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히메] 어떤 사랑은 영화의 근간이 되고 (연성 교환)
연성 교환 / 2023. 12. 28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꼭 영화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삶 자체가 허상이다. 관객이 아니라 만드는 축을 담당하는 인간은 그런 것에 관해 다소 비관적으로 굴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삶이라고 전부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현실이 그렇듯 영화도 매 순간 해피엔딩을 맞을 수는 없다. 영화 같은 삶, 영화 같은 사랑…….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정의되는 삶이나 사랑이 실제로 있기야 할까. 영화의 나라 케나르의 제1왕자이자 영화감독인 텔 비튼은 요즈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새 작품 시사회 반응이 기대 이하였다든가 아니면 차기작 구상이 잘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시시한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종류였다면 오히려 괜찮았을 것이다.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다. 텔 비튼이 그 그림자를 좇고 있었다.
드림이터의 습격으로 정신과 육체를 분실한 텔 비튼을 구해준 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트로이메아의 공주님. 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꿈을 흩뿌리는 사람. 눈을 뜬 순간 알았다. 운명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첫 만남이었다. 잊을 수가 없다. 이게 영화였다면 당신과 내가 주인공이었다.
저, 괜찮으세요?
여자가 조심스레 안위를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로 수많은 로맨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이 겹쳐졌다. 목숨을 구해준 상대에게 첫눈에 반하는 주인공은 남자의 작품 속에도 이미 등장한 적 있다. 텔 비튼 초기 작품군에 속하는 그것은 혹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았었다. 사랑에 빠진 이후의 감정 묘사는 섬세하고 아름다우나 왜 주인공이 정작 ‘그녀’에게 반했는지는 설득력과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평이 대표적이었다. 남자는 새삼 그 평들을 곱씹고 부수었다.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 그 어떤 인물을 세워놔도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람을 따라 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린다. 그것을 정리해 귀에 꽂는 손길조차도 눈이 부셨다. 여자를 품은 모든 각도의 세계가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간다. 올해 서른이 된 남자가 그 감정을 모를 리 없다. 그가 지금껏 그려낸 세계가 입을 모아 이게 바로 사랑이라고 속삭였다. 텔 비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 첫사랑이라는 점이었다. 남자는 연애도, 여자도 겪은 적이 없다. 타인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은 것도 처음이었다. 직업과 신분 탓에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으나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여태 없었다. 참고를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수도 없이 접해봐도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저 세간에서는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객관적인 정보만이 겹겹이 쌓였다.
영화 촬영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바빴다. 과거 트로이메아 왕족 대부분은 국내에 머물렀으나 유메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꿈을 퍼트렸다. 꿈세계는 넓다. 그러니 그와 그녀가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이따금 아는 왕자들이 국가 행사에서 유메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괜한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 물론 유메라면 특별한 이유 없이 초대해도 흔쾌히 받아주겠지만 가뜩이나 바쁜 이에게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을 고백하거나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대신 남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영상으로 토해냈다. 모든 영화가 무정형의 사랑 고백이었다. 관객 사이에 앉아 있을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남자는 개봉 전 시사회 날짜가 잡히는 대로 여자에게 초대장을 보내곤 했다. 꼭 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그 시기에 바쁘지 않다면……. 그런 조심스러운 인사말이 늘 초대장 말미를 장식했다. 처음부터 그는 기대하지 않았다. 여자는 꿈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그저 초대를 핑계로 여자의 안부를 합법적으로 묻고 싶었다. 유메는 시사회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영화가 개봉하면 그때그때 머무는 나라의 영화관을 찾아 그의 작품을 꼭 감상하곤 했다. 그냥 재밌게 봤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여자는 빠짐없이 감상문을 예쁜 종이에 길게 적어 보냈다. 그게, 그냥 기뻤다. 다른 공간에 있다고 해도 남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여자는 들어주었다. 유메는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내는 텔이 대단하다고 했다. 정작 남자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것은 여자였음에도.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 말을 전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면 그 감정을 상대에게 털어놓고 싶다던데. 조금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숨이 섞일 만한 거리에서 사소한 얘기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싶다던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다만 차츰 시간이 흐르며 유메가 같은 세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졌을 뿐이었다. 같은 세계의 땅을 딛고 같은 시대에 호흡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그를 벅차게 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너무 과한 기쁨이었다. 적어도 그는, 잠깐이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텔에게.
