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른 (단편)

[우성태섭] 편지와 수줍음

* 느바 정 X 느바 송

* 순진하고 귀여운, 청춘 우태가 보고 싶어 쓰게 된 글

오늘은 우성의 팀과 태섭의 팀이 맞붙는 날이었다. 미국에 진출한 이후 포인트가드로 전향한 우성은 의외였지만, 농구의 성지라 불리는 미국 농구 선수들의 타고난 피지컬이나 역량 등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우성의 역량이 부족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정우성은 그래도 정우성이라고, 태섭은 무서운 기세로 압박을 가하는 우성을 밀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안그래도 각이 다른 눈썹이 더욱 들썩였다. 우성에게도 큰 미국은 태섭에게 더 클 수 밖에 없다. 태섭은 더욱 집요해지고, 더욱 낮은 드리블로 우성에게 대항했다. 같은 고향 출신의 선수가 같은 포지션으로 맞붙는 광경은 관중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들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신장으로 이 먼 타국까지 온 젊은이들에게 열광하기도 하고, 눈을 찢어보이며 체구가 큰 미국선수들에게 짓밟히라는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가 섞이기도 했다. 응원보다 비아냥에 더 익숙한 태섭은 처음부터 듣지도 않았고, 천재라고 불리던 우성 역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수없이 의지를 꺾어대는 목소리에 단련이 된 상태였다. 서로의 눈이 서로를 응시한다. 볼을 어디로 돌릴지, 어디서 공격해들어올지 모를 서로의 손을 응시한다. 페이크를 섞을까, 지금 추격할까 바쁜 서로의 발을 응시한다. 거친 숨과 흘러내리는 땀이 코트 위에 둘만 존재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공을 잡고 있는 순간 느낄 수 있는 감각. 코트 위로 미끄러지는 마찰음이 경쾌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다음에는 우리가 이긴다!”

아쉬운 점수 차로 이번 경기는 우성의 팀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땀과 공을 주고 받으며 한층 유대감을 형성한 선수들이 같은 팀, 다른 팀 할 것 없이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유니폼을 교환했다. 우성이 주먹을 쥐고 태섭에게 다가오자, 태섭이 제 유니폼을 벗어 그에게 건네며 말아쥔 주먹으로 가볍게 친다.

“포인트가드에 제법 익숙해졌던데.”

“진성 포인트가드에게 칭찬받다니, 기쁜걸.”

“다음 경기에선 눈물 쏙 빼주지.”

“기대할게.”

우성이 태섭을 보고, 태섭이 우성을 보았다. 태섭이 씩 웃더니 우성의 주먹을 밀어내며 저 역시 몸을 물린다. 송! 가자!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며 태섭이 멀어져간다. 우성이 그런 태섭을 보며 말없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정! 우리도 가야해!

“응! 갈게!”

우성이 몇 초간 그 자리에 서있다, 팀원들을 따라나섰다.

“응? 이게 뭐지?”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씻고 나온 태섭이 가방 정리중 잡힌 감촉에 그것을 꺼내들었다.

“편지?”

팬레터는 팀에서 따로 받아주는데 이게 어디서 들어왔지? 태섭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태섭에게, 라고 적혀있고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편지를 노려보았다. 나름 단정하게 쓴 것 같은데 노력한 건지 끝이 미묘하게 삐뚤한 글씨체였다. 태섭이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냈다.

“헤엑… 이게 뭐야.”

편지지를 꽉꽉 채운 내용에 태섭이 편지를 테이블 위로 덮었다. 농구 관련 책 아니면 활자와 거리가 먼 태섭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어떻게 가방 안에 편지를 넣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편지를 읽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중얼거리던 태섭이 눈을 작게 뜨고 덮었던 편지를 뒤집었다.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꽉 채워진 글자들이 태섭을 어지럽혔다.

- 태섭에게. 안녕, 태섭아. 네가 농구 관련 책이 아니면 글자가 많은 것만 봐도 울렁증을 느끼는 걸 알아.

“알면서 이렇게 썼다고…? 대체 누구지?”

- 그래서! 내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어! 태섭아, 여기까지 읽었다면 맨 밑줄을 봐줄래?

태섭의 시선이 편지의 마지막 줄로 향했다.

- 잘했어! 있잖아, 나 이 편지를 언제 건넬 수 있을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 팬레터는 아무래도 팀에서 관리를 하니까… 팀으로 보내기도 뭐한 내용이라서, 정말 많이 고민했거든!

입가로 픽 하는 웃음이 샌다. 태섭이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테이블에 엎드려 편지를 이어 읽는다.

- 팀에서 관리차원으로 편지를 열어본다는 걸 알아. 그럼 완전 망하는 거거든! 아, 좀 길어졌나? 태섭아! 맨 위에서 두번째줄로 올라가서 맨 왼쪽으로 이번에는 세로로 읽어볼래?

“세로로?”

태섭의 시선이 편지 위를 향했다.

-

??

??

까ㅈ

본인도 실수였는지 쓰다 만 흔적이 보였다. 편지가 긴 이유가 있었구만. 태섭이 큭큭 웃었다.

