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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히메] 고백의 다양성 (커미션)

2차 커미션 / 2022. 09. 27

<꿈왕국과 잠자는 100명의 왕자님> 토르x히메 커미션

 “토르 왕자님!”

 “무슨 일이야.”

 “그게, 트로이메아의 공주님께서…….”

 남자는 그 순간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한다. 언제나처럼 묠니르를 휘두르며 훈련을 거듭하고 있던 그때. 차갑게 식어가는 체온.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망치. 낯설지 않은 타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카롭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만 같다. 입을 재차 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가 겨우 되묻는다.

 “다시, 말해봐.”

 “예, 트로이메아의 공주님께서 문로드로 향하시는 길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으셨습니다. 아무래도 가보시는 편이…….”

 그 뒤로도 상대가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이상하게도 생경한 감각이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몸만이 조각난 채로 움직인다. 그는, 어느 순간 아스가르드의 문로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후회한다. 왜 유메를 배웅하러 가지 않았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실은 조금이라도 더 그 낯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유메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남자는 지킬 필요 없는 자존심을 내내 휘두르기만 했다. 이내 그가 손에 쥐었던 무기는, 역으로 그에게 꽂혔다. 후회가 전신을 잠식한다. 몸이 얼어붙어 간다. 아스가르드의 몬스터는 그 성정이 흉포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일순 시야가 점멸한다. 불이 꺼졌다가 들어온다.

 머리는 계속해서 유메의 형상을 자아낸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카락.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신을 보고도 환하게 웃는 얼굴. 오묘한 푸른빛의 눈동자. 토르.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저를 부르는 목소리. 거듭되는 거절에도 꿋꿋하게 내밀어 오던 손. 그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유메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의 나라에 묶어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마음은 연심조차 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갈 바람이라고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그럼에도 남자는 몇 번이고 꿈에서 여자를 보았고, 손을 잡았으며, 포옹을 했다. 훈련 중에도 문득 여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기도 했다.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토르는, 그 모든 것을 부정했다. 유메는 곧 트로이메아로 돌아가야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떨쳐 내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어른거리는 형상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대했다. 여자가 돌아갈 날을 세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이따금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게 지극히 모순적이었다.

 문로드로 향하는 길을 내달리며 그는 최악의 상상을 했다. 만약 유메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물론 외교 문제로도 번질 것이다. 유메는 트로이메아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문제는 지금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여자는 트로이메아의 공주이기 이전에 틀림없이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이었다. 일방적인 감정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인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연심이 아니라면 이토록 심장이 거세게 뛸 리가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몬스터로 인해 죽은 이를 숱하게 보았다. 모두를 구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메 역시 그런 식으로, 생을 끝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목을 틀어쥐었다.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짧은 숨을 연달아 몇 번이고 토해낸다. 제대로 된 호흡법이 필시 있을 텐데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니, 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유메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이윽고 그의 시야에 몬스터에게 공격받고 있는 마차가 눈에 들어 왔다.

 

 상황은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성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했다. 오랜 훈련 덕에 몸은 이성의 부재에도 그럭저럭 잘 움직였다. 다만 평소에는 잘 저지르지 않았을 법한 자잘한 실수를 거듭 저질렀을 뿐이었다. 아니다. 사소하지 않았다. 마차에 붙어 있는 몬스터를 떼기까지는 쉬웠으나 그 뒤가 엉망이었다. 평소라면 냉정하게 행동했을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날뛰었다. 최단 경로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고, 이성을 날려 보낸 채로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흥분한 몬스터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토르는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몬스터의 살을 가르고, 찢고, 내리쳤으며 그 과정에서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썼다. 그것은 몬스터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이기도 했고 남자가 흘린 피이기도 했다.

 그 일대의 몬스터를 전부 해치우고 그는 조심스레 마차에 올랐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디선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이 무거웠다. 전신에 피를 바른 제 모습은, 유메와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왕자와 공주보다는 괴물과 공주에 가까울 것 같았다. 숨이 차오른다. 호흡이 버겁다. 경첩이 뒤틀렸는지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남자는 힘을 주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틈이 생기고, 시선이 얽힌다. 눈이 마주쳤다.

 “토르.”

