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연성교환/축전

타오르는 것과 남은 것 (커미션)

2차 커미션 / 2022. 07. 16

<Library of Ruina> 필립의 과거 날조 커미션

2023년 7월 프로젝트 문 사상 검증 및 직원 부당 해고 문제 발생 이전에 작성된 글입니다.

현재 프로젝트 문 장르 창작 및 소비 없습니다. 단순 백업을 위해 업로드합니다.

 둥지마다 문화와 관습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둥지를 구성하는 깃털마다 각각 다르게 내려져 오는 전승이나 전통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어떤 둥지의 어떤 깃털들. 다른 표현으로 한 둥지에서 오랫동안 지내 온 어떤 집안은 은밀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예언을 중시했다. 보통 예언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들 하겠지만 그들이 모셔야 할 신앙의 대상은 그 뜻이 지나치게 명료했다. 때로는 해석이 분명하지 않아 대행자를 불러오게 하는 검지의 지령과 다르게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둥지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다. 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선조가 모두 둥지에서 살았다. 어쩌면 둥지가 처음 성립되었을 때부터 둥지에서 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날개가 명령하는 온갖 잡일을 하다가 운 좋게 둥지 이주권을 얻어 기어들어 온 자들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그들은 날개의 후광을 입고 그 빛이 영영 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자손들 역시 둥지의 일원으로 살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사람의 태내에 아이 한 명이 잉태되기 전까지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남자아이였다. 부부의 첫 아이였다. 그는 4월의 마지막 날에서 5월의 시작으로 접어들어 가는 경계, 자정을 앞둔 시각에 태어났다. 장자의 탄생에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이었으나 집안사람 아무도 그렇게 굴지 않았다. 시일이 불길했던 탓일까. 불로써 기리는 봄의 축제. 마녀와 악마가 모여 속닥대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이한 밤. 그 중심에서 남자는 태어났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가문 대대로 자손이 태어나면 일원 중 누군가의 입을 빌려 그 미래가 읊어지고는 했다. 그것이 그들이 숭상하는 예언이었다. 그는 세상에 나고 첫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쏟아지는 시선이 부끄러운 듯 아주 가늘게 흐느껴 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미래를 읊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 본인이었다. 필경 잠들었던 아이가 낯선, 집안사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성인 남성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아이는 자라서 이 둥지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겁니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는 완전히 가문에서 배제되었다. 어느 누가, 둥지를 쑥대밭도 아니고 불바다로 만들 소년을 반길 수 있겠는가. 불이 물처럼 넘실대는 바다에서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둥지가 망한다면 가문도 온전할 수 없다. 지금껏 내려온 신탁과도 같은 예언은 단 하나도 비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운이 좋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러한 부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가문 사람들 대다수는 날개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만 교류했으므로. 뒷골목에는 발을 들일 일은커녕 가까이 갈 일조차 없어 그들에게는 뒷골목의 밤이란 한낱 가십에 불과했다. 하다못해 태어나는 날짜라도 달랐더라면. 세상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바로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했더라면. 어떻게든 더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울지도 않은 아이가 세상에 툭 던져 놓은 음울한 목소리는 겹겹이 쌓인 얇은 우연을 어떠한 확증으로 바꿔 버렸다. 필립.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증조부의 이름을 따 그렇게 불리던 아이는 출생 신고만 했을 뿐 가문에서 거진 없는 사람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 위로 드리워지는 유일한 그림자로 음산한 그늘 속에서 축축한 곰팡이처럼 자라났다. 건조한 재처럼 자랐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자명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먹이를 주고 잘 곳을 주고 입을 것을 준다고 해서 그 수혜자 전부가 사람이 될 리가 없다. 필립의 사례가 그러했다. 그들은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길들여야만 하는 가축처럼 좋은 음식을 먹이고, 삭막하고 아무것도 없으나 객관적으로는 퍽 좋은 방을 내어주고, 뒷골목 사람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그들 기준으로는 제법 저렴한 옷을 입혔다. 그냥 죽여버리면 될 텐데 왜 그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다만 방에는 안에서는 열 수 없는 자물쇠가 단단히 매달려 있었으며 창문에도 두꺼운 창살이 굳게 자리했다. 방보다는 감옥에 가까운 구조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교육을 받았다. 기계적인 교육이었다. 혹여나 머리의 규율을 어긋나는 일을 아이가 벌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집안사람들이 겁을 냈기 때문이다. 한낱 작은 아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싶지만 그들은 아이를 맹목적으로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에는 화근(禍根)을 향한 것도 포함된다. 저택 사람들에게 재앙은 불씨였다. 그 모든 것은 어쩌면 신앙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공포와 두려움은 결국 경외와 이어지는 일이었다. 둥지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언은 우회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을 포함한 둥지 전체를 불길로 휩싸이게 만들리라고 다들 추측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조차. 아이는 불을 무서워했다. 주입된 지식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필립에게 불의 두려움을 주입하려 했다. 둥지를 불바다로 만들리라는 예언을 타고났다면 불에 다가갈 수조차 없게 만들면 된다. 암묵적 결론이었다. 아이는 제대로 거대한 불을 본 적도 없이 자라났다. 한겨울에도 아이 방의 벽난로는 조용했다.

