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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 숨을 쉬면 하얗고 뽀얀 입김으로 나오는 계절이다. 첫눈도 이 시기에 온다. 좋아하는 사람과 첫눈을 함께 맞으면 그 사람과 이루어진다는 미신….

계절의 변화처럼 좋아하는 사람과의 새로운 변화가 생겼으면 해서 그런 미신이 생겨난 걸까? 그 애와 나와의 관계도 변화가 생겼으면 한다. 그저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연인관계…. 그 애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빠져있을 때였다.

“야~ 국수호!”

생각에 깊게 빠져있는 걸 멈추게 해준 그 목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그 애의 목소리다.

“어, 녹원아.”

김녹원, 대도고 18살.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가 김녹원이다. 녹원이는 뭐랄까…. 웃는 모습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리모 아저씨 음식도 서슴없이 먹는…, 아… 좀 중증인가. 아무렴 뭐 어때. 내가 좋아하는 녹원이는 변함없이 지내는 게 참 좋다. 교실 앞문에서 부르는 녹원이를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서 녹원이에게 다가갔다.

“수호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얼굴 빨개졌다.”

“어…? 아, 아니... 그냥...”

티 났나? 티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녹원이가 날 빤히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수호야. 오늘 끝나고 같이 가자. 오늘 애들끼리 모이기로 했어.”

“아... 응. 너네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이따가 보자.”

녹원이는 이따가 보자는 말을 남겨두고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그러면…, 나와 녹원이 단둘이서 가는 건가? 다른 애들은 항상 녹원이네 반이 늦게 끝나서 청소하는 날이 아니면 먼저 가버린다. 두리가 청소를 많이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혼자 가는 날이 더 많았을 거였다…. 음, 두리에겐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그래 줬으면 좋겠다. 녹원이가 혼자 하교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정신없이 수업을 듣고 나서 종례까지 끝냈다. 끝나고 녹원이 반 앞에 기다리고 있던 도중이었다. 하나와 딩요, 그리고 오공이까지 셋이 녹원이를 기다리는 날 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힘내라며 말을 남기고 홀라당 가버렸다.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녹원이를 쭉 좋아했다. 3년이나 고백도 못 해보고 지냈다. 고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야~ 국수호. 여기서 뭐 하냐? 애들이랑 모이기로 했는데 안 가고?”

“어? 그냥... 녹원이 기다리고 있어...”

두리가 놀란 눈치로 나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그럼... 오늘 고백하는 거야?”

두리에게 들은 말은 나를 빨갛게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녹원이가 같이 가자길래...”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암튼 잘해봐라 이 두리님과 세모는 청소 좀 하느라 늦게 갈 거 같다. 애들한테 전해놔!”

애들한테 전해놓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담겨두고 걸레를 들고 가버렸다. 이제 어쩌지.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고백할지 말지 고민했더니 녹원이의 반 종례가 끝났다. 녹원이가 나오자마자 날 보더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말을 건넸다. 나는 아니라며 대꾸해 줬다. 녹원이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더니, 말을 꺼냈다.

“수호야. 기다리는 동안 뭔 일 있었어? 얼굴이 아까처럼 빨갛네.”

아무래도 두리가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고백이라니….

“아, 아니. 그냥 좀 더워서….”

“지금 11월이거든? 참나.”

아….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상하게 얼버무린 후로 아무 말 없이 단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떨려서 무작정 아래만 보고 걷고 있었을 때, 녹원이가 옆에서 말했다.

“어? 눈 오네. 첫눈인가?”

첫눈. 두 글자를 듣자마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첫눈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맞으면, 그 사람과 이어진다는 미신. 한 번 믿어볼까…. 고민 끝에 횡단보도 앞에서 멈춘 순간에 녹원이에게 말을 꺼냈다.

“그... 저기 녹원아...”

“엉, 왜?”

막상 말하려니 떨렸다. 숨을 크게 내쉬고 다음에 있을 말을 이어갔다.

“내가, 녹원이 너를… 조, 좋아해…!”

“어...?” 너무나 조용해져서, 녹원이를 바라봤더니 녹원이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너무 계획 없이 한 고백이었나…라며, 후회하려던 찰나.

“나…, 나도. …….”

마지막 말이 잘 안 들려서 녹원이한테 되물어봤다.

“좋아... 한다고, 나도...”

녹원이에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녹원이도 날 좋아한다고? 날 좋아하는 사실만을 집중한 채,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야~ 김녹원! 국수호! 거기서 뭐 하냐~!!”

아, 두리다. 어쩌지, 두리랑 먼저 가버린다고 할까.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녹원이와는 나중에 얘기해 보자….

“아…! 노, 녹원아. 나 두리랑 해야 할 게 있어서. 먼저 두리랑 가볼게…. 세모랑 둘이서 천천히 와.”

아무 사정도 모른 두리를 끌고 아슬아슬한 신호를 건너고 먼저 가버렸다.

“야! 국수호. 왜 이래? 녹원이한테 고백이라도 했냐?”

“…응.”

두리가 떠나가라 소리치며 물어봤다.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야겠네….

“내가 녹원이한테 먼저 고백을 했는데…, 녹원이도 날 좋아한대... 근데 너무 당황해서 그냥 너 끌고 와버렸어...”

“뭐?! 사귄다는 말은? 안 했어?”

“아... 응….”

“그렇단 말이지? 걱정마. 국수호. 이 두리님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음…. 두리의 말 믿어도 되는 걸까... 또 생각에 깊게 빠져서 걸었더니, 벌써 하나네 집에 왔다. 들어가자마자 두리가 소리치며 나에게 있었던 일을 부풀려서 설명했다. 애들이 나를 일제히 쳐다보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그 정도까진 아니라며 대답해 주었다. 두리가 애들한테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모든 걸 알려줬다. 이제 녹원이랑 세모만 오면 된다며 신나 했다.

“차두리. 왜 먼저 갔….”

“세모야! 나 학교에 뭐 두고 온 게 있어서, 같이 가줘야 겠어!”

두리는 무작정 세모를 데리고 나가버렸고, 오공이는 온달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나갔다. 하나와 딩요도 부모님이 부르신다고 급하게 가버렸다. 이제 하나네 집에서 나와 녹원이. 단둘만이 남았다…. 쇼파에 앉아 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노, 녹원아…. 그... 내가 아까 고백한 거….”

“…사귀자.”

응? 녹원이가 내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사귀자’고.

“푸핫, 국수호. 너 얼굴 진짜 빨개졌다.”

“아, 아니... 좋아서….”

한편으론 좋았던 너무나 형편없게, 계획없던 고백도, 첫 눈을 같이 맞이한 사람과 이어진다는 미신.

녹원이와 함께하는 12월은 조금 더 따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