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려림] 청혼은 조금 비효율적이라도 괜찮은데

2022. 09. 01

 이느티님의 CoC 타이만 시나리오 <우주해> 엔딩 이후 로그

 비가 끝도 없이 내리고 있다. 언젠가를 떠올리게 하는 지독한 날씨였다. 장마철은 기분 나쁘다. 기분 나쁜 것보다도 몸이, 아팠다. 정확히는 마야를 내 손으로 추락시킨 날 잃어버린 왼쪽 다리가 아팠다. 려는 환상통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비만 오면 신경이 마구 곤두선다. 쏟아지는 비를 창 너머에서 마주한다. 통유리로 된 거대한 창은 제법 보기 좋았다. 빗방울이 창을 마구 두드린다. 창밖으로 도시가 펼쳐져 있다. 거대한 도시였다. 드문드문 형광의 네온사인이 반짝거린다. 그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연구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걸고 다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들. 무너트리고 싶었던 것들……. 마지막 순간에서 나는 내걸었던 삶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골랐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는데도 나는 죽지 않았다. 실소가 샜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몇 년이 지난 지금 와서도 종종 떠올리곤 한다. 후회는 아니었다. 다만 그 광경을 감은 눈 사이에 그려 넣는 것뿐이다. 별들이 흩뿌려져 있는 검은 바다를 뒤로 하고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내가 죽는 걸 지켜봐 줄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내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 속의 타인 또한 원래는 그럴 운명이었겠지만 그는 죽지 않는 인간이었으므로 살아남을 것이다. 절절한 작별 인사가 부질없게도 나는 살아 있다. 신분도 직업도 없이 그냥 존재한다. 마야가 추락하며 서예림은 죽은 걸로 처리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몇 년째 변치 않는 사실에 새삼스레 화가 났다. 통증이 불러일으킨 화재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은 아무 결과도 낳지 않았고 나는 살아 있다. 기계로 된 다리로 땅을 짚으며.

 “예림아, 담요 떨어졌어.”

 그 다리를 공수해줬던 남자가,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을 성립할 수 있게 만든 자. 어떤 의미로든 서예림을 살린 존재. 우려가 없었다면, 그가 마야에 오지 않았다면, 서예림이 그를 마야로 부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인류는 한 차례 더 멸망했고 예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 다시금 생각해보니 전부 내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 곱상한 얼굴을 보고 싶어 마야로 불러들인 탓이었다. 무릎을 덮었던 담요가 바닥에 떨어진 걸 굳이 줍지 않고 내버려 뒀었다. 시큰둥하게 그것을 받았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려는 여전히, 다정한 낯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이면을 안다. 정확히는 저 아름다운 껍데기를 뒤집어쓴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는 죽지 않는다. 늙지도 않는다. 늙지 않는다는 것은 외형적 특징을 일컫는 말이니 사실 그는 이미 늙었을지도 모른다. 표현을 정정해야겠다. 대상은 외적으로 노화하지 않는다. 나보다 오래 살아 늙었으나 나보다 어리게 생긴 소년이다. 저 분홍빛 머리카락을 입에 넣고 굴리면 단맛이 날 것 같은데. 몇 차례 실험 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저냥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다.

 “다리가 아파.”

 “또?”

 “비가 오잖아.”

 “예림이 넌, 꼭 비만 오면 그러더라.”

 이 고통은 습관적인 걸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문다. 려는 익숙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면 맨살이 드러나야 한다. 부끄럽지는 않다.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살이 아니라 기계였으므로. 려는 새삼스레, 세심하게 이음매를 살펴본다. 무심코 미간이 좁혀진다. 통점이 없을 부위가 선명하게 아팠다. 아픔을 잊기 위해 나는 또, 언젠가를 떠올린다. 의식을 돌린다. 의식은 익숙한 시간으로 향한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잘라낸 왼쪽 다리가 멀쩡하게 있던 무렵.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나와, 고장 난 전등 불빛 아래로도 뺨이 반짝이던 게 보이던 너. 나는 등을 돌렸었다.

