화면을 손으로 가리자 그제야 이쪽을 바라본다. 그만하고 들어가, 나도 내 일 끝내고 퇴근해야지. 아. 미안. 양심은 있어 사과는 곧장 나왔지만 의자에서 엉덩이가 완전히 떨어지기까진 십여 분 남짓 걸렸다.

 

*

 

“은행 이그프리, 또 망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야마토가 죽을상을 하고 들어와 반리에게 서류 하나를 내민다. 무슨 이유에서 망가졌냐고 물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또 테러였다. 이번에 테러가 일어난 곳은 은행 옆에 있는 도서관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대낮인 데다가 커다란 균열이 생겨 폭발 규모와 피해는 상당했다. 사망자가 한 명, 부상자는 16명이었다.

“백업한 데이터는 있죠?”

“응, 있어.”

아주 잘 있지. 반리는 유키토가 스물다섯 번이나 백업했던 것을 기억해내곤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넘겼다.

“문제는 그 도서관…”

“그~쪽 복구는 우리 팀에서 가장 유능한 야오토메군이 담당할 예정이니, 친히 쪼아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전 유키씨하고 일하는 건 당분간 사양하고 싶거든요. 말허리를 끊어버리는 떨떠름한 어투에서 반리는 그가 유키토에게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눈 밑이 푹 꺼져 잔뜩 피곤해 보이는 사람에게 일을 얹어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 수고했다는 말로 토닥이곤 그를 돌려보냈다.

“…여보세요. 어, 유키. 쉬는 날에 미안.”

*

반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유키토는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에 테러가 일어난 곳은 빌린 책을 반납하러 들렀던 중앙도서관이었다.

“사건 발생 시각은?”

“오후 2시. 정확히는 오후 2시 1분 12초.”

유키토는 식사를 위해 1시쯤 도서관을 나선 것을 기억하곤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우연이겠지. 일련의 사건이 제 곁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긴장감이 엄습한다. 옛날 같았으면 죽지 못해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유키토는 모모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현관 이그프리에 저장된 모모세의 데이터를 지우지 않았다. 이사도 가지 않고 그의 집세까지 대신 지불해가며 모든 것을 유지했다. 만약, 아주 만약에 모모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제 목숨은 그저 그런 목숨이었다.

“유키? 듣고 있어?”

그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반리의 목소리에 묶여있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미안, 지금 회사로 갈게.”

 

*

 

두 번째 테러. 범인은 이전 백화점 테러범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츠쿠모와 호시카게의 임원회의 결과를 받아온 반리는 슬쩍 유키토의 눈치를 살폈다.

“부서별로 인원 충원해서 테러 전담반을 조직할 예정이라는데, 지원할 생각 없어?”

“없어.”

역시나. 반리는 유키토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곤 말을 멈추었다. 그에게 있어 ‘업무’는 실종자를 찾고 모모세를 찾는 일이 전부일 테다. 숨 쉬듯이 애인 자랑을 늘어두던 오리카사 유키토의 밝은 얼굴은 반리의 기억 속에 선명했다. 만사에 딱딱하게 굴던 그도 모모세가 곁에 있으면 곱게도 웃었다. 반, 나는 모모랑 결혼할 거야. 그리 조잘거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제정신이 아닌 게 당연했다. 반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곤 도서관 테러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

다음 날엔 회사에서 가까운 거리의 공터 나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다음 날엔 식당. 그다음 날엔 빵집이었다. 하나같이 유키토가 방문했거나 근처에 머물렀던 곳이다. 자꾸만 누군가가 제 곁을 맴도는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낀다기보다, 제 주변을 끼고 테러가 일어나고 있는 정황들이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꺼림칙했다. ‘유키가 만지면 또 고장 날지도 모르니까.’ 갑작스레 연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채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무언갈 만져도 균열이 생기지 않았는데 근래에 들어 다시 그런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만지지 않아도 제 주변에서 아주 작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당장의 테러가 더 신경 쓰였던 유키토는 자잘한 균열 현상에 대해서는 그리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

보고 싶어, 모모. 널 찾기 전까진, 네 시체라도 찾기 전까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유키토는 반지에 입을 맞췄다.

 

*

4월 11일, 일련의 테러로 집계된 사망자 수 5명, 부상자 수 42명. 거듭되는 테러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츠쿠모와 호시카게는 편성된 테러 반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자료를 공유했다. 이그프리를 뜯어 데이터를 추출하고 야단법석을 떤 덕분에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리스트가 뽑혔고, 이를 테러반 수사팀 대표가 된 오오가미 반리가 1차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고생하네, 반.”


유키토는 자주 반리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전문반을 조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범인이 타겟으로 삼을 것은 테러반 멤버일 거란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타겟… 타겟이라. 유키토의 눈은 프로파일이 담긴 서류에 꽂혔다.

“……? 용의자 리스트라기엔 너무 두꺼운 거 아니야?”

“아, 그거. 그냥 데이터에 기록된 사람이면 전부 다 올린 모양이야.”

그 많은 사람 중에 진짜 범인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직 검토하지 못한 서류의 두께에 반리는 혀를 내둘렀다. 상당한 양인데, 혼자 할 수 있겠어? 유키토는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다 말곤 멈추었다.

“반, 이거 정확한 거야?”

“정확하다기엔, 말 그대로 용의자… …그거 테러반 소속 아니면 열람 금지니까 내려놔, 유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이그프리에 찍혔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올라온 거 맞냐고.”

반리는 다소 높아진 유키토의 목소리에 눈을 끔벅였다.

“…? 그렇지.”

“저번에 수사팀 인원 모자르다고 했지?”

나도 지원할게, 테러반. 떨리는 유키토의 손을 바라보던 반리는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거야 가능한데, 왜 갑자기……”

……설마, 반리는 유키토에게서 서류를 빼앗아 펼쳤다.

 

[ 스노하라 모모세, 25세 ]

 

―모모가 살아있어. 요코하마에 있어. 유키토는 두 손을 깍지 껴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북받쳐 오른 감정엔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테러반은 지금 어디까지 수사하고 있어?”

“직접적인 수사는 아직이야. 오늘로 반 편성 마감하고 공식 회의로 진행할 거고. 상부엔 내가 말할 테니까 내일 있을 회의엔 너도 들어와.”

반리는 몸을 떠는 유키토의 허리께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마워, 소속 절차 끝나면 용의자 명단이랑 이그프리 자료 나한테도 보내주고.”

젖은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쉽게 숨길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테러반 소속으로 발탁되면 용의자들, 즉 모모세가 발견된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잃어버린 연인과 가까워진 기분에 울컥한 감정은 눈가를 벌겋게 물들였다. 만나면 일단 한 대만 때리자. 정말 세게, 아주 세게 한 대만 때리자. 어디 갔다가 오길래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만들었냐고. 그동안 뭘 했냐고. 내가… …보고 싶진 않았냐고.

하루종일 할 말을 긁어모으던 유키토는 그날 밤 꿈에서 모모세를 만났다. ‘유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어’, 옛일이 다시 재생된다. 작은 동물이 우는 듯한 모양새에 당장 끌어안고 다독였지만 제 품에 담긴 이에게서는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키토는 감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좋으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좋으니 모모세를 품에 담아두고 싶었다.

쓸쓸히 맞이한 아침은 평소보다 더 허전했다. 아무도 없는 옆자리에 익숙해지리라 여겼건만 참 안일한 생각이었다. 오리카사 유키토는 정조를 지킨다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다른 이와 밤을 보내며 외로움을 채웠을 법도 했다만 그러지 않았다. 성욕 따위를 느낄 새도 없이 온 정신이 스노하라 모모세에게 향했기 때문일까.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그를 노려본다. 용서 안 할 거야, 모모. 유키토는 손에 끼워 둔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옮겼다가 다시 중지 손가락으로 옮겼다. 찾다 못해 테러범 용의자 리스트에서 찾게 만든 그가 야속했다. 문득 꿈에서 만난 모모세가 떠오르자 그가 이전에 꿨다던 악몽이 예지몽이 될까 봐 덜컥 불안해진다. 여러 가지 감정과 싸우며 속을 어지럽히던 유키토는 넥타이를 매는 것도 잊은 채 출근했다.

 

*

 

“……현재 용의자는 세 명으로 추려졌습니다.”

테러 전담반 공식 결성 당일, 회의장엔 부서별로 유능하다 소문난 인물들이 모였다. 보안팀 테러반 대표 츠나시 류노스케는 가져온 서류를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관리팀 분들의 조력과 츠쿠모의 자료로 복원한 이그프리를 수색한 결과,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얼굴이 찍힌 CCTV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류노스케는 스크린에 용의자의 얼굴을 띄웠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정확이 누구라고 짚어낼 수 없었지만, 유키토는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 왜 모모가 저기에. 짙은 머리카락 끝에 번진 하얀 브릿지. 틀림없는 스노하라 모모세였다. 공터에 있는 나무를 만지던 그는 노골적으로 CCTV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곤 현장을 빠져나갔고 그로부터 10여 분 후, 나무를 중심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근처 상가와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복원한 자료입니다. 방금 보신 남자는 용의자 3명 중 하나인 스노하라 모모세로 추정……”

“그 사람이 왜 모모일거 라고 생각하는 거지?”

“유키.”


책상 위에 있던 모모세의 프로파일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유키토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반리는 그를 저지하려 팔을 잡아당겼다.

“류노스케군, 계속 진행하세요.”

“ㄴ, 네. 이그프리에 간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있지만 현재 테러의 진행 자체는 포착되지 않은 이그프리의 오작동이 주를 이룹니다. 따라서 해당 부분도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모모는 아니야.”

반리가 무어라 막기도 전에 참다못한 임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오리카사. 아는 사람이야?”

“애인입니다.”

애인?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회의장에 반리는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의 애인인 유키토는 테러반에서 퇴출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키토가 대답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넘기고 싶지 않았다. 스노하라 모모세는 분명한 오리카사 유키토의 애인이고 약혼자니까. 유키토는 반지를 끼운 왼손을 꽉 쥐었다. 류노스케가 입을 다물자 유키토에게 아는 사람이냐 물었던 임원 와카바가 회의를 속행했다.

“츠나시. 또 다른 증거는?”

“…이그프리에 남은 조작 흔적입니다.”

류노스케가 어렵게 입술을 떼어내자 임원은 혀를 차며 유키토에게 소리쳤다.

“오리카사, 나가. 넌 전담반에서 빠져.”

역시나. 반리는 꼬여버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몰라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모모의 결백을 증명할 겁니다.”

“결백? 이봐, 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어디가 결백하단 거야.”

“범인일 리 없습니다!”

“네 애인이 진짜 범인이라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발견 즉시 사살 명령이 떨어져도 이상할 거 없어. 알지? 사람이 죽었어. 그것도 다섯 명이나. 와카바는 미간을 좁히며 유키토를 노려보았다.

“그땐…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죽을 거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는 편이 나아. 유키토는 자꾸만 모모세의 목소리가 떠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든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오래도록 쥐고 있던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류노스케와 눈이 마주치자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냈다.

“……방해해서 미안. 계속 진행해, 류노스케군.”

이후의 회의 내용은 유키토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드문드문 나타나는 CCTV 영상에 찍힌 모모세의 모습과 공범으로 의심되는 인물 두 명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저 새끼들이 모모를 협박한 게 틀림없어. 유키토는 자꾸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입술을 깨물었다.

 


 

“저, 오리카사 수사관님.”

“……누구.”

“오늘부터 조수로 일하게 된 관리팀 소속 오카자키 린토입니다.”

조수? 오카자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어내렸다. 관리팀 소속이라. 그 임원이란 작자가 감시 차로 붙인 것이리라. 유키토는 오카자키를 한번 흘끗 이곤 시선을 돌렸다.

“식사는 아직이시죠? 같이 가실까요.”

“입맛 없어, 혼자 가.”

“안 돼요, 언제 또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저기, 뭐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이라던가 없어요? 제가 사겠습니다.”

“그래, 유키. 다녀와.”

“반.”

뒤에서 제 어깨를 잡아 미는 통에 유키토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먹고 힘을 내야 모모의 무죄를 증명하든 아니든 할 것 아니냐는 설득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 불편해. 말이 조수지, 감시잖아. ]

[ 저번 회의 이후에 부서 대표들하고 임원진 회의가 더 있었어. 그때 모모가 범인일 경우, 네가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고.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 ]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유키토는 발밑에 생긴 작은 균열을 발견하곤 한숨을 내뱉었다. 또 나타나네. 오카자키는 균열이 생긴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골 카페에 간 둘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오리카사씨는 언제 입사하셨어요?”

“……”

“…하하,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분이신가요.”

“나에 대해 어디까지 들었어?”

오카자키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의 종이 부분을 걷어내느라 시선을 내렸다. 어디까지 들었냐니, 그야 같은 테러반 팀원이니 회의실에서 유키토가 쏟아낸 말을 들었고 공범일지 모르는 그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전부였다. 수사팀도 아니고 관리팀 사람인 제게 이런 감시 역할을 시키는 것 자체도 불만인 와중에 상대가 이리 공격적이니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제 의지랑 상관없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리카사씨가 결백하다면 제가 반대로 당신이 결백하단 걸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되는 거잖아요.”

저랑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어때요? 유키토는 오카자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토마토와 양상추가 가득 담긴 샌드위치를 눌러 잡곤 크게 한입 물고 우물거렸다. 오카자키의 눈에 유키토의 행동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 입에 무언갈 넣었다, 싶을 정도였다. 불쾌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란 걸 잘 알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내뱉은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오카자키는 아직 따뜻한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애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지금 그분 실제 거주지도 정확하지 않다는 소리가 돌아서―”

“나도 몰라. 모모가 실종된 지도 1년이 지났어.”

“……실종이요?”

이미 말을 한 마당에 무얼 더 숨기랴. 유키토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컵을 쥔 채 말을 이었다.

“집은 그대로 있어. 근데, 모모가 사는 건 아니야.”

“아, 네. 일단 집은 수색을 마쳤기 때문에……”

“……뭐?”

“앗, 차……”

오카자키는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유키토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수색을 마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수색 자체는 테러 전담반 수사반 대표가 된 반리의 지시가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 유키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츠, 츠쿠모 쪽에서 단독으로 진행한 거예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반리씨가 츠쿠모 사람하고 싸우시던데…”

“……츠쿠모.”

유키토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모모세는 관리국장의 아들과 한 약속이 있어 츠쿠모를 지망한다고 했다. 때를 봐서 호시카게로 이직할 수 있을 거라고는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유키토는 복잡한 기분에 팔짱을 꼈다.

“그거 아시죠? 츠쿠모랑 호시카게 임원들이 이그프리 지분을 두고 싸운다는 거.”

오카자키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야 일반인들은 모르죠. 회사에서만 난리고 밖으로 말이 나가봤자 관리국끼리 견제한다고만 생각하고 넘기는 사람이 대다수니까요. 그런데……”

테러범이 쓴 수법 같은 게, 관리국 통제 이상의 활약을 보인다나봐요.

“관리국 통제 이상?”

“네. 그러니까, 해킹으로 끝날 일이 아니래요. 이틀 전 사건에서는 균열 2단계가 발생한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 아시죠? 균열 2단계는 이론에서나 존재하고 실존하진 않아서 다들 모르고 지나갔다더라구요.”

아! 저것 보세요, 분명 저런 사각형… …어? 오카자키의 말에 유키토의 눈이 커진다. 균열 2단계, 사각형은 처음 본다. 알 수 없는 본능의 외침에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다.

“오, 오리카사씨!?”

어디 가세요! 오카자키가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난 유키토의 빈자리엔 온기가 남은 커피와 절반 정도 사라진 샌드위치만 남았다.

*

 

오카자키가 ‘저쪽’이라고 지목한 곳은 코끼리코 공원의 다리였다. 크고 작은 사각형이 한 번에 솟아났다가 뒤섞인 순서대로 꺼진다. 켜지고 꺼지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 일반인이라면 보지 못하고 넘기기 쉬울 정도였다. 다리 밑을 지나다니는 소수의 사람들을 훑어보던 유키토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내뱉곤 균열이 가장 크게 보이는 부근으로 향했다.

―콰앙!!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부서진 다리의 잔여물이 아래로 추락한다. 유키토는 신체의 말단이 저릿하게 당기는 감각을 무시하며 무너져 내리는 다리 아래로 달렸다. 저기에 테러범이 있을지도 모른다. 테러범을 잡으면 모모의 혐의도 벗겨질 테다. 유키토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유키!”

익숙한 음성의 부름에 유키토의 고개가 돌아간다. 검은 머리카락. 흰색 브릿지. 검은색 선글라스로 가려진 진홍빛 눈동자. 달리던 몸짓이 천천히 잦아든다. 인식이 끝나기도 전에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리는 것을 헤집고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제 이름을 부른 남자는 분명―

“모모!”

스노하라 모모세.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유키토가 무너지는 다리 밑에서 빠져나오자 모모세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찍이 운동이다 뭐다 빠삭하던 그를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돌연 도망쳐버리는 연인의 뒷모습에 눈이 뒤집히고 없던 힘까지 치솟은 데엔 분노와 사랑 말곤 어울리는 이유가 없었다. 모모, 왜 도망치는 거야. 불안으로 숨이 막힌다. 한참을 달린 탓에 힘이 빠져 몸이 휘청였지만 이대로 물러날 유키토가 아니었다.

폭발로 인한 연기로 검어진 하늘은 점점 그 빛깔을 죽여 갔다. 자욱하게 깔린 연기와 구름 틈새로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줄기의 형태를 이룬 것들이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할 때 즈음, 뻗어 나간 유키토의 손이 모모세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추장스러운 검정색 코트 자락이 크게 펄럭이다 멈춘다. 아무런 말도 없다. 아무런 표정도 없다.

“왜, 도망가는 거야.”

냉한 표정에 유키토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범인이 모모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이 엄습한다.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마음임을 알면서도 그 생각을 부정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더더욱 속이 문드러지고 뒤틀렸다.

“네가 한 거야? 너, 왜 테러 사건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관리국은 널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어. 왜 돌아오지 않고―”

유키토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안 가득 담겨있던 것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도망치라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야 할까. 머릿속에 온갖 것이 떠올라 입이 망가진다. 문득 그의 손으로 시선이 내려간다. 반지는 버린 걸까. 까만 장갑에 가려진 맨손이 신경 쓰인다.

“네가 아니란 거 다 알아. 내가 증명해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나야, 유키.”

“……뭐?”

“테러, 내가 한 거야.”

일순 사고가 정지한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모모세를 바라보던 유키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야. 아니잖아. 협박받는 거지? 너 말고도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둘 있었어. 그 자식들이… …!”

유키토의 목 언저리에 날카로운 나이프가 맞붙는다. 모모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비틀었다. 언제나 저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사람이 이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비난에 가까운 표정으로 마주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 같은, 아니. 모모세의 탈을 쓴 다른 이를 마주한 기분에 억장이 무너졌다.

“……모모.”

“그러지 마, 유키.”

내가 목격자인 너를 죽이면 믿어줄 거야? 말끝에 붙는 씁쓸한 미소에 유키토의 눈동자가 커진다. 스노하라 모모세. 결혼까지 약속했던, 제 인생에 다시없을 가장 찬란한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유키토는 목에 닿은 칼날보다 모모세의 눈빛에 겁이 났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거짓으로 점철된 것 같아 울음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앞질러 치밀어 오른 감정의 화염이 물기를 날려버렸다. 유키토는 주저 없이 모모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윽!?”

“1년 넘게 나를 방치해두고, 이제는 칼까지 들이대?”

널 어떻게 패버리면 내 분이 풀릴까. 유키토가 겉옷을 벗어 던지자 모모세는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빗물이 서린 선글라스를 벗었다. 별다른 말이 없다. 얼얼하게 비틀린 제 손목만 매만질 뿐이었다. 유키토는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저 멀리 차버렸다. 금속이 젖은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리가 요란하다.

“넌 변명이라도 해야 했어.”

“유키, 내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

유키토의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자 모모세는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났다. 얇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딘가로 시선을 돌린 모모세는 거치적거리는 코트를 내던지곤 검정색 장갑을 고쳐 끼웠다.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유키토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그는 몸을 틀어 유키토의 등 뒤로 빠졌다. 모모세가 뒤에서 치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유키토는 몸을 낮추곤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둔탁한 마찰음도 잠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내며 넘어지는 몸을 받친 모모세는 그대로 유키토의 무릎을 분지를 기세로 걷어찼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지만 뱃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못했다.

“오리카사씨―!!”

오카자키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려온다. 경찰과 관리국 수사팀까지 이끌고 들이닥치는 그를 돌아본 찰나, 모모세의 주먹이 유키토의 명치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커헉……”

유키토가 바닥에 주저앉자 모모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오카자키가 비명을 지르며 유키토를 부축했고 경찰과 수사팀은 모모세를 뒤쫓았다. 도망쳐, 모모. 저도 모르게 나갈 뻔한 말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 유키토는 주먹으로 바닥을 여러 번 내리쳤다. 잇새로 욕이 터져 나온다. 두들겨 맞은 탓에 이곳저곳이 아프다.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이 쫄딱 젖어 뺨에 달라붙는다. 영락없이 버림받은 몰골이었다.

 


 

“……괜찮으세요?”

호시카게 관리국 안. 오카자키는 쩔쩔매며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유키토의 눈치를 살폈다.

오카자키는 이그프리 균열 2단계를 목격하고 뛰쳐나가는 유키토를 쫓으며 관리국에 연락해 수사팀과 경찰을 호출했다. 테러 예고 조짐이 보인다는 신고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코끼리코 공원의 다리가 폭발했다. 유키토로 추정되는 인영(人影)이 무너지는 다리 아래로 들어가다 누군가를 보고 멈춰 선다. 그 시점에서 지쳐버린 오카자키는 수사팀과 합류하고 난 후에야 유키토를 찾으러 움직일 수 있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해.”

차가운 어투에 반리는 유키토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날렸다.

“말이 심하잖아, 오카자키 씨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반리의 말에 순간 무언가가 울컥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대꾸하지 못했다. 유키토는 제 안의 고집을 억지로 꺾어 내렸다. 오랜만에 본 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칼을 들이밀었고, 거기에 열이 받아 사정 볼 것 없이 싸워버렸다. 겨우 누그러뜨린 분노가 다시 피어올라 속을 집어삼켜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키, 할 말이 있어.”

입을 연 반리는 오카자키에게 잠시 방에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오카자키는 유키토와 반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이곤 얌전히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반리는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유키토에게 넘겼다.

“…이게 뭔데.”

“네 주변에서 이그프리의 균열이 확인된다는 자료야.”

“…….”

테러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 두었던 것이 돌연 발목을 붙잡는다. 호시카게에서 직접 분석해서 자료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저를 완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스노하라 모모세의 연인이기 때문에 더욱 의심 받는다. 유키토는 서류를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화점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테러 지점의 근처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과 지나친 건물에서도 균열이 보였다는 조사 결과에 입꼬리가 사선으로 휘어졌다.

“이미 날 공범이라고 못 박았네.”


반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변에서 1단계가 생기더니 이젠 2단계까지 발견됐어. …그 후에 테러가 일어났고.”

테러리스트의 용의자를 찾기 위해 이그프리에 부착된 CCTV 기능을 훑던 누군가(익명으로 표기되어 있다)가 해당 내용을 정리해 임원 회의에 제출했다는 내용이 붙은 페이지에서 유키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다. 문득 칼이 닿았던 목 부근이 끔찍할 정도로 서늘했다.

“긴말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테러반에서 나가라는 소리야.”

누군가가 문을 열며 들어와 반리의 말을 가로챈다. 호시카게 관리국 국장은 이마에 패인 자글거리는 주름을 더 짙게 구기며 유키토를 훑어 내렸다. 국장의 곁에 선 남자는 이전 회의 때 유키토에게 테러반에서 나가라고 했던 임원 와카바였다. 그의 얼굴을 본 유키토는 짜증 섞인 얼굴로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유키, 진정해! 국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리는 유키토의 어깨를 꽉 눌렀다.

“공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테러반 소속이란 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 것 같나? 테러를 조장하는 게 호시카게라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이그프리 지분을 전부 츠쿠모에게 빼앗기게 될 텐데.”

“날 공범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데요.”

“거기에 적힌 그대로지. 그리고 자네가 무너지는 다리 아래에 갇힌 시민을 구하러 뛰어든 줄 알았더니 그대로 스노하라 모모세와 자리를 떴다고 증언한 사람이 나왔거든.”

