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투명 피난소

늦어진 날조, 로젠메이든 AU 후추후추

빠레빠레 by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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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Diego PH

갖가지 색으로 물든 유리로 짜낸 창문으로부터 달빛이 녹아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흩뿌려진 빛무리가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피부에 닿아 반짝인다. 그 주위로 계절을 모르고 피어난 사계의 꽃이 그것을 주목했다. 장미가 노래하고 제비꽃이 꽃잎을 흔들며 춤추었다. 아이리스가 그의 소매를 스치며 백합이 향을 내었다. 그가 앉은 자리와 그 주위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앨리스를 위한 세계로 보였다. 머리와 몸통을 이어주는 목에 있는 통로가 멋대로 꿈틀거린다. 홍차나 레몬티, 하다못해 수돗물이라도 벌컥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갈증. 아마 전에 주인을 맡아준 사람이 알려준 욕구가 채워지지 못해 나는 현상. 꽃에게 연모 받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달을 보았다. 오늘 밤이면 저 공간뿐 아니라 모든 게 저것을 연모하겠지. 분명 무척이나 행복한 세상일 거야. 부수고 자르고 쪼개자. 그 시절 함께 웃고 다과를 즐겼던 그것들을 저것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끝에는 나 자신도 불태워 비료로 삼자. 불필요한 나무를 잘라내는 것 또한 정원사의 역할. 정원사가 도끼를 들었다. 꽃이 잠든 동안 끝내야 하니까.






*






두 손에 쥐어진 도끼는 멋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없이 투박했다. 무기는 주인을 나타낸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 도끼야말로 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시 하나 일어나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손잡이나 반대로 무엇이든 자르고 쪼갤 수 있는 날카롭고 단단한 쇠붙이가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나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앨리스라는 완벽한 존재와는 한없이 동떨어졌다는 사실을 절감해 스스로 동작을 멈추었다. 펌프에 달린 밸브가 조인다. 움직일 자리가 좁아진 공기주머니는 펌프질하는 속도를 늦추고 점점이 느려지다 이내 동작 자체를 멈춰버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시야가 뿌옇게 물든다. 사람은 이걸 잠이라 한다지. 때때로는 꿈을 꾸기도 한다고. 만약 나도 꿈을 꿀 수 있다면 행복한 꿈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누군가 태엽을 돌렸다. 내부의 수많은 바퀴가 맞물리면서 돌아가고 틈마다 굳어있던 윤활유가 마찰을 받고 녹아 통로를 맴돌며 잠든 부품을 깨워냈다. 핀이 돌아가면서 눈꺼풀이 뜨였다. 안구의 표면으로 은색 실 가닥이 쏟아져 내렸다. 언뜻 푸른빛이 보인 것도 같은데 막 깨어난 몸은 손가락 마디 하나도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아, 미안.”


은색 실 가닥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실로 된 천막이 걷히고 환한 달이 나타났다. 푸른 한 쌍이 눈꺼풀 사이로 깜빡였다. 달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가 뺨에 손을 얹었을 때 마디의 관절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인형.


“히에엑.”


“응? 고장났어?”


엄청난 미인이다. 아버지는 내가 잠든 사이 얼마나 많은 품삯을 들여 이런 엄청난 인형을 만들어내고 만 걸까. 그만큼 앨리스에 대한 집착이 느껴져서 무서운데 무서움마저 떨쳐버릴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눈썹 하나하나가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만든 하나의 작품이었다. 미인의 얼굴을 피해 볼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실크를 눈에 담자, 충격적인 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미인의 무릎에 머리를 맡긴 채 자고 있었다! 어, 어, 어쩌면 좋아?! 화들짝 놀라 미인과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굴러 거리를 벌렸다. 깨어남과 동시에 내면에서 반짝이는 ‘로자 미스티카’를 불러내 도끼로 만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는 베어서 버릴게요!!!”


“뭐? 왜? 그만둬 모처럼 귀여운 머리잖아.”


“네? 네?! 아, 그, 안 버릴게요!”


“베지도 말고.”


“안 벨게요!”