보내주신 시사회 초대장은 잘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그 시기에 맞춰 케나르에 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길게 머무르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시간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케나르에서 직접 뵙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텔의 영화는 꼭 슬픈 내용이 아니라도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정들 덕택에 왈칵 눈물이 나곤 해요. 텔과 같은 시대를 살며, 텔의 영화가 개봉하는 해에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영광으로 느껴진답니다. 완성 직전이라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텔은 언제나 영화에 관해서는 물불 안 가리곤 하니까 조금 걱정이네요. 몸조심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곧 뵙겠습니다.
유메.
이번에도 습관처럼 보낸 시사회 초대장에 대한 답장을 받았을 때 텔 비튼은 당황했다. 편지를 읽은 이후로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종이 위에 누운 글자들이 그대로 그의 뇌에 달라붙었다. 유메가 케나르에 온다. 그것도 그의 영화를 보러. 심장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쿵쾅댔다. 이제 남자는 이 감정을 제대로 안다. 첫 상영을 앞둔 영화를 향한 것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였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가쁜 호흡이나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가 증명하듯이. 이번 영화는 상대가 등장하지 않는 실험적인 로맨스 작품이었다. 상대는 이 세상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다는 게 대사로 암시되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모습은커녕 음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그 상대의 실존을 증명하는 건 주인공의 존재뿐이다. 관객은 주인공의 대사와 행동을 통하여 ‘상대’를 읽어내야 한다. 주인공이 없다면 상대도 없다. 이것은 작품 밖을 이루는 세계에 불과하다. 작품 바깥의 세상과 작품 안의 세상은 다르다. 작품 속에서는 오히려 ‘상대’가 주인공의 삶을 지배한다. 주인공의 삶은, 모두 상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안팎의 이중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은 상대방의 존재 여부 자체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열어 둔 작품이었다. 예술에 정답은 없는 법이니까. 구상 단계에서부터 텔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부재 속에서 남자는 더 선명하게 여자를 떠올린다. 유메를 향한 그의 고백과도 같은 영화였다. 그 첫 시사회에 유메가 참석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여자의 감상이, 궁금했다. 동시에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다.
“텔, 오랜만이에요.”
“정말 오랜만이네. 어서 와.”
문로드를 건너 케나르에 도착한 트로이메아의 공주를 맞이할 적임자는 단연 케나르의 왕자였다. 길게 머무르지는 못한다는 편지 내용대로 유메는 적은 짐과 함께 이 나라로 왔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갈색 머리칼이 변함없이 어깨 부근에서 살랑거렸다. 바로 직전까지 스노우필리아 국가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겨울의 중심부를 막 빠져나온 여자는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장갑과 귀마개까지 끼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다음 작품은 어쩌면 설원을 배경으로 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케나르는 스노우필리아보다는 따뜻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여자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주고 짐을 건네받았다. 유메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추워? 케나르는 그렇게 춥진 않을 텐데…….”
“아, 마, 맞아요. 확실히 따뜻해요. 고마워요.”
남자는 평정과 익숙함을 가장하며 여자를 에스코트했다. 케나르 성에 머물게 하고 싶었으나 스튜디오는 마무리 작업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소란스러운 곳에서 유메가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는 무슨 일이든 나서서 도우려고 했다. 혼자 쉬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니 아예 분리해 두는 게 옳았다. 대신 시사회 장소와 가까운 고급 호텔에 방을 마련해 두었다. 오랜만에 들린 케나르 거리가 반가운지 여자는 길을 걷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길이 오늘따라 생경하다. 남자는 그 이유를 안다. 유메의 존재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다른 색채를 흘려보냈다.