잔해에 갇혀있던 시민은 일반인들이 구출해 중환자실로 이송했어. 수사팀 사람이 인명 구조는 안 하고 노가리나 까고 있고, 잘하는 짓이야. 응? 국장이 턱짓으로 서류를 가리키며 말을 잇자 유키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스노하라 모모세. 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버린 이 배신감을 어떻게 떨쳐내야 좋을지 몰라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만요, 국장님.”

와카바는 마구잡이로 유키토를 쪼아대는 국장을 붙잡았다.

“오리카사를 미끼로 삼으면 모모세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범이라면 공범인 대로, 애인이면 애인인 대로. 왜 오리카사의 근처에서만 테러가 일어나는지, 과연 이다음 테러도 그렇게 될지도 알 수 있을 테고요. 그는 곁에 두고 감시하기 좋은 사람입니다.”

“……흐음.”

관리국장은 턱을 쓸어내리며 유키토를 바라보았다.

“오리카사.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네가 모모세를 잡아.”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옛날의 모모세가 그립다. 따뜻함이 넘치고 다정했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곧잘 불러주던 노래도, 미소도, 그 모든 것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왈칵 서러워졌다.

테러반에서 나갈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모모세가 있다. 유키토는 당장의 분노를 죽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건은 이전해도 말했습니다. 모모세는 제가 잡을 겁니다.”

잡힐 거면 차라리 내 손에 잡혀, 모모. 죽여야 한다면 내가 널 죽이게 해줘. 손에 감긴 붕대 위로 붉은 자국이 짙어졌다.

관리국에서 스노하라 모모세로 수사망을 좁힌 것은 도망치는 모모세의 뒷모습을 본 수사팀과 경찰의 증언, 그리고 국장이 유키토에게 전한 시민의 목격담 때문이었다. 유키토는 하루 빨리 모모세를 만나고 싶었다. 다시 만나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과연 화내지 않고 울지도 않고 말을 잘할 수 있을지, 또 주먹이 먼저 나가진 않을지 걱정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직접 부딪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긴급회의는 지겨울 정도로 열렸다. 범인을 특정했으니 그를 추적해 잡는 일에 대해 논의하면 끝일 텐데 임원들은 유키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만 퍼부었다. 일방적인 뭇매를 맞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졌으나 그럴 때마다 반리와 오카자키의 반박으로 무마되어 유키토가 폭발하는 일로 번지진 않았다.

보안 및 CCTV 기능을 탑재시킨 일반형 이그프리보다 한 단계 높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지형과 건물의 외관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관리형이다. 그러나 모모세가 간섭하고 있는 것은 그 관리형보다 상위에 존재한 무언가였다. 이그프리를 만든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거나 이그프리를 직접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모모세의 흔적은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이그프리 시스템은 츠쿠모와 호시카게의 합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개발에 관여한 회사도 해낼 수 없는 기능을 일반인이 수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키토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그프리 개발자는 누구죠?”

“츠쿠모와 호시카게가 공동 개발자지.”

무던한 대답에 어금니를 깨물자 상황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보안팀 소속 야오토메 가쿠가 언성을 높였다.

“그놈의 공동, 공동. 우리가 묻고 싶은 건 특정된 사람입니다! 정말 지금의 개발자들이 이그프리를 만든 게 맞습니까? 스노하라 모모세의 작품을 훔친 것이 아니고?”

저와 같은 의문을 품은 이가 있단 사실에 유키토는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야오토메, 말조심해.”

“그럼 설명하시죠. 어째서 우리보다 더 높은―”

“―스노하라 모모세가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을 훔쳐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개량한 걸지도 모르지.”
“하?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갑니까!? 호시카게랑 츠쿠모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미쳤어요?!”

“가쿠, 그만해.”

가쿠의 곁에 있던 류노스케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저지했다. 강제로 자리에 앉혀진 가쿠는 인상을 구기며 저와 말다툼한 임원을 대놓고 쏘아보며 류노스케의 손을 떼어냈다. 유키토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준 가쿠에게 고마웠다. 자신은 대놓고 의심 받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까딱하면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 뻔해 이렇다 할 발언도 편하게 하지 못했다. 팔자에도 없는 인내심 따위를 지겹도록 길러내고 있자니 열이 오른다. 아, 이게 다 네 탓이야. 자연스레 애인에 대한 원망이 섞였다.

“메인 시스템은 두 국장님의 키 카드가 있어야 접근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침입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본부에 있는 메인 시스템의 출입 카드를 둘로 나눈 것은 하나의 관리국이 단독으로 메인 시스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중앙 정부에서 만들어낸 조치였다. 침착한 오카자키의 말에 임원은 반박이 달갑지 않은지 인상을 구긴 채 뒷목을 문질렀다.

“스노하라에게서 훔친 것도 아니고 스노하라가 훔친 것도 아니라면 개발자가 스노하라에게 정보를 넘긴 걸지도 모르니까 그 개발자를 찾아보는 게 먼저 아닙니까.”

씩씩거리던 가쿠가 미처 잇지 못한 말을 내뱉자 유키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그프리의 개발자. 과연 그 사람을 찾는 것이 사건을 해결 할 수 있는 열쇠가 될까. 이그프리의 활용 범주가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있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 안의 스노하라 모모세는 이런 시스템으로 무언갈 해보려고 한 이가 아니었다. 또래와 똑같이 취업을 준비하고 친구를 만나고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즐기는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개발자를 잡자는 말에 호시카게와 츠쿠모 국장의 입이 다물린다. 호시카게의 개발팀 대표 나나세 텐은 회의장 안을 죽 둘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시카게의 개발팀 대표는 입사한 지 이제 겨우 5년 차인 제가 맡고 있습니다.”

이그프리의 개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란 소립니다. 각 부서별 대표는 경력이 충분한 사람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때문에 보통 3,40대가 맡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직 이십 대인 데다 경력도 5년에 그치는 텐은 이전 대표에게서 실력을 인정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츠쿠모 개발팀 대표도 저와 같습니다. 개발에 참여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맡고 있죠.”

삽시간에 조용해진 회의장. 호시카게 국장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텐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개발자는 없습니다. 저는 제 이전에 있던 대표님이 이그프리를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온전한 것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제게 온갖 기술과 데이터를 맡기고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그게 3년 전 일이죠.”

심각할 정도로 서두르시더군요. 왜 그분은 그렇게 서둘러 퇴사한 걸까요. 텐은 느리게 두 국장을 번갈아 보았다.

“가쿠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前) 대표님은 누군가에게서 이그프리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그걸 기반으로 지금의 이그프리를 개발한 거겠죠. 그 과정이 호시카게와 츠쿠모의 합작이란 소리를 만든 걸 테고.”

“나나세!”

참다못해 언성을 높인 호시카게 국장과는 달리 츠쿠모 국장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뱀의 눈과 같은 것이 섬뜩하게 휘어져 텐에게 꽂힌다.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텐은 거기서 말을 멈추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노려보는 호시카게 국장의 시선을 느낀 와카바는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 지금 중요한 건 개발자가 아닙니다. 스노하라 모모세를 잡는 일을 논의하러 모였잖습니까~ 제가 이미! 경찰은 물론이고 특수 부대 지원까지 요청해두었습니다.”

“무슨……”

경찰에 대한 지휘권은 와카바가 아닌 반리에게 있다. 아무리 임원이라지만 제가 전담한 업무를 빼앗겼단 사실에 침착하던 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게 좋은 작전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화제를 바꾼 와카바는 부산스레 뛰어나와 회의실에 스크린을 띄웠다.

 


 

모모세를 잡는다. 유키토는 인상을 구기며 두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모모세가 나타나는 곳의 전조 증상으로 알려진 균열 현상. 그리고 이번 코끼리코 공원 다리에 설치된 이그프리 복원과 그곳에서 추출한 ‘간섭’ 데이터. 멍한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던 유키토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유키씨,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추레해진 유키토에게 USB를 넘겼다. 수고했어, 야마토군. 건네받은 USB를 곧장 노트북에 끼운 그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분석 결과는 어때.”

“CCTV에 특이한 건 없지만 데이터가 옮겨진 흔적이 발견됐어요. 그 왜, 저번 회의 때 류노스케가 말한 이그프리 조작 흔적. 그거요.”

딸깍, 딸깍. 마우스가 두어 번 움직이고 복잡한 프로그램 하나가 켜진다.

 

[ 카페 잭, 12:05pm ] 

나른한 눈으로 스크린을 훑어보던 유키토는 파일명과 내용을 몇 번 더 확인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곳 말고 다른…”

“확인했어요. 그쪽도 마찬가지로, 데이터가 옮겨진 흔적이 남아있더군요. 용량이 커서 거기에 넣진 못했지만.”

“…알았어. 고마워.”

편의점. 도서관. 카페 잭. 전부 자신이 있던 공간에서 발견된 잔여 데이터였다. 해킹과 폭파를 입력한 거대한 프로그램이 있던 자리엔 정크 파일이 정교하게 얽혀있었다. 물론 분석을 한 탓에 찾아낼 수 있었지, 그냥 넘어갔다면 영영 몰랐을 정도로 좋은 솜씨였다. 유키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위치를 바꾼 걸까. 그것도 내가 있던 곳에서. 왜. …의도를 모르겠어, 모모. 넌 도대체 무얼 할 작정인 거야. 커다란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

 

와카바의 지시로 츠쿠모와 호시카게의 수사팀이 배치되고 특수 경찰 부대와 대량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메인 시스템을 지킬 인력과 국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거리로 쏟아졌으니, 이젠 테러반이란 그룹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보안팀 팀장이면서 테러반 대표를 맡기 싫어 류노스케에게 미뤘던 야마토는 상당히 불쾌한 낯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온갖 건물이 밀집된 곳에 덩그러니 서 있으니, 그야말로 제 발로 사지로 걸어왔단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 참, 이래서 윗대가리들이 똑똑해야 한다니까.”

“오, 야오토메~ 마침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 곳에서 사전 통지 없이 작전을 진행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야마토는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지금 유키씨가 저 전망대에 있다고?”

“아아, 혼자서 요코하마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호된 취급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유키토가 의아했지만, 상대가 애인이란 소리에 어깨를 으쓱이고 넘어간다. 제 속과는 다르게 한없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보던 야마토는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데에 여념이 없는 와카바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왜 하필 오늘일까. 왜 하필 이곳일까. 거듭 생각해도 수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랜드 마크 타워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유키토는 유리창에 크고 작은 균열이 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것을 보곤 손을 떼어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생겨난 것도 의아했지만, 점점 그 크기를 더해가는 삼각형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균열 체질이라는 게 있는지 검사하려면 병원에 가야 하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는 건물 아래에 빼곡히 모인 관리국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유키토는 보이지 않는 연인의 손을 잡았다. 늘 알던 표정의 모모세를 떠올린다. 상상 속의 그와 오래도록 눈을 맞추고 있던 유키토는 별안간 제 키만큼 퍼진 균열에 고개를 돌렸다.

본 적 없는 크기의 커다란 삼각형이 퍼지고 사라진다. 깨진 조각처럼 흩날리는 분홍색 실선이 도형을 이루었다가 비틀리고 그 색을 바꾼다. 평소에 보이던 균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현상에 유키토는 창가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 오리카사! 테러범은 만났나?! ]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거슬리는 목소리에 움찔 놀란 유키토는 작게 욕을 씹었다.

[ 유키! 지금 본부에 있던 보안팀에게서 연락이 왔어.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을 해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

설마, 사람이 없는 틈에 그쪽으로 간 건가. 유키토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쪽 작전을 엿듣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관리국을 터뜨릴 의도로 간 건지. 어쨌거나 보기 좋게 엿을 먹은 사람은 저보단 와카바였기에 지금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 반. 모모는 본부로 갔어? ]

[ 그건 모르겠어. 침입한 사람은 모모가 아닌 것 같아. ]

[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

[ 이봐, 오리카사. 스노하라를 잡지 못하면 넌 모가지야. 알아? ]

난 지금 당장 당신 목을 뽑아버리고 싶은데. 유키토는 목구멍을 채우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 넘기곤 무전을 끊었다. 정신없이 전개되고 사라지는 균열의 흔적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는 전망대에서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모모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으로 올 거라는 예감이 강한 확신으로 굳어졌다.

‘유키가 날 죽이는 꿈을 꿨어.’ 모모, 그때 네가 봤던 꿈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었어? 별안간 옥상정원에서 결혼하고 싶다던 말이 떠올라 숨이 막힌다. 유키토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걸음이 익숙하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겪은 적 없는 것을 겪은 것만 같은 기분. 난데없는 데자뷰에 착잡함이 주저앉는다.

청명한 하늘 아래, 유키토는 검은 인영을 발견하곤 허탈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헤매게 만드는구나.

“그래서 널 용서할 수 없어, 모모.”

“그래도 용서해줄 거잖아, 유키.”

“본부로 간 사람들은 뭐야?”

모모세는 대답 없이 장갑을 낀 손을 쥐었다 펴냈다. 공격 태세를 보이는 그에게 유키토는 망설임 없이 권총을 겨누었다.

“……반지, 아직도 하고 있구나.”

모모세의 씁쓸한 미소에 왜 화가 나는 걸까. 유키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방해가 없는 상황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선뜻 제 행동을 거두진 못했다.

“내가 여기에 올 거라는 거, 넌 알고 있었지?”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그저 가만히 눈만 맞출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자 이가 갈렸다.

“말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곁을 떠났는지―”

“시간 없어, 유키.”

[ 오리카사! 쏴! ]

“!”

무전기에서 들리는 거슬리는 목소리에 유키토의 어깨가 들썩인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 배치된 것인지 임원과 특수복을 입은 경찰 인력이 이쪽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의문을 불려가던 유키토는 다시 모모세를 향했다.

“시간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해. 이번에도 실패했어.”

알 수 없는 말에 유키토는 짜증이 폭발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반 씨를 죽이는 거였는데.”

반 씨를 죽이면, 넌 날 반드시 죽였거든. 모모세의 말에 유키토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무슨 말이야, 네가 반을 죽인다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 오리카사! 네가 쏘지 않으면 이쪽에서 발포한다. ]

“……이번엔 해낼 수 있을 거야.”

[ 본부에 침입한 사람은 전부 검거했습니다, 반(反) 이그프리 해킹 집단 메이즈 입니다. ]

“모모, 제발! 날 미치게 하지 마.”

[ …잠깐만, 무전기… …신호가, 다른 데로… ]

[ ……이봐, 왜…… ]

유키토의 무전기에서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직거리고 시끄럽게 꼬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키토는 그저 모모세만 바라보았다.

“발포 준비해!”

와카바는 먹통이 된 무전기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소리 질렀다. 유키토는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당장 쏘지 않으면, 모모세는 다른 이의 손에 죽는다. 차라리 도망쳐, 모모. 총을 쥔 손이 떨린다.

“미안해, 유키. 이 시간에서 꺼내줄게.”

분홍색 삼각형이 유키토가 끼우고 있는 반지를 중심으로 떠오른다. 갑작스러운 균열 현상에 놀란 유키토는 제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자각했다.

타앙―

귀를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모모세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피한다면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모모세는 일부러 거리를 좁힌 것처럼 보였다. 총알은 정확하게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모세는 평온해 보였다. 그의 곁에 다가간 유키토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 테러범은 분명한 제 애인이다. 자는 얼굴을 본지도 참 오래됐는데. 와중에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이 들어 웃음이 샜다. 유키토는 모모세의 왼쪽 손등에 제 손을 포개어 얹곤 깍지를 끼웠다. 가죽 장갑 위로 느껴지지 않는 금속의 굴곡에 맥이 풀린다.

“……말했지, 모모.”

네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또 하나의 총성이 울렸다.

 

 

Nabla|

 

 

스노하라 모모세는 뜨거운 철심이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에 눈을 떴다. 지독하게 아프고 끔찍한 감각이 원을 그리며 오래도록 머문다. 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고통과 총성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게 했다. 시야가 흐릿하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적당한 온기가 맴도는 방 안에 새겨진 포근함이 멍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가장 좋아하는 향기.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 모모세는 옆에 잠들어 있는 유키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꿈과 현실을 분리했다. 거칠게 꼬였던 호흡이 차분해지며 조각난 기억이 하나둘씩 따라온다. 뭐가 어떻게 되었더라, 알고 싶지 않지만 알고 싶다는 모순에 사고가 삐걱인다.

“……모모.”

언제 일어난 걸까. 아침잠이 지독해서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해 옷까지 입혀줘야 겨우 출근하던 연인이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눈으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모모세는 괴리감으로 범벅된 기분을 여과 없이 흘려보내며 유키토와 눈을 맞췄다.

“…미안해, 유키. 내가 깨웠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어색하다.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도 한 듯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얹어지며 말꼬리가 늘어지더니 끝내 물기가 스며 눅눅해진다. 유키, 유키……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던 모모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유도 모르고 쏟아내는 눈물엔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서러움이 가득했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총을 겨누고 있는 유키토의 모습이 보인다. 들이마신 숨결에 무형의 화약 냄새가 맺힌다. 유키가 나를 쐈어. 아니, 유키가 아니라 내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정신없이 꺽꺽대며 울자 놀란 유키토는 모모세를 확 끌어안았다.

“모모, 왜 그래. 어디 아파?”

죄여드는 가슴이 목구멍을 막아대는 통에 호흡이 뭉개지며 혀가 굳었다. 모모, 구급차 부를게. 겁을 먹은 듯한 유키토의 목소리에 모모세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 몽을, 꿨어. 유키가, 날, 죽이, 는, 꿈……”

억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문장을 잘라 전달한다. 떠듬떠듬 전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유키토는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은 반대야, 모모. 내가 널 죽일 리 없잖아.”

유키토의 말에 모모세는 울먹이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유키를 죽이게 된다는 소리야?”

“……죽이려고?”

“아니!”

내가 왜 유키를 죽여, 절대 안 해. 절대 못 해. 얼른 품으로 파고들어 가슴팍에 뺨을 대고 문지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에 코가 찡했다.

“어제, 내가 너무 심하게 했어?”

“어?”

“간밤에.”

간밤에? 뭘 했더라. 눈을 끔벅이던 모모세는 뻐근한 허리와 얼얼한 다리 사이의 감각을 깨닫곤 얼굴을 확 붉혔다. 기억이 나진 않았다. 설마, 자는 동안 해버렸다거나. 아니, 술을 마셨던가?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유키토의 눈매가 얄궂게 휘어진다.

“…그,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놀림 받는 기분에 불퉁한 대답이 튀어 나간다. 입술을 댓발 내밀고 툴툴거리자 유키토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오래 해도 괜찮다는 거지?”

“엑, 오늘도!? 무리, 무리! 모모쨩 허리 부서질 거야.”

허리 부서지면 앞으로 영영 엣찌 못하니까 절대 안 돼. 기억에 없는 밤을 짚어내며 모모세는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네, 네. 알겠어요. 오늘은 참을게.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달링, 변태. 그런 변태를 나는 너무 사랑하지만!”

“나도 사랑해, 모모.”

속삭이듯 낮게 깔리는 음색에 모모세는 웃으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두터운 이불로 제 몸 위를 덮어주는 유키토의 손길이 다정하고 부드러워 또다시 눈가가 젖어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추길 기도한다. 이 행복이, 두고두고 오래 가길 간절히 바랐다.

“유키, 몇 시에 출근해?”

“…? 오늘은 오프.”

“그래? 그럼, 우리 반지 맞추러 가자.”

“응. 그러자. 현관 이그프리도 저장하고.”

“아! 나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묘하게 의아해지는 유키토의 표정에 모모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반지 맞추는 거 별로야?”

“아니, 좋아.”

그냥 좀 어색해서, 누구랑 해본 적도 없고. 유키토는 눈을 감으며 모모세의 등을 쓸어내렸다. 누구랑 반지를 맞춰 본 적이 없단다. 그 말이 기쁜 와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자고 일어나면 생각나겠지. 모모세는 제 예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느껴지는 유키토의 존재에 안도한다. 다시 잠에 빠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날이 밝자마자 백화점으로 향한 두 사람은 이 반지 저 반지를 끼웠다 빼길 반복하며 온 매장을 돌아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하얀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모모세는 걸음을 멈추었다.

“유키, 여기 구경해보자!”

“…모모, 여기서 고르는 걸로 정하면 안 될까.”

“으앗, 미안! 피곤했지?”

이런 체력으로 어떻게 수사팀에 들어갔을까. 불의를 보면 없던 힘이 치솟는 걸까? 역시 유키는 멋있어! 모모세는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유키토의 손에 깍지를 끼며 웃었다.

투명한 천으로 장식된 천장은 금가루를 뿌린 듯 화려하게 반짝였다. 잡다한 장신구가 놓인 매장은 하나 같이 특이하고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악세사리로 가득했다.

“이거 어때, 유키?”

모모세는 홀린 듯이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링 두 개가 이어진 까만색 반지의 바깥쪽엔 흑진주가 짧은 간격을 두고 붙어있었다. 모모세는 점원에게서 사이즈가 맞는 반지를 받아 끼워보곤 작게 감탄했다.

“꼭 도돌이표처럼 생기지 않았어? 유키랑 나랑 영원히 이어진다는 느낌이잖아.”

이거랑, 응. 이렇게 끼우면, 봐. 모모세는 반지 하나를 유키토의 손에 끼워주곤 깍지 껴잡아 두 개의 기호를 나란히 맞췄다. 커플 반지니까 엄청 특이하게 하고 싶었거든! 행복을 잔뜩 머금은 모모세의 표정에 유키토의 입매도 따라 올라간다.

“그래, 그럼 이걸로 하자.”

“저희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이그프리도 설치할 거니까 기능 추가도 해주시고…”

유키토가 긍정하자마자 모모세는 반지에 이런 저런 옵션을 붙이기 시작했다. 점원은 그가 하는 말을 성실하게 받아 적었고 모모세는 적힌 의뢰서를 다섯 번 정독한 후에 카드―유키토와 함께 쓰는 데이트용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아, 유키. 뭐 보고 있어?”

점원 형님이 금방 완성된다고 기다려달래. 유키토는 다가오는 모모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냥. 목걸이 보고 있었어.”

“앗, 반지보다 목걸이가 더 좋았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반지 쪽이 더 나아.”

목에 뭐가 닿는 건 좀 불편하거든, 목걸이처럼 차가운 건 어쩐지 꺼려지고. 말을 잇던 유키토는 손끝으로 진열장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순간 유리 위로 조그만 삼각형이 너덧 개 깜빡이다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균열’의 표식에 놀란 유키토를 바라보던 모모세는 침착한 낯으로 점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이쪽 이그프리 고장인가 본데요!”

“네?”

“균열이 보여서요, 1단계.”

그럴 리 없는데, 애초 이그프리 균열 자체는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점원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보세요, 이쪽. 이 목걸이 진열장 안쪽에 연두색으로…”

“…아, 정말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점원의 물음에 모모세는 유키토의 눈치를 살폈다. 유키토의 주변에선 간혹 균열 현상이 일어났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 현상이 무슨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모모세는 유키토를 끼고 일어나는 균열 자체를 꽤나 신경 쓰고 있었다.

“제가 관리국 입사 준비 중이라, 사례를 다 외워놨거든요!”

 

*

반지를 하나씩 끼우고 나온 두 사람은 유키토의 집으로 향했다. 이그프리는 설치하지 않는 쪽이 좋지 않을까, 유키토의 말에 모모세는 마구 도리질 쳤다.

“고장 날까 봐 그래?”

“응. 아무래도.”

…그래도 일반형에는 별 반응 없는 것 같은데. 모모세의 중얼거림에 유키토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 아, 아니. 요즘 따라 유키의 우연이 심하네~ 싶어서.”

능력만 잘 살리면 탐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상한 이그프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유키가 다 잡는 거야! 허우적대는 통에 무심코 과장된 목소리가 나간다. 유키토는 모모세의 들뜬 표정에 빙긋 웃었다.

“알았어. 설치하자.”

“저장하는 건 내가 해줄 테니까!”

유키토가 만져서 반응을 보인 이그프리는 모모세의 기억상 전부 ‘관리형’이었다. 혹시 회사에서도 균열이 생긴 적 있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회사와 집을 제외하고 일어나는 균열이라, 유키가 오래도록 지내는 장소는 어떤 ‘기운’ 따위에 익숙해져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까. 모모세는 우스운 생각을 흘려보내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반지를 스캔해 모니터에 띄운 모모세는 유키토의 현관 이그프리 파일에 ‘스노하라 모모세’를 남겼다. 간단한 설치 작업을 끝낸 그는 이번엔 제 집으로 옮겨 ‘오리카사 유키토’를 입력했다. 이렇게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바엔 동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유키토가 귀찮다는 듯이 건넨 말에 모모세는 헉하며 입을 가렸다.

