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사키네코] 우리를 둘러싼 선에 색을 입혀줘

고백로그 / 2022. 06. 30


 엄마.
 우리 사키, 무슨 일이니?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란 건 말이야……. 

 바로 눈이 떠졌다.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오른다. 호흡이 가빠진다. 아득한 먼 옛날의 꿈이 목을 졸랐다. 아빠가 살아 있고, 엄마가 살아 있고. 세계는 스러지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그 애를 만나기 전이었던 시기의 덧없는 꿈. 그러니까 다시 말해 지금 돌이켜보기에는 너무 멀리 지나온 허상의 파편. 오래전부터 길게 기른 머리칼을 빗어 넘겨주던 엄마는 그때 무슨 답을 주셨던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오직 한 사람의 주변이 반짝거리게 보이는 거란다. 언젠가 사키도 그 의미를 알게 될 거야. 엄마의 얼굴은 더는 떠올릴 수 없는데도 그 말만은 내 몸에 견고하게 흡착되어 있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던 미우라를 바라본다. 그랬다. 우리는 자주 같은 침대에 눕곤 했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나는 악몽을 곧잘 꾸곤 했고 그럴 때면 미우라의 침대에 파고드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짙은 녹발의 여자는 곤히 자고 있다. 죽은 사람처럼. 죽지 않는 사람이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심장이, 뛰고 있다. 당연한 일인데도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미우라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 상체에 올려진 손 위에 손을 올린다. 두 개의, 크기가 비슷한 손이 겹쳐진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불멸자를 비춘다. 나는 몸을 틀었다.  


 “잠이 안 오나요?”


 잠에서 막 깨었음에도 다정한 목소리가 새었다.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자다 깬 거야. 근데 네가 자다가 숨이 멎은 줄 알았어. 죽어 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어. 그래서, 그게 두려웠어. 확인하고 싶었어. 그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자체로 미우라에게 짐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뱉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으, 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미우라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또 한없이 다정하게 등을 쓸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유리로 만든 조각상을 다루듯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이 머문다. 정작 물리적으로 깨지기 쉽고 무른 것은 그 애 쪽이었고 나는 단단한 금속과도 같았는데도 손길은 늘 그랬다. 미우라 네코는 마녀, 마법사, 아무튼 앞에 마(魔)가 붙는 모든 존재였다. 여자의 손길은 마법과도 같았다. 그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꽃이 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자리에 없는 심장이 먼 거리에서 쿵쾅대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오래 지속된다.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 같다. 그러므로 더는 눈을 감지 않는다. 좀 더 오래,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등을 돌리고 생각한다. 친구에 대해, 동료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 모든 생각은 하나의 종착점으로 귀결된다. 내게 친구와 동료와 가족에 해당하는 이는 이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개개인이 가지는 비밀 가운데 이따금 별것도 아닌 게 있을 때도 있으나 내가 가지는 비밀은 격이 달랐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이해해줄 수 없는 것. 이해받으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미우라 네코는 알고 있다. 알아버렸다. 정확히는 그 비밀에 가장 깊숙하게 개입된 자가 나를 제외하고는 미우라뿐이었다. 후지와라 사키가 이질적인 존재가 된 것에는 틀림없이 미우라 네코가 끼친 영향이 있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노란 눈의 소녀는 쉽게 녹발의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관계를 감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반짝이는 사막이 온 세상을 한바탕 덮고 나서 세계의 많은 것이 휩쓸렸고 많은 자가 죽었다. 미우라 네코를 아는 사람도 후지와라 사키를 아는 사람도 모두 없어졌다. 다만 후자의 경우 ‘후지와라 사키’라는 개인에 국한될 뿐 기업으로서의 후지와라를 아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그럴 만한 가치라던가 어떠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모르기가 더 힘든 쪽이었다. 워낙 유명했었으니까. 후지와라 사키는 이름 앞에 오는 성을,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미를 떠올릴 때마다 웃었다. 명백한 실소였다. 인류가 멸망을 목전에 둬도 변하지 않는 것이란 결국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를 이제 오롯한 사키로 봐주는 이는 오직 미우라 네코뿐이었다. 정작 그녀가 후지와라 사키를 부르는 호칭은 후지와라였음에도. 그래서 어리광을 부렸다. 


