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Sunday Sundae-gukbap Club
BL
로도스 아일랜드의 본선은 용문 근처를 순항하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조금 멀리 가기도 했지만, 주로 용문과 멀지 않은 황야에 있었다. 휴가를 얻은 오퍼레이터들은 왕복 차량을 대여하거나 직접 운전하거나 했다.
박사와 팬텀은 후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모처럼 둘이서 나가는데, 기왕이면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차편이 언제 마지막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건, 솔직히 멋이 없었다.
“박사, 이 모퉁이만 돌면 나오는 것 같다.”
“응. 일요일 아침이라 사람도 별로 없네.”
암만 용문이 염국의 경제 특구라고 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돌릴 구성원들은 여전히 잠들어있고, 아침이 빠른 사람들조차 주말의 태양은 다른 날보다 늦게 뜨곤 했다.
“안쪽에 주차하겠다.”
“편하신대로.”
박사의 아침은 다른 이들의 밤과 다를 바 없다. 모처럼 얻게 된 휴일도 한밤중에 시작하니까 따지고 보면 지금은 이른 저녁이나 마찬가지였다.
“햇볕 참 기분 좋다. 공기도 신선하고.”
“그런가.”
“직접 쬐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로도스 아일랜드의 요인(한자)으로써, 함부로 신상을 노출하는 건 곤란했다. 박사도 자신의 입장을 이해했으며, 오히려 얼굴을 드러내라 하거나 다른 옷을 입으라고 하면 어색할 것 같았다. 다만 동행도 꽁꽁 싸매면 수상쩍으니 좀 가볍게 입어달라고 부탁했다.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정도로 줄이니 그저 용문의 많고 많은 관광객처럼 보였다.
“박사, 조금 걷다가 들어갈까.”
팬텀은 어색하게 바닥을 바라보며 권했다. 옆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귀 뒤로 넘긴 게 여간 익숙하지 않는 듯했다. 연기하는 걸로 치라고 했더니, 드물게도 팬텀은 정색했다.
“나는 너와 만나는 배역을 맡은 적 없어. 그리고 그런 연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림자처럼 자아도 희미한 인간이, 박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던 것이다. 연인인 척은 하고 싶지 않다. 박사와 사귀는 건 연기도 무엇도 아닌 진짜니까. 연기에 대한 소명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솔직하게 주장하는 모습은 꽤나 사랑스러웠다.
“좋아. 오랜만에 손도 잡자고.”
두 사람은 어젯밤에도 열심히 잡았지만 감상은 다소 다르다. 가슴께가 느른하고 간질간질했다.
낯선 이국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둘은 느긋하게 걸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단국 식당. 낡은 간판이 흐릿하게 빛났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 막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박사와 팬텀도 벽에 걸린 텔레비전이 보이는 쪽에 앉았다. 곧 앞치마를 두른 퉁퉁한 우르수스 여자가 플라스틱 물병과 당근과 고추가 든 그릇을 탁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특이요, 보통이요?”
메뉴는 단 두 가지 뿐인가. 고개를 돌리면, 차림표가 보였다. 그냥 순대국밥과 특 순대국밥, 그리고 순대 모둠과 주류가 적혀 있었다.
“어, 둘이 무슨 차이죠?”
“특은 내장이랑 고기를 더 넣어드려요. 관광객?”
“아, 네, 네.”
“둘 다 보통으로 하고 순대 모둠 먹어요. 젊은 남자들이니까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어.”
“그럼 그걸로 할게요.”
“술은?”
“괜찮습니다. 차를 갖고 와서….”
빠르고 어설픈 염국어가 쏟아졌다. 용문 출신 오퍼레이터의 추천을 받아 왔을 뿐 달리 아는 것도 없고 해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둘에 모둠 하나요!”
여자의 우렁우렁 큰 목소리에 화답하듯 부엌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박사와 팬텀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들한테도 인사 하나 없이 물병과 채소를 내려놓고 메뉴부터 묻기 시작했다.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는 현지인, 관광객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했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인가봐.”
박사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맞은편에 앉은 팬텀도 고갯짓으로 묵묵히 동의했다.