“그럼 나 매일 위험해지는 거지?”

“살살 할 테니까.”

“정말?”

“거짓말.”

“너무해!”

유키토가 장난스레 엉덩이를 주무르며 속삭이자 모모세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키득였다.

“동거는 청혼하고 해줄 건데요, 달~링.”

“헤에, 모모가 나한테 청혼하는 거야?”

“나 완전 멋있게 할 거니까!”

앗, 미리 말하면 역시 재미없나. 하지만 유키가 거절할지도 모르는데! 호들갑을 떠는 모모세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유키토는 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후후, 기대하고 있을게. 결혼식은 어디서 할까.”

“으핫, 엄~청 높은 빌딩 위에서! 저번에 본 드라마에서 나온 건데, 그… …뭐더라, 아무튼 옥상에서 하는 거!”

“그럼 겨울에 하긴 춥겠는걸.”

“그럼 봄에 할까?”

“모모가 바란다면.”

모모세는 유키토와 나누어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도돌이표. 두 사람을 이어주는 두 개의 기호. 오래도록 반지를 내려다보던 그는 연인의 손을 잡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모모세는 유키토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제 선에서 끝내고 해결했다. 관리국 업무로 바쁜 그에게 자신은 쉼터이고 싶었기에 힘든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취업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했고 종종 밀려오는 우울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동거하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당장 고갤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유키토에게 얹혀사는 꼴이 될 것이 뻔했다. 일하지 않아도 돼, 모모는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들은 적 없는 말이 자연스레 연상되어 난처하다.

관리국 입사를 준비 중인 모모세는 츠쿠모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자신과 다른 회사로 가겠다는 말에 유키토가 실망하자 ‘친구와의 약속’이라 둘러댔지만, 사실 츠쿠모에 입사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거래’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 모모세는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상금이 걸린 각종 대회에도 참가했다. 특기 분야로 도전을 거듭하다 보니 신청 가능한 대회의 규모와 수준은 높아졌고 상금 액수도 그에 맞게 올라갔다. 18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세계적인 규모의 프로그래밍 대회에 지명되어 출전한 그는 전국 상위 5% 안에 들었다는 성적표와 함께 츠쿠모 측에서 후원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츠쿠모 관리국장은 대학을 졸업하면 관리국으로 입사해주었으면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후원을 약속했고 모모세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엔 이그프리의 도입이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국은 유망 직종으로 급부상하여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후원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난 데다가 남들이 바라는 직장까지 보장되었으니, 당시의 모모세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후, 오리카사 유키토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 마음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유키토는 호시카게 입사 시험에 합격해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취직했고 한 학년 아래였던 모모세는 이 사실에 굉장히 심란해했다.

졸업을 3개월 앞둔 어느 날, 그는 츠쿠모로부터 ‘특별 채용’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적힌 우편을 받았다. 그들이 보낸 입사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기엔 마음이 껄끄러웠던 그는 제힘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빛깔 좋은 핑계를 대며 일반 입사를 하겠다고 답신했다. 단순한 도피였다. 입사를 미루어봤자 츠쿠모에 가야한다는 결과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투정을 부렸다. 차라리 빨리 들어가서 자리 잡고 유키토와 결혼해 매일 집에서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설득당해 본격적인 입사 준비를 시작한 지는 이제 겨우 반년 이었다.

“쉬는 날엔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

어느새 검게 물든 바깥을 바라보던 유키토에게 모모세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손짓했다.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어? 묘하게 상처받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고 만다.

“내일도 볼 거잖아~ 그치?”

“……뽀뽀는?”

삐쳐버리기 전에 얼른 하고 떨어지려 했지만 허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는 통에 그대로 입맞춤이 길어져 버린다. 웃음이 터져버린 모모세는 유키토의 어깨를 두드리며 겨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왜 그래, 싫어?”

“좋아! 그치만 이러다 침대로 가면 큰일이잖아~ 달링은 항상 그렇게 시작하는걸!”

어제 못한 공부도 해야 하니까 아쉬워도 오늘은 곤란해. 납득할 수 있는 이유임에도 미련이 남았는지 유키토는 모모세의 손을 잡고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모모세는 가여운 연인의 등짝을 도닥이며 돈 많이 벌어와, 유키! 내일도 파이팅이야! 하며 월요일임을 부지런히 각인시켰다. 조금 심했나, 자꾸만 이쪽을 바라보는 유키토의 모습에 비죽비죽 입꼬리가 올라간다.

[ 유키, 삐친 거 아니지? (´・ω・`) 내일 만나! 사랑해♥ ]

애정을 듬뿍 담은 래빗챗을 보내고 잠시 후, 유키토는 모모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열심히 해, 끝나면 래빗챗 보내고. ]

[ 굿나잇 인사는 꼭 할 테니까! 항상 고마워! 사랑해! ]

[ 나도 사랑해. ]

모모세는 마지막 래빗챗과 함께 손 키스를 보내고 돌아왔다.

유키토가 떠난 집은 온기를 잃은 양 허전했다. 입사하면 바로 동거하자고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기꺼이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의 할 일’을 떠올린다. ‘이그프리의 이해’, ‘균열의 현상과 사례’와 같은 기초 과목을 체크하며 책을 정리하던 그는 결코 두꺼울 일 없는 책―균열의 현상과 사례―이 묵직해졌음을 깨닫곤 고개를 기울였다.

“…? 이게 뭐지?”

유키껀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엄지손톱만 한 두께의 스프링 노트는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누렇게 빛이 바랜 그것은 표지도 없이 너덜거렸고 군데군데 닳고 헤진 자국도 많았다. 누가 보면 쓰레기라 오인할 정도로 볼품없는 것이었기에 버리려던 찰나, 왼쪽 하단에 적힌 반듯한 글자에 움직임이 멎는다.

 

스노하라 모모세

 

글자 옆은 펜 자국이 번져 지저분했다. 자신의 것이라기엔 기억에 없는 물건이다. 모모세는 의아해하며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료, 전화. 12/ 1 시,  쿠모  리국 옆   페   르베

 

얇은 펜으로 긁힌 듯이 난 글자는 언뜻언뜻 지워진 부분이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기껏 또렷한 글자는 ‘료’, ‘전화’가 끝이고 숫자 뒤의 글자는 추측하건대 ‘츠쿠모 관리국’으로 짐작된다. 료라면, 츠쿠모 료를 말하는 건가. 그는 츠쿠모 관리국장의 주선으로 친구가 된 그의 아들을 떠올렸다. 구멍이 난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하단에 그어진 글자에 눈을 떼지 못했다.

 

유키가 죽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글씨체다. 모모세는 눈썹을 찡그리며 뒷장으로 넘어갔다. 쓴 적 없는 것에 자신의 흔적이 가득하다. 어떤 페이지는 펜이 오래 눌린 듯 시커먼 잉크 자국이 남아있었고 모퉁이가 찢어져 있기도 했다. 종이가 통째로 뜯겨져 나가 책등에 붙은 접착제가 지저분하게 드러난 부분도 있었고 덧쓰고 덧쓴 탓에 심하게 두꺼워진 글자도 여럿이었다. 보이는 글자로 ‘퍼즐 맞추기’는 가능하니 심심풀이로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지만, 가로줄이 그어져 있다 해도 유키토가 죽었다는 말에 기분이 상해버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료’, ‘전화.’ 왜 료에 대해서 적혀있지. 무시하고 버리면 그만인 노트에 무심코 마음이 엮이고 만다. 머릿속을 장악한 비상벨이 요란하게 번쩍이자 모모세는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여보세…… ]

[ 료! 오랜만이야! 갑자기 미안한데,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을까? ]

[ 와~ 모모가 먼저 전화한 것도 모자라서 바로 만나자고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

필요에 의해 연락했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지 않나, 모모세는 료가 답한 문장에 실린 작은 비아냥을 눈치채곤 어색하게 웃었다.

[ 아하하,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

[ 아쉽게도 오늘은 일이 있어. 내일은 어때? 오후 11시에 이쪽 관리국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알지? 르베. ]

낯익은 단어에 모모세는 노트에 적힌 글자를 확인했다.

 

12/ 1 시, 쿠모 리국 옆 페 르베.

12/21 11시, 츠쿠모 관리국 옆 카페 르베.

 

노트에 지워져 있던 부분이 료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어색한 부분 없이 문장이 완성되자 모모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거, 설마 정말인 거야? 멍해진 탓에 말과 말 사이에 긴 공백이 생긴다.

[ …모모? ]

[ …아, 어. 미안! 응, 괜찮아. 내일 보자. ]

전화를 끊은 모모세는 곧장 읽을 수 있는 문자들을 정리했다.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문자만 해독한 그는 자신이 조합한 문장을 보곤 짧게 탄식했다.

 

내가, 24일, 있으면, 죽어, 옆에, 12월, 유키가

12월 24일 내가 옆에 있으면 유키가 죽어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일까. 아니,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목을 막아버릴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거린다. 공포로 점철된 불안이 전신을 휘감는다. 떨림과 함께 손발이 차갑게 식어갔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료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모모세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페에 앉아있던 모모세는 평소와 같은 밝은 표정으로 료에게 마주 손짓했다.

“한 아홉시인가~?”

“헤에, 꽤 오래 기다렸잖아.”

“그치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료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는 모모가 없어, 하며 돌아가기 일쑤였다. 때문에 모모세는 그와 잡은 약속엔 30분 정도 일찍 나왔지만, 오늘은 심한 불안감 때문에 두 시간이나 앞질러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아니고~ 잘 지내나 걱정이 되길래!”

“아하하, 날 걱정하는 거야? 나보단 네 쪽이 더 걱정인데.”

“취업 얘기라면 좀 봐줘. 돌아가면 공부할 테니까…”

모모세는 빨대로 컵 안을 휘저었다. 얼음이 부딪쳐 달그락거린다. 복숭아 조각이 동동 떠 있는 잔을 보던 료는 그와 똑같은 음료가 담긴 자기 잔에 빨대를 꽂았다.

“……저기, 료. 궁금한 게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물어봐야 좋을까. 노트의 존재에 대해 알려도 괜찮은 걸까. 막상 그와 마주하자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입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혹시 낙하산이 다시 필요하단 얘기?”

“그런 게 아니라~! 이그프리에 대한거야.”

모모세를 따라 잔 안을 휘적이던 료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그프리가, 사람한테 해를 끼칠 수 있어?”

“해를 끼친다고?”

“응. 넌 지금 츠쿠모 관리국 부국장이잖아. 그러니까 뭔가 더 아는 게 많지 않을까 싶어서…”

“설마 그럴 리가! 이그프리는 사람을 보호하는 시스템이야.”

사람이 이그프리에 해를 가한다면 가했지. 가느다란 눈동자가 위로 째지며 드러나자 모모세는 우물거리고 있던 복숭아 조각을 덜컥 삼켜버리고 말았다.

“케헥… …사람이 해를 가한다니.”

“이번 달만 해도 균열 신고가 5건 있었어.”

호시카게쪽 신고랑 합치면 총 다섯 건. 이상하지? 균열은 한 달에 두 번 일어나도 이상할 정도인데. 덕분에 보안팀 내에서 균열 보완 인력은 꿀 빠는 직종으로 유명했잖아. 능청스러운 말에 모모세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사람이 해를 가한다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사람이 어떤 영향을 끼쳐서 기계가 고장 나는 것 아니겠어? 애초에 물리적인 타격을 입지 않는 이그프리가 손상을 받았단 건 해커일 가능성도 높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해를 끼치면, 이쪽도 참 곤란하거든.”

관리국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료는 빨대로 각얼음 하나를 찔러대며 말을 이었다.

“벌써 이그프리를 해체하고 고리짝 시절 잠금장치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이대로 균열이 늘어나면 이그프리의 ‘절대 보안’의 명성이 깨지고 만다. 료는 집히지 않는 얼음을 포기하곤 크랜베리 하나를 건져 입에 물었다.

“그런데말야. 그 균열이 신고된 곳의 CCTV를 보니까, 누가 만진 직후에 꼭 그런 현상이 벌어졌더라.”

“우, 우와~ 신기하네! 그런 우연이!”

“그래, 우연! 오리카사 유키토가 손을 댄 곳에 균열이 생겼어. 다섯 건 전부! 너무나 멋진 우연이지!”

“으하하! 역시 우리 유키, 이그프리도 반해서 어쩔 줄을 몰랐나 보네!”

“피해가 생기면 우리도 지켜볼 수만은 없거든. 한 번 더 그러면 아버지는 이대로 유키를 삭제할 생각이야. 사업에 지장이 가는데 어쩌겠어.”

한껏 높은 텐션으로 받아치던 모모세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간다.

“…삭제?”

“죽인다고.”

료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모모세는 입을 다물었다. 죽인다고? 유키를? 노트에 적힌 글자가 떠오른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에 또 유키 근처에서 균열이 발생하면 아버지는 유키를 죽이려고 할 거야. 남들이 모르게 사고로 위장한다던가. 아마 테러 같은 게 아닐까~? 하지만 난 사람 죽이는 건 반대거든.”

자신은 없지만 그만두라고 설득해볼 테니 그렇게 화내지 마. 료는 주먹을 쥔 모모세의 손등을 두드렸다.

“뭐, 일단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야. 개발하는 게 끝나면 눈에 거슬리는 건물 몇 개를 없앨 거라고 했거든. 아마… 1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그런 게 가능해?”

료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능하지! 이그프리는 더욱 발전할 거야. 데이터에 주머니 같은 공간을 만들어서 무언갈 심고 숨기는 것도 가능해지지! 거기에 폭탄 파일을 숨겨서 펑~ ……아, 실례.”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료는 반쯤 남은 음료를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바깥에서 통화를 계속하는 그를 바라보던 모모세는 제 뺨을 찰싹였다. 정신 차려, 모모! 여기서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생각하자, 생각해. 료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키는 균열의 원인이라고 의심받는 중이고 이그프리의 존속을 위해 유키를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이겠다, 뭐 그런 내용인 거지? 이야기를 홀로 정리해가던 모모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집안을 구했다는 은인의 존재는 흐려지고 범죄자라는 인상이 짙어진다. 료가 설득해본다고는 했지만 고집불통에 독선적이기로 유명한 츠쿠모 관리국장이 그의 말을 들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모모세는 노트가 신경 쓰였다. 왜 여기에 유키가 죽는다고 적혀있는지, 왜 자기가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문득 노트 여기저기에 그려진 이그프리에 관한 데이터 수식어가 떠오른다. 균열 현상을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한 열쇠일까. 료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지자 충격은 선명해졌다.

“미안, 모모. 지금 들어가 봐야 해.”

“벌써?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전화를 끊고 돌아온 료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눈치 보듯 주변을 훑으며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모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 활짝 웃었다.

“다음에 또 보자. 여긴 내가 계산할 테니까! 친구에게 이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

일부러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갑을 열어 현금 몇 장을 꺼낸 그는 모모세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우연이 계속되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어. 네 애인이 또다시 우연에 말려들지 않도록 네가 잘 감시해.”

료가 내려놓은 현금 아래엔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아버지 비서가 여기에 있어.’ 모모세가 쪽지를 확인한 것을 본 료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모모세는 얼음이 녹아 묽어진 음료에 시선을 고정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기는 소름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비서란 사람이 여길 보고 있었나? 대화 내용이 들린 걸까. 두려움에 붙들려 오래도록 고민하던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카페 안을 살펴보았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아 감을 잡기 어려웠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람이 적었다면 위험한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띠링, 넋을 놓고 있던 모모세는 갑작스러운 래빗챗 알림음에 정신을 차리곤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 비서라는 사람이 미행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었는지 최대한 츠쿠모 관리국에서 멀어져 그 반대편에 있는 호시카게 관리국 근처로 넘어갔다.

[ 오늘 정시 퇴근이야. 같이 저녁 먹자. ]

“……유키.”

내가 네 옆에 있어도 될까. 복잡한 머릿속이 많은 것을 방해했다.

 

*

 

유키토와의 저녁 식사를 마친 모모세는 자연스레 그의 집에서 잠들었다.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으로 시작한 아침은 행복했지만 밀려오는 불안에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모모세는 유키토가 출근하고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그의 집에 붙어 있었다. 유키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노트에 적힌 것을 거짓이라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한 그는 유키토와의 저녁 식사도 미루고 집으로 돌아와 노트를 꺼냈다.

 

메이즈, 거점 패스 드 149SS9O13, ZE-920

프 램 기록, 반지

 

반지 아래로 짙게 그어진 밑줄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는 제 왼손을 의식했다. 반지라면 이 반지를 말하는 걸까. 글자가 조금 벗겨진 곳 위에 새 펜을 꺼내 덧칠한다. 깊게 패인 자국으로 보아하니 이미 여러 번 펜이 닿은 듯 했다.

 

반지 성 프 토콜

그 아래는 글씨가 여럿 겹쳐 읽을 수 없었다. 중요한 정보에 대한 내용일 거란 막연한 예감이 ‘반지’에 찍혀 떨어지질 않는다. ‘분석’을 위해서는 데이터를 활성화하여 정보를 열고 수식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해석하는 복잡한 작업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반 컴퓨터로는 불가능했다.

‘관리국에 있는 컴퓨터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텐데…’

…관리국에 있는 컴퓨터? 모모세는 바로 앞 페이지로 돌아갔다. ZE-920, 관리국 레벨의 기관에서 사용하는 고사양 컴퓨터 기종이다.

“……메이즈?”

메이즈가 이걸 갖고 있단 뜻인가? 뚜껑을 닫은 펜으로 노트 위를 몇 번 두드리던 그는 최근에 본 메이즈에 대한 기사를 기억해냈다.

메이즈는 이그프리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며 반(反) 이그프리 운동을 전개하는 해킹 집단이다. 그들은 이그프리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이그프리가 설치된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이그프리의 보호 아래에 건물 피해는 최소화되었고, 메이즈의 의도와 다르게 대중들은 이그프리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폭력적으로 활동하던 메이즈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세력을 넓히기 위해 조용히 지내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지만 메이즈가 나타나지 않은 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간다.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어딘가에서 어떤 모의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관리국은 경계를 멈추지 않고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노트에 적힌 단어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메이즈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휴대폰을 집어 든 모모세는 잠시 망설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라고 해서, 일단은 도쿄에 있다고만 알려져 있어요. 정확한 곳은 수사팀이 수색 중이고요.”

아마 메이즈는 수사팀에서 타마키가 담당일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에 모모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시카게 소속 이즈미 미츠키. 그는 모모세와 같은 대학 동아리 후배였다. 정보 고마워, 미츠키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메이즈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신 거에요?

“아, 그…! 옛날 사건에 대해 조사 중이야. 면~접 때! 물어보지 않을까 싶어서.”

“아! 맞아요,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면접장에서도 자주 물어보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언제든 전화주세요, 힘내시구요!”

그럴듯한 핑계를 믿어준 덕분에 응원까지 받아버린 모모세는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츠키에게 타마키의 연락처를 받아 메이즈에 대한 정보를 묻자니 같은 수사팀인 유키토에게 들킬까 봐 불안했다. 그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자기 선에서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수첩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홀로 50년은 너끈히 먹은 듯한 모양새에 누렇게 뜬 페이지 속엔 잡다한 이야기가 메모되어 있다. 빼곡하게 적힌 새카만 글자들을 다시금 넘겨가던 모모세는 숫자, 아니. 날짜가 적힌 페이지에서 멈췄다.

 

2021년 4월 5일 편의점 로티

 

…편의점 로티? 분명 저와 유키토가 사는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다. 번화가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어서 지금도 자주 애용하고 있었다. 이다음으로 적힌 글자들은 무어라 적혀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번져있었기에 가까스로 확인할 수 있는 단어만 모아 짜 맞췄다.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019년인 지금으로부터 2년 후 4월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폭탄’이라는 단어로 미루어보아 테러에 대한 내용으로 의심되었다.

료는 츠쿠모 관리국장이 유키를 죽이는 것을 막아보겠다고 했지만 특별한 일―균열―이 없다면 그의 말대로 ‘이그프리의 발전’이 진행된 후에나 벌어질 일이었다. 개발까지 걸리는 시기는 1년, 테러가 시작되는 시기는 2021년 4월. 모모세는 건물과 지명이 적힌 페이지를 끊임없이 넘기다 말곤 메모지를 꺼내 멀쩡한 글자들을 옮겨 적었다.

 

2021년 4월 5일 편의점 로티

2021년 4월 7일 중앙도서관

2021년 4월 8일 오쿠보 약국

2021년 4월 9일 카진 레스토랑

2021년 4월 10일 빵집 허니마리

2021년 4월 13일 카페 잭

2021년 4월 15일 유키

 

시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예 까맣게 칠해져 있거나 구멍이 뚫려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상호명이 적혀있어도 정확히 어떤 지역에 있는 것인지 불분명해 지도를 켜 상호명을 짜 맞췄다.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4월 15일은 ‘유키’라는 단어 외엔 읽을 수가 없었다.

2019년 12월 23일, 지금으로부터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노트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츠쿠모가 테러를 예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그프리가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수사팀 계열의 공부를 했다면 노트를 해독하는 일은 더 수월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휴대폰을 열었다. 래빗챗 옆에 띄워진 말풍선 글자가 16. 그중 열한 개는 유키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손가락 끝이 떨린다. 도저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유키는 죽어, 코를 누르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킨다.

그날 밤 9시, 모모세는 무작정 도쿄로 향했다. 유키토와 마주치면 그가 죽을 것 같아 겁이 났다. 추적도 불가능하도록 계좌와 휴대폰은 전부 없앴다. 반지와 현찰이 든 봉투가 담긴 작은 가방. 그것이 모모세가 가진 전부였다.

메이즈가 도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 가지고 무작정 나왔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모모세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두려웠다. 마치 다 알고 간다는 듯한,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에 긴장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12월 24일 내가 옆에 있으면 유키가 죽어

 

무시할 수 없는 문장. 내가 유키의 곁에 있으면 죽는다. 마음이 크게 휘청였다. 24일은 유키의 생일인데. 이그프리가 뭐라고. 균열이 나타나면 고치면 그만이잖아, 대체 왜 유키를 죽인다는 거야. 그깟 시스템 이상에 왜 사람을 죽이겠단 소리까지 하면서 나서는 거냐고. 앞으로의 발전.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는 이그프리. 그리고 테러. 생각을 곱씹어가던 모모세는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쿄 한복판에서 목 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린 그는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지나자 그리 크지 않는 규모의 공장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철근이 삐져나온 것으로 보아 폐기된 건물로 보였다. 주변에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두꺼운 패딩을 꼭 여민 그는 다 쓰러져가는 문짝을 조심스레 밀었다. 나사가 빠진 철문이 삐걱이며 그 틈을 벌린다. 육중한 소리도 잠시, 모모세는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암호.”

“…….”

목에 닿은 것이 서슬퍼런 나이프임을 자각하자 일순 호흡이 멎는다. 정말로 메이즈의 본거지인지, 자신은 어떻게 알고 당도한 것인지 의문이 몰려왔으나 당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이프와 멀어지는 일이었다. 모모세는 노트에서 암호와 같은 무언가가 적혀있진 않았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분명, 컴퓨터 기종 옆에 무어라 적혀있었는데. 틀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서 솟구친 자신감일까, 모모세는 눈을 휘며 웃었다.

“외우질 못해서 그러는데, 칼 좀 치워줄래?”

능청스레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페이지를 펼친다. 남자는 모모세가 들고 있는 수첩에 시선을 박은 채 나이프를 거두었다.

“……149SS9O13. 이왕이면 좀 더 쉽고 귀여운 쪽으로 하는 게 좋지 않아~?”

틀리면 큰일인데, 모모세의 시선이 남자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힐끗이곤 돌아온다. 속내와 달리 태연한 말투와 여유로운 표정에 남자는 모모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곧 들어오라 손짓했다. 암호가 맞았구나, 한 고비 넘겼다곤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안도감이 크진 않았다.

“토모카, 손님이야.”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에 검정색 마스크를 낀 남자는 모모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손님’이라면 암호를 알고 왔단 소린데. 토모카의 중얼거림에 모모세는 얼른 노트를 안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부탁이 있어.”

“부탁?”

“ZE-920, 여기에 있지?”

토모카는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그런데?”

“이 반지에 들어있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싶어.”

