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연성교환/축전

[슈텔히메] 너의 부재는 타인의 부재가 아니라서 (커미션)

2차 커미션 / 2022. 06. 27

<꿈왕국과 잠자는 100명의 왕자님> 슈텔x히메 커미션

사망 소재 주의

 메테오벨의 왕자는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되새기기만 했던 유년기처럼 슈텔은 침대에 누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트로이메아의 공주, 유메의 장례식으로부터 딱 3일이 지난 참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도 그랬으나 정말로 그녀가 영영 세상을 떴음을 되새기는 의식을 치르고 나니 새삼 실감이 났다. 공주는 이제 세상에 없다. 저도 모르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지도 몰랐다. 베개가 젖어 알았다. 
 
 눈을 뜨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시야에 가득 찬다. 언젠가 유메와 함께 이 침대에 누워 별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모든 생각의 흐름은 결국 유메로 향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왜 울어요, 슈텔?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말해줄 사람도 손수건을 꺼내 상냥하게 볼을 닦아 줄 사람도 더는 없는데. 남자는 그만 눈을 감았다. 검은 어둠 사이로도 환한 빛이 들어왔다. 아니다. 더는, 환하지 않은 빛이었다. 어둑했다. 그 사이로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갈색 단발머리가 가냘픈 어깨선 위에서 아슬하게 찰랑였다. 유메. 그녀는 이제 뒤돌아보지 않는다. 슈텔은 눈을 뜬다. 연인이 없어도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다.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가 실종됐던 17년 동안에도 꿈세계는 어떻게든 굴러갔으니 당연한 걸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슈텔, 뭐라도 좀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왕궁에서 떨어진 곳에서 학자로서 학문을 탐구하던 왕이 다시 왕성으로 돌아온 것도 슈텔 때문이었다. 아무리 몸이 약하다고 해도,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럭저럭 호전되어 메테오벨 왕족의 책무를 다하던 아들이 갑작스레 며칠이나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슈텔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음이라도 옆에 두고 갈 테니 먹고 싶으면 들 거라.”

 왕은, 걱정스런 낯으로 아들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그리 높지 않았다.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서 기인한 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고 슈텔은 넓은 방에 혼자 남았다. 고소하다고 느껴야 할 냄새가 그저 역겹기만 했다. 지금껏 몇 번이고 무언가를 억지로 속에 욱여넣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소화하질 못했다. 조금만 지나면 먹은 것을 다 게워내기만 하는데 식사를 챙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렇게 살다가 쇠약해져서 유메의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남자는 생각한다. 유성은 한 번 떨어지고 나면 그만이라 돌아갈 곳따위 없지만 그에게는 틀림없이 있었다. 유메의 곁이, 그가 있을 장소였다. 슈텔은 분명하게 제 자리를 알았다. 슈텔, 뭐라도 먹어야죠. 네가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접시를 깨끗하게 비울 텐데. 누구보다도 건강해질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은 결국 가정형으로 끝난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 메테오벨 왕족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금기이기에 앞서 불가능했다. 몇 번이고 그는 빌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별모래의 양은 그대로였다. 그게 더 비참했다. 

 슈텔은 변함없는 별모래를 볼 때마다 어째서 유메가 마지막 순간에 소원을 빌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았는지에 관하여. 적어도 죽기 전에 살려 달라고 자신에게 빌었더라면 슈텔은 제 모든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유메를 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마지막으로 품은 소원은, 떠올린 생각은…… 다름 아니라 슈텔이 저로 인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였다. 우습게도 소원을 이뤄주는 왕자님은 그 소원을 이뤄주지 못했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었다. 죽은 연인을 살려달라는 염원과 마찬가지로.