“이 당근 스틱? 같은 건 먹으라고 준 것 같은데…. 일단 물부터 좀 마시자.”
식탁 구석에 뒤집어져 있는 스테인레스 컵에 물을 따라 팬텀한테 건넸다. 팬텀은 신묘한 얼굴로 갈색빛이 도는 물을 받아마셨다.
염국 식당에서 차를 내오는 건 흔한 일이지만, 염국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단국 사람들도 차를 내오는 것 같았다. 이름은 몰라도 구수한 맛이 좋았다. 팬텀이 차를 마시고 있으면, 박사는 채소만 내려둔 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역시 이름을 알지 못하는 벽돌색 소스. 당근과 고추를 찍어먹으라고 내놓은 것 같았다.
“…특이하네.”
염국에서 살고 있지만, 염국과는 분명 다른 문화였다. 타향살이에 지친 단국 사람들이 모여 살아 D타운이라고 부른다는데, 해외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모양이었다.
박사와 팬텀이 조심스레 새로운 문화와 접촉하고 있으면, 아까 주문을 받았던 우르수스 여자가 하얀 접시와 뚱뚱한 캔 하나를 내려두었다.
“순대 모둠이요. 음료는 총각이 잘생겼으니까 서비스.”
“…감사합니다.”
주문은 박사가 다했으나, 공은 팬텀이 얻고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박사는 냉큼 칭찬을 받아들였다.
“들었어? 팬텀 너 잘생겼대.”
“…조용히 해줘.”
“왜? 잘생긴 루시안.”
팬텀은 히죽히죽 웃으며 놀려대는 박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별로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이건 빅토리안 블랙 푸딩처럼 생겼군.”
“맛은 좀 다르네. 뭔가 투명한 면 같은 게 들어있어.”
둘은 신중하게 음식을 분석하며 맛보기 시작했다. 박사는 본디 연구자였던 터라 금세 학술 스위치가 올라간 것 같았다.
“이대로 먹는 건가? 너무 뜨거워보이는데.”
팬텀은 숟가락으로 내용물을 휘휘 저었다. 하얀 국물이 팔팔 끓는 검고 작은 솥(뚝배기)이 조금이라도 식길 바래서였다. 박사는 필라인이 아니었지만 그 무의미한 저항에 동참했다. 침울해보이는 팬텀을 두고서 먼저 식사할 만큼 밥상머리 교육이 모자라지 않았다. 괜히 학위를 소지한 게 아니다.
“잠깐 기다려봐. 내가 먼저 뜨거운지 확인할게.”
“조심해라, 박사.”
독특하다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고, 벽걸이 TV에선 손님들의 취향에 맞춘 단국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염국도 외국이지만, 그 안에도 다른 나라가 있었다.
“먹어도 되겠어. 아니면, 호호 불어줄까?”
“됐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팬텀의 모습은 영락없이 흔한 필라인 청년으로 보였다. 박사는 자신 앞에서 팬텀이 자기 또래처럼 구는 게 퍽 즐거웠다. 극단의 블러드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팬텀도 아니고 그냥 루시안일 뿐이다. 박사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때, 입에 맞아?”
“음.”
다행히 맛없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진하고 따뜻한 고깃국물은 호불호가 생기기 어렵기도 했고.
“아까는, 고마웠다.”
팬텀은 작은 목소리로 기미에 감사를 표했다. 박사는 대답 대신 눈썹만 치켜뜨고 식사에 집중했다. 식으면 맛이 없는 게 또 고깃국물이었다.
두 사람이 그럭저럭 분위기에 적응해서 식사를 마칠 쯤, 손님들은 아까보다 늘어나있었다. 오퍼레이터의 추천대로 단골도 관광객도 많은 식당인 듯했다.
“슬슬 일어날까. 아까 걸으면서 봤던 카페도 열었을 것 같아.”
입이 짧은 팬텀의 그릇은 그다지 준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팬텀은 양에 만족한 듯 티슈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래.”
용문폐를 지불하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가 되기 전 바람은 적당히 시원하게 불었고, 햇살도 따갑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손을 맞잡았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일류 제약 회사의 간부도, 수상한 극단의 전 암살자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간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도록, 이토록 평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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