고작 반지 데이터를 돌릴 생각으로 손님이라니, 이곳에서 무엇이 거래되는지 모르는 것으로 보아 운 좋게 암호를 얻은 일반인이리라 생각한 남자는 숨김없이 비웃었다.

“이봐, 손님. 여기는 부탁을 하는 곳이 아니라 거래를 하는 곳이야.”

“물론 무상으로 빌리려는 건 아니야.”

값은 제대로 낼 테니까, 모모세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꼭 쥐었다.

*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공기가 좋지 못한 것이 피부로도 느껴졌다. 토모카를 따라 한참을 내려간 모모세는 자물쇠가 걸린 철문을 통과해 더욱 지하로 내려갔다. 이대로 돈만 다 털리고 납치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잠시, 머잖아 보이는 밝은 불빛에 이유 모를 안도를 느꼈다.

컴퓨터가 가득 들어있는 방은 겉보기와 달리 굉장히 깔끔했다. 창문이 없는 대신 공기청정기가 여럿 돌아가고 있었고 더 안쪽엔 주방 기구와 욕실과 침대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도드라지는 온도 차에 놀란 모모세는 애써 긴장감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반지는 어디에 놓으면 돼?”


토모카는 모모세가 내민 반지를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물음에 모모세는 어물거리며 답했다.

“…? 백화점에서.”

쯧, 또 가품인가. 토모카는 인상을 찡그리다 말곤 반지를 건네받았다. 혼다, 이거 읽어봐. 메인 컴퓨터를 만지던 금발 머리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진품이야?”

“몰라. 저 남자가 가져왔―”

“스노하라 모모세야.”

“…스노하라가 가져왔어.”

진품이다 가품이다, 오가는 말을 듣자 하니 이 브랜드가 그렇게 유명했던가 싶다.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산 건 아닌데. 모모세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눈을 굴렸다. 기계에 반지가 맞춰지자 컴퓨터는 무서운 기세로 돌아가며 스크린 위로 여러 문자를 죽 띄워냈다.

“반지에 남은 데이터 분량만 500년은 넘는 것 같은데.”

오롯이 남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강제로 증폭 시킨 흔적도 있고. 남자의 목소리엔 흥분이 가득했다. 시큰둥하던 토모카도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읽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데이터가 들어있는거야? 반지에 이그프리를 저장할 때 데이터 충돌은 없었는ㄷ……”

“그거야 이그프리는 ‘겉’에만 저장되니까. 분석하면 그 아래에 깔린 ‘속’을 파헤치게 되는 거고. 겉과 속은 뒤섞이지 않아, 모모세.”

그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겉과 속이 섞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용량을 견딜 수 있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턱을 괸 채 스크린을 바라보는 혼다의 눈빛엔 희열이 가득하다. ‘진짜’가 이렇게 어이없이 들어오다니, 그의 중얼거림에 토모카가 바짝 다가왔다.

“진짜라는 증거는?”

“말도 안 되는 용량. 그리고 시간에 대한 데이터들.”

토모카의 눈엔 안 보일 수도 있지만. 혼다는 몇몇 글자를 노트에 휘갈겨 적으며 토모카에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이그프리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어. 내 가설이 맞다면 메인 시스템과 비슷할 거야. 아니, 똑같은 걸지도 몰라.”

이걸 ‘역’으로 돌려서 관리국에 있는 메인 시스템에 삽입하면 데이터 충돌이 일어날 거야. 그럼 국장들이 가지고 있는 ‘키 카드’ 없이도 접근이 가능할 거고.

“안 돼,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데이터를 갖고 무슨 일을 벌인다는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깔끔한 편이거든? 그리고, 여길 봐. 락(Lock)이 걸려있어.”

문자를 띄우던 스크린 끝에 자물쇠 모양의 기호가 생긴다. 붉은색으로 깜빡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남자는 모모세에게 손짓했다.

“모모세, 반지에 손가락 대 봐.”

기계에 끼워진 반지는 엄청난 기세로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튕겨 나가거나 고장이라도 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잠시, 모모세가 손가락을 갖다 대자 잠잠해지더니 붉은색으로 깜빡이던 자물쇠가 녹색으로 변했다. 다시금 화면 가득히, 이번에는 모모세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수식들이 띄워졌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토모카는 모모세에게 반지를 빼라고 손짓했다.

노트에 적혀있던 반지에 대한 내용은 이거였을까? 어째서 여기에 저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고, 왜 이 사람들은 반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지?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를 물며 늘어진다.

“데이터를 읽는 건 우리가 도울 수 있겠는데, 시간은 꽤 걸릴 거야. 분석한 값은 그 반지에 든 데이터로 하고 싶은데. 어때?”

“혼다. 그걸 갖고 뭘 하려고.”

“증폭 흔적을 역추적해서 데이터를 늘리는 방법을 알아낼 거야. 그걸로… …음.”

혼다는 모모세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남은 얘긴 나중에 할까. 벌써 새벽 세 시야, 이만 자는 게 좋겠는데. 아,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그 반지를 훔쳐 갈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열쇠는 너고 네가 없으면 데이터 열람은 불가능하니까.”

혼다는 모모세의 어깨너머로 놓인 작은 방을 가리켰다.

“모모세, 너는 어디 가지 말고 저기서 자.”

“야, 왜 하필 우리 방에서―”

“침대가 하나 남는데 뭐 어때.”

혼다는 토모카의 어깨를 감싸며 가까이 붙더니 목소리를 확 낮췄다. 읽는 데만 해도 꽤 걸릴 거야. 못해도 6개월은 잡아야 한다고. 그때까지 우리는 저 ‘열쇠’가 어디 못 가게 감시해야 해, 알아? 섬뜩하게 빛나는 혼다의 눈동자에 토모카는 미간을 좁혔다. 혼다는 별다른 말 없이 곱게 방으로 들어가는 모모세의 뒷모습을 보며 아주 기뻐했다.

도쿄로 오자마자 잠도 자지 않고 메이즈를 찾았다. 그 탓에 지쳐있던 모모세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버렸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든 그를 내려다보던 혼다와 토모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참 ‘손님’ 운도 좋아, 안 그래? 혼다에 반해 토모카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

 

모모세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안개 속을 걸었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군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몽롱하다. 어느 정도 지나자 양옆으로 여러 개의 스크린이 떴다. 크고 작은 진홍색 삼각형이 그를 중심으로 맴돌았다. 주변을 살피자 시선이 닿는 족족 영상이 무음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영상이 동시에 열리고 재생된다. 영상 속 주인공은 모모세와 유키토였다.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울린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고 사라진다. 삼각형은 크기를 늘렸다 줄이고 빙글빙글 돌아가길 반복하며 허공을 떠다녔다.

“모모, 제발! 날 미치게 하지 마.”

“미안해, 유키. 이 시간에서 꺼내줄게.”

탄알이 날아와 왼쪽 가슴에 처박힌다. 느껴본 적 있는 고통. 아니, 몇 번이고 겪은 고통이다. 천천히 멀어지던 의식이 성큼 돌아온다. 통증에서 묻어나오는 피는 없다. 발치에 피로 범벅이 된 누군가의 시체가 걸려 휘청였다. 시체 너머에는 또 시체가, 또 그 너머에도, 또 그 너머에도. 끝도 없이 널브러진 시체들은 모두 같은 사람의 것이었다. 끝에 하얀 브릿지를 물들인 짙은 머리카락의 남자. 그는―

“…나…”

모모세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체들이 사라진다. 꼬이고 꼬인 실타래가 너저분하게 흩날린다. 공원이 보이고 백화점이 보인다. 폭발음과 비명, 익숙한 인물의 죽음이 보인다. 모모세는 직감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거쳤고 겪었던 경험의 파노라마임을. 무수한 시간을 죽고 죽어 돌아와 또 다른 세계를 살았던 ‘자신들’임을. 그 모든 것이, 오리카사 유키토. 그를 위함이었음을.

“…….”

잠에서 깨어난 모모세의 호흡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아무도 없는 방. 오후 네 시가 넘어간 시계. 조용한 공간에 살벌한 공기가 감돈다. 모모세는 표정을 잃은 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나는 몇 번째 모모일까. 왜 매번, 모든 것을 잊고 돌아오는 걸까. 거쳐 온 삶이 너무도 많아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이 꼬이고 섞여 깨질 듯한 두통이 목 언저리를 자극한다. 전부 다 기억하려고 하지 마. 가장 중요한 것만 생각해. 어떻게 하면 유키를 살릴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 모모.

“어이, 스노하라. 언제까지 자고 있…”

뭐야, 일어났냐. 토모카는 모모세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모모세는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누르며 그가 내민 물병을 건네받았다.

“…혼다는?”

“밖에 있어.”

차가운 물병을 목에 대고 문지른다. 정신은 돌아왔으나 의식이 또렷하진 못했다. 어떤 후유증에 취한 것처럼, 모모세는 한참 동안 넋을 빼다 밖으로 나왔다.

“혼다, 컴퓨터 좀 빌릴게.”

“…? 왜. 뭘 하려고.”

혼다가 예민하게 반응하자 모모세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지에 있는 데이터를 추출해서 이그프리 프로토콜을 짤 거야.”

너희들에게도 좋은 기회잖아?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던 혼다는 모모세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어제 본 그 사람이 맞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햇님 같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차갑고 검은 무언가를 잔뜩 집어 삼킨 짐승처럼 보였다. 그 침착하고 예리한 기운에 압도된 혼다는 잠깐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그프리 프로토콜을 짠다는 게 왜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는 거야?”

“해킹할 거잖아.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

“…….”

혼다는 텅 빈 진홍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떻게 알았지? 단순한 추측인가?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거나, 아니면 어제 토모카와의 대화가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경계심에 말을 돌린다.

“인터넷 연결은 끊어져 있어.”

“괜찮아, 여기에 있는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우리가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물음이 채 나가기도 전에 모모세는 혼다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토모카는 혼다에게 바짝 다가갔다.

“스노하라가 여기에 온 거,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잖아.”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혼다는 대답 없이 토모카를 바라보았다.

“왜 오래 봤던 사람처럼 눈에 익는 건지 모르겠어.”

“…사쿠라 하루키쪽 사람일 가능성은?”

“그랬으면 저걸 들고 우리한테 왔겠어?”

게다가, ‘그때’ 저런 애는 없었어. 토모카의 말에 혼다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우리가 메인 시스템 해킹을 연구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어, 그는 적잖이 동요했다.

“어제 네가 한 말이 들린 거 아니야?”

“들렸겠어? 네 뺨에 뽀뽀할 기세로 말한 건데.”

“일단 지켜봐.”

정말로 만들어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을 테니까. 토모카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혼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2020년 3월, 모모세는 완성시킨 이그프리 프로토콜을 반지에 저장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모모세는 혼다와 함께 데이터 증폭 기술을 완성했다. 메이즈의 지원도 한몫했지만 기본 바탕을 제안하고 설계한 건 모모세였다. 어째서 우리를 돕냐는 물음에 모모세는 뜻이 같기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이그프리를 해킹한다. 목표가 같다면 함께할 의사는 충분했다. 물론, 그다음의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물론 모모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있었다. 간혹 싸움을 걸기도 했지만 체력적으로 밀릴뿐더러 토모카와 혼다의 보호 때문에 도가 지나친 행동까진 하지 못했다. 모모세가 합류하고부터 데이터 수급량이 늘어나 10년 후에나 가능했을 작전이 앞당겨졌다. 두 사람이 모모세를 보호하는 근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모세는 노트를 토대로 비밀리에 반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데이터가 어떻게 열리고 조작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어 실험을 거듭한 끝에 사용법을 완전히 익혔다. 첫 번째 진주를 문지르면 반지 위로 작은 스크린이 뜨고 두 번째 진주를 문지르면 스크린이 꺼졌다. 조작 버튼이 허공에 생길 정도로 반지를 개량할 수 있었던 것은 낡은 노트의 활약이 컸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무수한 모모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 노트에 적힌 수식들은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21년 3월, 모모세는 반지에 저장한 자료를 ‘관리형’ 건물에 옮기는 작업에 성공했다. 타인의 눈에 걸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전송 시간을 최대한 줄였고 데이터를 옮기거나 삭제하고 복구하는 작업을 꾸준히 연습했다.

세상은 료의 말처럼 발전했다. ‘색깔 칩’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실체 없는 것으로 가득 호화로워졌다. 옷이나 장신구에 칩을 심어 무늬를 넣고 색깔과 향기 데이터를 삽입해 시들지 않는 꽃을 피워내 그 향과 빛깔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이그프리는 단순 보호 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나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모모세는 색깔 칩을 구매했다. 그가 구입한 칩에는 연두색 색상 코드 데이터만 들어있었는데, 연두색 칩을 해킹해서 분홍색을 입력하자 분홍색 칩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색상 코드 자체를 해킹해 삭제해본다. 칩은 색깔을 잃어 투명해지더니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투명한 칩에는 가벼운 자료 정도는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용량이 남았다.

여기에 폭탄 파일을 삽입한다면 시간에 맞는 테러도 가능할 것이다. 무수히 지나온 과거가 기억의 피안에서 꿈틀거린다. 이전보다는 빨리 알아차린 걸까,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불안이 심장을 쥐고 흔들어 압박감이 치솟았다. …아니,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괜찮아. 이번엔 될 거야. 언제까지고 같은 결말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 수십 수백의 혼잣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달랜다. 거듭된 위로는 심히 필사적이었다.

테러가 일어나기까지 앞으로 31일. 가지고 있던 기억과 엇비슷한 흐름에 저도 모르게 안도한다. 다른 간섭이 없다면 이그프리 해킹 작전 개시일은 무사히 4월 15일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

 

3월의 마지막 날. 모모세가 먼저 요코하마로 떠나겠다고 하자 토모카와 몇몇 메이즈 일원들은 반대했다. 해킹의 열쇠를 지닌 인물이 가장 먼저, 그것도 홀로 이곳을 떠난다. 그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작전 개시일은 15일이야. 지금부터 이동해서 태세를 정비하는 게 맞지만 모모세를 가장 먼저, 그것도 혼자 보낼 수는 없어.”

“그럼 뭐, 위치추적기라도 달아?”

모모세는 덤덤했다. 메이즈끼리 말을 주고받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무언갈 첨언하거나 표정을 구기지도 않았다.

“이게 그렇게 시끄러워질 일이야? 내가 따라가면 되잖아.”

혼다가 나서자 검정색 캡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우악스레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넌 여기 있어, 내가 따라갈 테니까.”

“케이, 넌 평소에 모모세한테 불만 많았잖아.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너를 붙여?”

따지는 듯한 어투에 적의 가득한 눈이 대답한다. 케이, 그는 내내 모모세를 달갑지 않게 여긴 인물로 뜬금없는 주먹질로 싸움을 곧잘 벌여왔다. 메이즈가 테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그였으니, 폭력적인 성격은 알만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후려칠 기세로 노려보는 통에 시끄러워질 것을 예감한 혼다는 하는 수 없이 그럼 셋이 가던가, 하며 얼버무리곤 고개를 돌렸다.

“4월 15일.”

“토모카?”

“4월 15일이 끝이야. 저 반지에 기록된 데이터에서 나온 정보 중에 ‘날짜’에 대한 부분.”

정확히는 2021년 4월 15일 오후 2시. 토모카는 팔짱을 낀 채 모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알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거.”

4월 15일까지 2주, 그때까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 모모세는 유키토를 지키기 위한 일임을 숨기곤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소란스러운 일은 없었으면 해.”

“…알고 있어.”

소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음에도 모모세는 뻔뻔한 낯으로 끄덕였다. 모모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테러’였다. 정확히는 츠쿠모가 유키토를 살해하기 위해 설치할 폭탄 파일을 꺼내 다른 건물로 옮기는 작업이었지만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란 부분에서 명백한 범죄 모의였다. 테러가 예고된 건물에 대한 정보는 이례적인 상황까지 전부 외워두었다. 외우려고 외운 것은 아니었다. 유키토가 없는 나날을 내내 노트만 보며 넘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반드시. 그런 단어가 빼곡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종잇장에 깃든 절규는 매일의 다짐을 단단하게 했다.

“잘못되면 죽을 각오도 하는 게 좋을 거야.”

토모카의 살벌한 허가를 끝으로 모모세는 혼다와 케이를 포함한 여덟 명과 묶여 요코하마로 떠났다. 가는 내내 아무 말도 섞지 않던 그는 옛날과 다를 바 없는 요코하마의 야경에 처음으로 입을 벌렸다. 유키랑 같은 곳에 있어, 모모세는 울음이 샐 것 같아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보고 싶어, 유키. 소리 없는 부름이 가슴에 소복이 쌓여갔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여덟이란 숫자는 적당히 분리되어 흩어졌다. 모모세에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혼다와 케이가 붙었다. 각 그룹은 관리국을 중심으로 근처에 있는 모텔에 방을 잡았고 혼다가 만든 핸디형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다.

모모세는 기록된 날짜가 가까워지기 전까지 매일 요코하마 일대를 돌아다니며 반지에 건물 이그프리를 스캔해 저장했다. 이렇게 해두면 건물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달라진 건물’ 즉 ‘츠쿠모가 손댄 건물’에 대해 바로 알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히 산책을 하는 이십 대 청년 정도로 보였을 테다. 물론, 혼다와 케이의 눈에도 그러했다.

 

2021년 4월 5일 편의점 로티

 

최초의 테러 일까지 앞으로 48시간가량 남았다.

 

*

 

4월 4일 밤 10시 30분, 모모세는 케이와 혼다가 자리를 비운 틈에 모텔을 빠져나왔다. 유키토의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모텔이었기에 편의점이 있는 골목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저만치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온다. 어깨에 힘이 없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야근이라도 한 걸까. 잔뜩 피곤해 보이는 애인의 표정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유키, 살 빠진 것 같아. 무너지는 가슴을 꽉 잡아 쥐자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 모모. 유키토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장 건물 뒤로 돌아가 반지를 작동시켰다.

 

[ Nuclear system 01. Loti 00:20 ]

 

편의점을 스캔한 자료에 선명한 붉은색 표식이 떠오른다. 츠쿠모가 심은 것으로 짐작되는 폭탄 파일은 예상대로 투명한 칩에 숨겨져 있었다. 약 1500여 개의 칩을 모아 만든 구멍으로 보이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반지에 담긴 데이터에 파일명과 확장자를 똑같이 설정해 눈속임용 파일을 만들었다. 츠쿠모가 설치한 파일과 자신이 만든 파일을 교환해 빈자리를 채워 틈을 메꾼다. 치밀한 작업은 그 어떤 균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모모세는 마지막으로 편의점 CCTV에 접속했다. 반지에 등록된 신체 정보를 데이터로 변환해 비교하여 자신과 같은 데이터를 전부 삭제한다. 이 모든 작업은 10분 만에 끝났다.

자, 그럼 이 파일을 어디로 옮기면 좋을까. 파일을 뺏었다고 해서 폭발을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4월 5일 12시 20분, 그것이 츠쿠모가 설정한 예정 시각이었으니, 폭발이 없는 편의점에 의문을 갖고 파일의 위치를 추적할 것이 뻔했다. 아쉽게도 폭탄 파일을 삭제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단순히 시간을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미루는 것이 전부였다. 모모세는 가장 가까운 건물로 달려가 이그프리를 해킹해 파일을 밀어 넣은 후 같은 방법으로 CCTV 자료를 삭제하고는 백화점과 편의점,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건물 전체에 전파 방해 데이터를 전송하며 자리를 떠났다. 전파 데이터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주변 건물의 이그프리를 교란 시켜 기록 없이 해를 끼쳤다. 츠쿠모가 알아차렸으리라 예상되던 그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백화점이 무너졌다.

 


 

“어서 와, 모모세.”

어디 갔다가 이제 들어와? 혼다는 창밖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저만치서 시뻘건 불길이 보인다. 폭발음에 놀라 깨어났는지 케이는 상당히 짜증 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시험해보고 싶다던 게 저거야?”

혼다는 제멋대로 뻗친 금색 머리칼을 훑어내며 물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케이는 작게 욕을 씹으며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분명 소란 피우지 말라고 토모카가 말했잖아. 우리 존재가 들키면 관리국은 보안을 강화할 거야. 그런 의미란 걸 왜 모르고―”

“혼다, 난 폭탄 같은 거 없어.”

모모세가 한숨까지 쉬며 말을 잇자 혼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아침에 얘기하자.”

혼다는 겉옷만 겨우 벗고 침대 위로 엎어지는 그를 보곤 혀를 찼다.

모모세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새하얀 백지가 된 상태로 그저 한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만 붙들었다. 앞으로 버텨야 할 하루를 세어보던 그는 무거워진 마음을 뭉개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모모세는 편의점에서 나오는 유키토를 쫓아가 손을 잡았다. 조심스레 깍지를 끼워보고 엄지로 손등을 매만지기도 했다. 하지만 길게 느낄 새도 없었다. 촉감도 온도도 없는 피부 결에 이 모든 것이 꿈이란 걸 자각한다. 유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어색하다. 정착할 곳을 잃고 헤매던 음색이 눈물을 머금는다. 모모세는 허상일 뿐인 연인을 끌어안았다. 꿈이라면 조금 더 행복해도 괜찮잖아, 서글픔에 호흡이 흔들린다.

 

*

 

어제 새벽 1시경, 카라쿠라 백화점…

…경찰은 이에 대한 대비로 관리국 수사팀…

 

“…시끄러워…”

모모세는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두 눈이 푹 꺼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통에 목 뒤가 뻐근하다. 소음을 뿜어내는 작은 기기를 쥐고 있는 케이의 표정엔 그를 괴롭히겠단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가장 가까운 은행의 이그프리를 우선으로 복구하여…

 

간밤의 일을 떠들어대는 뉴스는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둥 온갖 호들갑이 가득이다.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피해를 입은 인근 주민들의 울부짖음이 들렸지만 귀에 박히진 않았다. ‘유키를 구한다.’ 행위의 초점은 거기에 있었으니 다른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으나 세간에서는 테러리스트, 혹은 폭탄마로 불리게 되었다. 까마득한 옛날엔 이 명칭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무뎌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 모모세는 자신이 잔인하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감정이 비어버린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표정 없는 모모세를 경계하듯 바라보던 혼다는 간밤의 일을 묻지 않았다. 관리국이 이번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메이즈를 의심한다면 모모세를 내세워 시선을 돌리면 그만이었으니 몰아붙일 수고를 들일 필욘 없다고 판단했다.

편의점에 설치한 폭탄이 백화점에서 터졌으니 파일을 설치한 츠쿠모의 직원은 분명 잘렸겠지, 모모세는 혼다가 건네는 커피를 받으며 노트의 내용을 되새겼다. 츠쿠모가 어느 시점부터 심하게 경계하기 시작했는지 가늠해보던 그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새까만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꼭 제 속과 같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에 있던 조명의 불빛이 별이 되어 잔 위에 띄워졌다.

모모세는 오후 내내 다음 테러 예정지로 지목된 중앙도서관 근처에서 머물렀다. 반지엔 이미 저장한 정보였지만 해당 날짜의 하단에 적혀있던 ‘장소는 가변적’이라는 단어에 예민해진 탓이었다. 수많은 만약에를 그리며 하루종일 돌아다니던 그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서야 모텔로 돌아왔다. 혼다와 케이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2021년 4월 7일 중앙도서관

 

4월 7일 오후 9시. 아직 폭탄 파일이 깔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근처 카페에 몸을 숨겼다. 타겟이 될 예정인 도서관을 포함해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느라 좀처럼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후가 지나서야 도서관 건물에 붉은 점 두 개가 나타났다. 예상이 맞았음에 안도하며 반지를 꺼버린 그는 10여 분 정도 흐른 후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킹을 시도하기엔 보는 눈이 많은 낮 시간대였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청소 도구가 든 창고로 몸을 숨겼다. 편의점에서 했던 것과 같은 조작을 끝으로 무사히 폭탄 파일을 습득 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은행으로 옮겼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키토만 무사하면 됐다.

“…야, 저 새끼는 왜 자꾸 혼자 나대.”

케이는 폭발한 은행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토모카가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던 거 까먹었대? 분노에 찬 물음에 혼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떼어냈다. 왜 테러를 하는 걸까. 어떻게 이그프리를 해킹하고 폭탄을 설치했을까. 컴퓨터도 없이 어떻게 한 걸까. 모모세가 무언갈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과연 이그프리의 메인 시스템을 해킹한다는 목적은 공통된 것일까. 혼다는 후드를 뒤집어쓰곤 네모난 기기를 꺼냈다.