 필립은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삶에 순응했다. 다음으로 태어난 자는 무난한 예언을 받았고 평범하게 집안의 일원으로 수용되었다. 동생 되는 이는 그늘지고 습한 필립의 방과 다르게 해가 가장 잘 들어오는 방을 썼다. 제대로 된 후계자의 탄생에 사람들은 들떠 며칠 축제를 벌였다. 당연하게도 필립은 제외되었다. 평소보다 좋은 식사가 내어져 왔을 뿐이었다. 필립의 부모이기도 한 아이의 부모는 가장 좋은 물건들만 엄선해서 그 방 내부를 채웠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바깥을 내다 볼 수 있게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는 뒷골목 사람들이 평생 일해도 벌지 못할 만큼 비싼 옷을 입었다. 필립은 그 모든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상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상이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단어이므로. 그는 제가 받는 대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키워졌기에 그 전부를 당연하게 여겼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와 대화하기를 꺼렸고 피했다. 사용인들은 그에게 최소한의 말만 했다. 그에게 대인 관계란 책 속에나 존재하는 개념적인 이야기였다. 가정 교사를 통한 교육은 받았으나 그의 진정한 스승은 수많은 책이었다. 책은 객관적이니까. 저택의 서고는 넓고 번지르르했으며 과시를 위함인지 장서 수도 제법 많았으나 찾는 사람은 적었다. 구성원들은 누구나 원하는 책은 무엇이든 새것으로 사서 제 방 책꽂이에 집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성원에 필립은 포함되지 않았다. 역으로 그랬기에, 저택에서 제 방을 제외하고 서고만은 아무 이유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책에서 책으로 전해지는 오래된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나 믿음, 사랑과 애정, 그리고 동정이나 애틋함 같은 것. 도움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주는 게 옳다는 것. 그에게 그 모든 것은 그저 어떤 문자의 나열에 불과하였으나 어렴풋하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동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퍽 나중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품은 동경을 후회하게 된 것은 아주, 나중 이야기였다. 아무튼 먼 미래에 남자는 그러한 학습이 자신에게 해로웠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는 구시대의 가치가 낡은 먼지 냄새를 풍기는 서고에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배워 버렸다. 필립이 평범하게, 가문의 일원으로 자랐다면 배우지 못했을 감정들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록들이 그들의 서고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읽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그들이 사는 저택 1층 중앙에는 거대한 계단이 있었다. 중앙이라기보다는 입구가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손님이 찾아오면 그 계단 꼭대기에 서서 저택의 주인이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는 구조였다. 시선으로부터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리고 주인들이 서 있는 뒤편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다. 부부와 두 아이를 담은 그림이었는데 우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부부가 앉아 있고, 그 옆에 아이 둘이 서 있는 구도였다. 사람들은 어딘가 경직된 듯 보였으나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먼 거리도 10초만 지나면 금세 도착하는 워프 열차가 상용화된 이 시대에 사진 대신 그림을 걸어 두었다는 게 이상해 보일 법도 했지만 도시에서는 워낙 이상한 일이 잔뜩 일어나는 판이니 크게 거슬리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기이한 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 다른 물감으로 잔뜩 뭉개져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제대로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작품이 완성된 이후로 덧바른 탓에 아래로 엷게 원본이 비쳤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계속 그 위로 물감을 덧발랐다. 그 아래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그런 의도가 선연했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가려진 얼굴은 이 집안의, 꺼림칙한 장남이었으므로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 흩뿌려진 물감 아래 있을 얼굴의 주인만이, 이따금 서고로 향하면서 제 얼굴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낯을 하고서.