 단도직입적으로 트로이메아의 공주는 사람을 구하다 죽었다. 명예롭다면 명예로운 죽음이었고 아깝다고 말한다면 아까울지도 모르는 죽음이었다. 그러니까 흔히 생각할 만한 영화나 책 속에 나올 법한 죽음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선상 파티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발견하고 가장 먼저 뛰어들었을 뿐이다. 희극의 한 단락처럼 아이는 죽지 않았다. 비극은 언제나 희극이 막을 내리고 나서야 찾아오는 법이었다. 한겨울의 바닷물은 지나치게 차가웠고, 유메가 두른 가벼운 드레스를 부풀리기에는 차고 넘쳤다. 헤엄을 쳐도 금세 가라앉기 일쑤였다. 입을 열면 짜고 차가운 해수가 그 속을 파고들었다. 사인은 익사가 아니었다. 저체온증이었다. 무모했다. 그러나 트로이메아의 막내 공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도와 버리는 사람. 그런, 체질이었다. 

 유메는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여기서 당장이라도 살려달라는 소원을 빈다면 슈텔이 그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 한달음에 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여자는 빌지 않았다. 빌고 싶지 않았다. 슈텔과 유메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했고, 또 함께 지낸 모든 시간 동안 배려하며 지냈으나 단 한 가지만은 서로 타협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형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슈텔에게 있어서 타인의 소원을 이뤄주는 일이란 생의 전부와도 같았다. 메테오벨 왕족들은 모두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며 살아간다. 애초에 그것을 조건으로 왕족으로 군림한 족속들이었으므로. 소원을 이뤄주는 대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조금씩 줄어들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주어진 수명이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훨씬 길었다. 하지만 슈텔은 불량품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원을 이뤄줘야만 하는 자가 단명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불량품이라고. 성인이 된 후 몸이 그럭저럭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낯선 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된 이후부터 드디어 제대로 된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제 목숨을 깎아 먹는 짓이라고 해도 놓을 수 없었다. 메테오벨의 왕족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것은 마치, 트로이메아의 왕족들이 꿈의 힘을 나눠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에게는 페널티가 있을 뿐이었다. 

 유메는 달랐다. 슈텔의 목숨을 대가로 이룬 소원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의미는 있었다. 슈텔이 타인의 웃는 모습을 바라고 스스로 택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슈텔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주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슈텔이 손을 한 번 휘두르면 모든 게 편해지겠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다소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슈텔과 마주 보고 웃는 미래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도 둘이서 그냥 주변 풍경을 보며 찬찬히 걸어가고 싶었다. 슈텔과 함께 하면서 수많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만났지만 늘 같은 마음이었다. 슈텔의 힘에만 기대지 않고 둘이 힘을 합쳐 해결해나가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마지막 순간에 살려 달라는 소원을 잠깐만이라도 떠올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되리라. 인간이라면 대체로 누구에게나 생존 욕구가 있고 그것은 유메도 마찬가지였다. 차갑고 짠 바닷물이 넘실거리다가 입 속으로 들어올 때, 찬 공기가 온몸을 때릴 때. 몸에서 힘이 빠지고 시야가 점멸하기 시작할 때. 그 모든 순간에 떠올리게 되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상(像)은 아니었다. 그 기반은 틀림없는 애정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유메는 욕구를 이겨냈다. 상을 지워 버렸다. 여기서 내가 당신을 떠올리면, 당신에게 살려 달라고 언젠가 받은 별에 빈다면 바로 와주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유메는 그렇게 한다면 남은 생에 걸쳐 평생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제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다. 맹렬한 추위 탓에 뼛속까지 얼어붙고, 본능적으로 한계점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도 쉬이 그를 떠올릴 수 없었다. 생각은 말과 다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슈텔은 그 짧은 바람과도 같은 소원만으로도 무언가를 알아차릴 사람이었다. 그가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순간이 어긋나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유메는 경건하게 제 죽음을 맞이하는 수도자였다. 주마등이 짙게 스쳐 지나갔다. 물은 영상을 투영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매개체였다. 