“……토모카.”

할 얘기가 있어.

 

*

 

“테러만 벌써 두 번째야. 용의자 신상 정도는 나올 법한 시기 아냐?”

케이의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모모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빛을 잃은 지 오래된 눈동자는 검은색 선글라스 아래에 숨겨진다.

“단독 행동만 두 번째야. 앞으로 세 번째도 있을 것 같은데.”

혼다의 날 선 목소리에 모모세는 눈동자를 굴렸다. 두 번이나 저질렀으니 츠쿠모도 방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눈치챘을 테고 이전에 테러를 일으켰던 전적이 있는 메이즈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생겼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 대신 사람 많은 데서 터뜨리고 얼굴 보이고 와.”

혼다는 메이즈를 지키기 위해, 아니. 메이즈를 갖기 위해 자신과 토모카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구구절절 토로하고 싶었지만 발설했다가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토모카도 마찬가지였기에 어금니를 물어 참아냈다.

“…나랑 케이는 의심받고 싶지 않거든. 그날을 위해서.”

“그날은 내게도 중요한 날이야.”

4월 15일. 모모세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았어. 얼굴 비추는 건 별일 아니니까 제대로 CCTV 보고 인사할게.”

유키, 화내겠지. 걱정하는 속과 달리 웃었다. 웃어야 한다. 못하겠다면 표정은 없는 편이 나았다. 혼다는 그의 뻔뻔한 반응에 맥이 풀려 이를 갈았다. 그래, 앞으로 조금 남았어, 며칠만 지나면 다 끝이야. 귀한 손님이라며 대접하던 때와 달리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하자 시선에 날이 섰다.

 

*

 

공원 입구에서 스물다섯 걸음 지나면 나오는 오른쪽 흰색 벤치 뒤. 색깔 칩으로 이루어진 나무는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이그프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작품이었다.

 

2021년 4월 8일 오쿠보 약국

 

모모세는 나무를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투명해진 부분엔 약국에서 얻은 폭탄 파일이 보기 좋게 삽입되어 있었다. 혼다의 말대로 CCTV는 지우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고 손도 흔들어주며 자신이 범인이란 걸 알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럼에도 마음을 풀지 못한 혼다는 모모세에게 한 번 더 테러를 지시했다. 폭탄 파일을 만들 줄 모르는 모모세는 츠쿠모의 파일이 필요했다.

 

2021년 4월 9일 카진 레스토랑

 

예정대로 레스토랑에서 파일을 추출한 모모세는 파일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진 못했다. 어쩌지, 시간은 멈춰뒀지만 금방 다시 움직일 텐데. 조작이 더해지려던 순간, 뒤에서 버티고 있던 케이가 모모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지금 해.”

“여긴 터뜨리지 않을 거야.”

“지금 하라고.”

너 지금 존나게 의심 받고 있는 상황이니까 하라면 해. 그동안 잘만 터뜨려놓곤 여긴 못하겠어? 왜?

 

[ Nuclear system 04. Kazin 14:00 ]

 

……역시 시간을 늦추는 쪽으로 바꿀까. 모모세는 상당히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케이의 얼굴을 훑었다. 츠쿠모의 실수인지 유키토의 변덕인지 식당엔 그가 없었다. 그러니 당장 터뜨려도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오오가미 반리. 그가 양복을 입은 몇몇 인물들과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반리는 유키토의 오랜 친구로, 모모세 또한 그를 좋아해서 곧잘 따랐다. 자기보다 반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며 질투하던 유키토가 떠오른다. 그를 달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던 일이 떠오르자 이가 맞물렸다.

“…안 돼.”

반 씨가 죽으면 난 절대 유키랑 행복할 수 없었어.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은 그에게 ‘반리를 죽였던 세계’를 상기시켰다. 당시엔 반지에 대한 연구가 완벽하게 끝나지 못해 조작이 어려웠기에 지금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늘리는 기능까지 사용하진 못했다. 자세한 정황은 흐릿하지만, 아무튼 그 세계의 모모세는 반리가 있는 레스토랑을 폭파했다. 당연히 반리가 있는 줄은 몰랐다. ‘테러반 수사팀 대표인 오오가미 반리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되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하고서야 알았다. 죄책감을 딛고 달렸던 그 세계에서는 랜드 마크 전망대로 갈 일 없이 유키토가 발포한 총에 맞아 죽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떠오른다. 엄한 상처 하나가 도드라져 속이 메스꺼웠다.

“지금 당장은 터뜨릴 수 없어.”

“뭘 못해? 해킹하면 되는 걸 모를 줄 알아?”

“그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야.”

케이와의 실랑이로 시간을 번 모모세는 반리와 일행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폭탄을 가동시켰다. 이제 됐어?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며 등을 돌리자 케이는 작게 욕을 씹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처음부터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점점 수상해지자 케이는 모모세를 죽이고 싶을 만큼 거슬려 했다.

 

*

 

“모모세는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모텔로 돌아온 케이의 말에 혼다는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죽이면 안 돼. 이 일에 연루된 건 우리뿐만이 아니야.”

그 폭탄 파일들, 모모세가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케이의 핀잔에 혼다는 조그맣게 개량된 무전기를 흔들었다.

“토모카도 모모세를 조사 중이었으니까.”

“…아, 그래. 조사 중이라니까 생각났어. 그 녀석, 관리국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 봐.”

수사팀 팀장, 그 인간이 나가고 난 다음에 폭탄을 터뜨렸어.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게 많았다고. 너도 알잖아, 오오가미 반리.

“…알아.”

메이즈는 관리국 부서 팀장과 임원들의 이름과 얼굴은 제대로 외운 상태였다. 그 오오가미 반리와 대치한 적이 있는 혼다는 바로 연상되는 그의 얼굴에 인상을 찌푸렸다.

“단순히 나간 후에 터뜨렸다고 몰아세우기엔 증거가 부족해.”

아무튼 토모카가 곧 이쪽으로 올 거야. 그럼 모모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그건 참 반가운 소리네.”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도쿄에 있는 토모카에게 꾸준히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로 요코하마로 오지 못했던 이유는 모모세가 가진 반지의 락(Lock)을 풀기 위한 연구 때문이었다.

“또 다음 테러는 어디로 하는지 지켜보자고.”

누가 있는 장소를 테러하는지, 누가 없는 장소를 테러하는지 네가 감시해봐. 피지컬로는 걔 못 이겨. 혼다는 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케이에게 건넸다.

“그래서 이걸로 찌르란 소린가?”

“위협 정도만 해. 죽으면 큰일이니까.”

그놈의 락만 없었어도. 케이는 입맛을 다시며 나이프를 챙겼다.

 


 

2021년 4월 10일 빵집 허니마리

 

“야, 너……”

모모세의 주변 일대는 공간과 공간이 부러진 것처럼 자잘한 파편이 휘몰아쳤다. 예정지인 빵집에서 새벽부터 밤 8시까지 머물렀으나 이그프리에 폭탄 파일이 저장되는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여기가 아니면 도대체 어디인데. 여러 개의 스크린이 반지를 벗어나 모모세의 주변으로 펼쳐진다.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며 한 번에 다 담기도 어려운 정보를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유키, 유키는 어디에 있는 거지.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반지는 건물 이그프리를 해킹해 실시간으로 촬영 되고 있는 CCTV 영상을 띄웠다. 골목과 골목을 지나고 유키토의 집을 지나 호시카게 관리국 근처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케이는 모모세가 누군가를 찾고 있음을 깨닫곤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네가 노리는 게 누구야, 모모세.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갈무리하기도 잠시, 이윽고 모든 스크린이 한 사람을 비춘다. 수십 개의 화면이 정신없이 꺼지고 또 새로운 화면이 켜진다. 모모세의 의식과 결합된 것 같은 움직임에 케이의 미간은 보기 흉할 정도로 깊게 패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더니만. 화면에 비친 곱상한 사내의 옷깃엔 관리국 소속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은색 뱃지가 붙어있었다. 관리국하고 연줄이 있는 게 맞네. 테러반 수사팀 대표 오오가미 반리. 그리고 저 남자. 케이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모모ㅅ……?”

케이가 붙잡을 새도 없이 모모세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유키토가 빵집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예정지인 빵집 허니마리가 아니라 다른 빵집이라는 것이었다.

빵집 건물 뒤로는 높은 돌담이 쌓여 있었다. 사람이 오갈 리 없는 곳을 확인한 그는 곧장 그쪽으로 들어가 벽면에 손을 대고 접속을 시도했다. 츠쿠모 쪽에서 손을 쓴 것인지 이전보다 두터워진 보안 시스템 때문에 해킹 속도가 더뎌지고 말았다. 조급한 마음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어가던 그는 짙은 붉은색의 균열을 띄워내고 말았다. 색이 점차 옅어지며 분홍빛으로 옅어질 즈음, 모모세는 무슨 짓을 해도 이 파일은 뜯어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정된 시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유키토의 얼굴이 보이는 스크린은 제 곁에 둔다. 남은 제한 시간을 한번, 유키토가 아직 가게에 있는지 한번 확인하던 그는 가만히 미소 짓는 연인의 모습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종이 가방에 샌드위치를 담고 떠나는 유키토의 뒷모습에 안도하며 작업을 거두었다. 앞으로 5분 후면 이곳은 폭발할 것이다. 모모세는 주변 건물에 전파 방해 데이터를 전송하며 자리를 떠났다.

 

*

 

“모모세, 어디가.”

“마지막이야.”

“동행하지.”

케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너. 호시카게에서 보낸 첩자지?”

“아니.”

“똑바로 말해.”

케이의 옆에서 유키토를 대놓고 수색했으니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연인을 살리기 위해 츠쿠모의 계략을 역이용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가는 유키토가 메이즈의 타겟이 될까 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이번 생도 의미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이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케이, 그런 식으로 몰아붙여서 무슨 이득이 있어.”

옆에서 감시해, 그 수사팀 사람들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니까. 혼다가 낮게 속삭이자 케이는 허, 하곤 입을 벌렸다.

“그리고, 감시할 거면 빨리 가.”

모모세는 이미 떠났으니까. 케이는 윽 소릴 내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케이가 모모세를 찾으러 나가자 혼다는 엄지손톱만 한 기기를 꺼내 매만지다 귀에 꽂았다.

“……어, 토모카.”

모모세는 케이가 감시 중이야. 이전의 모든 일은 토모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상태였다.

[ 그때 말한 ‘종이’는 어떻게 됐어? ]

[ 제대로 해석했고 프로그래밍도 끝났어. ]

조만간 요코하마로 넘어갈게. 토모카는 혼다의 무전을 받으며 온갖 수식이 적힌 낡은 종이를 매만졌다.

 

*

 

2021년 4월 13일 카페 잭

 

예정대로 카페 잭에 설치되어 있던 파일 덕분에 모모세는 유키토가 도착하기도 전에 제거에 성공했다. 하지만 파일의 용량이 굉장히 큰 탓에 일반 건물로는 옮길 수가 없었다. 더 크고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근방에서 가장 적합한 건축물은 코끼리코 공원의 다리였다. 다리의 기둥에 파일을 설치한 그는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반지를 작동시켜 유키토의 위치를 찾았다. 작은 스크린은 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유키토를 비추었다.

유키, 피곤해 보여. 지친 걸까, 안아주고 싶어… 유키토의 입술로 내려간 시선엔 슬픔이 녹아있었다.

“쥐새끼처럼 여기에 숨어 있었네.”

케이는 다짜고짜 모모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겁도 없이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모모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널 피하려고 숨은 건 아닌데.”

“오리타카인지 오리카사인지 그 인간이 근처에 있던데.”

케이는 모모세의 곁에 띄워진 스크린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너, 그놈하고 무슨 관계야. 물음에 모모세는 웃던 입을 다물었다.

“…알아서 뭐하게.”

“관리국하고 연줄이 있는 거면 지금 당장 여기서 손 떼고 꺼져.”

모모세는 유키토가 띄워진 화면을 닫았다. 감정이 흔들리자 뒷목부터 찌르르하니 당겨왔다. 기존에 품었던 아이 같은 미소는 거두어진 지 오래였다. 오랜 순환으로 새카만 그림자가 낀 눈동자는 기괴한 빛으로 번뜩였다.

“신뢰받고 싶으면 관리국의 개 하나쯤은 죽여야지.”

민간인 학살하는 정도로, 아니. 아니다. 그 정도 죽인 건 학살도 아니지. 케이는 키득이며 험악해진 모모세의 턱을 동물 대하듯 간질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모모세는 그의 손등을 세게 쳐냈다.

“그 인간 죽여봐, 죽이면 믿어줄 테니.”

“너희는 반지를 잃을 텐데?”

“네가 ‘정말로’ 해킹을 바란다면 ‘인력’도 필요하겠지. 너 혼자서 관리국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관리국을 상대로 혼자서는 무리였으니 메이즈를 찾아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고 되도록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용히 살아왔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모모세는 침묵했다.

“왜 대답을 안 해? 아, 칼이 없어? 그래서 죽이기 좀 힘든가?”

그는 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모모세에게 건넸다. 모모세는 케이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이프가 펼쳐져 날카로운 부분이 모모세의 손바닥을 찍는다. 이럴 줄 알았지, 피가 스며 나오는 중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반질거리는 손잡이 부분을 찾아 쥐었다.

“장난도 정도껏 해.”

“칼이 힘들면 테러에 휘말리게 유인하던지.”

봐봐, 이 다리 곧 무너지겠는데. 케이의 말에 모모세는 고개를 확 쳐들었다. 다리 위로 나타난 큼직한 사각형의 균열, 모모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그프리의 손상을 알리는 신호인 2단계 균열, 폭발까지는 길어봤자 2분 정도 남았을 테다. 보호 이그프리마저 깨졌으니 다리가 무너지면 파편이 사방으로 튈 가능성도 높았다. 이내 콘크리트 철근이 무너지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사방이 요란해지고 도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키는 아직 카페에 있겠지. 숨을 돌리려던 그는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키…?”

먼지를 일으키며 기울어대는 다리 아래로 뛰어가는 연인의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가지 마, 그쪽으로 가면 위험해. 입을 열기도 전에 케이의 손이 모모세의 어깨를 꽉 잡는다. 구하러 가기만 해봐. 마음 같아서는 나이프로 짜증 나는 면상을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기에 입술을 짓씹어가며 참아냈다.

“…네 소원대로 해줄 테니까 이거 놔.”

차가운 목소리가 성대를 날카롭게 긁어내린다. 케이는 모모세에게서 손을 뗀 후 뒤로 물러났다.

“유키!”

유키, 널 막는 방법은 역시 내가 나타나는 것 외엔 없겠지. 모모세의 외침에 유키토의 고개가 돌아간다. 은빛 머리카락. 흰색 브릿지. 눈 밑에 난 점과 곱상한 얼굴선.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던 이름을 입에 담자 가슴이 떨린다. 하늘에서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도 제가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달려오는 모습에 모모세는 무심코 기뻐하고 말았다. 유키, 나 여기에 있어.

“모모!”

―안 돼,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유키토가 달려오자 모모세는 재빨리 몸을 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좀 전의 상황에서 유키토를 돌아보게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목소리뿐이라는, 그런 자의식 넘치는 답안이 나온 것을 누굴 탓하랴. 유키토와 대면한다면 싸울 것임을 각오한 그는 얼굴빛을 바꾸었다.

폭발로 검어진 하늘을 갈라내며 쏟아진 물줄기가 머리와 어깨를 두드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 때 즈음, 뻗어나간 유키토의 손이 모모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붙잡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왜, 도망가는 거야.”

낙담한 듯한 말투에 모모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떠냈다. 불안해하는 유키토의 모습이,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테러 정말 네가 한 거야?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모모. 왜 나를 찾아오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키. 있는 대로 쏟아져 내리는 목소리에 모모세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유키토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진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을 바라보자 모모세 또한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지, 끼고 있었구나. 유키토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는 여전했다.

“아무튼 내가 네 무죄를 증명해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서…”

“테러는 내가 한 게 맞아.”

내가 한 거야, 유키. 강조하듯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충격에 휩싸였는지 얼이 빠진 유키토의 표정에 모모세는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니잖아. 협박 받는 거지? 너 말고도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둘 있었어. 그 자식들이……!”

유키토가 말을 맺기도 전에 모모세는 나이프를 꺼내 그의 목에 갖다 댔다. 그가 말하는 용의자 둘이란 분명 혼다와 케이일테다. 기껏 공원 CCTV에 대고 인사까지 했건만 정보가 샜단 사실을 케이가 듣기라도 한다면 제 입장은 보다 더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쿵쾅거리는 심음이 귀를 울릴 정도로 커진다.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며 웃어본다. 안도하기 위한 거센 발버둥이었다.

“……모모.”

“그러지 마, 유키.”

내가 목격자인 너를 죽여야 믿어줄 거야? 장난끼 없는 표정과 건조한 말투에 유키토의 눈동자가 커진다. 나이프의 끝이 유키토의 목에 맞닿는다. 이러다 정말로 찔리면 어떡하지, 겁을 먹은 것과 달리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나한테서 떨어져, 이만 돌아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낸다. 꼭 울어버릴 것처럼 표정을 구기던 유키토는 별안간 인상을 찡리며 모모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윽!?”

“1년 넘게 나를 방치해두고, 이제는 칼까지 들이대?”

널 어떻게 패버려야 내 화가 풀릴까. 유키토가 겉옷을 벗어 던지자 모모세는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화난 유키도 멋있어. 본능처럼 나갈 뻔한 말이 입안을 맴돈다. 지금 상황에선 할 수 없는 말이란 사실이 유감이었다. 빨간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매만지자 유키토는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물웅덩이 쪽으로 차버렸다.

“넌 변명이라도 해야 했어.”

“유키, 내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

유키토의 주먹이 복부로 파고들자 모모세는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났다. 얇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마른 바닥을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다. 있는 힘껏 자신을 비웃고 있는 케이의 존재에 모모세는 이를 갈며 코트를 내던지고 장갑을 고쳐 끼웠다. 쉴 새 없이 달려드는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그는 보란 듯이 몸을 틀어 유키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피한 유키토는 팔꿈치로 모모세의 옆구리를 찍어버린다. 둔탁한 마찰음도 잠시, 바닥을 짚어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운 그는 유키토의 등 뒤로 돌아갔다.

“오리카사씨―!!”

한 남자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가르고 퍼져나간다. 경찰로 보이는 인력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모모세는 잠시 틈이 생긴 유키토의 명치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헉……”

미안해, 유키. 정말 미안해. 모모세는 그가 바닥에 주저앉자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언제 온 건지 토모카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훤했기에 숨이 막혀왔다.

“…가서 얘기하지.”

모모세는 대꾸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텔로 돌아온 다음은 침묵만 이어졌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혼다는 손톱만 한 크기의 전자 기기를 만지고 있었고 케이는 모모세를 똑바로 보며 힘껏 이죽이고 있었다. 언젠간 저 면상에 칼을 그어야지, 모모세는 불쾌한 기색 없이 그런 생각을 흘려보냈다.

“반지의 권한은 나한테 넘겨.”

도쿄의 본거지에서 일련의 테러 사건을 분석한 토모카는 모모세가 반지에 대한 조작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키토와 맞춘 반지. 그걸 쉽게 넘길 수 있을 리가. 하물며 만일의 사태엔 그 반지로 유키토의 총을 조작해 자신을 쏘게 해야만 했으니 그에게 줄 수는… …잠깐만, 그동안 어떻게 했더라. 모모세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그프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반지가 필요하다. 유키토의 총을 조작하기 위해서도 반지가 필요하다. 노트의 마지막 장은 4월 15일 14시에 대한 기록이 끝이다. 혹시 방법이 적혀있는 페이지가 찢어져서 보지 못한 걸까. 완전하지 못한 기억이 원망스럽다.

토모카에게 권한을 넘겨서 해킹하도록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다 실패하면? 유키가, 날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고민이 늘어져 기다란 공백이 생기자 혼다는 모모세의 귀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

“뭘 그렇게 놀라. 무전기야.”

이틀 남았잖아. 그치? 모모세가 귀에 끼워진 무전기를 신경질적으로 빼내자 토모카는 품에서 낱장으로 된 낡은 종이를 모모세에게 건넸다.

“이거, 네가 쓴 거지?”

누리끼리하고 지저분한 종이는 분명 제 노트와 같은 재질이지만 읽은 적 없는 페이지였다.

 

두 겹의 링으로 이루어진 반지는 하나씩 분할할 수 있다.

하나의 링엔 ‘데이터’만 남고 또 다른 링엔 ‘조작 기능’만 남았다.

각각의 링은 역할을 분담한다.

 

가지고 있는 노트와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문장 아래엔 알아보기 쉽고 바로 적용하기 좋게 다듬어진 수식이 가득 달려있었다.

 

두 겹인 상태로는 ‘조작 링’이 ‘데이터 링’에 간섭해 락을 해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할한 이후엔 간섭에서 벗어나 락을 풀 수 있었고, 그 결과 타인도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다음으로는 ‘반지 분할’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모모세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도 이런 기록을 어디에 남겼는지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노트에 의존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다음을 기약하고 무수한 과거를 넘어왔다. 모모세는 떨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터 반지는 ‘이그프리 삭제’에 사용한다.

조작 반지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다.

 

“이걸 어디서……”

“네가 썼던 침대 밑에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맨 처음, 노트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을 땐 이렇게 멀쩡한 페이지는 아예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이 종잇장은 ‘처음부터’ 그 방 침대 밑에 있었단 말이 된다.

“네가 메이즈로 들어왔을 때 웬 낡은 노트를 보고 들어왔단 소리는 전해 들었어. 처음엔 아주 모르는 체 연기도 잘하더니 하루아침에 돌변하더군. 죄다 수상하다고 봤지.”

와중에 반지에 대한 정보까지 치밀하게 적어두고. 토모카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듯이 잡아챘다.

“거기 적혀있는 프로그램 설비는 우리가 끝냈어. 이제 네가 반지를 넘기고 락을 해제하기만 하면 돼.”

“…….”

토모카는 모모세가 썼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확신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종이를 보여줘 가며 몰아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지에 대한 연구는 조작을 체화한 시점에서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그다음이 있었을 줄이야, 모모세는 입을 다물어 표정을 굳혔다.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모세는 마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락은 해제할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작 링은 나한테 넘겨, 그러지 않으면 락은 절대로 풀어주지 않을 거니까. 락을 푸는 열쇠는 오로지 모모세의 신체 정보뿐이다.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너 이 새끼가―”

“보험이야. 날 지키기 위한 보험.”

봐, 너도 날 위협하고 있잖아. 토모카는 모모세의 멱살을 잡은 케이의 손을 뜯어냈다. 모모세가 필요하다. 저 반지가 필요하다. 데이터가 필요하다. 악을 쓰는 케이를 무시한 채, 토모카는 모모세의 조건을 수락했다.

분할에는 반나절 정도 걸렸다. 모모세는 반쪽이 되어 떨어져 나온 ‘조작 링’을 받아 시험한 후에도 락을 풀어주지 않았다. 풀면 날 죽이고 이 반지도 가져갈 거잖아, 뻔한 전개를 간파하자 어딘가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널 당장 죽일 생각은 없어, 모모세.”

우리 작전에 넌 아주 귀중한 미끼니까.

 

*

 

“…토모카, 와카바는?”

“예정대로 하고 있어.”

호시카게 관리국 소속 임원진 와카바는 메이즈의 ‘손님’이었다. 그는 메이즈를 도와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을 해킹해 그 권한을 ‘나눠 가지려고’ 했다. 해킹 집단인 메이즈가 무슨 돈이 있어 그런 슈퍼컴퓨터를 구비하고 죽어도 들키지 않을 공간에서 편안히 먹고 마시며 연구를 진행했을까, 튼튼한 조력자가 있는 게 당연했다.

새로운 관리국을 세워 메이즈와 이그프리를 공유한다. 그것이 호시카게의 와카바가 내민 제안이었다. 초기 메이즈는 호시카게 관리국의 전(前) 개발팀 팀장인 사쿠라 하루키가 비밀리에 만든 소규모 연구팀이었다. 그곳 소속이었던 토모카와 혼다는 우연히 하루키가 가지고 있던 ‘반지’의 존재와 무궁한 가능성을 알아버렸고, 탐욕에 넘어가 반(反) 이그프리 단체란 간판을 내걸어 메이즈를 뒤집었다. 굳이 이그프리에 반대한다는 간판을 사용한 것은 ‘이그프리의 삭제를 원한다’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하루키는 ‘이그프리를 해킹해 정복한다’는 속뜻을 알아차리곤 반지와 함께 잠적했다.

