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 타임머신
-사망 요소 있음.
“무현 씨, 저랑 타임머신 만들어요.”
“네? 아.”
무현은 재희가 들고온 ‘어린이도 할 수 있는 타임머신 만들기’ 키트를 내려봤다가, 다시 재희를 올려봤다. 그러고보니 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어떤 과학자가 타임머신에 재희를 태워주겠다고 하면 무한교를 버릴 거냐는 질문에 재희는 망설임없이 버리겠다고 했다. 무현이 재희에게 지금부터 물리공부를 해서 직접 만드는게 더 가능성 있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무현은 재희가 가져온 키트를 넘겨받았다. 무현의 어깨너비의 길이에 가볍지는 않지만 아주 무겁지도 않은 상자. 무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상자 뚜껑을 열자 타임머신이라기엔 조악하고 장난감이라기엔 복잡해보이는 기구가 드러났다.
“이게 뭡니까?”
“보시다시피 어린이도 할 수 있는 타임머신 만들기인데요.”
무현은 동봉된 설명서를 꺼냈다. 어린이도 이해하기 쉽게 만든 조립순서와 조작방법 뒷편엔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로 타임머신 원리에 대해 깨알만한 글씨로 주절주절 설명되어 있었다. 다시 앞면으로 넘겨 조작방법을 대충 훑어본 무현이 재희에게 물었다.
“이거, 이 원통형 기구 안에 든 것만 과거로 보낼 수 있다는데 그래도 하고 싶어요?”
원통은 아주 작았다. 얼마나 작냐면, 재희의 피어싱 한두개를 넣으면 꽉 찰 것 같았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제가 물리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요,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재희가 식물 관련 외에 뭔가를 직접 사와서 하자고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무현도 가벼운 마음으로 어울려주기로 했다. 뭘 넣는게 좋겠냐는 무현의 물음에 재희는 일단 정말 되는지 확인하고 싶으니 날짜가 적힌 메모지를 넣자고 했다. 무현과 재희는 주말 내내 조립 설명서를 읽으며 기구의 나사를 조이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하라는 대로 기계를 작동시켰지만 무참하게 실패했다.
어린이도 할 수 있는 거라면서요. 진이 다 빠진 무현이 타임머신 옆에 널부러져서 중얼거리자 그 반대편에 엎어져 있던 재희도 투덜거렸다. 하여튼 이래서 머리 좋은 놈들이 싫어요.
재희는 그 뒤로도 꾸준히 무현에게 타임머신을 만들자고 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어린이도 할 수 있는 타임머신 키트를 성공시키긴 했지만, 워낙 날짜가 적힌 메모지가 집 안 구석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던 터라, 원통에서 메모지가 사라진 건 확인했지만 과거로 갔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재희는 어쨌든 원통에서 메모지가 사라진건 처음 아니냐며, 이건 성공이라고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무현은 어찌됐든 이제 주말마다 어린이용 키트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맬 일은 끝났다고 생각해서 안도했다.
“이건 또 뭡니까.”
“다음 단계요.”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마당에 엄청나게 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무현의 키만한 상자를 보며 무현이 경악하자 재희가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줬다. 기계는 몇 십년은 되어 보였다. 철판에 나사로 조여진 부분이 전부 녹이 슬어 붉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때가 탄 기계는 의미 모를 계기판과 버튼이 빼곡했다.
“어린이용 다음 단계라기엔 좀, 많이 건너뛴거 아닌가요?”
딱 봐도 어떤 미친 과학자가 뭔가 만들어보려다가 실패해서 처박아놓은 기계처럼 생겼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어린이용 다음에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이 만들 수 있는 타임머신 키트도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악용할까 봐 그런걸까요?”
몰라 이 자식아. 무현은 성인용 타임머신 키트는 왜 팔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기계를 노려봤다. 일단은 창고를 하나 구해야할 것 같았다.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중고기계는 외곽에 지어진 한 컨테이너 박스에 설치되었다. 재희가 투덜거렸지만 무현은 집 마당에 그런 기계를 둘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주말마다 자동차로 10여분을 달려 타임머신을 작동시키러 가던 재희는 한 해가 지날수록 기계를 살펴보러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무현은 재희가 가자고 하지 않으면 굳이 가지 않았다. 대신 재희를 데리고 식물원에 놀러가거나, 집에서 서로에게 기대 티비로 영화를 봤다. 해저기지에서 탈출한지도 20년, 한 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놨던 사건이 이제는 지나간 흉터로 변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살면 안돼요?”
“….”
기울어진 의자에 편하게 기대 앉아 있던 무현에게 재희가 다가왔다. 무현은 재희에게 손을 뻗었다. 환갑이 넘었어도 재희는 여전히 멋있었다. 무현이 재희의 얼굴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을 엄지로 쓸어만지다가 미소지었다.