 이곳에서 필립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비단 예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교육 방침 아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양육되는 가문 속에서 홀로 다르게 키워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름에는 인간 관계의 배제가 우선적으로 포함된다. 그는 어떻게 사람을 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이 자랐다. 남들처럼 행동하고 반응할 수 없었다. 인간은 모방의 동물이었고 그에게는 따라 할 대상이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에게 붙은 교사는 여러 가지를 얻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설파하곤 했다. 직위, 재산, 친구, 가족, 지식, 돈……. 물론 그 모든 것을 교사가 말해준 것은 아니었다. 책을 읽다 보면 모르고 싶어도 자연히 알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교사는 그에게 말했다. 재산도 가족도 지식도 돈도 충분하니 당신의 삶은 이미 성공했다고. 필립은 납득할 수 없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남자는 어느 것에도 애착을 갖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쥐나, 창문을 두드리는 큰 새들은 불편했으나 싫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게 ‘싫다’는 감정임을 깨닫게 되는 것도 나중 일이었다. 필립의 감정은 무척이나 무뎠다. 그저 존재하고, 스러져 갈 뿐이었다. 누구라도 남자처럼 자랐으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립은 순응했다. 그게 그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운명은 간혹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 움직이기도 하는 법이다.

 그는 늘 일찍 잠들었다. 그렇게 키워졌다. 낮보다 밤에 불을 쓸 일이 많았으므로. 물론 둥지 최중심부에서 불로 방을 밝히는 일은 드물었으나 저택 사람들은 최대한 예기치 못한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 가문을 위해 마련한 수많은 대책 중 하나였다.

 어느 날 필립은 눈을 떴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모든 것에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포함된다. 목이 마르고 더웠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음에도. 필립은 제 방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불이었다. 불이라고는 책에서만 본 게 전부였지만 알 수 있었다. 남자는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이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립은 곧 손을 떼었다. 손이 아팠다. 처음으로 느끼는 고통이었다.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인간의 형체를 한 남자는 반쯤 녹아 있었다. 사람이 느껴야 할 공포심도 두려움도 없이 그저 그 형체만 얼기설기 끌어안고. 높은 온도의 불은 금속을 녹인다고 했다. 이 불을 오랫동안 쬐고 있으면 어쩌면 저도 녹아 없어지지 않을까요. 남자는 문득 그것을 떠올린다. 그에게 없어진다는 것은 축복에 가까웠다. 축복이었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축복도 저주도 큰 의미를 갖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라지고 싶지도 않았으나 이 집을 위해서는 사라지는 게 나음을 알고 있었다. 제 얼굴만 가려진 초상화가 알려 주듯이. 그러니 불이 겁나지 않았다. 비명조차 나지 않았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안경이 흐려진다.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었다. 녹아내린다. 전부.

 “이 집 사람들도 지독하구먼.”

 “스승님.”

 낯선 목소리들이 필립의 옅어지는 정신을 자극했다. 그는 눈을 떴다. 귀가 날카로워졌다. 사용인은 아니었다. 아니다. 사용인일지도 모른다. 그는 집안사람들과 최소한으로 접해 왔으므로 생경하기는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용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구하러 올 리는 없었다. 그 순간 필립은 애매하게 깨닫고 만다. 구하러 오는 손길을 기다렸던가? 눈앞에서 문이 덜컹거린다. 밖에서 자물쇠가 거칠게 울부짖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다. 알 수 있었다. 필립은, 난생처음으로 무언가 기대를 품는다. 아주 미약한 감정이었다. 문이 열린다.

