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The Blue Night of Jeju Island

https://youtu.be/JVZSJ0remok?si=pLQsdw5IJhUXR_nc

‘영 시작이 좋지 않군.’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박사의 표정은 오늘 날씨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기상 예보를 안 찾아본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하늘이 정한 일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사?”

한참 생각에 잠긴 박사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담당 어시스턴트였다. 팬텀은 박사의 페이스 가드 너머를 꼼꼼하게 살폈다.

“괜찮나? 무리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아니, 괜찮아. 그냥, 날씨가 영 별로라서.”

“아.”

팬텀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곳저곳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나는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참 기특한 소리였다. 하마터면 박사도 “그래? 온종일 호텔에서 뒹굴거리면서 놀까?!” 하고 속마음이 튀어나갈 뻔했다. 하지만 박사의 의도와는 맞지 않았다.

“모처럼 새로운 도시잖아. 함께 구경하고 싶어.”

팬텀과 같이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두 사람만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고요한 아침 해가 뜨는 나라, 단국의 작은 섬에서(이건 박사의 착각인데, 자잘한 섬이 많은 단국에서 제주도는 상당히 큰곳이다).

“만약 팬텀이 불편하다면 호텔에 가도 괜찮아. 나도 너랑 있고 싶은 거니까.”

“….”

팬텀은 대답없이 필라인 쪽 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박사와 닮은 귀는 귓불이 붉게 익어 있었다.

“…가자. 박사. 네게는 충분한 계획이 있겠지? 보여다오. 기꺼이, 곁에 있게 해줘.”

박사는 팬텀의 손을 잡았다. 생긋 소리 없는 미소가 선명히 보여 팬텀은 차마 자신의 손을 빼내지 못했다.

비록 칙칙한 날씨는 박사의 예정에 없었지만, 자세한 관광 계획은 갖고 있었다. 관광 가이드가 보면 현지인이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싶을 만큼 통제병에 걸린 계획성을 자부할 수 있다.

“차를 빌릴 거야. 공항이랑 멀지 않다는 것 같은데.”

제주도는 섬이라서 교통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마차 포함 자차가 있으면 어디든 운신하기 편했다. 동방의 이국도 흔한 일반론에 포함되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소지한지 1년 이상 된 운전 면허증이 있으셔야 되어서요.”

렌트카 매니저는 난처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엥?”

“내가 갖고 있다.”

벙찐 박사 대신 팬텀이 사인을 갈겼다. 언제 봐도 유려한 글씨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수줍음 많은 필라인 남성은 냉큼 손을 뺐다.

“영화 출연한지 일년은 됐으니까.”

팬텀의 보증으로 세련된 스포츠카를 빌렸다. 뭔가 조금씩 맞물리던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박사는 애써찝찝함을 모른 척했다.

“내비게이션은 내가 입력할게! 다 준비됐거든!”

“응, 박사에게 맡기지.”

팬텀은 성산일출봉의 아침 햇살처럼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좆됐다(단국식 욕설).”

다 준비되기는 개뿔.

“….”

박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먼저 팬텀과 간단히 점심부터 해결하려고 미리 알아봐둔 식당이 문제였다.

“금일 재료 소진으로 영업 종료? 장난하냐고! 점심 시간 시작한지 2시간밖에 안 됐잖아!”

혹시나 싶어 예비로 알아봐둔 곳에서도,

“임시 휴무라니, 웃기지말라고!”

“웨이팅 3시간? 어떻게(이하 단국식 욕설).”

이 지경 이 꼴이었다.

박사의 지시에 따르다 여러번 헛걸음한 팬텀은 그저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박사는 어디에다 호소할 겨를이 없어 욕설만중얼거렸다. 누가 그 억울함을 알아주랴. 웨이팅에 미친 D의 일족을 얕본 박사의 잘못이 컸다.

결국 두 사람은 관광객 인파에 떠밀리며 점심 끄트머리에서야 겨우 구멍 가게 같은 식당을 발견했다. 요즘 유행 중인 씨푸드 보일링 찜(해산물 비닐 봉지 찜)이나 고사리 흑돼지 구이(단국하면 철판에 구운 돼지 구이가 유명하다)도 아니고 무슨 해장국 전문점이었다. 허름한 간판이 노포처럼 보였는데, 박사나 팬텀이나 식도락가는 아니어서 맛집인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여기서 가볍게 먹고, 카페 가자. 바다(아직 시테러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 수역)가 그렇게 예쁘대.”

“응.”

다행히 팬텀은 박사의 거듭된 실패에도 꼴사납다고 여기진 않는 것 같았다. 아까처럼 웃어주진 않았지만, 혐오하는 시선도 아니었다. 아직 만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밑반찬이라 불리는 부식(사이드 디쉬)은 흥미로웠다. 매콤한 걸 좋아하는 국민성답게 대부분 매운 것들이었다. 팬텀은 한점씩만 먹고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두었다.

“꽤 재밌는 곳이군, 박사.”

맛있다, 맛없다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는 점이 팬텀다웠다. 어떤 배역이라도 쉽게 몰입하기 위한 자아는 호불호가 분명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극단의 레슨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팬텀의 본성이 그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팬텀과의 여행을 즐기고 싶은 박사의 입장에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래도 본식만 맛있으면 괜찮았다.

‘망했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낯선 용기에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진득한 국물. 고춧가루와 깨, 파만 송송 올라온 모습은 빈말이라도 맛있어보이기는커녕 바닷속 진흙이 부글거리고 있는 듯보였다.

“음, 생긴 건 이래도 먹으면 맛있을 거야.”

