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히메] 비밀
2018. 04. 23
통상 하쿠 스토리에서 공개된 설정 포함
“곧 성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하쿠 왕자님.”
그 말과 함께 한참을 덜컹대던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더 서두르라고만 짧게 전할 뿐이었다. 내릴 준비는 진작 끝나 있었다. 마차에 앉아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몸뿐이었고 그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성에서 떠나지 않았으므로 이는 당연한 얘기였다. 그가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성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왕자로서 책임감이 없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성과 나라는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그 성에 머무르고 있는 트로이메아의 공주, 유메였다. 그녀가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그곳이 바로 그가 있어야 할 장소였다.
그가 공주와 만나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잃어버렸던 것들을 전부 되찾아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사이 그는 많은 감정을 새로이 배워나갔다. 그가 새로 배운 감정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전부 같은 사람의 그림자였다. 다정한 눈을 가진, 동화책에서나 읽었던 상냥하고 아름다운 공주님. 그의 감정은 모두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을 그녀와 함께 누리고 싶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녀를 두고 여행길에 오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그만이 성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까지 리베일에 십 수년간 좋은 목재를 괜찮은 값에 넘겨주었던 나라가 갑작스럽게 가격 협상을 제안했고, 리베일에 얽힌 외교 문제에서는 늘 그러했듯이 그가 특사로 가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와 함께 다녀올 생각이었다. 지금껏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곳이다. 모든 일정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는 그가 가장 잘 알았다. 유메 없이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그가 없더라도 그녀는 아마 괜찮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없던 삶으로는 단 며칠이라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었다.
“저도 하쿠랑 같이 가보고 싶어요. 제가 가보지 않은 곳들을요.”
같이 다녀오지 않겠냐는 그의 권유에 유메는 활짝 웃으며 그리 대답했었다. “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략적인 일정이 짜여 나오기 전부터 그녀는 분주하게 제 할 일을 찾아서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일정이 공표되고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녀는 더 바빠졌다.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서재에서 평소보다 긴 시간을 머무르는 일이 잦아졌고 급기야 새벽의 여신이 그 손가락을 뻗기 시작할 즈음까지 방으로 돌아오지 않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등불을 들고 곁을 서성이면 그제야 미안하다면서 그의 손을 잡고 잠을 청하러 가곤 했다.
“요즘, 서재에서 뭘 그리 열심히 하지?”
“비밀이에요.”
근래 반복되는 기다림에 지친 그가 넌지시 의문을 내비쳤다. 그가 그녀를 데리러 서재로 향한 것이 스물세 번째가 되던 밤이었다. 공주는 피곤에 지친, 그러나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짧은 대답을 남기고는 언제나와 달리 그대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두 사람의 침대는 여러 명이 누워도 괜찮을 만큼 넓었으나 지금까지 둘은 언제나 꼭 붙어 사소한 얘기들을 작은 소리로 나누다 잠이 들곤 했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도 좋아했지만 잠들기 직전 그녀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알지 못하는 그녀라니.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유메라는 책 속에 그를 새겨 넣고 싶었다. 그의 책은 이미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녀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이 또한 그가 그녀와 함께하면서 배운 감정이었으나 그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단지 잠자는 공주의 보드라운 갈색 머리칼 끝자락만을 조심스럽게 만져볼 뿐이었다. 공주가 지금 여기,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몇 번 더 밤이 지나고 눈을 뜬 공주는 무슨 일인지 조금씩 앓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가볍게 콜록대던 것이 점차 영역을 넓히더니 그 날 밤이 되자 몸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긴 시기였으나 유메는 계속해서 몸을 떨었다.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과로로 인한 몸살로 푹 쉬면 나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직접 처방 약을 먹이고, 가장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고, 난로에 불까지 지펴주고 나자 그 몸의 떨림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불안했다. 약과 열에 취해 그녀는 혼자만 아는 이름들을 조금씩 뱉어냈다. 그가 알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낯선 말들이 그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그는 그것들이 그녀가 자랐던 세계에 속한 이름들임을 알았다. 그는 그녀가 뱉어낸 단어들을 따라 읊었다. 그에게는 그 발음조차 너무나도 먼 것이었다.
열은 공주의 옛 기억들을 밤새 퍼 올렸다. 그녀가 읊는 단어들 역시 제 주인이 그러하듯 그에게 새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그것들이 무서웠다. 그가 모르는 단어들이 그녀를 낯선 세계로 다시 데려갈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공주의 손을 쥐었다. 만약 무언가가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해도 그를 두고 떠나지 못하도록. 열은 그녀에게만 과거의 일들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잠든 공주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손이, 공평하게 그에게도 빛바랜 기억을 가져다주었다. 오래전 어머니의 장례식을 눈앞에 두고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던가. 그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가 해야 했던 일만을 했었다. 그에게 모든 죽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든’에 예외가 생긴 것이다.