- 아, 나도 어렵다. 역시 쓰는 게 익숙하질 않으니 나도 계속 실수를 하네 ㅋㅋㅋ

“그러고보니 한국어였네.”

미국이라고 전부 미국인만 구성되어있는 건 아닐테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자신부터 미국에서 보면 이방인이 아닌가. 아니면 미국인인데 자신에게 어필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웠을 수도 있고.

- 그래도 울렁증은 덜 하지 않아? 이번에는 오른쪽 세로로 읽어봐! 실수 안 할테니까!!

“크큭. 미치겠네 진짜.”

-

??

??

??

??

??

“오, 이번에는 실수 안 했네.”

태섭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재미있는 방식에 활자가 많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눈 앞이 흐려지면서 어지러운 증상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편지를 쭉쭉 읽었다. 다시 위에서도 읽었다가, 왼쪽으로 보냈다가, 오른쪽으로 보냈다가. 단정하게 쓰려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는 글씨가 엉망이 되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편지의 내용 자체는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다. 편지를 쓰는 오늘 날씨는 좋았다던가, 농구하는 나를 생각했다던가, 단순한 일상이 담긴 내용에는 충분한 애정이 깃들어있었다. 편지를 읽고 있는 태섭은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편지 하나를 읽을 뿐인데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고 돌던 글씨는 점점 편지의 중앙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 태섭아.

이름을 부르는 단어가 꾹꾹 눌러 쓴 듯 그 자리만 편지지 뒤까지 자국이 남아있었다. 태섭은 무심코 그 뒷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제서야 쓰게 되네. 웃기지. 이 편지지를 그렇게 꽉 채워놓고, 정작 본론을 이 작은 남은 공간에 쓰려 하다니.

태섭이 자세를 바로했다. 왠지 테이블에 엎어져 다 늘어진 자세로 읽으면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사실은 나도 무섭거든. 이 편지의 본론이 네게 닿았을 때.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서.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관계가 이 편지로 인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게 너무 무섭고, 두려워. 넌 내가… 무서울 게 없을 녀석이라고 했지만.

“…응?”

이 편지의 주인공과 자신은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태섭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이 글씨체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았다. 실패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편지에 쓰인 글씨는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글씨체였다. 원래의 글씨체를 보이지 않는 한 태섭이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찾을 수 없을 게 당연했다. 태섭이 마른침을 삼켰다.

- 나는,

- 나는 있잖아.

- 내가 네게 내 마음을 전했을 때 네가 긍정적으로 대답해주길 바라.

- 네 마음이 나와 같길 바라고 있어.

- 너를 직접 보면서 얘기하고 싶은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편지를 썼어.

- 네가 이렇게 많은 활자들을 보면 끝까지 읽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편지를 썼어.

- 네가 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해서, 네가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전략을 짜서 편지를 쓴 거야.

- 태섭아.

- 네가 좋아.

- 너를 좋아해.

숨이 막혔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렇게 절절한 고백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거야. 태섭이 편지지를 테이블 위로 뒤집었다. 손을 들어 발갛게 열이 오른 뺨을 문질렀다. 문득 뒤집어놓은 편지지 중앙에 작게 적힌 글씨가 눈에 띄었다. 처음 글자가 많은 걸 보자마자 뒤집었을 때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째서? 생각하던 태섭이 작게 탄식했다. 그때는 제 손이 편지지의 반을 가려놓은 탓에 보지 못한 거였다. 태섭이 편지를 집어들었다.

- 네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97 스트리트의 공원으로 와줘. 기다릴게.

- 우성이가.

“우성? 정우성?!”

태섭이 벌떡 일어났다. 편지의 주인공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럼 아까 경기 끝나고 마주했을 때 넣었던 건가? 왜 미쳐 몰랐지? 생각이 휘몰아치던 태섭이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 몇시지?

해가 져 어둑해진 97 스트리트의 우태파크 안. 가로등이 하나씩 빛나기 시작했다. 창백한 빛이 어두워져가는 하늘 위로 흩뿌려진다. 분수가 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벤치에 앉은 우성이 중얼거렸다.

“태섭이가 온다.”

똑 하고 꽃잎 하나를 뗀다.

“안 온다.”

또 하나의 꽃잎을 떼어낸다.

“온다.”

발치에 뜯겨나간 꽃잎이 잔뜩 떨어져있었다. 노란색, 분홍색, 빨간색…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우성의 발치를 수놓았다.

“안,”

우성의 손이 멈칫했다. 떼어낼 꽃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우성의 손 끝에 연약할 정도로 작은 꽃이 톡 떨어졌다.

“푸우우우우우…….”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힌 우성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멍하게 어두워진 하늘을 본다. 별이 약하게 빛나는 하늘을 보았다.

“편지 다 안 읽은 거 아냐? 우씨, 송태섭 진짜…….”

“진짜 뭐?”

“헉!”