“모모세는 우리가 이그프리를 삭제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우린 ‘해킹’이라고 했지, 단 한 번도 ‘삭제’라고 말한 적은 없는걸. 혼다의 너스레에 토모카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그 미끼 역할이란 건 뭐야?”

“모모세를 랜드 마크 전망대로 보낼 거야.”

와카바가 그쪽으로 관리국 인력을 전부 모으겠다고 했어. 그러니 모모세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죽겠지. 일이 끝난 후엔 와카바가 모모세의 시체에서 반지를 가져올 거야. 그럼 온전한 하나를 가질 수 있을 거고.

“모모세는 거기서 오리카사 유키토와 대치할거야. 와카바가 그 남자도 공범이라고 몰아놨거든.”

“그런데 모모세는 그 오리카사랑 무슨 사이길래 계속 엮이는 거야. 설마 사귀어?”

“와카바의 말이 사실이라면.”

“……헤에.”

장난으로 한 소리였는데 정말이었네, 혼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작전 시작은 15일 오후 12시. 관리국 건물에 침입해 메인 시스템이 있는 문까지 가는 시간은 길게 잡아도 약 1시간. 국장들의 ‘키 카드’를 센싱할 패드에 ‘데이터 링’을 두면 해킹 작업이 가능하다.

“모모세는 12시 30분을 기점으로 랜드 마크 전망대에 도착해서 이목을 끌 거야.”

와카바의 정치질로 주력 인원은 다 바깥에 배치될 거지만 몇몇은 관리국에 남아있을 테니 조심하고. 토모카는 기대에 찬 눈으로 반쪽짜리 반지를 매만졌다.

 

*

 

2021년 4월 15일 유키

 

랜드 마크 타워 전망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모모세는 제 주변에 퍼지는 균열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한 붉은색. 녹색. 쨍한 분홍색에서 이번엔 노란색으로 울긋불긋하다. 멀리 돌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불안이 속을 잠식해 성공할 거란 확신이 들진 않았다. 반쪽이 된 반지를 검은 장갑 아래에 숨긴다. 내키지 않지만 메이즈의 성공을 빌어본다. 모모세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껏 마주치지 못했던 크기의 커다란 삼각형이 퍼지고 사라진다. 깨진 조각처럼 흩날리는 알록달록한 실선이 도형을 이루었다가 비틀리고 사라진다. 평소에 보이던 균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현상에 모모세는 오늘이 마지막임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 모모세. 위치는? ]

귓속에 든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혼다의 목소리에 모모세는 조용히 대답했다.

[ 랜드 마크 옆 건물 옥상. 곧 올라갈거야. 해킹이 성공하면 말해줘 ]

그래야 죽을지 살지도 정할 수 있을 테다.

전망대에 올라가자 온갖 기억이 한 데 뒤섞여 자라났다. 뿌리가 어디에 박힌 지도 모르는 이 기이한 줄기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뻗어갔다. 모모세가 이그프리를 삭제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유키토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해킹에 실패하면 데이터 충돌로 반지에 담긴 데이터가 전부 날아가면서 반지는 부서졌다. 반지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죽으면 시간은 되돌아갔다. 되돌린 시간만큼 반지도 데이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 …수사팀에서 해킹 중인걸 눈치챘어. ]

혼다의 무전이 끊어진다. 이는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는 지시와도 같았다. ―유키, 난 여기에 있어. 모모세를 중심으로 커다란 균열이 펼쳐진다. 전망대의 가장 높은 곳. 헬기의 착륙장으로 쓰이는 이곳은 끝이 되는 지점이었다.

달빛이 담긴 머리카락. 그 틈에 걸린 브릿지는 제 머리에 매달린 것과 같은 색이다. 고운 선을 그리는 눈매 아래로 물기 없는 처연함이 적신 눈동자에 모모세는 까슬거리는 입술을 이로 뜯어냈다. 구슬픈 비릿함이 입안에 퍼진다.

“…유키, 기억나? 옥상정원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것도 몇 번이나. 바람에 실려 오는 중얼거림을 듣고도 유키토는 대답 대신 권총을 들었다. 철컥, 익숙한 마찰음에 모모세는 안도했다.

“본부로 간 사람들은 뭐야?”

이번엔 모모세가 답하지 않는다. 진홍빛 눈동자는 총구와 유키토의 얼굴을 번갈아 훑다가 그의 등 뒤로 깔린 무장 경찰에게 넘어갔다.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이들은 아둔하게 생긴 이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올 거라는 거, 넌 알고 있었지?”

말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곁을 떠났는지.

[ 모모세, 해킹은 실패했어. ]

귓속에서 들려오는 혼다의 목소리에 모모세는 유키토의 물음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들렸어도 대답하지 않았으리라.

[ ……이유는? ]

[ 데이터 부족. ]

데이터가 부족하다. 모모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죽어야 성공할까. 왜 어째서 자꾸만 실패하는 걸까.

“대답해, 모모!”

[ 오리카사! 쏴! ]

“!”

누군가의 목소리에 유키토의 어깨가 들썩인다. 모모세는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다. 매번 저 사람이다. 머리에 든 것 없이 그저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길 좋아하는 얼굴. 자신이 일군 것이 아닌 부모의 재력으로 우위의 삶을 즐긴 피둥피둥한 몸뚱이는 제대로 각인되어 있었다. 저 사람이 죽이라고 부추긴 덕에 죽을 수 있었던 적도 많았지만, 언제나 달갑진 않았다.

“……유키.”

답지 않은 목소리가 새어나간다. …지쳤다. 이젠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나 같은 일만 반복하고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체념한 시선이 유키토의 손으로 향한다. 왼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의 존재가 서글퍼 북받쳐 오른 눈물이 목구멍을 막았다.

[ 오리카사! 네가 쏘지 않으면 이쪽에서 발포한다. ]

……반지. 너와 내가 영원하리라 약속했던 그 반지. 모모세는 죽을 각오를 씹으며 유키토에게 다가갔다. 유키토의 반지 옆에 녹색의 균열이 떠오른다.

[ 본부에 침입한 사람은 전부 검거했습니다, 반(反) 이그프리 해킹 집단 메이즈입니다. ]

유키토는 무전기에서 떠들어대는 목소리에 미간을 구겼다.

“메이즈라니. 너 대체…”

[ …잠깐만, 무전기… …신호가, 다른 데로… ]

[ …잘 안들… …어디에… ]

유키토의 무전기에서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노이즈가 잔뜩 끼어 지직거리고 시끄럽게 꼬이는 목소리와 함께 모모세의 반지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기세로 덜그럭거렸다.

“발포 준비해!”

경찰을 지휘하던 남자는 먹통이 된 무전기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소리 질렀다. 모모세는 유키토의 총부리가 제 가슴에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

“미안해, 유키.”

나 좀 죽여줘. 녹색 위로 돋아난 분홍색 삼각형이 유키토가 끼우고 있는 반지를 중심으로 떠오른다. 방아쇠 위에 얹어진 손가락은 총기의 차가운 감촉마저 잊고 굳어져 갔다.

“……나 포기 안 할게.”

너랑 평생, 행복하게 사랑하고 싶어.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 코앞에 버티고 있다. 모모세는 유키토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전하는 온도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유키토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각이 된 균열이 수갑처럼 손목에 채워진다. 두 다리가 바닥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모모, 지금 무슨 짓……”

“다시 만나, 유키.”

타앙―

사나운 총성이 시작도 못 한 이야기를 끊어낸다. 잘려나간 반동으로 모모세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유키토의 손등을 감쌌던, 손가락 위를 누르던 압박감이 멀어진다. 모모세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붉은 꽃송이는 옥상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물결의 형태로 넘실거렸다.

절망을 아는 눈동자가 설득력 잃은 희망을 붙잡은 채 얇은 눈꺼풀에 닫혀 사라진다. 즉사는, 매 세계마다 해피엔딩이었다.

 

 

Parallelogram|

 

 

숨이 끊어지며 사라진 고통은 무(無)에 닿았다 돌아온다. 어느덧 몸을 받치고 있는 것은 차가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푹신한 이불이었다. 축축하고 뜨끈한 것이 빠져나간 구멍은 흔적을 지웠지만 통증은 여전히 남아 가슴에 맴돌았다. …꿈? 아니, 꿈이 아니야. 모모세는 곁에서 자고 있는 연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해, 유키. 정말 미안해. 완전히 잠에 빠진 연인은 무어라 웅얼거리기만 할 뿐, 깨어나진 않았다.

―다시 시작이다. 모모세는 눈을 감은 채 유키토의 품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체취에 안도하기도 잠시, 문득 자신이 기억을 잃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음을 자각하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째서 기억이 남아있지? 몽롱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던 그는 이곳이 유키토의 침실이 아닌 자신의 침실임을 자각했다. 항상 유키 집에서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반지 사러 갔고. 또 다른 옛날이 되어버린 아까를 되새기던 그는 제 왼쪽 손가락에 끼워진 온전한 모양의 반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오늘이 며칠이지? 침대 위를 더듬는 손이 분주하다.

 

[ 2019년 12월 23일. 유키 생일♥ D-1 ]

 

“왜……”

휴대폰 액정에 띄워진 날짜와 디데이 알림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시작 지점인 2019년 12월 20일이 아니라 2019년 12월 23일에 이전 세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깨어났다. 늘 겪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모모세는 크게 동요했다. 침착해, 침착해 모모. 천천히 생각하는 거야.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을 주워 입었다.

“……어디가.”

“앗, 유키. 깼어?”

부스스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유키토의 목소리에 모모세는 얼른 그의 옆으로 가 누웠다.

“추워서 옷 좀 입으러!”

“이리와.”

유키토가 눈을 감은 상태로 팔을 벌리자 모모세는 얼른 안겼다. 유키토의 향기와 체온, 나른한 목소리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유키, 너랑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방해하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어.

“…유키.”

“응.”

“미안해.”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네 품에 안겨서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미안해. 매번 혼자 남겨둬서 미안해. 이 시간에서 꺼내주지 못해 미안해. 유키토는 모모세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 금방 다시 잠들었다. 연인의 숨결이 일정한 박자로 피부 위를 두드리는 감촉이 포근해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간다. 딱 5분만 더 안겨 있다가 노트부터 찾아보자. 10분만 더. 조금만. 조금만 더. 어리광을 이기지 못하고 노곤해진 몸은 오랜만의 안식에 붙잡혀 의식을 놓치고 말았다.

모모세는 유키토가 출근하자마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바로 이전 세계의 기억이 남아있는 상태라지만 자신이 만든 작업물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기억할 리는 만무했다.

메이즈 암호는 외우지도 못했는데… 도쿄에 있는 메이즈의 거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암호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이 이상 출발을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모세는 하는 수 없이 노트 찾는 일은 포기하고 무작정 도쿄로 향했다.

 

12월 24일 내가 옆에 있으면 유키가 죽어

 

소름 끼치는 팻말은 뇌리에 정확히 각인되어 그를 서두르게 했다.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재촉하며 뛰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어느덧 해가 떨어진 바깥엔 쌀쌀한 공기가 가득했지만 모모세의 몸은 열이 올라 뜨끈했다.

쉬지 않고 움직여 메이즈에 도달한 모모세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를 배회했다. 다 부서진 건물 외관은 철근 구조물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모양새였다. 기분 탓일까, 이전에 봤던 메이즈의 외관보다 더 낡고 허름해 보인다. 역시 그냥 오는 게 아니었나, 노트의 부재로 불안에 떠밀린 그는 입구를 서성거리다 몸을 숨기길 반복했다.

“누구십니까?”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깜짝 놀라 헉 소릴 내뱉은 그는 등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눌한 발음의 일본어. 까만 밤에도 빛나는 금발의 머리카락과 높은 콧날에 날렵한 얼굴선과 또렷한 이목구비는 꼭 어느 나라의 왕족 같은 인상이었다. 외국인인가? 모모세는 허공으로 비켜나간 눈동자를 그에게 되돌렸다.

“아, 하하… 그냥 산책.”

“What? 이런 곳에서 말입니까?”

아, 말을 잘못 골랐나. 메이즈에서 본 적 없으니 일반인이라 짐작하고 대답한 탓에 어설픈 변명이 쏟아졌다.

“궁금하잖아. 아무리 외곽이고 사람이 없는 곳이라지만 왜 이런 공장을 철거도 안 한 상태로 버려놨는지.”

꼭 괴물이라도 나올 것처럼 생겼고, 심령 스팟으로 유명해져서 남겨둔 거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데… 대비 없이 맞닥뜨린 상황에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말이 나가버려 입꼬리가 떨렸다.

“Yes! 그 말대로입니다.”

역시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철거를 못 한 걸까, 하고 덧붙이려던 말이 쏙 들어간다. 푸른 눈동자가 진홍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자 모모세의 머릿속엔 수많은 물음표가 이어졌다. 괴물이 나온다고? 여기서? 혹시 케이 같은 놈들이 날뛰기라도 했나. 그래서 소문이 났다던가. 아니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긴장감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코코나 한정판 굿즈를 샀다가 머리채를 잡혔습니다! 난 공금에 손을 댄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

코코나? 굿즈? 이게 무슨 소리야. 무어라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 모모세를 향한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건 내가 열심히 모은 돈으로 산 굿즈란 말입니다! 나의 돈, My money! 아름다운 나의 머리를 잡아 뜯다니, 미츠키는 아주 무서운 괴물 입니… …Ohhhhh!!”

“여기서 뭘 노닥거리는 거야, 나기! 내가 괴물이… …?”

“미츠키?”

“모모씨?!”

나기는 미츠키에게 꼬집힌 손등을 문지르며 모모세와 미츠키를 번갈아 보았다. 미츠키, 아는 사람입니까? 서로의 얼굴에 당혹감을 표한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못했다.

“미츠키~?”

“…아, 어. 아는 사람이야. 정확히는 대학 선배지만…”

나기가 답변을 재촉하듯 소곤거리자 미츠키는 조용히 대꾸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미츠키가 여기에. 이즈미 미츠키, 그는 호시카게 관리국 소속… …일 테다. 이전 세계에서 그에게 메이즈의 거점에 대한 정보를 들었던 일을 떠올린 모모세는 느닷없는 전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의 메이즈는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하하, 오랜만에 뵙네요. 무슨 일로 도쿄까지 오셨어요?”

복잡한 생각을 가르고 들어온 물음에 모모세는 얼른 웃었다.

“너도 관리국 다니면서 바쁠 텐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연차 썼어요. 이 친구랑 할 일이 있어ㅅ…”

…모모씨, 그 반지 어디서 났어요? 시선이 모모세의 손에 멈춰버린 미츠키는 저도 모르게 물음을 건넸다. 이 반지에 대해 알아? 반문하자 두 사람분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진다. 반지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은 토모카와 혼다, 즉 메이즈 구성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였다. 그런 정보를 미츠키와 나기가 알고 있단 부분에서 모모세는 이들과 메이즈가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나는 이 반지 안에 들어있는 게 필요해서 찾아온 거야.”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말과 말 사이를 띄우자 뒤늦게 너무 섣불리 판단했나 하는 후회가 이어졌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나? 반지를 낀 손이 둥글게 말려 들어간다.

“모모씨, 안에서 얘기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어?”

걱정과 다른 반응에 모모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메이즈는 어떻게 된 걸까. 나기와 미츠키를 따라 공장으로 들어가던 모모세는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의문 덩어리에 집착했다. 미츠키가 회사에 연차를 썼단 소리는 여전히 호시카게 관리국 소속이란 의미고, 나기는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왜 메이즈의 거점에 이들이 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즈는 잡힌 거야?”

꼬리를 물던 의문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나온다. 모모세의 목소리에 미츠키와 나기는 걸음을 멈추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직 관리국에 다니고 있으면서 메이즈의 거점에 들어가는 미츠키의 정체는 뭘까. 혹시 스파이? 아플 정도로 머리를 굴려가며 층계를 밟아 내려간 그는 얼기설기 꼬여있는 파이프 아래에 숨겨진 버튼을 누르는 나기의 뒤를 따랐다. 전자음과 함께 공장 안쪽의 문이 열린다. 또다시 나타난 계단을 내려가 비밀번호가 걸린 다른 문을 열자 이전에 지냈던 메이즈와 거의 흡사한 내부 구조가 드러난다. 모모세는 빠르게 눈을 굴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아는 얼굴이라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 관리국 사람들이야?”

“그건 아니에요.”

“앗, 미츠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네, 리쿠. 잘 지냈어?”

붉은 머리의 사내가 품에 서류 파일을 끌어안은 채 달려온다. 테가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던 그는 미츠키의 곁에 서 있는 모모세를 보곤 멈칫하더니 가볍게 목례했다.

“…소고는?”

“요즘 개발팀 업무가 심해서 시간 내기가 힘든가 봐. 텐이 눈치를 챈 것 같다고 행동도 조심스럽고.”

“텐 형……”

형한테 거짓말하는 거 역시 좀 힘들어. 그 마음 이해해, 이오리도 모르고 있는걸. 모모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에 한 발짝 물러났다.

“모모, 긴장할 것 전혀 없습니다.”

“아, 어… 고마워.”

혹시 여기가 메이즈야? 질문이 많은 분이로군요. 나기는 눈을 접어 웃었다.

“Yes, ‘진짜’ 메이즈입니다.”

‘진짜’라고? 나기가 붙인 수식어에 모모세는 눈만 끔벅였다. 그럼 이전에 있던 메이즈는 가짜였다는 소리인가? 점점 복잡해져가는 상황에 크고 작은 물음표가 한가득 쌓여갔다.

“손님이네요?”

하얀 연구복을 입은 사내가 가까이 다가온다. 얼핏 봐도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밝은 밀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그는 모모세를 위아래로 훑더니 나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기 전엔 이쪽에 연락을 먼저 주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로쿠야 씨.”

“Oh, 나츠메 씨. 나 혼자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에 나기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구석으로 이동했다. 뭐 하는 거예요, 이것 놔요. 미나미의 핀잔에 나기는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닥였다.

“그의 왼손을 잘 보십시오.”

링 두 개가 붙은 반지. 흑진주 장식. 미나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건 그냥 가품이잖아요. 아니요, 저건 진짜입니다. 미나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모모는 반지에 대해 전부 알고 여길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반지에 대해 알고 왔다는 소리에 미나미는 고개를 기울였다. 반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소수인 데다가 이 장소는 관계자 외엔 아무도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사쿠라 씨 불러올게요.”

“Thanks! 부탁합니다.”

썩 내켜 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미나미는 모모세를 힐끗 바라보곤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지 못했던 모모세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메이즈이지만 자신이 알던 메이즈가 아니다. 짙은 긴장으로 귓가에 심음이 퍼졌다.

머잖아 잔뜩 피로해 보이는 남자가 헬쓱한 낯을 하고 나왔다. 제멋대로 뻗친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그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모모세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얼른 꾸벅였다.

“스노하라 모모세라고 합니다.”

“사쿠라 하루키야.”

사쿠라 하루키. …사쿠라 하루키? 아, 맞아. 뉴스에서 봤어. 호시카게 관리국 개발팀 대표였던 초창기 관리국 창립 멤버.

“갑자기 미안한데, 반지 좀 볼 수 있을까?”

분명 강물에 던져버렸는데. 조용히 덧붙는 말에 모모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강물에 던졌다고? 모모세가 건넨 반지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사내는 기뻐하는 것인지 절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건 어디서 찾았어?”

“백화점에서 샀어요.”

…아마도요. 이번 세계에서는 없는 기억이지만 그동안 반지는 항상 백화점에서 돈을 주고 구매했다. 미나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가장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물어봐야 좋을지 모르겠네…”

“그럼 제가 먼저 물어도 될까요?”

응, 괜찮아. 모모세는 가장 큰 의문 하나를 뱉어냈다.

“제가 아는 메이즈는 테러를 일삼고 이그프리를 해킹하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나기는 이곳이 ‘진짜’ 메이즈라고 했어요.”

토모카랑 혼다는 어떻게 된 거죠? 딸려 나오는 이름에 공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토모카랑 혼다요…?”

리쿠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자 나기의 목소리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테러하지 않습니다!”

“모모씨가 말하는 메이즈는 전에 있던 메이즈에 대한 얘기니까 진정해, 나기.”

“Yes… …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소중한 메이즈의 이름이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먹칠 되었습니다, 정말로 슬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예요?”

분석을 위한 준비를 마친 미나미는 몸을 돌려 모모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냐니, 그야 그 사람들이 메이즈니까. 모모세는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단 사실이 답답했다.

“이전에 있던 테러 사건에 그 둘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해서 알고 있어요.”

이곳이 ‘진짜’ 메이즈라는 말. 그리고 ‘우리는 테러 하지 않았다’는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토모카와 혼다는 메이즈의 이름을 갖고 테러를 일으킨 인물들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정황을 포착하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의 대답임을 모를 리 없었던 미나미는 구겨진 표정을 도무지 풀어내질 못했다.

“…그럼, 나머지는 내가 설명할게.”

“―사쿠라 씨.”

만류하듯 부르는 미나미에게 하루키는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하루키는 만약 모모세가 어떤 꿍꿍이를 갖고 이곳에 온 거라면 굳이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짚어가며 말하진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 둘은 내가 호시카게 관리국에서 일할 때 만든 소규모 연구팀 ‘메이즈’의 멤버였어. 이그프리의 개발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 토모카와 혼다는 뒤에서 몰래 이쪽 데이터와 연구 결과를 츠쿠모에게 팔아 이익을 챙겼고, 어떻게 안 건지 반지의 존재를 눈치채곤 협박하기 시작했고.”

그 협박이 바로 테러야. 토모카랑 혼다는 이그프리가 걸린 건물에 폭탄을 설치했지. 보호 시스템 덕분에 건물은 무사했지만, 폭발 당시 충격에 휩쓸려 다친 사람이 정말 많았어. 무고한 시민들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주면서 나에겐 반지를 내놓으라고 협박했어.

모모세가 말한 테러 부분에 대해 가볍게 짚어낸 그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내렸다.

“그래서 나는 싸움의 원흉이 되는 반지를 없애려고 했어. 부수려고 해도 부서지지 않았고, 불에 지져도 손상은 없었어. 그래서 강물에 던져버렸지.”

그렇게 되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대로 잠적하려고 했고. 그럼 의미 없는 테러도 멈출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기와 미나미가 날 붙잡았어. 당신의 오랜 꿈을 남들 손에 빼앗기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Egfri(Entire Growth For Resonable Implementation), 난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는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하지만 누군가에게 욕망으로 사로잡힌 이그프리는 더 이상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었지. 반지가 없어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이그프리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야.

“…그래서 돌아왔어. 돌아와서 메이즈를 정돈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힘을 빌려 기존의 잔당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팀을 꾸려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거점을 옮긴 거고.”

여기 있는 사람들 외엔 내가 잠적한 줄 알고 있어. 그들은 지금의 메이즈가 ‘사쿠라 하루키의 뜻을 잇기 위해 모였다’ 정도로만 알고 있지. 숨어서 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답답해도 차라리 이게 나았어. 내가 있단 걸 알아차리면 토모카랑 혼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되도록 조용히 지냈고.

“우리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메인 시스템에 충돌시켜 이그프리를 삭제 할 거야.”

이그프리는 결국 ‘그 소년’의 말대로 고통(Grief)이 되었거든. 약속을 지켰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루키는 후회 가득한 얼굴로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하루키가 나기와 미나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잠적했다면 이 메이즈에 있는 사람은 토모카와 혼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하루키에게 협박하고 무력을 일삼았던 것이 이그프리에 반대하는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척’을 하고 이그프리를 해킹해 ‘정복’하려고 한 무리였다는 부연 설명에 모모세는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거지?’

당연히 이그프리를 삭제하기 위해 움직인 집단이라고 여겼건만 가로채려고 했었다니. 의미 없는 회귀라고 절감한 순간 나락으로 끌려간다. 결국 내가 이용당한 거였어, 열이 올라 벌겋게 변한 모모세를 바라보던 나기는 자세를 낮춰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모모,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돕고 싶습니다.”

당신이 우리와 같은 적을 두고 있는 거라면 말입니다. 눈시울이 붉어져 글썽거리는 눈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푸른 위로에 모모세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물기가 걸린 목소리는 몇 번의 기침 끝에 겨우 또렷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삭제할 수 있을까요.”

“그 반지 덕분에 가능성은 올라갔어.”