 처음 마주했던 순간부터 잊을 수 없게 시야를 가득 메운 사람을 기억한다. 밤하늘을 등진 남자는, 별을 녹인 것 같은 은백색 머리칼과 별이 빛나는 밤처럼 투명한 파란색 눈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배경에 스며들 것처럼 하얗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그가 별똥별을 집어 건네준 순간이나, 그를 따라 별똥별을 타고 별들 사이를 날았던 것. 추워했던 자신에게 마법을 부리듯 걸쳐 준 코트. 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본 것. 그로부터 받았던 목걸이. 그리고 그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느꼈던, 숨 막히는 감정들까지 전부. 유메는 슈텔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오롯이 남을 위해 쓰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삶의 방식을 존중했음에도 그것만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빌지 않았다. 각오가 약해질 때마다 그의 별모래시계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를 떠올리지 않게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연인을 떠올리지 않기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유메는 그것을 해냈다. 단지 그의 행복을 빌었다. 슈텔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단지 함께 있지 않았음에,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낀 사람이란 것을 유메는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빈 소원은 그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기를 바라요. 생각을 물속으로 뱉어낸 순간 수면 위에서 별이 반짝였다. 슈텔. 떠오르는 이름은 그뿐이었다. 유메는 눈을 감았다.

 슈텔은 틀림없이 유메의 목소리를 들었다. 왜 하필 그런 소원을 빌었을까. 나, 때문에. 내가 너로 인해 슬퍼할 일이 뭐가 있다고. 불길한 예감만이 가슴 한구석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몸이 그닥 좋지 않아 행사에 불참했던 슈텔은 어느 순간 달려 나가고 있었다. 목 끝까지 숨이 찼다.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본능적인 불안이 그에게 열기를 주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 것. 유메가 있어야 할 장소로 향하는 내내 아무리 그 소원을 들어주려고 해도 들어줄 수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힘은 얼핏 전지전능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타인의 감정에 관여하는 소원이나 죽은 자가 바란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메테오벨 왕족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유메가 빈 소원은 전자여야만 했다. 알면서도 소원이 귓전에서 그에게 계속 알 수 없는 말들을 날카롭게 속삭였다.   

 슈텔이 끝내 마주한 공주는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 고결한 품성이 그대로 반영된 듯한 낯을 하고, 꿈세계의 지배자답게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을 맞추면 깨어날 것 같았다. 입술은 차가웠다. 몇 번이고 입을 겹쳐도 공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고 놀란 눈으로 바라봐주지도 않았다. 추운데 왜 아무것도 걸치고 오지 않았느냐고, 제 뺨을 따뜻한 손으로 감싸주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구해진 아이는 폭신한 수건에 휩싸인 채 새파란 입술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그제야 새삼스럽게 남자를 둘러싼, 기대라는 이름의 얇은 막을 두르고 있던 환상이 한 차례 깨어지고 현실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슈텔이 아니라, 유메가 먼저 세상을 떴다.



 두 사람은 이따금 멀고 가까운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다음 계절에는 같이 무엇을 하자든가, 내년에 또 이곳에 오자든가 하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런 얘기를 부러 먼저 꺼내는 사람은 언제나 유메였다. 슈텔은 미래를 기약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명을 안고 그는 살아왔다. 그랬다. 슈텔과 유메에게 있어서는 슈텔이 먼저 죽는 것이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제 목숨을 해변의 모래알처럼 무한한 것처럼 퍼내어 남에게 건네주는 남자가, 오래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텔은 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 기둥을 그렇게 쉬이 놓아버리겠는가. 비록 유메를 만나고 나서는 기둥이 두 개로 늘기는 하였으나 놓아버리기에는 여전히 버거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유메가 말하는 미래를 그는 검은색으로 덮어버리곤 했다. 유메는 그 검은색으로부터도 반짝이는 우주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죽어도, 너무 슬퍼하면 안 돼.
 왜 그런 말을 해요. 
 넌 왜 그런 얼굴을 해?
 당연히, 하죠.
 난 사람들의 소원을 계속해서 들어 줘야 하니까…….