 선을 넘은 행동임은 진즉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미우라 네코를 지켜봤었으므로. 같이 살게 된 것도 그러했다. 다짜고짜 찾아가 떼를 써서 성립된 관계였다. 이 자리에 살아 숨 쉬는 행위조차 미우라의 자비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욕심을 우선시했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어쩌면 그 손을 맞잡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악몽을 핑계로 그 침대를 파고든 것도, 그 고운 손가락에 같은 색의 매니큐어를 바르며 노닥거린 것도, 이따금 일이 빨리 끝난 저녁이면 미우라의 연구실 앞에서 얼쩡거린 것도, 주말이면 괜히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간 것도 전부 미우라 네코라는 개인이 장막처럼 두른 선 밖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서로가 유일하니까, 괜찮지? 한 번쯤은, 대놓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동시에 두려웠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질문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아 더 묻어두기도 힘들었다. 어디까지면 용인할 수 있어? 날 싫어하지 않을 거야? 왜 날 내치지 않아? 내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후지와라 사키는 미우라 네코를,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경원시했다. 숭배했다. 숭배자는 그 신앙의 대상을 필연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전구에 달려드는 나방은 제가 불에 탈지도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지. 후지와라 사키는 언젠가 밀쳐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대상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너는 내 전부야. 내게 하나 남은 가족이고, 친구야. 내가 영원히 기억할,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부담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털어놓고 싶어지고 만다.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다.


 차라리 어떤 선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 선을 밟지 않고 근처만 계속 배회할 텐데. 네가 나를 무슨 일이 있어도 내치지 못하게. 선이 모호하다면 그으면 될 텐데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열차 위에서 차라리 그 애의 손을 내쳤을지도 모른다. 그 애를 내치고, 밀쳐서, 혼자 사막 한복판으로 뛰어내려 말라 죽어버렸다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텐데. 그 죄악의 대가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 가족과 친구에는 명확한 형태가 없다. 심지어 법적으로는 가족도 아니다. 단순한 동거인이었다. 우리 관계에는 아무 이름도 없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잔인하게 뜨거웠다. 낮은 내 체온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았다. 어쩌면 미우라의 체온 역시 낮은 축일지도 모르는데 내게는 더 이상 그 판단 기준이 없었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뜨거웠다. 그게 좋았다. 




 미우라를, 네코를 처음 봤던 날을 기억한다. 별이 폭발한다면 그런 느낌으로 빛을 내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던 순간을. 세계를 휘몰아치던 빛이 감싸 안던 순간. 빛이 망막을 거칠고 부드럽게 찔러댈 때 발생하는 선명한 여름의 색채를. 세계가 녹색 별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 장소는 다름 아닌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가는 길목 뒤뜰이었다. 거대한 고목이 있어 그만큼 넓은 그늘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늘이 드리워지는 자리에 딱 맞게 벤치가 자리했다. 바람이 불면 바닷가의 파도 소리보다 거센 소리가 나고 체육 시간 이후의 열기를 식혀주는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중등부 입장에서는 고등부는 미지의 세계이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금단의 구역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 자주 출입하지는 아니했다. 내가 그날 그곳에 갔던 것도 순전히 선생님의 심부름이라는 반강제적 요소 탓이었다. 고목의 기둥 뒤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여, 걸음을 더 늦출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아가씨 학교라고는 해도 내부에서의 위계는 존재했고, 그것은 많은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벤치 아래에서 주름이 잡힌 검은 치마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거기에 일순 넋을 잃었을 때 들고 있던 프린트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 저질렀다. 서둘러 몸을 숙이고 흩어진 종이들을 줍는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좁혀진 시야에 그녀의 구두가 들어 왔다. 교칙으로 정해진 검은 메리제인 구두였다. 요즘 시대에 복장까지 규제하는 학교가 어디 있냐며 대다수의 아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신고 싶은 신발을 신고 오곤 했다. 그래도 도를 지나치는 범주가 아니라면 선생님들은 굳이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신발을 신는다는 건……. 나는 아주 약간 시선을 올렸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을까. 검고 깊은,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을 닮은 눈이 예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여학교인 만큼 당연하겠지만 어쩐지 일본 인형을 닮은 인상에 흠칫 놀라고 만다. 짙은 녹발이 흩날리는 공기의 흐름에 물감처럼 녹아 풍경에 짙게 섞여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이 파스스 흩어지고 그 광경은 마치 꿈결처럼 펼쳐진다. 검은 세일러 교복. 그제야 같은 중등부 학생임을 알고 멈췄던 숨을 토해냈다. 아는 얼굴이었으나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는 아이였다. 복도에서 아주 가끔 봤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하얀 석고 조각 같은 손을 뻗어 말없이 떨어진 프린트를 주워 주었다. 아무 말 없이. 고요하게. 