비록 절반뿐이지만. 하루키는 절망에 신음하는 모모세에게 들리지 않는 사과를 담아냈다. 이그프리로 배를 채우려는 관리국. 이그프리를 빼앗으려고 했던 토모카와 혼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실행되고 있을지 모르는 온갖 음모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근본이 되는 이그프리를 삭제하는 것이 평화를 부르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미나미는 하루키가 건넨 모모세의 반지를 기계에 끼웠다. 컴퓨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온갖 데이터 수식들로 가득 찬 화면을 띄웠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모모세는 락(Lock)에 이르러 자물쇠 모양의 기호가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곤 손을 뻗었다. 하루키는 모모세에게 반지에 손을 대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행동하는 그를 보곤 하려던 말을 삼켰다.

잠금이 풀리자 눈이 아플 정도로 온갖 문자와 수식어가 화면에 휘날린다. 끊임없는 그것들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는 이는 미나미와 하루키였다.

“미나미, 어떨 것 같아?”

“기록에 있는 증폭 자료만 역추적하면 데이터는 더 늘릴 수 있을 거예요. 정제하는 건 역시 시간문제고. 사용은 바로 가능해요.”

모모세 씨가 반지의 ‘열쇠’가 되었으니까. 미나미는 스크린에 쏟아지는 글자들 중 몇몇을 종이에 휘갈겼다. 하루키가 화면에 무언갈 입력하자 수식은 빠른 속도로 스크롤 되더니 가장 마지막에서 멈췄다.

 

2021/4/15 14:00

 

“이건 무슨 뜻이지…?”

“마지막 날이겠지.”

미나미의 혼잣말에 답하는 하루키의 말에 모모세는 긍정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이전에 토모카가 강조했던 날짜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이 날짜가 데이터의 마지막 기록이었기에 성공 여부를 떠나 기한이 지나면 반지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 행동했다. 하지만 모모세의 머릿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정의는 이전에 거쳐 온 삶에서 묻어난 본능에 기반한 것과 같았다. ‘반지에 셋팅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죽으면 회귀할 수 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서둘렀던 것이 아닐까.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입술이 뭉개진다.

“단순한 숫자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위험 부담이 클 거라고 봐.”

“시간이 지나면 반지 안에 있는 데이터가 전부 사라진다거나…?”

“그럴 수도 있고.”

리쿠가 흘려보내듯 추측한 말에 하루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미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기회를 그냥 놓쳐서는 안 된다. 그의 손에 쥐어진 펜은 쉴 새 없이 까딱였다.

“…일단은 프로그램을 짜는 게 먼저예요.”

2021년까진 앞으로 1년 정도 남았어요. 미나미는 그사이에 여러 장이 된 종이를 하루키에게 넘겼다.

“그동안 우리가 모은 데이터와 반지에 든 데이터를 합칠 프로그램을 거기 적힌 수식을 토대로 설계할 거예요. 충돌 없이 삽입한 후에 증폭을 유도할 거고 또 지속적으로 데이터는 취합해가면서 성공 가능성을 높일 거에요.”

메인 시스템에 들어갈 프로토콜에 대한 신호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요. 미나미의 말에 모모세는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메인 시스템에 들어갈 프로토콜은 직접 짜본 적 있어.”

신호에 대해 연구하는 건 금방 끝날 거야, 그건 내가 할게. 아주 정확한 수식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번, 아니. 수십번도 더 넘게 해온 작업이었기에 금방 떠오를 거란 괜한 자신이 있었다.

회의 아닌 회의가 끝나자 리쿠는 모모세를 빈방으로 안내했다. 창문 없이 공기청정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공간엔 전과 다른 어떤 편안함이 자리했다. 모모세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 앉아 오늘 하루 만에 일어난 일들을 정리했다. 갑작스레 들이 부어진 정보의 양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침착하게 되짚어보았지만, 토모카와 혼다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흐름이 끊겼다.

그동안 이그프리를 지키는 자와 부수는 자의 싸움이라 생각했던 것에 오류가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나만 보고 달린 탓이다. 그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한 탓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던가. 속에서 온갖 말소리가 뒤엉켰다.

지금의 토모카와 혼다의 머릿속엔 스노하라 모모세라는 존재는 없다. 그 사실을 천천히 곱씹으며 가까스로 현재에 초점을 맞췄다. 거칠어진 감정을 갈고 또 갈았다. 분을 삭이기 위해 눈을 감고 누워버린 그는 짜야 할 수식에 대해 억지로 떠올렸다.

‘메인 시스템에 들어갈 프로토콜을 먼저 만들고 그다음엔 료가 말했던 색깔 칩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간단한 실험을 했지. 프로토콜이 완성된 이후엔 반지에 대해 파악했고.’ 생각이 깊어갈수록 범람하던 감정이 서서히 잦아든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소모한 체력이 많았기 때문일까, 모모세는 계획하던 것에 마침표를 채 찍기도 전에 잠들고 말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모모세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유난이었다. 스스로를 빼곡한 일정에 가두고 잠도 줄여가며 연구하는 모습에 괜히 미나미까지 열의가 올랐다. 모모세는 기억나는 수식어만 먼저 대입해 프로토콜을 만들었고 비어버리거나 오류가 생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루키와 미나미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미나미는 반지 안에 든 데이터의 양을 측정한 후 메이즈가 모아둔 데이터를 전부 옮겨 넣었다. 특별한 충돌 없이 데이터가 무사히 옮겨지자 다음엔 증폭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파일을 복제해서 늘리거나 자체 파일에 실린 하위 항목을 분할하는 등, 데이터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적용한 덕분에 기존 데이터의 5배가 넘는 양을 얻어냈다.

“모모,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미나미의 노트를 참고하며 반지 조작법에 대한 수식을 써내려가던 모모세는 나기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그 반지에 대해 알고 왔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하루키에게 ‘이번에야말로’ 삭제할 수 있냐고 물었어요. 프로토콜에 대한 건도 그렇고요.

“혹시 이전에 삭제를 시도한 경험이 있는 겁니까?”

모모세는 잠깐 망설이다 짧게 답했다.

“해본 적 있어. 매번 실패했고.”

“하지만 그런 뉴스나 소식은 접한 적이 없습니다.”

“그치? 아하하, 어쩌면 내가 그냥 꿈을 꾼 걸지도!”

“What…?”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단 표정에 모모세는 웃으며 나기의 어깨를 토닥였다.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도 그가 믿으면 믿는 대로,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대로 곤란한 것은 자신이었다. 회귀 사실을 누군가에게 발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발설했다가 이대로 회귀가 끝나버리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영화를 너무 본 탓이라고 치부했지만 불안해질 일은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쪽이 안전했다.

모모세는 나기를 향해 미나미의 노트를 흔들었다. 나기, 이거 봤어? 명백히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였다.

 

*

 

모모세는 잠들기 전엔 항상 유키토를 생각했다. 손에 끼워진 약속의 표식을 오래도록 보고 있다 눈을 감으면 꼭 그가 꿈에 와줄 것만 같았다. 유키토에게 받은 것, 유키토와 나눈 것을 생각하자 손가락이 귀에 박힌 붉은 귀걸이로 움직인다. 차갑고 동그란 것을 천천히 매만지던 그는 옛일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었다.

모모세가 귀를 뚫게 된 것은 날카로운 것에 약한 유키토를 격려하기 위해 그가 제멋대로 저지른 사고였다. 두려움으로 얼룩진 손으로 천천히 힘을 주던 유키토에게 ‘한 번에 콱! 하는 게 안 아프니까!’했던 제 목소리가 생생하다. 손을 덜덜 떨면서 느릿하게 누르니 정말 아팠지만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역시 유키는 대단해! 못하는 게 없잖아! 하나도 안 아팠어, 정말이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답하는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안아주던 유키토는 피가 맺힌 귀에 대고 열 번도 넘게 고백했다. 모모, 정말 좋아해. 나도 좋아해, 유키. 항상 그러려니 주고받던 고백 때문에 정확히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키와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웠고 잠자리를 갖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모모세는 아직 날카로운 귀걸이의 끝을 엄지로 눌렀다. 살점을 파고들어 작은 핏방울을 맺히게 하는 그것은 유키토의 사랑을 느끼게 했다. 조금만 기다려, 유키. 정말 좋아해. 보고 싶어. 모모세는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

 

2021년 3월의 마지막 날, 모모세는 요코하마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정된 ‘결전의 날’은 4월 15일 오후 12시였으니 지금부터 위치를 옮겨 상황을 보겠다는 의도라면 꽤 적합한 시기였다. 특별히 서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지는 계속 모모세의 손에 끼워진 상태였고 메이즈는 모모세가 요코하마로 떠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나기랑 리쿠가 같이 가는 건 어때?”

나도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왕래하긴 좀 힘들었으니까 셋이 거기에 있으면 조금 편해질 것 같아. 미츠키의 제안에 하루키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모모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뢰받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신뢰받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 뻔할 테니 좋은 마음으로 이그프리 삭제를 계획하고 있는 이들과는 언젠간 갈라서게 될지도 몰랐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지만 이렇게 자각할 때면 착잡함에 입안이 쓰게 변했다.

4월 1일 저녁 7시, 모모세는 나기와 리쿠와 함께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공간에 유키토와 함께하는 자신을 대입했다. 유키,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반복되는 외침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지낼 곳은 어디로 할까요?”

“번화가는 역시 위험합니다.”

리쿠와 나기의 말에 모모세는 괜찮은 곳을 알고 있다며 이전에 혼다와 케이와 지냈던 모텔로 향했다. 그들이 떠오를만한 장소에서 머무는 것은 역시 꺼림칙 했지만, 익숙한 동선을 위해서는 이쪽이 최적이었다.

미나미가 건네준 이어커프형의 무전기를 끼운 리쿠는 모텔의 위치를 암호화하여 전달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엿들을지 모른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무전 신호를 잡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에 만전을 기울이는 탓에 중요한 단어를 말할 적엔 꼭 암호를 사용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모모세는 곧바로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피로함이 어깨를 누르고 달려든다. 뻣뻣해진 근육은 멍이 든 것처럼 얼얼해서 두드리고 싶었지만, 손이 올라가질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쉬겠다고 엎어졌다가 잠들어버린 모모세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덧 4월 2일이다. 4월 2일, 날짜를 바라보던 그는 테러가 일어났던 날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2021년 4월 5일 편의점 로티

2021년 4월 7일 중앙도서관

2021년 4월 8일 오쿠보 약국

2021년 4월 9일 카진 레스토랑

2021년 4월 10일 빵집 허니마리

2021년 4월 13일 카페 잭

2021년 4월 15일 유키

 

처음부터 많은 것이 달라져 있던 세계였다. 어쩌면 이번 세계엔 테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괜한 희망이 돋아났다. ‘유키가 아무 일도 겪지 않고 무사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미 모모세를 잃는 ‘아무 일’을 겪은 유키토는 다른 의미로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꿈과 같은 소리는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았다. 지금은 최악을 상정하고 그에 맞게 대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색깔 칩이 상용화되고 정착한 지금, 시간상으로는 츠쿠모가 테러를 준비하기에 알맞은 시기였다. 난데없는 불안은 모모세를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겨운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일대에 있는 모든 건물의 이그프리 정보를 스캔해 저장했다. 산책이라 칭하며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려버린 거리를 스캔하고 또 스캔했다. 수상한 파일이 보이면 뽑아내 보고, 사용하기 좋은 파일은 복제해서 분석해두었다.

마음이 앞선 탓일까, 지나칠 정도로 힘이 들어간 상태로 돌아다니다 보니 숙소로 도착하면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2021년 4월 5일 편의점 로티

 

질릴 만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어찌하랴, 모모세는 4일 밤 열 한시에 모텔을 나섰다. 열 두시쯤 되면 나타났을 유키토가 이미 편의점 안에 있다. 서둘러 건물 뒤로 들어가 몸을 숨긴 그는 곧바로 반지를 켜 빌딩 내부에 숨겨진 폭탄 파일을 꺼냈다. 없어야 마음 편할 것이 이제는 보여야 편안하다. 여기에 없으면 또 어디에 있는 거냐며 역정을 냈던 아찔한 과거가 아직도 선명했으니, 이제는 마음이 놓일 적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감사까지 하게 되었다.

폭탄 파일을 무사히 뜯어냈음에 안도하며 번화가로 나온 그는 카라쿠라 백화점에 꺼낸 파일을 설치했다. 이전에 해본 곳이니 손쉽게 삽입 경로를 파악했고 파일을 밀어 넣은 후엔 CCTV 자료까지 완벽하게 삭제했다. 모모세는 혹시 모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주변 일대의 이그프리에 전파 방해 데이터를 전송하며 유키토의 뒤를 밟았고, 그가 백화점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도달했음을 확인하고서야 모텔로 돌아왔다.

콰앙!

방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폭발음에 깜짝 놀라 어깨가 들썩인다. 원래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모모세는 먹먹해진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밖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다 깼는지 리쿠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만 내밀고 소리쳤다. 나기는 상당히 불쾌한 낯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뿌옇게 올라오는 연기와 시뻘건 불길로 혼잡했다.

“…아무래도 들킨 모양입니다.”

나기는 토모카와 혼다에게 하루키의 존재를 들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모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더 얹는다 해도 거짓말 외엔 할 말이 없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모텔 내에 있던 작은 TV는 간밤의 사건에 대한 뉴스를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백화점 주변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려 쑥대밭이 되었고 파편이 튀어 찌그러진 집과 우는 피해자들의 모습에 리쿠는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나기 말대로 정말 혼다와 토모카라면…”

리쿠의 입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이름에 의문 하나가 돋아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어… 츠쿠모 관리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츠쿠모에 있다고…?”

“저도 그냥 들은 얘기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관리국 사이에서 이그프리 소유권 문제로 종종 싸운대요. 일반인들은 모를 거예요.”

츠쿠모가 이그프리를 독점하려고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고 치면 정황이 딱 맞아떨어지거든요. 하루키씨를 위협하려고 터뜨린 테러 사건의 범인도 그 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뒤집어쓰고 끝나서 범죄자 신분인 것도 아니고요. 아마 츠쿠모랑은 이그프리의 지분을 나누네 어쩌네 했을걸요. 아, 물론 이것들 다 미츠키가 가져와 준 정보에요. 모모세는 나기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츠쿠모.”

마음 같아서는 츠쿠모를 부수고 싶었다. 호시카게도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해를 가한 곳은 츠쿠모 였으니까. 물론 자신의 후원자인 츠쿠모 국장과의 거래는 끝난 것이 아니었지만, 그깟 거래 따윈 엿이나 먹으라는 심보가 먼저였다.

“하루키에게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은 전해두었습니다. 당분간은 저희도 몸을 사리는 편이 좋겠군요.”

“일단 나랑 모모씨는 나기처럼 얼굴이 알려진 게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나기는 하루키씨랑 연관된 것도 많고 호시카게 개발팀 출신이니까 제일 위험해, 그러니까 특히 더 조심하고. 리쿠의 말에 나기는 조용히 웃었다.

“Yes, 내 걱정은 마십시오. 문제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나기는 아직 커피에 입도 대지 않고 바라보기만 할 뿐인 모모세가 테러의 충격으로 상심에 빠져있는 줄 알고 걱정했다. 하지만 모모세는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모든 테러를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

 

2021년 4월 7일 중앙도서관

 

모모세는 중앙도서관에 설치된 폭탄 파일이 좀처럼 꺼내지질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이전 세계에서 되던 것이 되질 않자 문득 츠쿠모로 들어갔다는 혼다와 토모카가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 두 사람이 테러 작업에 붙어―그럴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만들어낸 알고리즘이 적용된 것이라면 파악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 뻔했다. 모모세는 파일의 경로를 바꿔보거나 신호를 재조합하는 등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전부 실패했다. 한 번 더 시도할 시간은 있었지만, 그것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작업인 줄은 알고 있었기에 포기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 Nuclear system 02. Library 13:01 ]

 

그는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시간을 조작해 폭발 예정 시각을 한 시간 후로 미루었다. 하지만 설정을 완료하고도 모모세는 초조함을 놓지 못했다. 테러에 대해 경계하고 걱정하던 나기와 리쿠의 얼굴이 떠오른다. 참 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의’ 자신이 했을 법한 행동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의 자신이 뒤섞이지 못한 부유물처럼 느껴졌다.

모모세는 폭탄 파일에서 흘러나오는 디지털 신호를 추출해 백업하고는 그 위로 정크 파일을 얹어 엉성하게나마 이그프리를 흉내 낸 장막을 덧씌웠다. 이렇게 하면 해킹된 내부는 폭발할 것이고 해킹되지 않은 외부는 장막에 감싸여 어느 정도의 피해는 줄어든다. 해본 적 없는 작업이었기에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유키토를 만났을 때 그의 곁에 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서관은 지체한 시각에 맞게 폭파했다. 추가한 장막이 무사히 기능한 덕분에 피해자 수는 이전보다 적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유키토도 무사했다.

모모세는 안도했다. 그 안도감이 어색해 속이 꼬였다. 잘못된 공간에 있는 것만 같은 이질적인 감각에 잡아먹히자 헛구역질이 났다. 유키,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꽉 쥔 두 손은 눈물을 대신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던 그는 곧장 모텔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해가 다 지고 난 다음에야 걸음을 옮긴다. 저녁 내내 무전을 꺼놓고 돌아다닌 탓에 크게 걱정하고 있던 나기는 그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도했다.

“걱정했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리쿠가 당신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지금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하겠습니다. 나기는 환하게 웃으며 리쿠에게 무전을 보냈다.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는 이가 존재하는 세계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적응하기 힘든 다정함은 역으로 칼날이 되어 가슴을 그었다. 체온은 통증이 되어 아픔을 뿜는다. 말라버린 죄의식 위로 양심이 미끄러진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던 나기는 덤덤한 모모세의 표정에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너무 걱정 마, 아무 일 없었어. 미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모모, 말에 ‘괜찮다’가 없습니다.’

듣고 싶은 말이 빠져있다. 하지만 대답을 요구하기엔 위태로워 보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2021년 4월 8일 오쿠보 약국

전날 백업한 디지털 신호를 분석한 덕분에 무사히 약국에 있는 폭탄 파일을 꺼낸 모모세는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예정대로 색깔 칩으로 만들어진 나무에 폭탄 파일을 옮겨 심고 나오면 끝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 모모씨.”

이런 곳에서 뭐 하고 계세요? 누군가의 부름에 놀란 모모세는 반사적으로 반지를 꺼버렸다.

“아… 답답해서 산책하고 있어.”

“저…”

모모세와 마주한 미츠키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 회사에서 유키씨를 만났어요.”

모모씨가 실종 상태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두 분이 당연히 연락하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왜 유키씨한테는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거에요? 모모세는 반지에 들어간 폭탄 파일이 신경 쓰이는 와중에 들린 유키토에 대한 이야기에 미츠키의 어깨를 잡았다.

“유키한테 내 얘기했어!?”

“이, 일단은 안 했어요…”

과도한 반응이었다. 높아진 목소리에 놀란 미츠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모모세와 눈을 맞췄다. 겁을 먹은 듯한 얼굴에 모모세는 그제서야―억지로 끌어내린 티가 나는―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하지 마, 부탁이야.”

유키가 알면 안 돼, 알았지? 아… 알았어요. 강하게 압박하는 손아귀의 힘에 미츠키는 괜한 식은땀을 흘렸다. 연인에게라면 메이즈에 대한 내용까진 말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떠난다는 말 정도는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침울해 보이던 유키토의 얼굴이 떠오르자 모모세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혀 밑에서 깔짝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미츠키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겨우 소리를 실었다.

“저, 모모 씨……”

……? 이게 무슨 소리예요? 틱, 티딕, 틱. 모모세의 반지에서 묘한 스파크가 튀더니 발치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아까 몇 분 정도 남았었지, 이대로 가다간 반지째로 폭탄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모세는 공원 쪽으로 내달렸다.

“모모 씨!?”

분명 반지에서 뭐가 튀었어, 어깨를 잡힌 탓에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던 미츠키는 반사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반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모모씨는 괜찮은 걸까? 그런데 지금 뭘 할 생각인 거지? 의문은 그를 달리게 했다.

모모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눈에 익은 나무에 손을 댔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미츠키에게 돌아가라 손짓했지만,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그는 모모세의 이름을 불러댈 뿐이었다.

변수. 예외. 이것들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터지기 마련이다. 노트에 적힌 그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크게 당황한 모모세는 다급히 반지를 켜 스크린을 띄웠다.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어…”

그는 나무를 구성하는 색깔 칩에 폭탄 파일을 쑤셔 넣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뒤인 60분을 폭발 예정 시각으로 셋팅하려고 했다.

“모모 씨! 반지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코앞까지 달려온 미츠키에게 놀란 모모세는 반지 위에 뜬 스크린에 0을 적기도 전에 활성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재조작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밀려버린 시간은 더 뒤로 향하지 못했다. 모모세는 자신이 한 실수에 애먼 남을 탓했다. 그토록 아끼고 예뻐하던 후배가 이제는 장애물로 보였다.

모모세는 언제나 공원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엔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 유키와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끝낼 수 있길 바랐건만. 어떻게든 정체를 밝히게 만드는 상황이 꼭 ‘테러리스트임을 알리지 않으면 이다음은 없다’는 경고문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앞으로 6분. 6분 안에 미츠키를 보내야 돼, 이대로 가다간 전파 방해도 쓰지 못하고 끝날 거야.’

모모세는 나무를 만지던 손을 거두곤 완전히 가까워진 미츠키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윽!? 모모 씨, 이게 무슨 짓……!”

“쉿. 이러지 않으면 너도 공범으로 몰려.”

모모세는 반지를 낀 손을 공원 나무에 갖다 댔다. 한 손으로 장막에 대한 설치가 진행된다. 4분. 초조함에 입술이 말라갔다. 모모세의 악력에 짓눌려 비척거리던 미츠키는 낮게 신음했다.

“모, 모모씨. 설명을 좀……”

“내가 놔주면 바로 관리국으로 도망쳐.”

“아, 알았어요.”

2분, 설치 완료 창이 뜨자 모모세는 빠르게 반지를 껐다.

“뛰어.”

모모세가 힘을 풀자 미츠키는 몸을 옆으로 굴려 빠져나갔다. 그는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뜨린 미츠키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CCTV를 향해 손짓하더니 일부러 그의 뒤를 쫓았다. 공원 CCTV에 찍힌 모습은 마치 자신의 정체를 알아버린 일반인을 살해하기 위해 뒤쫓는 테러리스트 그 자체였다.

미츠키가 무사히 시야 밖으로 사라진 후, 모모세는 밭은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바람결에 실려 등 뒤로 닿아오는 폭발음과 새카만 연기가 뜨겁다. 겨우 숨을 돌린 그는 모텔까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CCTV를 삭제하며 전파 방해 신호를 내보내 일대의 이그프리를 전부 교란시켰다.

모텔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모모세는 이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3시경, 고로 공원 일대에…

 

“또 테러로군요.”

“너무 잦은데… 정말 하루키씨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게 아닐까.”

아, 설마 모모씨 공원 근처를 산책하셨어요? 리쿠의 순진한 눈망울에 모모세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응, 거기서 산책했어.”

“다치진 않았습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습니다. 눈썹이 아래로 내려간 나기의 어깨를 도닥이는 모모세의 손짓은 밝았다.

“무사해, 놀라서 그런 거야.”

“다행이에요.”

이제는 거짓말도 익숙하구나. 혀가 아릴 정도로 입안이 쓰다.

“미츠키…? Yes, 모모는 여기에 있습니다. 무전기 말입니까?”

Ok. 지금 전하겠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무전을 끈 나기는 귀를 가리키는 제스쳐를 보였다.

“미츠키의 연락입니다, 무전을 켜달라고 합니다.”

“아, 응. 지금 할게.”

귀에 걸린 무전기를 만지자 곧장 신호가 들어온다. 모모씨, 박히는 음성엔 원망이 실려있었다.

[ 설명해주세요. 왜 공원을 테러하신건지. ]

[ 나중에. ]

모모세는 나기와 리쿠의 눈길에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나기와 같이 있지, 그러니 어떤 말도 편하게 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미츠키는 짧은 한숨을 내뱉곤 무전을 이었다.

[ ……퇴근하고 그쪽으로 갈 테니 제대로 말씀해주셔야 해요. ]

약간의 간격을 띄우고 나온 미츠키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무전이 끊기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몸 안을 배회하고 있던 죄의 혈흔이 펄떡거린다.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을 자각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자극으로 와닿았다.