 “유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이런 적은 처음일지도 모른다. 유메는 늘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토르는 무시로 일관하곤 했으므로. 그러나 이번에는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낯 위로 겁에 질린 기색이 얹혔다가 곧 사라진다. 몸이 고꾸라진다. 넘어지지는 않았다. 남자가 급하게 여자를 품에 넣었다. 남자는 그 이유를 안다. 이렇게 피투성이인 사람이 문을 비집고 들어오면 누구라도 놀라겠지. 다가오고 싶지 않겠지. 속이 답답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남자는 이 감정의 이름을, 모른다. 다만 무기의 나라 아스가르드의 왕자로서 이 나라를 찾은 이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제 품을 가득 메우는 유메의 체온은 그럼에도, 지나치게 따뜻했다. 이대로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했기에 모든 게 괜찮았다. 허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스가르드의 왕자뿐이었다. 누가 봐도 중상을 입었는데도 남자는 좀처럼 병상에 누워 있으려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공주가 깨어나는 것을 봐야겠다며 흔치 않게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공주의 옆 방으로 잠깐 침실을 옮겼으나 대개 남자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가 늘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유메의 곁까지 향했기 때문이었다. 공주의 외상은 심각하지 않았음에도 정신적 충격이 큰 탓인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토르는,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보는 것이 자신이기를 바라면서도 또 자신이 아니기를 바랐다. 명확하게 모순된 감정이었다.

 다 낫지 않은 상처를 달고 유메의 방으로 향한 새벽이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안개가 일렁였다. 해는 한창 떠오르는 도중이라, 은은하고 거대한 촛불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빛은 그림자를 자아낸다. 침대에 앉아 있는 여성의 거대한 그림자가 남자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유메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마냥 계속 누워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앉아 있는가. 몸이 새삼스레, 다시, 얼어붙는다. 마치 처음 그 소식을 들었던 순간처럼.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쏟아지는 빛 탓에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토르.”

 “……”

 그 목소리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것. 반지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꿈을 꾸고 있었을 때 자신을 그물에서 건져내던 음성은 여전했다. 그 소리의 속성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를 덮어쓴 남자를 마주했던 때조차. 하지만 그만은 알지 못했다. 직면하기에는 겁이 났다. 처음으로 나가는 토벌을 하루 앞둔 밤에도 이토록 두렵지는 않았다. 남자는 얼어붙은 채로 그저 문을 닫았다. 토르, 잠깐만! 문 너머에서 다시 한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백한 회피였다. 그 와중에도 토르는, 유메를 향해 쏟아지는 빛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유메가 눈을 뜨고 며칠이 지났다. 의식이 돌아오자 여러 검진이 차례로 쏟아졌다. 유메는 괜찮다고 했으나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거듭되는 검진 끝에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안정을 위해 공주는 당분간 아스가르드에서 지내게 됐다. 토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유메는 그날 이후 토르와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일단 방 밖으로 나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가더라도 토르가 있을 법한 곳까지 가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소문에 의하면 많이 다쳤다고 했는데 괜찮은 걸까. 공주는 마지막 순간의 토르를 기억했다. 묘한 표정의 소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낯. 그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그늘이 그 얼굴 위에 덮여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소년은 늘 그러했듯이 한 조각의 대답도 건네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게 조금은 아쉬웠다. 그럴 입장은 아니었으나 그랬다.

 공주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리나케 그녀의 집사가 아스가르드를 찾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중상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마차에서 내리는 나비의 하얀 얼굴은 그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비는, 아스가르드 성의 토지를 밟자마자 유메에게로 달려갔다. 폭신한 털은 어딘가 축축했다. 작은 손이 유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죄송해요. 그러지 마. 나비는 아무 잘못도 없는걸.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토르는 멀리서 들었다. 청각이 절로 예민해졌다.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탓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는 그리 생각했다. 제 나라를 방문한 왕족을 지키지 못한 건 온전히 그의 탓이었다.

 나비는 문로드를 타고 오며 여러 서류 더미도 함께 들고 왔다. 병상에 누워 있어도 꿈세계를 다스리는 트로이메아의 유일한 왕족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었다. 토르가 고의적으로 유메를 피하는 동안, 유메 역시 많은 일을 했다. 국왕 내외의 배려를 받아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방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노라면 이따금씩 밖에서 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메는, 그럴 때면 고개를 돌려 오랫동안 그 방향을 보고 있곤 했다. 그 시선의 실을 타고 여러 감정이 흘러내렸다.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여자는 그 근원을 알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누군가는 명백하게 유메를 피하고 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 성에, 어느 순간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떠다녔다. 트로이메아의 공주님께서 한 차례 쓰러지신 후에, 그녀를 향한 청혼이 밀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집사가 매일 방으로 나르고 있는 게 서류가 아니라 구애를 담은 편지라고들 했다. 그 귀여운 외모 탓에 모두 쉬이 말을 붙여보면 그는 애매한 미소와 공주님께 직접 물어보시라는 답을 했다. 그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유메는 언뜻 보기에는 유약한 인상이지만 심지가 굳었고, 무엇보다 그 트로이메아의 공주님이었다.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명목상 공주였지, 트로이메아의 지배자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이에게 쉽게, 그것도 그렇고 그런 화제로 말을 붙이겠는가.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소문은 그 기세를 더욱 떨쳐갔다.