“이번 신작, 시놉시스만 확인했는데도 너무 기대되더라고요. 시사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한 만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나야말로…… 바빴을 텐데 와 줘서 고마워.”
호텔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물론 내일도 만나겠지만 쉽게 찾아오는 만남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흐르는 게 아쉽기만 했다. 명백한 욕심이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줄 알았는데. 만남과 만남 사이의 간극이 길어지며 그간 그리움을 묻어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란히 걷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시간이 초 단위로 소중했다.
“스노우필리아에서도 텔의 작품은 인기가 많더라고요. 신작을 기념해서 몇 작품 재개봉을 했길래 다 보고 왔어요. 전 역시 텔이 그리는 세계가 좋아요.”
“당신이 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해서 정말 기뻐.”
“텔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유메가 맑은 웃음을 터트릴 때마다 세상이 환해진다. ‘좋다’는 말이 자신이 아니라 제가 만든 작품을 겨냥했음을 알면서도 심장은 철없게 수런거렸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만다. 저도 모르게 들떠 이상한 말을 두서없이 뱉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날이 저물며 가로등이 차츰 눈을 뜬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연인들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도 어쩌면 저런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한 개체마냥 꼭 붙어 있는 이들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한 거리가 있었다. 지나치게 멀지 않은, 딱 일행으로 보일 법한 정도의 간극. 호텔 앞까지는 금방이었다. 역시 케나르 성의 빈방을 준비할 걸 그랬나. 유메를 위한 배려였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푹 쉬어. 내일 극장에서 보자.”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철 지난 로맨스 영화처럼 차라도 한 잔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텔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남자와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시사회는 성공적이었다. 두 주인공의 합과 호흡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는 게 로맨스 영화였다. 부재 자체가 영화의 핵심 소재로 기능했기에 두 주인공 사이에서 태어날 법한 어떤 묘한 분위기를 기대할 수 없어 시놉시스 공개 당시부터 걱정 섞인 반응이 제법 있었으나 괜한 우려였다.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과 감독 특유의 색채가 겹쳐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평이 일색이었다. 미술도 음악도 훌륭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관계자 사이에서 박수가 끝도 없이 쏟아졌음에도 남자의 심경은 불편했다. 남자를 적시는 소음은 장막이 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우아한 검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감독은 신이 아니다. 관객의 감정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어떤 장면이 그렇게 슬펐을까. 직접 듣고 싶었다. 내 작품의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텔 비튼 본인은 할 수 없는 일을 그의 피조물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조금 부조리했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기념 연회가 시작되자 텔 비튼은 유메의 곁으로 향했다. 여자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당연했다. 설령 유메가 트로이메아의 공주가 아니었더라도 상황은 변함없었으리라. 여자에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마법 같은 힘이었다. 여자가 손 한 번만 까딱해도 그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제 전부를 바칠 사람이 널려 있었다. 다만 유메 본인이 그걸 원하지 않았다. 세계 평화는 정말로 유메 한 사람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본인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중심에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환한 미소가 햇살처럼 내려앉았다.
“텔!”
무리 지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남자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사실 비켜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텔의 눈에는 유메 만이 비춰졌을 뿐이었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하얗고 가는 목이 훤히 드러났다. 원래 살결이 흰데 검은 옷을 입으니 그것이 더 두드러졌다. 그 색의 대비가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자극이 강했다. 텔은 괜히 안경을 고쳐 쓴다.
“어땠어?”
“너무 좋았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관객에게 슬픔을 직접적으로 유도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덤덤한 표현 방식이 오히려 더 슬프더라고요. 각자 사정이 있어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상대를 공백 속에서도 계속 생각한다는 게 멋있었어요.”