 “저, 저기.” 


 그 애는 가만히 나를 본다. 말은 없다. 손을 멈추지는 않는다. 민첩하게 움직이며 떨어진 프린트를 주워 건네준다. 나는 어색하게 그것을 계속 받아 들고만 있다. 검은 눈에 비치는 내가, 왠지 이질적으로 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으, 응…….”


 동급생일 터인데도 딱딱한 존댓말이 돌아온다. 높낮이가 분명하지 않은 어조에, 내 말끝은 계속 어쩔 수 없이 흐려지고 만다. 몸이 자연스레 위축된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고 재잘댔다. 이 애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어딘가 덧없는 그 분위기 탓일지도 모른다. 눈을 깜빡이면 사라져버릴 듯한 신기루를 닮았다. 눈이 부시고 시려도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시선 속에 잡아 두려고.

 “나는 후지와라 사키라고 해. 3학년, 인데…… 같은 학년 맞지?”
 “미우라 네코입니다.”

 여전히 격식을 차린 말투가 돌아온다. 뒷말에 대한 긍정으로 그 애, 아니 미우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듣고 나니 얼핏 고양이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영부영하던 새에 미우라는 마지막 프린트 한 장을 내게 건네준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들고 있는 프린트 더미 가장 상단에 쌓았다. 미우라는 다시 벤치로 향한다. 그 뒤를 따랐다. 상급생이 아니었으므로 눈치 볼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그 애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검은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벤치 위에는 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둔 책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운 책이었다. 그 애는 자리에 앉아 그것을 자연스럽게 펴서 읽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옆을 차지했다. 옆모습이 예쁜 아이였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 애의 짙은 초록색 머리카락에 음영을 드리웠다. 우주와 자연 중에서는 후자에 가까운 풍경에 녹아 있는 미우라에게서, 나는 틀림없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빛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수런거렸다. 답답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쿵쾅댔다. 답지 안 하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릴 것만 같았다.

 “그, 그럼 난 가볼게! 도와줘서 고마웠어!”

 미우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 우주를 닮은 눈을 책에서 떨어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신경 쓰였다. 프린트를 쥔 손이 떨렸다. 혹여 넘어질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 애는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책장만을 넘길 뿐이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그 애를 찾게 됐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쉬이 눈에 들어 왔다. 3학년은 두 층으로 나눠 반을 쓰기 때문에 자주 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층 아래의 교실을 썼고 등교 시간이 빨랐다. 교실에 있기보다는 도서관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우리 학교는 기본적으로 에스컬레이터 제라서 대개 중등부 아이들은 전원 그대로 고등부로 올라가는 편이었다. 내년에는 미우라와 같은 반이 될 수 있을까. 햇볕이 본격적으로 시끄럽게 내리쬘 여름 방학 전의 계절부터 감히 다음 해를 상상할 정도로 나는 그 애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렇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며 같은 반만 된다면 친해질 자신도 부끄럽지만 내게는 있었다. 

 계절이 연거푸 바뀌어 중등부 특유의 세일러 교복을 벗게 된 후, 가장 먼저 머릿속을 잠식한 것도 그 애였다. 입학식이라는 명목상의 행사를 앞두고 블레이저의 리본을 묶으면서도 그 애 생각을 했다. 다른 학교로 진학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신은 내 편이었다. 미우라 네코는 학원을 떠나지 않았고 우리는 무사히 같은 반이 되었다. 변하지 않은 길이의 녹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살랑거리는 등을 보며 나는 몸을 떨었다. 전율이었다.