 “안에서는 열지 못하게 해둔 것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여전히 낯선, 얼굴들이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이다. 남자의 머리는 하얬으나 그렇게 되어 버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웃는 게 익숙한 사람 같았다. 여자는, 짧은 청록빛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초록색 눈이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남자가 한참 나이가 많아 보였으나 여자가 말을 스스럼없이 뱉는 것이 두 사람은 퍽 다정한 사이 같았다. 사용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안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차림새가 생소했다. 그들은 거센 불길에도 아랑곳 없이 그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불길은 그들을 침범하지 못한다. 아,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여린 기대는 스러진다. 하지만 그의 방을 태운 불씨로부터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떨어진 불씨가 길을 침범하고 있어서 말이야. 집주인들께서는 모르는 체하길래 지나가는 참에 들러 봤는데…….”

 하얀 머리의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부서지고 타오르는 방을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필립에게는 알 수 없었다. 대신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자신이 이 방의 열기에 금속처럼 녹아 없어지기를 바랐던 사람들. 제 얼굴 위로 물감을 덧바른 누군가…….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을 자랐으니까. 누군가가 일평생 살았던 방이 형체를 잃고 일그러진다. 방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불사조는 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르고 그 재 속에서 새로 태어난다고들 했다. 제 손으로 불을 지른 것은 아니지만 필립은, 분명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잃었던 형체를 되찾아간다.

 “사정은 당장 묻지 않겠네. 마침 일손도 부족하던 참이니…… 같이 가지 않겠나?”

 “스승님도 참, 이런 집안이랑 얽히면 사정이 복잡해지지 않겠어요?”

 여자가 단박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은 집안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호칭에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 관계임을 알았다. 어울리지 않는 상이었다. 조금은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불 속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그가 있는 곳으로. 필립은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이 정도야 괜찮다네, 유나 양. 내 그 정도 힘은 있지.”

 “뭐…… 일 잘하는 후배 한 명 있었으면 하기도 했지만요. 너, 따라올래?”

 두 개의 손이 내밀어져 온다. 처음 다가오는 타인의 손이었다. 처음 다가오는, 손이기도 했고 처음 다가오는, 타인이기도 했다. 필립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손이 내밀어져 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배우기는 했지만 학습과 실전은 아무래도 다른 편이므로. 불 속에서 얼어붙은 그의 손을, 두 사람이 먼저 쥐었다.

 “손을 온통 다 데었네.”

 “뜨거웠을 텐데 소리 하나 안 내는 걸 보면 딱 우리 사무소 인재이지 않은가.”

 “그건 그래요.”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제 겉옷을 벗어 필립에게 둘러 주었다. 이상하게도 열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꿈일까. 꿈일지도 모른다. 타인은 늘 그에게 생경하고 낯설고 섬뜩한 존재였지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책에서나 읽었던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길을 헤집고 나아 간다. 불은 그들을, 필립을 삼키지 못한다. 두 사람 또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그들의 등을 필립은 각막에 새겨두고 싶었다. 한 번 눈 뜬 이름 모를 감정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을, 해결사라고 하는 걸까. 도시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듣고는 했었다. 집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지만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어떤 책에서 해결사는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정의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이들이었다.

처음으로 내디딘 저택 밖에서는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났다. 타는 것은 그의 삶이었고, 그의 정신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필경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했다. 방 안의 남자 역시 타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살던 저택은 거대했고,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창살 없이 본 저녁노을은 어쩐지 서먹했다. 하지만 이제는 감내해야만 했다. 바깥의 중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으나 붙잡는 손길 탓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저택에 드리워진 불길이 하늘까지 뻗쳐 있었다. 불길은 노을 속으로 아름답게 녹아든다. 아름다웠다. 저녁노을이, 새벽을 닮았다.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필립은 여전히 두 사람에게 손이 잡혀 있었다. 등 뒤에서 그가 살던 방이 후드둑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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