 

*

 

미츠키는 모텔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모모세를 기다렸다. 시간에 맞게 카페로 들어온 모모세는 온갖 거짓말을 떠올리다 그만뒀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 거짓말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온다. 모모세는 미츠키의 맞은 편에 앉았다.

“오는데 헤매진 않았어요?”

“유키랑 와본 적 있는 곳이야, 괜찮아.”

유키라는 이름에 미츠키는 짧은 한숨을 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표정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물기가 번지기 시작한 목소리에 모모세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부터 설명해주세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내민 질문에 긴 침묵이 대답으로 자리했다. 모모세는 미츠키와 나눈 이야기가 유키토에게 전달될 것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해주지 않자 미츠키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수사팀에서 내일 저를 상대로 취조한대요. 테러리스트 목격자라는 신분으로 증언하게 됐어요.”

유키씨가 정말 모모씨가 맞냐고 거듭 물어봤어요.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 관리국 테러반은 모든 자료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모모씨의 얼굴은 이미 관리국 테러반에겐 다 퍼져있어요.

마치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했다는 양 뜨문뜨문 이어지는 말에 섞인 유키라는 이름에 모모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모씨가 뭘 하려고 했는지, 제가 그걸 증언해야만 해요.”

전 모모씨한테 들은 그대로 말할 거에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미츠키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모모세의 행동에 기대를 걸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리더십 있고 밝은 선배의 모습은 동경하는 존재 그 자체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타락할 리는 없다며, 미츠키는 스스로를 붙잡고 다독였다.

“그럼 유키에게 전해질 게 뻔하잖아.”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한다. 왜 유키씨가 들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뭐라도 알고 있는 게 좋잖아요. 쉼 없이 쏟아지는 물음에 모모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일 취조 받을 때 내가 테러를 꾸몄다고 얘기해.”

“모모씨.”

“그렇게 하면 15일에 날 미끼로 써서 관리국의 눈을 돌리고 작전을 진행할 수 있을 거야.”

본부까지 가는 길도 훨씬 간단할 거고. 담담한 어조에 미츠키는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모세가 남을 해칠 의도로 테러를 저지른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15일에 있을 작전을 위해서 테러를 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꼭 테러가 아니어도 눈길을 끌 수 있을 만한 ‘평화로운 사건’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보아 온 모모세의 모습을 떠올린 미츠키는 그를 향한 신뢰를 더 견고히 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테러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던가. 테러가 누군가를 지키게 된다던가. 머릿속을 갈무리하던 미츠키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죄송해요. 제가 지나쳤어요. 더 묻진 않을게요.”

“그래, 고마워.”

“대신 도와드리게 해주세요.”

저는 모모씨를 믿어요. 미츠키의 말에 당황한 모모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위험해. 넌 관리국 사람이잖아.”

“서포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잖아요!”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도와주지도 못하게 하다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선배님? 미츠키는 굳이 선배님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곤 인상을 구겼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고 날 돕겠다는 거야.”

“몰라요. 하지만 선배가 하는 일이라면 옳은 일 일 거에요.”

혼자서 짊어지지 마세요. 도움은 요청해도 되는 거에요. 선배는 항상 혼자서 다 하려고 했잖아요. 동아리 회장이 되셨을 때도 그렇고. 함께한 시간이 몇인데 제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아요? 급기야 화가 난 미츠키는 따박따박 불만을 읊었다.

“적어도 유키씨는 알고 계셨어야죠.”

둥글어진 의식에 각이 생겨난다. 그것이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입이 벌어졌지만 곧 억지로 다물었다. 너는 여기에 휘말리면 안 돼. 이 이상 미츠키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모모세는 그를 카페에 남겨두곤 밖으로 도망쳤다.

 

*

 

요코하마에서 일어난 테러 소식은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일찍이 소식을 접한 미나미는 테러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어떻게 했길래 이그프리가 설치된 건물을 부술 수 있었지?’ 외부 자극이 아닌 내부 자극이 원인으로 작동해 이그프리를 깨뜨렸다는 가설 말고는 그럴듯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테러리스트는 ‘폭탄 파일’을 ‘직접 만들어서’ ‘삽입했다’는 뜻인가.’ 연구자로써의 무언가가 들끓어 오기가 생긴 그는 관리국 개발팀의 오오사카 소고에게서 전달받은 피해 지점의 이그프리 자료를 토대로 파일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다.

폭탄 파일의 작동 원리를 분석한 결과 ‘데이터 충돌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균열 현상을 초래하는’ 파일로 판명됐다. 폭발 신호와도 같은 균열의 표식은 본격적으로 터지기 직전에 발생했고, 충돌이 진행된 파일들은 데이터가 돌연변이처럼 꼬이며 팽창해 이그프리를 무력화시켰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사쿠라씨.”

내부 파일이 이그프리를 무력화시켜서 피해 규모를 확산했다고 한 거라면 알겠는데, 실질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폭발 자체에 대한 데이터는 찾을 수가 없어요. 하루키는 미나미의 말에 스크린에 적힌 수식을 훑었다.

“폭발과 동시에 소멸했을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데이터 충돌을 일으켰다는 신호는 남아있잖아요.”

내부 폭발과 외부 폭발, 이 두 가지 기능을 단 하나의 파일로 소화했다는 소린데 그 매커니즘을 찾을 수가 없어요.

실제 상용화된 이그프리나 데이터 파일들은 1개의 기능만 했기 때문에 다발적으로 묶여 활용되었다. 보편적인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등장하자 돌연 불쾌감을 느낀 미나미는 이젠 스크린을 노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 딴엔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싸움이었다. ‘테러리스트가 만든 폭탄 파일을 완벽하게 분석해 삭제 파일을 만들어 계획을 방해한다.’ 보기 좋게 걸어 둔 포부가 불에 데어 붉게 타올랐다.

“무력화 정도도 충분할 거야, 너무 삭제에 집착하지 마.”

하루키는 최근에 일어난 테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본디 테러리스트라면 피해 규모를 넓혀 더한 공포를 부르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첫 번째 사건이 끝난 이후부터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 기분 탓일지도 모르는 데다가 자칫 테러리스트를 옹호한다는 핀잔을 들을까 봐 입 밖으로 내진 못했지만, 폭탄 파일을 아예 삭제하는 것보다는 무력화시키는 정도만으로도 피해를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사쿠라씨. 모모세라면 반지로 폭탄 파일이 설치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아요?”

“건물 자료를 미리 스캔해둔다면 가능해. 그럼 모모세에게 연락해서 해두라고 전할까?”

“네, 최대한 빨리해달라고 전해주세요.”

무력화부터 만들어볼게요, 3시간이면 충분해요. 미나미는 난이도가 낮아진 과제에 몰입했다.

 


 

[ ……그렇게 됐어. 가급적 빨리 부탁할게. ]

하루키의 무전을 받은 모모세는 반지를 낀 왼손을 쥐었다 펴냈다. 이미 건물에 대한 자료는 일찍이 습득한 상태였으니 이 사실을 말할지 아니면 침묵할지 갈등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 말하면 말하는 대로 거짓말이 보태질 것이고 침묵하면 침묵하는 대로 밖에 나가 건물을 스캔하는 시늉을 해야 한다. 이 이상 입을 여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 모모세는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Great! 이제 테러를 막을 수 있습니다!”


잘하면 테러리스트의 얼굴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땐 망설이지 않고 차버리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나기의 목소리에 리쿠는 긴장한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호흡했다.

“긴장돼, 너무 무서워.”

“걱정 마십시오, 리쿠. 다 잘 될 겁니다.”

모모세는 미츠키가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선배가 하는 일이라면 옳은 일 일 거에요. 누군가에게 신뢰받는 기분은 오랜만의 것이어서 어긋난 블록을 억지로 끼워 맞춘 듯 불편했다.

다음날 새벽 2시, 모모세는 하루키가 메이즈 멤버의 손에 쥐어 보내준 USB를 전달받아 반지에 설치했다. 컴퓨터 없이 곧장 연결되어 작동하는 반지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리쿠는 모모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걱정마, 리쿠. 너는 여기서 다른 일을 해야 하잖아.”

시선을 느낀 모모세의 말에 리쿠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여긴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만 모인 집단인가, 모모세는 온기에 어설퍼진 스스로가 이물질처럼 느껴졌다.

 

*

2021년 4월 9일 카진 레스토랑

 

시험해보지 않은 파일을 사용하는 일엔 언제나 불안이 뒤따랐다. 미나미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모모세에게 이 파일은 ‘급조된’ ‘불안정한’ 무언가로 여겨질 뿐이었다.

레스토랑 벽에 기대어 반지를 작동시킨다. 내부에 설치된 CCTV 하나에 접속해 둘러보니 식당 안엔 유키토가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양복 차림의 인물들과 식사를 나누고 있다. 곁에서 반리가 무어라 거들어가며 유키토가 대화에 섞이도록 이끌어가는 듯했지만 유키토는 묵묵히 식사만 이어갈 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일까. 순간, 모모세는 화면 너머로 유키토와 눈이 마주쳐 어깨를 들썩였다.

우연이잖아, 놀라지 마. 쿵쾅거리는 심장을 토닥이며 붉게 표시된 지점으로 접속해 미나미의 파일을 삽입한다. 백색의 설치 바는 앞으로 10분 후면 설치가 완료된다는 안내 문구와 함께 가동했다. 셋팅된 폭탄 파일의 숫자와 엇비슷한 시각임을 확인한 모모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5초가량 남았을까, 설치 완료 메시지와 함께 폭탄 파일에 손상이 생겼다는 창이 뜬다. 그는 복구되지 못하도록 구멍이 숭숭 뚫린 폭탄 파일의 빈틈을 정크 파일로 채우곤 CCTV 자료를 삭제한 후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5분, 10분, 30분. …시간이 지나도 레스토랑은 폭발하지 않았다. 반지에 저장된 건물 정보도 녹색이었다.

[ 모모 씨, 성공했어요? ]

[ 덕분에. ]

귀에서 들리는 미나미의 목소리에 모모세는 밝게 대답했다. 피해 없이 유키토를 지킨다. 그게 가능해졌단 사실에 옛날이 허무했다.

 

*

 

“큰일이에요, 관리국에서 모모씨에 대한 수배서를 내렸대요.”

발견 즉시 사살해도 된다고 했대요. 츠쿠모 쪽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회의 상황이 좋질 않았다고 미츠키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어떡해요, 억울하게 테러범이 되었는데…”

전에 공원 CCTV 자료로 범인이 누군지 찾았다는 뉴스가 있었어요, 그런데 관리국에서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대요. 분명 츠쿠모 쪽 사람일 텐데. 모모세는 땅이 꺼져라 한숨 짓는 리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기회가 됐다고 생각하자.”

“네?”

4월 15일의 미끼. 모모세는 곧장 신호가 오는 무전을 받았다.

[ 얘기 들었어, 모모세.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내가 미안해. ]

[ 아니에요, 하루키씨. ]

그런데 마침 좋은 때에 연락주셨네요. 모모세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 반지를 분할해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죠? ]

[ 반지를? ]

[ 네. ]

반지에 대한 각각의 성능을 익히 알고 있던 하루키는 모모세의 생각을 읽곤 짧게 탄식했다. 설마 관리국의 시선을 돌릴 생각이야?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어요. 아시잖아요. 본부 쪽이 얼마나 삼엄한지.

[ 잘 부탁드릴게요. ]

무전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하루키는 한참을 고민하다 마지못해 모모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작업하는 내내 마음은 편치 못했다.

*

 

2021년 4월 10일 빵집 허니마리

 

모모세는 이전 세계에서 유키토가 갔던 다른 빵집과 기존에 기록되어 있던 예정지를 돌아다닌 끝에 허니마리에서 그와 함께 폭탄 파일을 발견했다. 곧장 미나미의 파일을 넣으려던 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약 2시간분의 시간을 미루어 셋팅했다. 만약 토모카와 혼다가 테러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인물들이라면 어제의 실패를 고려해 더 강화한 파일을 넣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대비했네.’

모모세의 판단은 옳았다. 폭탄 파일의 용량이 커진 탓에 삭제까지 걸린 시간은 48분 12초였다. 매번 이렇게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면 위험 부담이 커지는데, 모모세는 귀에 걸린 무전기를 두드렸다.

[ 미나미, 소요 시간이 달라지는 것 같아. ]

[ 용량 문제 아닐까요? 그동안 파일이 옮겨지거나 시간이 밀린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작동되지 않았으니 일을 더 크게 준비했겠죠. ]

그 상태면 폭탄 파일을 설치하는 시간도 오래 걸릴 거에요. 그럼 저희 쪽에서 파일을 빨리 발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생긴 거니까 이걸 잘 이용해봐요.

[ 추가 데이터는 어느 정도 됐어? ]

[ 당신을 만나서 반지에 넣어봐야 알 것 같네요. 15일 오후 9시까진 계속해서 모을 거고요. ]

[ 응. 부탁할게. ]

[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어요. ]

전 사쿠라씨를 위해 하는 일이니까. 말은 그리해도 어조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2021년 4월 13일 카페 잭

 

“오늘은 비가 올 거야.”

모모세는 모텔을 나서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다. 이번엔 유키토와 싸울 필요가 없다. 칼을 쥘 일도 없다. 대신 폭탄 처리만은 확실하게 해내야 했다. 결전의 날까지 앞으로 이틀. 모모세는 나기를 통해 하루키가 분할 프로그램을 완성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순조로워서 겁이 날 지경이었다.

카페 잭, 유키토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모모세는 빠르게 파일을 찾아 무력화를 실행했다. 요 며칠 테러가 없네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쫑긋거린다.

“범인을 잡겠다고 난리여서 숨어버린 건 아닐까요.”

“그럴걸. 나 같아도 얼굴 다 팔린 시점에 숨었을 거야.”

“애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에 공연히 위축된다. 화 많이 났구나, 유키. 이전엔 이쯤에서 주먹질까지 해대며 싸웠으니 꼬였을 심산은 불 보듯 뻔했다.

설치 로딩은 생각보다 빨랐다. 스크롤 바가 가장 아래까지 도달하고 알림창이 뜨더니, 갑자기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유키토를 죽이는 방법은 테러만 있는 게 아니야, 모모세. ]

모모세의 표정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

 

[ ……일단은 그렇게 됐어요. ]

미츠키는 호시카게 관리국 소속인 와카바의 고집으로 유키토를 미끼로 삼아 모모세를 잡으려고 한다는 내용의 작전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회의장에서 유키토가 모모세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발설한 후 그는 공범으로 의심받았는데, 와카바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테러와 각 이그프리에 남은 폭탄 파일 소거 흔적을 공범이라는 증거로 제출했다고 한다.

[ 그래서 15일에 모모세의 애인인 유키토를 랜드마크 전망대 위에 올리겠다? ]

[ 네, 최대한 많은 병력을 모아서 확실하게 죽이겠다고 했어요. ]

츠쿠모도 별다른 반박 없이 수긍했고요. 꼭 유키씨도 같이 죽일 것처럼요. 미츠키의 말에 하루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 …테러는 역시 츠쿠모가. ]

[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특히 모모씨가요. 미츠키는 모모세가 무력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처음엔 혼란스러워했다. 테러가 일어나야만 했던 게 아니었나? 처음엔 ‘테러가 일어나지 않아도 내 계획엔 차질이 없다’, 정도로 받아들여 괜한 배신감이 들었지만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나서는’ 모모세를 보니 ‘테러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따라붙는 골칫덩어리’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일단 모모세가 설명한대로 그 작전을 실행할 거야. 우리는 반지를 분할할 장비를 갖고 내일 오후까진 요코하마에 도착할 거고. ]

[ ……정말 괜찮을까요? ]

[ 내키지 않지만, 고집을 저렇게 피우니까. ]

모모세는 종종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말을 해. 마치 미래를 전부 보고 온 사람처럼. 하루키는 반지 분할에 쓰일 프로그램을 정리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 저는 유키씨도 걱정이에요. ]

[ 다 잘 될 거야. ]

이날만을 기다려왔어. 전부 다 잘 풀릴 거야. 걱정 마, 미츠키. 하루키는 미츠키를 달래며 무전을 끊었다.


 

모모세는 폭탄 파일을 만졌을 때 발견한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다 유키가 죽을지도 몰라, 겁에 질려 말하는 통에 나기와 리쿠는 유키토라는 사람이 모모세와 어떤 인연이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로 그를 미행하고 감시했다. 관리국에 있는 시간엔 미츠키나 소고와 같은 다른 멤버들이 도왔고 다행히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키와 미나미는 예정보다 빨리 요코하마로 이동했다. 불안에 잠식되어 심하게 예민해진 모모세를 어떻게 달래야할지 걱정했지만, 그는 꽤나 침착해진 상태로 이들을 맞이했다. 모모세는 다음날 진행될 작전에 누가 되지 않을 거라며, 반드시 유키를 지키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이후론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반지는 반으로 분할되었고 조작 반지는 모모세의 손에, 데이터 반지는 락이 풀린 상태로 하루키의 손에 들어갔다.

15일 오후 12시, 미나미와 나기가 반지를 갖고 본부로 침입한다. 오후 12시 30분, 모모세는 랜드마크 전망대에 나타난다. 하루키는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내면 이목은 순식간에 집중될 것이라고 했다.

오후 1시 30분, 2시가 지나기 전에 이그프리 메인 시스템의 삭제를 마친다. 하루키는 삭제 프로그램이 가동되면 멈출 수 없도록 셋팅했기 때문에 삭제를 실행한 상태로 도망쳐도 된다고 나기와 미나미에게 말했다.

“그다음엔 너와 유키토를 구할 거야.”

모모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루키를 바라보다 가만히 웃었다. 자기 자신과 유키토만 생각하며 살았던 모든 길목에서 만난 작전은 대부분 비슷했다. 하지만 하루키가 붙인 마지막 항목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에 한없이 어색했다.

다른 메이즈 멤버들도 요코하마에 도착해 숨어 유키토를 감시하고 있으니 그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손짓했지만 모모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말았다.

 

*

2021년 4월 15일 유키

 

놓쳐서는 안 될 기회를 얻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모모세는 하나의 링만 걸쳐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이 일이 끝나면, 이 일이 성공한다면 유키와 함께 지낼 수 있겠지. 모모세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유키토의 근처를 감시하는 메이즈 일원들의 연락을 귀에 새겼다.

여기저기서 암호화된 장소를 말한다. 호시카게가 어디에 분포했는지, 츠쿠모가 어디에 분포했는지는 투명하게 알려졌다. 모모세는 크게 심호흡했다.

[ 모모씨,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

[ 걱정마. ]

항상 겪는 일이었다. 항상. 마지막 날짜인 4월 15일은 항상 이러했다. 긴장감이 온몸에 둘러지고 손발이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모모세는 제 가슴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균열을 만드는 동작은 단순했다. 이그프리의 신호가 A에서 Z로 간다면 모모세는 Z에서 A로 가는 신호를 만들면 되었다. 역이 되어 늘어진 신호가 무언가에 부딪치며 균열을 만든다. 바닥과 벽면은 물론, 머리 위까지 번진 커다랗고 화려한 도형들에 눈이 가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 12시입니다. 나기랑 미나미는 들어갔어요. ]

미츠키의 말에 모모세는 움직였다. 랜드 마크 타워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균열의 형태는 부서지고 흩날렸다. 사각의 균열이 너덧개 솟아난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 키 카드 센서 해킹. 다음으로 이동할게요. ]

[ 곧 경찰이 올 것 같습니다, 신호는 없지만 텐이 걱정이군요. ]

미나미와 나기의 말에 모모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상세한 상황 보고는 처음일뿐더러,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나눈 것도 처음이었기에 괜한 기대로 두근거렸다.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형은 거기 없어, 내가 점심 먹자고 불렀거든. 그래서… …아, 텐 형! 리쿠의 무전이 끊어지자 모모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메이즈 각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였다. 이그프리를 삭제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동기들은 제각각이겠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그러하듯 모모세는 자신의 일이 가장 중요했다.

[ 모모,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주의를 더 끌어주었으면 합니다. ]

이미 균열을 전개하고 있던 모모세는 나기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 혹시 위험해? ]

[ 수사팀에게 들켰습니다. 미나미는 해킹을 지속하고 있습… ]

나기의 목소리가 툭 끊어지자 모두의 목소리가 잠긴다. 무슨 일이지. 모모세는 미리 짜두었던 시간보다 더 빨리 랜드마크 전망대로 올라갔다. ‘나는 여기에 있어.’ 수많은 발소리가 이쪽으로 향한다.

참 맑은 하늘이다. 높은 빌딩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옥상 정원에서 결혼하고 싶다던 소원은 다른 걸로 바꿔야 할까.’

이렇게 바라보는 하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던 모모세는 익숙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유키.”

유키토는 바닥에 큼직하게 그려진 H 문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쪽을 바라봐주지 않는다. 모모세는 억지로 웃었다.

보드라운 바람결에 찬란히 나부끼는 은빛 머리카락이 참 예쁘더라. 그 틈에 걸쳐진 하얀 부분이 제 머리끝에 물들인 것과 같아 길게 뻗은 눈매가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해, 유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사과도 하고 싶었고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유키토의 손엔 권총이 들려있었다. 철컥, 장전음에 약간의 안도와 함께 불안이 들썩인다.

“본부로 간 사람들은 뭐야?”

“…….”

모모세의 눈은 유키토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반지가 없다. 저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반지가 없다. 그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진홍빛 눈동자는 총구와 유키토의 얼굴을 번갈아 훑다가 그의 등 뒤로 깔린 무장 경찰에게로 넘어갔다.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사내는 변함 없이 유키토를 향해 무어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항상 날 지켜보고 있었지?”

“……알고 있었구나.”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널 찾아다녔어.”

유키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했으나 너무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다.

[ …세요, …도… 쳐서… 로쿠야… ]

갑작스레 연결된 신호음에 모모세는 만들어내던 균열을 멈추었지만 지직거리는 소음은 여전했다.

[ …삭제 프로그램은 가동했어요. 그런데… ]

멈췄어요. 어느 지점을 끝으로 움직이질 않아요. 로쿠야씨는 수사팀을 상대로 교전 중입니다. 곧 대피할게요.

오후 2시까지는 겨우 30분 남았다. 기다려볼까. 모모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날 찾아줘서 고마워, 유키.”

반지는 언제 뺐어? 서글픈 물음에 유키는 무어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의 허리에 꽂힌 무전기에서 듣기 싫은 고함이 앞질러 나왔다.

[ 오리카사! 쏴! ]

“!”

유키토의 어깨가 들썩인다. 모모세는 전자음과 겹쳐 들리는 목소리에 경찰 무리와 함께 있는 인물을 노려보았다.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저 돼지 같은 인간의 이름이 와카바라고 했지. 이번에도 똑같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가 토모카와 혼다의 끄나풀인게 아닌가 싶었다.

[ 기다리면 다시 작동하지 않을까. ]

[ …큰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

아직은 어떻게 될지 확답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미나미의 나긋한 어조에 섞인 둔탁한 마찰음에 모모세는 유키토와 권총을 가만히 훑었다. 다시 시작해야 하나. 착잡함에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 모모 씨, 곧 구하러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

[ 오지마. ]

절대 이쪽으로 오면 안 돼. 그대로 도망쳐. 여기에 있으면 잡히는 것도 모자라서 해명도 뭣도 아무것도 못 하게 될 테니까.

[ 오리카사! 네가 쏘지 않으면 이쪽에서 발포한다. ]

“닥쳐.”

[ 뭐라고? 무전에 대고 말해! ]

[ 닥치라고!! 시끄러우니까 모모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 ]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멀리서도 벙찐 것이 보이는 듯해 입꼬리가 비틀렸다. 오래도록 쌓아왔던, 그리고 매번 이 시간이 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잔뜩 떠오른다. 유키, 난 너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토로하고 싶은 고통을 삼키며 모모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깐 동안에 퍽 수척해졌다. 고민하던 그는 크고 작은 균열을 여러 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파 방해와 더불어 사방에 삼각형이 솟아나 요란스레 원을 그리며 깜빡였다. 진홍의 불빛은 그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

 

▶ "미안해, 유키." 이그프리를 조작한다.

[유키모모] Re:quiem|첫번째 선택지

비밀번호 152

▶ ……내가 없는 세상의 유키는 어떻게 되는거지?

[유키모모] Re:quiem|두번째 선택지

비밀번호 317

▶ "……." 스노하라 모모세는 침묵했다.

[유키모모] Re:quiem|세번째 선택지

비밀번호 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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