 슈텔이 그런 말을 내뱉으면 유메는 언제나 말없이 묘한 얼굴을 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낯. 유메는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기쁠 때면 있는 힘껏 행복하게 웃었고, 슬플 때면 온 마음을 다해 울었다. 슈텔 또한 여전히, 처음을 기억했다. 유메 앞에서 별똥별을 만들어내고 코트를 꺼내줬을 때도, 어린아이를 위해 토끼들을 따뜻한 곳에 데려다줬을 때도 유메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고 그가 이뤄줄 수 있는 남은 소원의 수를 입에 올릴 때면 늘 애매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우는 얼굴보다 그게 더,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마침내 남자는 이제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이따금 내뱉곤 했던 말의 무게까지 포함하여 전부를. 수명을 깎아내면서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았다. 그 사람들이 제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상관없었다. 그게 삶의 이유였으니까. 그리고 유메 역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만약 유메가 반지에 갇힌 왕족을 깨우는 대가로 앞으로 살날을 희생했어야 한다면 그도 필경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 슈텔은 비슷한 심경이었다. 아무리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네가 살아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그의 세계에 유메가 필요했다. 그녀의 세계에 슈텔이 필요했듯이. 서로의 세계에는 반드시 서로가 있어야만 했다. 남자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숨이 막혔다. 그가 별똥별을 불러올 때, 동시에 그에게 주어진 별모래가 하나둘 스르륵 내려갈 때, 유메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던가. 무엇이 됐든 더는 볼 수 없는 얼굴이다. 한없이 투명해서 이제는 볼 수조차도 없는 사람이, 그의 몸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이 막혔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둘 중 언제나 유메의 몫이었다. 슈텔은 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날 때부터 죽음은 그의 동반자와도 같았다. 지금까지 몇 개의 고비를 넘어왔는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밀접한 존재였다. 당장 생이 끝난다고 해도 그는 당황하지 않을 만큼. 그저 유메가 아주 많이 슬퍼하리라는 사실만이 명백했다. 오랫동안 슬퍼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우습게도 그의 생각은 늘 그곳에서 멈춰버리곤 했다. 메테오벨 왕족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예로운 것이었다. 세상에 첫 호흡을 내뱉는 순간부터 길게 주어진 명줄을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데 전부 사용했다는 증표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는 긴 수명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죽음만은 명예롭게 수용할 수 있었다. 유메가 떠난 지금은 한층 더 그랬다. 

 죽음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슈텔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누워서도 유메를 찾았다. 유메가 살아 있을 때도 비슷했다. 왕가에 속한 자들은 연인이라고 해도 서로가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없었다. 하물며 트로이메아의 공주와 메테오벨의 왕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것뿐이었다. 지극히 단순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껏 내뱉은 말의 무게들을 체감한다. 언젠가 반드시 올 미래를 왜 굳이 가정형으로 꺼내 들었을까. 왜, 유메가 보는 앞에서 제 생명을 깎아내리는 일을 했을까. 그의 목 근처에서 별모래시계 속 별 조각들이 잘그락거린다. 그의 생명이, 소리를 낸다. 한겨울의 후회는 녹지 않는다. 유메와 만나고, 그녀가 계속 자신을 걱정하게만 했다. 남의 소원을 계속해서 빌어주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걱정하던 유메가 있었다.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조금 더 행복한 기억만 가져다줄 수도 있는 거였는데, 어째서 우리는 갈등해야만 했을까. 이것은 필시 남은 자만이 느낄 수 있을 감정이다. 유메가 느낄 일이 없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그런 가혹한 말이 어디 있을까. 떠나간 연인은 아름답고 상냥했으며, 잔혹했다. 그녀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냐며 투정을 부릴 수도 없게 영영 떠난 사람이,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저편 어디선가 소원을 비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몸은 여전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제 그에게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그는, 제게 주어진 일을 하기로 했다. 슈텔은 생각한다.  

 슬퍼하지 않는 법은 모르겠어. 너를 기리는 법도 잘은 모르겠어. 잊어야 하는 걸까, 평생 담아둬야 하는 걸까. 너를 생각하면 분명 슬퍼질 텐데,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잊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내가 떠올린 최선의 방법은…… 조금이라도 빨리 더 네 곁으로 가는 거야. 사람들의 소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들어주려고 해. 우리 같은 곳에서 다시 한번 만나자. 이번에도 네가 나를 깨워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를 올려봐 줘.

 무거운 몸을 옮긴다. 누워 있기에는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꼴불견이었다. 별모래를 옮기기 위해 걸음을 내디딘다. 그럴 때마다 자취가 새겨진다.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의 것만 같은 자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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