 같은 반에서 몇 년을 함께 생활했지만 미우라 네코와 후지와라 사키는 친해지지, 못 했다. 반장과 구성원으로서 의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친해지고 싶은 아이’ 자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상대와 나는 이미 ‘친구’였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애 앞에서만 유독 갈피를 못 잡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처음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눴을 때 느낀 광채는 눈의 착각인지도 모른다고, 넘기고 싶어도 그 애의 측면에서도 늘 빛이 나서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냥, 미우라 네코는 내게 있어서 항상 빛나는 사람으로 남았다. 이지러진 홀로그램과도 같은 형형색색의 빛. 시야에 차는 빛에는 흠도 티끌도 없다. 결코 완전무결하다든가, 그래야만 한다든가 하는 뜻은 아니다. 설령 그런 것이 있더라도 그 빛으로 모두 덮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우리 학원은 얼핏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아가씨들의 지상 낙원 같지만 내부를 헤집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선후배 사이의 확고한 위계 서열뿐만 아니라, 같은 학년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선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선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였고 나는 언제나 선 밖의 존재였다. 선 밖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미우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우리 사이에도 선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나와 있는 선보다 희미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나는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가 없다. ‘같은’ 선 밖의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따금 맥락 없이 그 애와 다른 반 아이들 사이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뿐이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미우라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나를 보았다. 그게 전부였다. 쏠리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 옅게 고조된 감정 외에 우리의 접점은 정말 드물었고 졸업식 때 사진 찍자는 말도 쉬이 건넬 수 없었다. 끝이었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열차에서, 마주하기 전까지는.

 우습게도 나는 그 조우가 어떠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입학 직전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눈을 떠 보니 열차는 거진 폐허가 되어 있고, 그 끝 칸에서 친해지고 싶었던 상대를 만나는 건 필시 운명의 출발점이라고, 바보같이 생각했다. 훤하고 미로 같은 열차를 헤매는 것도 조금은 즐거웠다. 속이 안 좋은 건 긴장해서라고 또 멍청하게 생각했었다. 그 즐겁고 낭만적인, 별이 쏟아지던 어트랙션의 출구에서 나는 지옥의 문지기와 조우했고 그가 열어 준 입구로 미우라의 손을 잡고 뛰어들었다. 




 입구를 벗어나면 우리의 침실이 있다. 미우라는 여전히 뜨거운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선 밖에 있다. 하지만 선 안의 사람이 모두 사라졌다면 선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 사이에는 정말로 명확한 선이 필요했다. 내게는 어떤 행위가 승인되고 거부되는지에 대한 뚜렷한 경계선이 필요했다.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안심할 수 있는 경계가 갖고 싶었다. 예를 들면…….

“미우라.”
 “……네.”

 답이 한 박자 늦게 돌아온다. 졸린 모양이었다. 협탁 위의 시계가 새벽 세 시 이 분을 가리킨다. 그럴 시간이었다. 그 애의 어조는 처음 마주했을 때와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럼에도 다정함을 느끼는 것은 내 뇌가 내게 보여주는 기만적인 환각인가. 환영을 현실로 나는 믿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손길이, 행동이 다정한데. 목소리가 다정하지 않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우라는, 내 친구지?”
 “그렇습니다.”
 “내 가족이고.”
 “……그렇죠.”

 등을 쓰다듬는 손이 멎는다. 정적이 흐른다. 고요는 두렵다. 내 맥박이 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뇌는 끊임없이 호르몬을 분비하고, 명령을 내릴 텐데 혈액은 돌지 않는다. 심장을 거쳐 순환하지 않는다. 내 몸은 피가 고여 있는 단순한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같다. 그리고, 보통 그런 종류의 시체는 자신을 되살려 준 자에게 복종한다. 내 감정은 복종인가, 동경인가. 아니면 둘 다일까. 

 “거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어.”
 “……”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마침내 몸을 틀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다. 미우라는 눈을 감지 않고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빠져들 것 같았던, 검은 우주가 아주 작은 틈을 두고 존재했다. 나는 오늘도 그 안에서 빛을 보았다. 태양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내는 광대한 연속 스펙트럼 같은 색색의 빛이었다. 가장 검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은 빛을 나는 본다. 눈을 감는다. 눈이 부셨다. 

 “미우라의 연인 자리도, 갖고 싶어.”

 내게 선을 줘. 네게 입 맞출 자격을 줘.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춰도 내쳐지지 않을 선을 줘……. 우리 사이에 분명한 선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겁내지 않을 테니. 후지와라 사키는 일그러진 인간이야. 귓가에 내 목소리로 누군가 속삭였다. 아니야! 나는 소리쳤다. 후지와라 사키는…… 일그러졌어. 알고 있으니까 말해주지 않아도 돼. 내가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건 오직 한 사람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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