 부풀어 오르는 모양새가 아슬아슬하기까지 해 비눗방울을 연상케 했던 소문은, 곧 토르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혼 얘기가 오가는구나. 사실 나이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늦은 축이었다. 제 또래 왕자 가운데서는 이미 약혼한 자도 제법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묠니르를 계승하여 요르문간드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기에 조금 먼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었다. 저보다 연상인 유메는 이미 식을 올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왕족으로 태어나 받은 교육이 모두 그렇게 알려 주었다. 알고 있는데도 속이 메스꺼웠다. 낯설지는 않은 감각이었다. 이미 한 번 느껴봤던 것이었으므로. 유메는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좋은 사람과 결혼한다면 축복해주고 싶었다. 공기를 가르고 헤엄치는 소문을 보며 남자는 그리 생각했다. 이왕이면 빨리 상대를 정해서 아스가르드를 떠났으면 좋겠는데. 결혼할 왕자가 있는 공주가, 다른 국가에 머무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유메와 결혼이라는 단어를 연결 지을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이유 없이 아려왔다.

 그저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하던 남자는 결국 동력을 잃었다. 서서히 움직임이 멎는다. 가야 할 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멈추어설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같은 공간을 하염없이 오가더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처음 겪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감정의 종결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회피라고 할지라도 그랬다. 차라리 유메의 입으로 듣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를 움직이는 건 그것이었다. 훈련을 끝낸 남자의 발이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연다.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집사는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방에는 유메 뿐이었다. 싫은 내색도 없이, 여자는 그 이름을 부른다. 역시 그 소리의 속성에는 변함이 없다.

 “토르.”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거리를 달렸는데도 숨이, 찼다. 어떤 말을 뱉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붉어진 낯을 숙인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만년필을 들고 무언가 종이에 서명을 하던 유메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서 교차한다. 저건 예의 그 청혼일까. 점점 더 고개를 들기 어려워진다. 여자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펜을 내려놓고 차분히 입을 연다. 여전히 따뜻한 음성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공백을 여자는 화두로 던지지 않는다.

 “많이 늦었지만, 구해줘서 고마워. 나, 토르에게 꼭 이 말이 하고 싶었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난 이 나라의 왕자니까.”

 그제야 토르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는 늘 하던 말을 기계처럼 뱉어낸다. 아스가르드의 왕자. 묠니르의 계승자. 요르문간드의 숙적. 몬스터의 토벌자. 정해진 역할을,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유메의 앞에서 그는 뭘 해야 좋을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개가 잔뜩 낀 아스가르드의 계곡을 보는 것만 같았다. 유메도 자신처럼 동요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덤덤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유도 없이. 아니다. 이유는 틀림없이 있다. 다만 그가 부정할 뿐이었다. 그는 말을 뱉어낸다. 토해내는 행위에 가까웠다.

 “너, 결혼할 거야?”

 “응?”

 “청혼, 잔뜩 받았다고 하던데.”

 “……”

 여자가 웃는다. 입이 잠깐 닫혔다. 그 짧은 순간조차도, 남자는 긴장한다. 타고난 숙명이 숙명이라 늘 경계를 온몸에 두르고 다녔으나 지금은 그 결이 달랐다. 여자의 입으로부터 어떤 말이 나올지 남자는 두려워했다. 만약 유메가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유메는 입을 연다. 잠깐, 하고 멈출 새도 없이.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토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

 두 사람의 뺨이 동시에 달아오른다. 그럼에도 유메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토르는 그저 입을 벌리고만 있다. 그가 예상한 답은 두 가지였다. 결혼할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르는, 유메의 답변에서 그 자신을 배제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대치할 때는 수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놓았으면서 어째서 유메 앞에서는 고작 두 개의 답을 준비한 채로 서게 될까. 그는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관객으로 입장한 극에서 돌연히 무대로 끌어올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혹시 모르겠어?”

 “……바보. 내가 너인 줄 알아?”

 붉어진 얼굴을 보고 유메가 묻는다. 어쩐지, 조금은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바보. 남자가 작게 투덜댄다. 이어서 여자가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는 틀림없는 애정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것이 선명한. 그는 명백하게 유메에게 휘둘리고 있다. 토르는 그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어떤 의미로든 자신이 그간 겪어 온 괴로움에서는 벗어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감정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리라. 괴로움을 낳은 건 여자를 향한 마음이었으니까. 이제 그는 피하지 않는다. 직면한다. 책상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던 유메의 손을 잡는다. 여자는 손을 빼지 않는다. 체온이, 따뜻했다. 곧 남자는 그것을 들어 올린다. 손가락 끝이 하얬다. 입술이 가볍게 부딪힌다. 서투르게 내려앉은 입술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제는 그가 그녀를 휘두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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