열쇠는 네가 갖고 있어.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재회 기념 선물로 줬으면 해. 다른 나에게는 주면 안 돼.

그건 내 마지막 말이 됐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수많은 말을 뱉으며 살아왔다. 침묵을 지키며 살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눈을 떴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 짜증 나.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신물이 났다. 염증이 났다. 지쳤고 지겨웠다. 곧바로 익숙하고 오랜, 친구라고 부르기엔 어색하고 단순히 동료라고 끊어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사람이 제 속마음을 읽은 것마냥 말을 걸어왔다. 이름을 부른다.

 “죽지 못해서 아쉬워, 예림아?…….”

 나는 그 발음이 처음부터 싫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진득하면서도, 언제라도 사라질 것 같은 가벼운 발성이. 왜 싫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애가 부르는 게 나 하나만이 아닌 것 같은, 그러니까 겹겹이 누군가가 그 위로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싫다고. 그, 묘한 예감은 우습게도 맞아떨어졌다. 수백 년을 살아 온 려의 삶 속에서 나는 여럿이었다. 서 예림은 유일하지 않았다. 클론과 나는 그 애에게 있어 다르지 않았다. 내가 죽고 그것이 살았어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게 화가 났다. 나는 내 존재를 견고하게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멸망할 듯 멸망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내가 살아 있는 사실을 아는 건 이제 려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세계는 무엇인가. 내 세계는 이제 그 애일지도 모른다.

 “……아니. 덕분에 얻은 건 하나 있으니까.”

 “참, 열쇠 줘야지. 다시 만났으니까.”

 “목에 직접 걸어줄래?”

 몸을 일으킨다. 내가 얻은 건, 네 본질이라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쭉 모호한 의구심 속에 빠져 살았다. 기시감이 짙게 묻어 있는, 사막을 달리는 열차의 꿈. 황금빛 바닷속에서 제 손을 잡아 끌어 올리는 차가운 손. 입 안에서 뒹구는 모래 알갱이……. 네게서 나던 낯선 모래의 향. 나는 이제 그 꿈이 가리키는 전부를 안다. 우리는 오래전에 만났고, 지금보다는 덜 비틀린 사이였다. 만만찮게 뒤틀리기는 했지만 인간이란 으레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기 마련이므로. 아무튼 어떤 관계든 지금의 우리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예림이라는 인간은 우려에게서 죽음의 권리를 앗아 갔다. 그게 그 애로부터, 예림이란 존재를 유일하게 만든 원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ID카드처럼.”

 려는 어떤 표정으로 내게 그것을 걸어줬던가. 모든 것을 기억해도 그 표정만은 기억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를 정의하는 유일한 증표와 같았다. 마야의 온갖 장소를 드나들기 위한 ID카드와 같이. 어떤 형태로든 여기 있을 수 있게 만드는 출입증은 푸른 열쇠가 걸린 목걸이의 모양을 했다. 나는 려가 내 마지막 말을 지켜줬음을 알았다. 그것은 지금도 내 목에 걸려 있다.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빼는 일도 잘 없다. 다리 이음새를 꼼꼼히 살펴보는 려에게 문득, 떠오르는 말을 토해낸다.

 “우리, 결혼할까.”

 “갑자기 웬, 그거…… 청혼이야?”

 “하기 싫으면 결혼이 아니어도 좋아. 네 삶을 나에게 묶고 싶어.”

 나는 이 순간 확신했다. 이 대화를 기억해도, 려의 표정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의도적인 외면이 아니었다. 선연한 회피였다. 네가 어떤 낯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조차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그럼에도 말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림은, 애초부터 그런 존재였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으나 네게 상흔처럼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게 유일한 예림이 되고 싶어. 네가 수도 없이 만났을 서 예림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마야가 산산조각나며 죽었을 예림보다도 더. 손을 뻗어 네 뒤통수를 쓸어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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