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림] 연속성 회피
2022. 10. 22
여전히 사방에서 가는 모래 입자가 잔뜩 섞인 바람이 분다.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모래가 공기의 빈자리를 채운다. 우리는 사막의 구석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살아남은 채로. 감히 우리, 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그게 행운임을 안다.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는 놀라지 않는다. 나 역시 그의 낮은 체온에 놀라지 않는다. 손의 온도가 섞인다. 미적지근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한 존재로 마침내 돌아왔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의 바다. 저 너머 어딘가에 우리가 재회한 장소가 있다. 유령처럼 기척 없이 달리던 열차가, 어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막을 볼 때면 언제나 그것을 떠올리고 만다. 반사적으로. 그 애도 그럴까. 려는 아닐 것이다. 내게 떠오르는 심상과 그 애가 연상하는 심상은 같을 수 없다. 내게 열차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찾아보기 쉬웠던 날 모래바람 속에서 신기루처럼 다가온 것이었고 그 애의 열차는 산 사람이 그득하게 붐비는 역에서 겨우겨우 올라탄 것이었기에. 하지만 그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종국에는 같을 것이다. 나는 이 감정이 오만임을 안다.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란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정서다. 무언가를 아는 것은 때로 무지보다 두렵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려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명백한 거짓이었다. 그러나 려는 굳이 파고들지 않는다. 나는 그 애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어깨에 얹힌 머리의 무게를, 잡고 있는 손의 애매한 온도를, 바람에 나부끼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먼 곳을 응시하는 유리알 너머의 눈 역시 ‘그런 점’에 포함된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사이에 단절이 있기는 해도 그 공백 전후의 시간은 객관적으로 길었다. 그러나 전과 후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의 우리에게는 같은 시간의 흐름이 작용했는데 후에는 아니었다. 그건 내 선택의 결괏값이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 애를 살리고 싶어 했다. 무조건이라는 단어에는 수많은 것이 함의되어 있다. 설령 려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서 영원히 미움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수십억 년에 걸쳐 그에게서 잊힌다고 해도 다만 그 애가 살아주기를 바랐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랬다.
진정 그것뿐일까.
그 애의 차가운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자조한다. 려는 자칫 날카로워 보이는 금빛 눈을 끔뻑거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조금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꾼다. 그 애의 무게가 더욱 짙게 얹힌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해가 서서히 넘어간다. 노을이 사막을 이기지 못해 부서지고 흩어진다. 눈이 부셨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몇 번이고 봤던 풍경임에도 아름답다. 몇 번이고 느꼈던 무게가 유난히, 선명하다. 나는 이 무게를 독점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기원이 아득했다.
“내가 죽어도, 너무 거기에 매여 있지는 마.”
“왜…….”
“영원을 사는데 한순간에 묶여 있을 수는 없잖아. 네 삶을, 살아.”
그럼에도 입을 열면 다른 말이 나왔다. 인정해야 했다. 나는 그 애에게 흉터가 되고 싶었다. 지우고 싶어도 너무 깊이 남아서 어쩔 도리가 없는 상흔이 되고 싶었다. 그 애의 긴 삶 속에서 손 쓸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이 모래 입자의 일부가 되어도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아무리 수많은 관계를 맺어도 내 자리는 남아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었다. 그 애에게는 온전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무너지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은 명백한 나의 실패였다. 그 당시에는 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을 한 번쯤은 떠올려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게, 좋았다. 이 마음은 명백히 뒤틀렸다. 려는 마침내 고개를 든다. 어깨가 허전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려의 얼굴 위로 노을이 우수수 쏟아진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진심을 꾸덕꾸덕 바른 말을 토해낸다. 내 입에서 흘러나가는 말이 질척하다. 차마 뱉어내지 못한 감정들이 있는데도 이미 차고 넘쳤다. 나는 손을 뻗는다. 려는 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차례 분리되었다가 합쳐진 이후 이런, 접촉에서 서로를 밀쳐낸 적이 없다. 손바닥에 닿는 뺨이 차가웠다. 그는 따뜻할 것이다. 아무런 신호가 오가지 않는 단순한 행위에도 새삼스레 심장이 마구 뛰었다. 너의 심장도 어딘가에서 뛰고 있을까. 퍽 잔인한 질문이 떠오른다. 건네지 않았다. 뺨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내 품으로 끌어 내렸다. 다만 이 소리를 공유하기 위하여. 그리고 네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하여. 답을 듣지 않기 위하여. 이 모든 행위가 회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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