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민폐혜리] 되돌아가는 것과 직진은 달라서

11주년 기념 로그 / 2023. 02. 17

서정체님 타로 커미션 기반

경찰 민폐 X 마피아 혜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응, 들어 와. 가볍게 대꾸하고 나면 문이 거리낌 없이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익숙한 사람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어쩌다가 보스의 자리까지 올랐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제는 내 삶의 전부인 양 느껴졌다. 처음부터 이 자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마냥 안락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요컨대, 계약 같은 것이었다. 많은 이들을 거느리고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책임이 요구된다. 그래,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이따금 죄책감 같은 것이 스멀스멀 속을 채우고 기어오를 때면 언제나 같은 말을 되뇌고 만다. 나를 위한 주문이었다.

“보스.”

“응.”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보고 있던 서류를 마저 들여다본다. 오늘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약속이 있다. 일 때문에 못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전 받았던 전화를 떠올린다. 다음 주 목요일, 그 카페에서 또 보자. 기다릴게. 다짜고짜 던져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응. 짧은 대답을 건네자마자 전화는 끊겼다. 통화의 흔적이 남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 봤다. 그 카페. 우리가 다시 만났던 곳.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못 한 사람과 만난 장소니까.

보스가 아닌, 내 이름으로 불렸던 짧은 시절.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그 애였다. 중심이라고는 해도 우리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으레 고등학생이란 같은 성별끼리 몰려다니는 법이니까.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따금 내가 누군가와 대립했을 때, 뒤에서 내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던 게 그 애였단 것을. 정작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 둘도 잔뜩 다투기만 했는데. 나는 그 애가 편했다. 영혼에도 결이 있다면 내 결과 맞는 건 단연 그 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다. 왜였을까. 그때는 그게 당연했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 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에도. 보스가 된 내게는 그 애를 만날 자격이 있을까. 다만 이 순간만큼은 꿈을 꾸고 싶었다. 그 애가 먼저 손을 내밀어줬으니까. 그는, 나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래서 뒷모습을 보자마자 불러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연락처를 줬다. 끊어져야 했던 인연이 내 욕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 애는 재회 이후로 문자보다는 전화로 연락을 취했다. 나도 그쪽이 더 좋았다. 글자로 흔적이 남는 것도 좋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 뇌리에 둥지를 트는 건 생각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보스가 요즘 만나시는 그 사람 말인데요.”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그 애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눈이 마주친다. 내가 조직에 막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 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조직 밑바닥을 구르며 우정을 쌓았었다. 그것을 감히 우정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아무튼 믿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어둔 선을 넘어도 어느 정도는 용서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주제넘지만 제 선에서 조사해봤거든요.”

“그래.”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냥 그의 기우였을 뿐이라고. 왜 굳이 조직과 관계없는 사람의 뒤까지 캐느냐고 가벼운 핀잔을 주고 약속 장소로 조금 일찍 향하고 싶었다. 그 애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이 열리고 나는 아득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다시 맛본다. 오랜만에 겪는 감각이었다. 영혼이 몸으로부터 유리되는 듯한, 그런.

“경찰이랍니다.”

“……뭐라고?”

“경찰이라고요, 그 사람. 처음부터 보스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던 겁니다. 빨리 조치를…….”

“그만.”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유독 낯설고 단호했다. 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조직의 ‘보스’니까. 보스는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언제나 굳건해야 한다. 하지만 왜,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나올까. 애초에 그가 말한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애는 경찰 같은 일에 몸담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니, 그 애가 경찰이라도 나는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어떤 수식어도 없는 나 자신이. 허나 그 애는 정말 아니었을까. 우연히 카페에서 만났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만남에 개입된 건 우연뿐이었는데, 그 우연이, 그 애가 뱉었던 말이 전부 의도된 것이라면……. 세상이 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구보다도 냉정해야 하는데 모든 게 바닥나고 있었다. 아니다. 바닥 자체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고 있다. 내게는 조직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입술을 꾹 깨문다. 비릿한 피의 맛이 어쩔 수 없이 났다.

"내가 처리하고 올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 다들 걱정할 거야.”

“보스…….”

“죽이면 되는 거잖아. 더 뒤를 밟히기 전에. 그렇지?”

나는 웃는다. 그게 제대로 된 웃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순간, 그런 얼굴을 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오랫동안 사람을 속이는 일을 하다 보면 그 정도는 알게 된다. 내게는 의무가 있으니까. 이 거대한 조직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설령 불법적인 조직이라도. 처음 이곳에 몸담은 순간 나는 무언가를 내던져버렸다. 돌이킬 수는 없다. 눈앞의 상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눈빛에서 나는 신뢰를 본다. 배신할 수는 없었다. 잠깐, 허황되고 덧없는 꿈을 꿨다. 그뿐이었다.


 

날이 추웠다.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 숨이 피어오른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람들이 오가는 카페 앞. 굳이 들어가지 않고 그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린다. 품 안의 총을 생각한다. 쓰고 싶지 않아.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애초에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곳까지 나왔는가. 다른 이들을 시켜 그를 해칠 수도 있었으나 나는 핑계를 대며 이 자리에 섰다. 약속 시각까지는 앞으로 10분이나 남았는데도 멀리서 그 애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눈에 찾아낸다. 그것조차 웃겼다. 나는 너를 계속 눈으로 좇게 돼. 우습지 않니. 이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옛날에도 그랬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날에도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애를 보곤 했다. 그 역시 나를 찾아냈는지 손을 흔든다. 자연스럽게,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오른다. 웃겼다.