어느샌가 다가온 인형은 허공으로 손을 휘젓다가 서툴게 머리 위로 손을 얹어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공기주머니가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서둘러 숨을 뱉어냈다. 고장 날 뻔했다. 아름다움이란 때때로 폭력적이라는 것을 눈앞의 인형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만들어졌는데도 곤히 자길래. 심심했어. 깨워서 다행이다. 네 눈을 보니 노래가 떠올라.”


곧바로 인형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잔디 사이로 숨어있던 작은 꽃이 노래를 듣고 고개를 들어 꽃을 피워냈다. 그런 꽃이 하나둘씩 더 늘어나자 금세 주변은 꽃밭이 되었다.


“네 이름은?”


“...모모예요. 2번 돌 모모.”


“모모. 나는 3번 돌인 유키야. 듣기로는 너도 정원사라던데.”


“그, 렇기는 한데. 유키씨처럼 꽃을 피울 수는 없어요.”


말하면서 자신이 볼품없게 느껴져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같은 정원사라는 직함이라도 유키와는 역할이 크게 다르다. 나는 정원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불필요한 잡초를 뽑고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고를 뿐이니까. 정원에 있어서 필요한 일이지만,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폄하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로.


“흐응. 이 도끼로 말이지. 날카로운 물건은 싫어하는데…”


“아, 죄송해요. 집 넣을게요.” 


“잠깐, 잠깐. 그러니까, 네 도끼는 내가 만들 정원을 예쁘게 해주려고 있는 거잖아? 싫지 않아. 멋있어.”


“히에엑.”


“모모는 높은 소리도 잘 내내. 같이 노래할래?”


“아, 아뇨. 유키씨의 훌륭한 노래에 제 목소리라니…”


“유키씨가 아니라, 유키.”


“유키.”


이름을 부르자 유키가 미소 지었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은색이 하얗게 빛나는 것만큼 푸른 눈이 가느다랗게 말려 들어가며 미소 또한 반짝였다. 아버지는 이런 인형을, 이런 존재를 만들고 싶었던 거구나. 막 만들어졌을 무렵 들었던 아버지의 푸념을 떠올렸다. 그는 해내었다. 그날의 슬픔, 고뇌는 눈앞의 인형으로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모는 그만 즐거워져 서툴게 유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딱딱하지만, 그래도 듣기 좋은 목소리라며 유키는 성심껏 내게 칭찬을 선물했다.


“언젠가 칭찬에 대한 보답을 할게요.”


“굳이?”


“꼭이요.”



되돌아보면 모든 일이 꿈이었다. 아버지의 꿈으로 시작해 내 꿈이 되어 언젠가는 깨어나 버릴 꿈. 인형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쯤 알고 있어. 인형이니까 누구보다도 잘 알아. 그래도 하나쯤은 저 인형 하나쯤은 인간이 되어도 좋잖아. 친구였던 것, 같은 아버지에게 만들어진 어쩌면 가족이라 불러도 좋았을 인형을 나무처럼 베어 쪼개어 심장을 끄집어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색으로 반짝이는 게 없었다. 모두가 모두 아름다웠다. 아버지 대신 지켜보는 별빛이 하나둘 쓸모를 잃어가는 인형에 안타까워했다. 인간과 달리 짠맛이 나지 않는 인형의 눈물은 그래도 눈물이었다. 앞으로 하나, 아니 둘. 샹들리에에 장식된 유리알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꽃이 인형의 곁에서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꽃으로 메꾼 오른쪽 눈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하늘이나 바다보다 훨씬 예뻤는데. 그래도 꽃으로 치장한 모습은 이전보다 신비로움이 더해져 역시 아름다웠다. 눈을 다치게 한 손은 수복할 수 없을 만큼 망가뜨렸으니 원한도 미움도 없다. 이건 아버지가 준비한 판이고, 우리는 판에 따라 놀아나는 말일 뿐인데 그땐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난 정원사고, 불필요한 잡초나 나무를 뽑아서 예쁜 정원을 지켜야 하니까.


흰장미 옆 감긴 왼쪽 눈에 입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아직은 깨어나지 말라는 소망을 담아 잠든 인형에게 빌었다.


“보답하게 해주세요. 이 게임에서 이기는 건 당신이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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