하늘을 보며 투덜거리는 우성의 시야에 숨을 헐떡이는 태섭이 비쳐진다. 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태섭이 빠르게 몸을 물리며 숨을 골랐다.

“뛰어왔어?”

태섭을 토닥이는 손길과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나온다. 얘는 뭐가 그리 좋아서… 숨을 고른 태섭이 우성을 슬쩍 밀어내자 그가 머쓱하게 까끌한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 내가 글자 많은 거 안 보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편지를 썼어?”

“다 읽었어?”

“그러니까 여기 왔잖아!”

“고마워. 편지 끝까지 읽어줘서.”

“…….”

저보다 훨씬 큰 성인 남자가 쑥쓰럽게 웃는다. 태섭이 허,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냐, 송태섭? 저게 왜 귀엽다고 생각을 해?

“…….”

“…….”

미묘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우성은 편지에 대한 태섭의 답을 기다리느라 긴장한다고 그랬고, 태섭은 우성의 뭐가 귀엽다고 느꼈는지 순간 자괴감이 들어서 그랬다.

“너는 내가 편지 다 안 읽었으면 어쩌려고 여기서 계속 기다릴 생각을 했어? 지금 시간이 몇 시인줄 알아?”

“그래서 배고파.”

“내가 안 오면 어쩌려고 했냐고.”

“그냥… 차였거나 편지 안 읽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려고 했지.”

“편지를 안 읽은 거면?”

“모른 척 하고 원래 사이로 돌아가는 거고…….”

“…차인 거면?”

“…….”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데, 귀 끝이 창백한 가로등 불빛에서도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태섭의 눈썹이 쳐졌다.

“우성아.”

“나 차이는 거야? 그럼 나 한동안 태섭이 얼굴 보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럴 거면서 편지를 썼어?”

“진짜 차이는 건 도저히 생각을 못 하겠어서 그랬지이…….”

태섭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미국에서 마주했을 때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하고 우물거리는 우성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귀에 이어 코 끝까지 빨개지는 모습에 이런 식으로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태섭의 시선이 우성의 발치에 잔뜩 흩어진 형형색색의 꽃잎들을 향했다. 저 덩치에 꽃점이라니 귀엽다고 해야할지 가소롭다고 해야할지. 우성의 편지에 답장을 당장 주기엔 솔직히 태섭도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편지빨인지 가로등 불빛빨인지 우성이 귀여워 보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거짓된 대답으로 서로에게 상처가 될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자.”

“…나 차이는 거 아니야?”

“모르겠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우리 사귀는 거야?”

“몰라.”

태섭이 우성의 손목을 붙잡고 근처에 봐두었던 한식퓨전식당으로 향했다. 우성이 뒤에서 사귀는 건지 차는 건지 확실히 얘기해달라며 쫑알거렸으나 모른다는 답으로 일관했다.

“우우, 송태섭 너무해. 난 진지한데.”

“그러니까 나중에 대답해준다고.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정우성.”

“웅?”

“좋아해.”

“……?”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데 태섭이 대뜸 그랬다. 우성이 팝콘을 씹다 그를 돌아보았다. 태섭은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우성이 눈을 굴렸다. 데록데록. 데굴데굴. 태섭이가 갑자기 무슨 일일까… 하다가 영화 속 주인공이 편지를 건네받는 장면이 보였다. 응? 편지?

“송태섭.”

“어.”

“너 이거 설마 그때 그 편지 고백의 대답이야?”

“어.”

“세상에. 태섭아.”

우리 사귄지 970일이 지나고 있는데 그 대답을 지금에서야 하는 거야……?

“나중에 답한다고 그랬잖아.”

저도 머쓱했는지 태섭이 시선을 피했다. 우성이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지금까지 사귀고 있던 건 맞지?”

“…어.”

“너 그럼 그때 대답한 건 뭐였어?”

“네가 울면서 사귈건지 안 사귈건지 분명히 말해줘! 라고 했잖아. 그 때에 대한 답이었지.”

“내가 언제 울었어!”

“기억 안 나냐? 술도 못 먹는 게 맥주 두 캔에 얼굴 벌개져가지고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매달렸잖아!”

“그, 그건!!”

“네가 하도 울고불고 하길래 그김에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네가 계속 귀여워보이는 거면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사귀자고 한 거야. 편지에 대한 답은… 그때처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말 안했던 거고.”

“태서바…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왜 영화보면서 던지듯이 얘기하는 거야…?”

“그거야…….”

태섭의 시선이 TV 속 영화로 향했다. 우성 역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편지를 읽어본 주인공이 가슴에 소중히 편지를 끌어안는다. 다음날이 되자마자 상대를 찾아간 주인공이 양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서로를 꽉 끌어안는 모습에 태섭이 우성을 보며 말했다.

“네 편지가 그만큼 소중했으니까. 내게.”

“…진짜 치사해. 송태섭.”

“이리와.”

태섭이 팔을 벌렸다. 우성이 그런 태섭을 마주 안았다. 가슴이 맞닿으며 서로의 고동소리를 공유했다. 기분좋은 소리를 나눈다.

- 편지와 수줍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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