팬텀보다도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후후 불어 맛보았다. 걱정은 기우였던것처럼 꽤나 슴슴한 고깃 국물이었다. 가닥가닥 찢긴 고기와 고사리라 부르는 식물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매콤한 밑반찬이 아삭아삭한 식감을 더해주었다.

“나쁘지 않아.”

꽤나 반가운 소리였다. 울적한 말투가 퍽 다정하게 들려 박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음식을 밀어 넣었다. 다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마치고(팬텀의 그릇은 받을 때와 큰 차이가 없어보였다), 렌트카에 올라탔다.

“아, 맞아. 이거 천장 열리는 것 같은데.”

기왕 팬텀과 둘만 여행을 가는 거, 멋 좀 부려보자고 가장 좋은 차를 빌렸다. 무리하진 않았다. 이래보여도 박사는 거대한제약 회사의 임원이다(그것도 창립부터 함께한 간부).

“박사.”

“응?”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도착할 당시부터 흐렸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퉷 하고 내뱉었다. 차 안에 있어서 맞진 않았지만 박사는 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썩 불쾌했다.

“아니, 어째서….”

로도스 제일 인기남과 여행이라도 온 게 잘못이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제법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건만,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이 순간 박사에게만 들이닥치고 있는 것 같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 내리는 비조차도 박사만큼 밑바닥에 떨어지진 않았으리라. 팬텀은 조용했다. 질책이라도 해주면 마음이 편하겠건만, 미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팬텀은 팬텀이었다. 가면을 쓴 듯 알기 힘들었다.

“박사, 이 카페가 맞나?”

팬텀의 말에 고개를 들자, 3층짜리 건물이 대나무 죽순처럼 우뚝 솟은 듯 나타났다. 빅토리안 양식 같았는데, 잿빛 하늘탓인지 우중충해보였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기 전에 자리가 있는지 확인 먼저 해주세요.”

다소 지쳐 보이는 점원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프로라 그런지 피곤한 듯한 손길조차 기계처럼 재빠르고 정확했다.

두 사람은 미약한 기대감을 품고 계단을 올랐다. 이늑한 실내에 편하게 앉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근사한 통유리창 앞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님들의 대화 소리도 거슬리지 않을 테다. 이렇게 궂은 날에 카페를 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내가 하면 로맨스하면 남이 하면 불륜이듯 박사팬텀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아.”

팬텀이었을까, 박사였을까. 동시에 기가 탁 풀려 입이 열렸을 수도 있었다. 오늘 반 나절 사이 D의 일족에 대한 평가를 여러 번 고칠 수 있었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가는 곳곳마다 한 발 앞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가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박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미안. 다른 곳이라도 갈래?”

“미안해할 것 없다.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하겠지.”

완곡한 거절이었다. 운전하는 입장에서도 맨바닥을 몇 시간 씩 헤매는 것보단 호텔에서 쉬는 게 나을 터였다.

“그럼, 커피만 사가자…. 따뜻한 게 마시고 싶어.”

“알았다.”

완전히 망했다.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었다. 박사는 한숨으로 땅을 꺼트리는 대신 커피 두 잔을 샀다. 제주 특산품 같은 감귤이나 우도 땅콩으로 만든 라떼였다. 말린 감귤칩이나 로즈마리, 땅콩 분태 같은 게 뿌려져 있어서 과연 인기를 알 만했다. 팬텀은 바로 마시지 않고 차량용 컵홀더에 음료를 꽂았다. 그 모습을 본 박사는 입으로 컵을 가져가려다가 말았다. 간신히 눈치는 챙겼다.

“팬텀? 여긴 호텔 방향이 아닌데.”

“…이쪽 도로를 타면 좀더 빠르다.”

그런가? 박사는 지은 죄가 많아 더 따지진 않았다. 열없이 뜨거운 종이 컵만 만지작거렸다.

“박사, 비가 그쳤다.”

“어? 어.”

“…천장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빗물이 조금 떨어질 수도 있지만.”

팬텀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박사는 입을 헤 하고 벌렸다. 팬텀이 박사가 한 말을 염두했을 줄은 몰랐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떨까. 풍경도 잘 보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없어.”

우리 둘 뿐이다. 박사는 멍하니 팬텀을 바라보았다. 막막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 이따금 꾸짖듯이 지천을 울리는 천둥. 푸르기만 한 거대한 물 웅덩이 앞에는 작디 작은 두 사람과 자동차 뿐이었다.

“오늘 정말 예기치 못한 일들 뿐이었지.”

“윽, 미, 미안해. 알아본다고 했는데….”

“후후. 네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봤다. 고성의 함정조차도 냉정하게 파헤쳤는데.”

“그건….”

팬텀은 운전대에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처음 겪는 일밖에 없었지. 너와 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후회하는 걸까? 박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목이 타는 것 같은데 손에는 갓 나온 커피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지. 박사, 넌 후회하나? 네 곤란한 모습을 좋아한 건 아니야. 난 그저…. 너와 보낸 하루가무척 즐거워서, 내일은 또 무엇을 할 지 기대되더군.”

“난 아주 엉망이었는데…. 힘들지 않았어?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순 없어.”

“네 말대로다. 기껏 극단에서 나왔는데 다시 끌려갔지. 하지만 네가 와줬고, 태양은 떠올랐다. 모든 게 나쁘다고도 말할순 없다. 박사….”

하얀 물보라가 검은 현무암에 부딪히며 사라졌다. 팬텀은 부드럽게 웃었다.

“머리 좋은 네가 잊어버린 건 유감이지만…. 나는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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