“70살 넘게 살았으면 충분하죠.”
“요즘 기대수명은 130살인데 절반밖에 안 살았잖아요.”
“그건 병도 없고 건강한 사람 이야기고요.”
무현은 척추에 박아 넣은 철 때문에 수술을 몇 번 반복했다. 몸이 늙으면 자연스럽게 같이 쇠하는 다른 뼈와 달리 철로 만들어진 보형물은 홀로 뻣뻣이 서서 늙어가는 무현의 몸을 아프게 긁어댔다. 반복되는 전신마취와 척추 수술은 무현의 몸을 빨리 쇠하게 만들었다. 기대수명이 130살이라지만 보통의 인간은 80살 전후로 세상을 떠났다. 무현이 특별히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두고 먼저 가는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너무 힘들어요.”
무현이 미안해하며 양손으로 재희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의안도 고장난지 오래였다. 또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해 찾아간 병원에선 벌써 4번이나 수술한 것을 확인하더니 무현의 나이에 5번째 수술을 받게되면 성공률이 5%도 안된다고 했다. 수술받다가 사망하거나 진통제로 버티다가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무현은 후자를 골랐고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진통제도 더 듣지 않았다. 무현이 슬슬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 재희는 소리도 못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음이 아팠다. 아팠지만….
“…재희야, 나랑 살아서 좋았어?”
“…응.”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무현은 재희가 이별을 받아들여줬으면 했다. 걷지도 못하는 자신의 병수발을 들다가 서로 못볼꼴을 보이고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서 무현의 사망을 후련하게 여기는 이별이 아니라, 무현이 멀쩡한 모습일 때, 웃으면서 이별하고 내세를 기약했으면 했다.
곧 시간이 되어 담당직원이 들어왔다. 무현에게 서류를 보여주고 서명을 받고, 이제 걷지도 못하는 무현이 재희와 마지막으로 짧게 입맞춤을 하고, 그리고,
무현은 편하게 눈을 감았다.
처음에 타임머신을 만들려고 한 건 진심이었다. 무현 씨도 무한교보다 그게 더 가망이 있겠다고 말했고. 하지만 어린이용 키트를 작동시키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재희는 좀 포기하고 싶어졌다. 아냐, 그래도 이게 몇 번째 시도인데. 재희는 ‘어린이’라고 적힌 글자를 노려보다가 키트 재구매 버튼을 눌렀다. 타임머신은 포기하더라도 이건 성공하고 싶었다.
조잡한 어린이용 기구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나자 욕심이 생겼다. 중급 타임머신 만들기는 없나 싶어 열심히 검색해봤지만 찾은 건, 해외 중고 사이트에서 몇 년째 팔리지 않은 어느 과학자의 유품이었다. 재희가 이메일을 보내자 과학자의 딸은 자기가 이걸 올려놓은것도 까먹고 있었다며, 기계를 통째로 버릴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체하기엔 잘못 건드렸다가 시간여행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창고 구석에서 보관 중이었다고 했다. 재희는 기계값 대신 운반비만 대신 내고 미국에서 건너 온 중고기계를 받았다.
처음엔 흥미가 있어서 몇 번 시도를 해봤는데 반응도 없는 기계를 주말마다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시간낭비같았다. 재희가 창고로 걸음하는 주기가 길어질수록 무현이 기뻐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재희는 여전히 그때의 영화관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린 그 사건을 고쳐 쓰고 싶었지만, 무현의 손을 잡고 식물원을 거닐고 있다보면 컨테이너 박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무현이 없으면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재희는 무현을 떠나보내는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진통제로도 눌러지지 않는 고통에 밤마다 몸부림치는 무현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그의 뜻을 존중했다. 그러니 재희도 무현과 다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도 존중해줘야 한다.
무현이 질소캡슐에서 눈을 감았던 날과 같은 나이가 된 재희는 그간 자는 시간도 줄여서 겨우 고친 기계를 작동시켰다. 전기로 돌아가는 것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수상하게 큰 소리를 내던 기계는 계기판에 돌아가고 싶은 날짜를 입력해달라고 알림을 띄웠다. 돌아간다면, 역시 그 날이겠지. 수 년간 빠른 속도로 더 주름져진 손으로 망설임없이 버튼을 눌렀다.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나 싶더니, 재희의 눈 앞에 매끈한 피부의 무현이 웃고 있었다.
“왜 갑자기 멍 때려요?”
“….”
그 날의 대한도가 이렇게 날씨가 좋았었던가. 재희는 어쩐지 현실같지 않은 새파란 하늘과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해변을 바라보다가 무현의 손을 잡았다.
“그냥 좋아서요.”
“?”
8년을 그린 연인을 만나니까 너무 좋아서요. 재희가 옅게 미소지었다.
- ..+ 7
댓글 1
열정적인 뱁새
하...... 무현아.. 재희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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