유메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붉게 상기된 뺨을 통해 여자의 감정이 전해졌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며 쓴 거야. 뱉을 수 없는 대사를 지운다. 남자는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보통 연인 간의 사랑이라고 하면 만남이 전제되잖아요. 거리가 멀어지면 그 이유로 헤어지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는 그 거리가 전혀 문제 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음, 저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남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사랑을 하는 이를 향해 ‘도’라는 조사를 붙이는 유메가 생경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던 걸까. 알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였다. 눈앞이 구겨졌다. 세상이 일그러진다.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쥐고 있던 잔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마셔 버린다. 유메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한 대사의 의미를 깨달은 걸까. 이미 늦었다. 들어 버렸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 아니면 쓰러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텔 비튼은 기계처럼 걸음을 옮겼다. 유메가 남자의 뒤를 좇았다. 괜찮으세요? 안위를 묻는 목소리가 잔인할 만치 다정했다. 테라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달이 모습을 감춘 검은 밤이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자기 자신보다 음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차인 남자에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난간에 고개를 묻는다. 온갖 상념들이 지저분하게 섞인다. 유메와 같은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전부 가식이고 위선이었다. 제가 낳은 감정들이 불쾌해 견딜 수 없었다. 등에 작은 손이 얹힌다. 남자는 손의 주인을 안다. 유메가 남자의 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속 많이 불편하세요? 사람을 부를까요?”
“아냐…….”
여자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응이 마치 몇 번 겪어 본 사람처럼 능숙했다. 어쩌면 내가 그냥 넘겨짚은 게 아닐까. 괜한 착각을 한 게 아닐까. 알코올이 뒤늦게 혈관을 타고 내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차마 직접 물을 수는 없다. 만약 질문을 던졌다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답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텔의 영화는 언제나 제게 힘을 줘요.”
“……”
“텔과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텔이 만든 영화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그래요.”
밤바람이 유독 미지근하다. 바람을 타고 달큰한 향이 내려앉았다. 테라스 아래 어딘가에 핀 꽃의 냄새일까, 아니면……. 남자는 문득 고개를 든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친다. 지난날 그러했듯 유메는 오로지 텔을 향해 웃어 보인다. 그에게만 내려진 축복이다. 난간에 얹었던 손 위로 타인의 손이 올라 온다. 제 것보다 훨씬 작은 손이다. 텔 비튼은 직접적인 연애 경험은 없었으나 간접 경험만은 풍부한 남자였다. 얼굴이 뜨거웠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텔 비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유메.”
“네?”
“내 영화 속 상대, 실은 전부…….”
남자의 대사가 끊긴다.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배우마냥. 여자는 남자의 말을 기다린다. 텔은 유메의 눈을 피하고 만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어떤 순간임을 남자는 안다. 지금을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그와 그녀의 클라이맥스였다. 제 손을 덮은 손을, 비어 있는 손으로 감쌌다. 여자는 손을 빼지 않는다. 편안한 정적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전부 당신이야. 당신 이외엔 생각해 본 적, 없어.”
“텔.”
“……”
“저도 영화를 보면서, 텔을 생각했어요.”
컷을 외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게 멈췄다. 남자는 고개를 돌린다.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유메에게 저런 반응을 이끌어 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꿈은 아니었다. 만약 이 세상이 영화였다면 지금쯤 감미로운 선율이 배경 음악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겠지. 배우의 연기는 엉망이었으나 어설프게 전달된 진심이 더 낭만적일 때도 있는 법이다. 텔 비튼이 손을 들어 유메의 뺨을 감싼다. 외부 온도와 체온이 한데 섞여 미지근하다. 여자는 눈을 감지 않는다. 반짝이는 눈이 오로지 그만을 비추고 있었다. 눈가 화장이 조금 번져 있었다. 남자의 젖은 입술이 그 위로 내려앉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무른 피부를 빨았다. 독특한 화장품의 맛이 났다. 눈에 낯선 것이 닿는 감각에 유메가 몸을 움츠린다. 지금까지 남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었다. 그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 순간만이, 예외였다. 현실을 기록한 필름이 있다면 아무도 접할 수 없도록 영영 파괴하고 싶었다. 그와 그녀만이 출연하고 또 감상할 작품들이 줄을 지어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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