예정된 출발일을 며칠 앞두고 유메의 병세가 훨씬 나아졌음에도 의사는 완강히 그녀의 동행을 반대했다.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여독이 겹치면 손쓸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읽어 온 많은 책도 입을 모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해요. 잘 다녀와요.”
“…당분간 서재까지 데리러 갈 수 없으니 무리하지 말고.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니니까.”
“돌아올 때까진, 다 나을게요.”
출발 당일, 채비를 끝내 그가 오르기만 하면 되는 마차 앞에서 둘은 인사를 나눴다. 남아 있는 열 탓에 유메는 평소보다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품속에서 웃어 보일 때와 별다를 바 없이 달아오른 볼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낯섦은 두려움을 데리고 나타난다고 하던가.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평소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들 대신 고개를 끄덕여 두려움을 가린 채 그는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앉자 마차는 서서히 길에 자취를 남겨 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그는 리베일에, 그의 성에 내려섰다. 마차 소리를 듣고 급하게 나온 집사는 묵묵히 할 일을 했으나 지금까지 이렇게 빠르게 돌아온 적이 없었으므로 퍽 놀란 눈치였다.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함께하지 못한 공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왕자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긴 시간을 감정 없이 살던 왕자는 그것을 가져다준 공주에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분명 기묘하고 또 위태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집사는 왕자가 감정에 허덕일 때마다 어쩐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하쿠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시계는 종을 열두 번 울렸다. 보름달이 하늘의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고 있어 환한 밤이었다. 창문 틈새로 달빛이 침실 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제 연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스레 문을 열었지만 어쩐 일인지 차가운 밤공기만이 침대를 차지하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는, 서재에 계실 겁니다.”
짐을 들고 그를 쫓아 온 사용인이 그리 고했다. 하쿠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겨우 짜낸 목소리였다. 그는 사용인에게 겉옷을 맡기고 그대로 그곳으로 향했다. 뜨거운 감정이 그의 안에서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또 아프면 어쩌려고.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가 떠나기 전부터 그랬다. 자신에게만 비밀이라는 듯 숨기고 서재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비밀을.
그러나 정작 그가 마주한 서재의 문은 비밀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유메?”
이름의 주인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유메는 서재 가운데 놓여 있는 책상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온갖 책으로 덮여 넓은 책상이 어쩐지 좁아 보였다. 그는 그녀가 베개로 쓰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책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천 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두꺼운 책은 유메가 평소 좋아하던 소설을 다룬 것이 아니었다. 책과 종이의 역사, 그리고 종이의 생산 과정과 이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전문 서적이었다. 그는 그 책을 잘 알고 있었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었다. 책상은 그런 책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온갖’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책이나 종이, 그리고 목재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아마 책상 위의 책들을 하나로 모으면 그의, 책을 다루는 나라인 리베일이 될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책상 한편에 조그마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 유메의 필체였다. 바르게 또박또박 썼으나 어쩐지 귀여운 느낌이 남아 있는 글씨로 ‘다음에는 하쿠 씨와 같이 가서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라고 쓰여 있었다.
비밀은 그것이었다.
일정이 짜이기 전부터 바쁘게 그녀가 찾아서 하던 일은, 비밀은, 다름 아니라 그와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일투성이였다. 빙글 그의 머리가 돌았다. 어지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기뻤다. 이것이 ‘기쁘다’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 그녀가 가르쳐 주었기에 알고 있었다. 유메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게 기뻤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에게 있어 유메는 더는 독립된 한 권의 책이 아니었다.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그의 책처럼, 그녀 역시 그러했다. 그는 그녀의 책의 목차였고 그녀 또한 그의 책의 목차였다. 서로가 없으면 불완전한 책으로 남게 된 것이다. 설령 유메가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책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해도 그는 그녀를 붙잡아 끌어안겠지.
그는 천천히 유메를 안아 올렸다. 그가 없는 새 조금 더 야위었는지 그녀의 몸은 이전보다 가벼웠다. 그는 그것이 마음 아프면서도 어쩐지 좋았다. 그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 역시 그 하나라는 게 기뻤다. 방으로 처음 향했을 때와 같이 달빛은 여전히 환하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이번에는 둘을 축복하는 듯한 환함이었다.
“하쿠?”
그 빛 속에서 공주는 잠깐 눈을 떴다. 달빛에 눈이 부셔서였는지 잠에 취해서였는지,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거, 꿈인가요…?”
하쿠가 여기에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겠지. 지금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품속에서 그녀는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그가 없는 동안 그리던 마음이 무의식중에 섞인 꿈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혼자겠지만 이 조각과도 같은 순간만이라도 함께라는 게 기뻤다. 유메는 팔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밤이 묻어 있는 뺨은 차가웠다. 꿈에서는 느껴질 리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지금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꿈이어도 좋아. 그녀는 더 깊은 잠의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아니. 꿈이 아냐.”
아침이 찾아오면, 현실이 될 거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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