“기다렸냐?”

“아니, 전혀.”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그것조차 확신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불분명하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그 앞에 서 있었다. 공기가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설다. 너와 함께 있을 때는 처음 맛보는 감각이었다. 어색한 미소가 얼굴을 채운다. 아마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내 일이므로. 무엇보다도 그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알았다. 그 애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 애도, 무언가를 알았으리라. 나는 우리의 만남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내 유년의 추억은 이미 종말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 늘어진 끈을 잡고 나는 머뭇거리고 있다. 끝없이 맴돌고 있다. 어쩌면, 아마도 나만 그럴 것이다. 끈의 끝을 잡았어야 할 상대는 떠났는데.

“오늘은 왜 불렀어?”

“이유 같은 게 필요해?”

“그런 건 아닌데.”

평소처럼 주고받는 농담은 그 의미가 퇴색됐다. 어쩔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이 대화 속에서 연신 솟아오른다. 곧 터질 거품이다. 모호하게 웃어 보인다. 내 시선의 끝은 그의 눈을 향해 있다. 검은 눈이 나를 오롯이 비춘다. 그게 늘 좋았다. 너무나도, 좋았다. 좋아했다. 이제는 과거형이어야만 했다. 지금도 지나치게 상념에 젖어 있었다. 넘칠 정도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휘두르고 배신하는 게 업이 된 지금조차도 그의 생각만큼은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사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도 못 나올 뻔했는데.”

“……”

“그냥 그렇게 됐다.”

그는 말을 마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입을 다문다. 황민폐가 그런 식으로 생색내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이것은 신호였다. 끝은 예상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추억을 곱씹을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다. 잔인했다.

“우연이네. 나도 급한 일이 있었거든.”

“……”

이번에는 그가 입을 다문다. 우습다. 그를 비웃는 게 아니었다.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우스웠다. 만약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떳떳하게 너와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전부 헛된 가정이다. 그랬다면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르기에. 허나 나는 믿는다. 우리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한 차례는 만나게 되었으리라고. 정말, 우연으로. 우리는 그것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바라본다. 각자의 눈에 담기는 건 결국 서로의 상(像)뿐이다. 본래 형태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파편과도 같은 흔적을 끝까지 망막에 새기고 싶었다.

“얼굴 보니까 좋네.”

“그러게.”

우리는, 틀림없이 서로가 무엇인지 안다. 입에 올리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서로가 ‘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대화는 그 조건하에 성립된다. 황민폐는 오늘따라 유독 검은 옷들만 입고 왔다. 반면 나는 온통 하얀색이다. 감히 정의하자면 우리 중 검은 것은 내 쪽일 텐데도. 그 모순이 새삼스레 눈에 밟힌다. 세상은 온갖 색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오직 우리만이 흑백이다. 나는 기꺼이, 너와 섞이고 싶다. 다 타버려서 남은 게 없는 재의 색. 회색이 기꺼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그저 소망일 뿐이다. 내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네게도 마찬가지리라. 그러니 우리는 섞일 수 없다.

“양혜리. 이제 앞으로 너한테 연락할 일, 없을 거야.”

“……그래.”

“이유는 안 묻냐?”

“안 물어보려고.”

“너답네.”

그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는다. 분위기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미묘하게 풀어진다. 나는 이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임을 안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까. 아마 없겠지. 우리는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갑을 채우려면 채울 수 있고 무기를 휘둘러 상처를 입히려면 입힐 수 있는. 하지만 황민폐는 분명히 갖고 있을 수갑을 꺼내 들지 않고 양혜리 역시 챙겨 온 총을 손에 쥐지 않는다. 이것은 투명한 약속이다.

“근데 내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 나?”

“좋아했다는 거?”

황민폐는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마치 고교 시절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나 이치라고는 전혀 모르는 순수의 시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본다. 나는 그 애로부터 과거의 편린을 보는데 그 애는 나로부터 무엇을 보는가. 미지의 영역이다.

“그 말은 거짓말 아냐.”

그 말만을 내뱉고, 가까이 있던 그가 서서히 멀어진다. 상이 사그라든다. 그 말은. ‘은’. 무너질 것만 같다. 이 자리에 붙박이게 될 것만 같았다.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는 제 거짓말을 전부 실토했다. 알 수 있었다. 그, 가벼운 조사 하나가 영영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견딜 수 있다. 설령 우리의 재회가 거짓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네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만이 진실로 남아 있다면……. 충분했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랬듯이. 황민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입을 연다. 낯선 공기가 몸을 가득 채운다. 이 순간 나는 한낱 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말과 공기로 가득 찬, 무기체.

“나도 좋아했어!”

내 목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행인은 없다. 오로지 우리 둘뿐이다. 아니다. 우리는 끝났다. 양혜리와, 황민폐 뿐이다. 그 말에 걸음을 옮기던 황민폐가 일순 멈춰섰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좋아했어……. 나, 있잖아. 네게 거짓말을 했어. 좋아했다는 건 거짓말이야. 지금도 좋아해. 널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혜리를 끝까지 양혜리로 남게 하는 마지막 껍질 같은 거니까. 양혜리는 황민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를 뜬다. 표정을 지운다. 늘 그러했듯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응. 나야. 경찰은 처리했어.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모든 게 제자리를 되찾는다. 돌아간 게 아니다. 그저 그대로 나아가 한 바퀴를 더 걸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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