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른 (단편)

[우성태섭] 첫사랑이니까 책임져!

* 리퀘스트 받은 우태

* 리퀘는 블스 계정에서 계속 받습니다 😉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 어린 우성은 아빠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던 광철의 얼굴에 드물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옆에 선 엄마 미사 역시 우중충한 얼굴로 흐리게 우성을 보며 웃어보였다. 우성이 눈을 깜빡이고, 미사가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없이, 하지만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우성 역시도. 제대로 빗지 못했는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꽁지로 묶은 여자가 미사를 보고는 이미 짓무른 눈가에서 다시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광철 역시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우성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울고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우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울고있는 여자 옆에 그와 같은 검은 옷과 검은 치마를 입은 작은 아이 둘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한 명은 단발머리에 자신보다 어려보였고, 다른 한 명은 제 나이 또래로 보였다. 두 여자와 다르게 혼자 곱슬머리를 한 그 여자아이는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우성의 시선이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고정되고, 그 시선을 느낀건지 아이가 고개를 들어 우성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한 눈가와 앙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우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다섯살의 어린 우성은 이 상황에서 그 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에 어린 나이였다. 아이는 우성을 잠시 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광철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왜인지 모르겠다. 가슴이 쿵쿵 뛰는 건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아이에게 시선이 계속 간 것은, 왜였을까.

“우성아.”

광철이 우성을 불렀다. 퍼뜩 정신 차린 우성이 광철에게 다가갔다. 주춤거리며 우느라 여념없는 여자를 달래는 미사 건너에 쭈그려 앉은 아이들을 보았다.

“아라는 너무 어리니까 미선씨 옆에 두고, 네가 태섭이랑 같이 좀 있어줄래?”

“태섭이?”

이름이 불리자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성과 다시 눈을 마주친다. 우성의 검은 눈과 아이의 갈색 눈이 마주친다. 광철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멈칫하다 여자를 보더니 입술을 꾹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철이 아이를 한번 품에 안고 등을 도닥여 준 후 우성에게 손짓한다.

“태섭아. 우리 아들 우성이야. 우성이랑 같이 있으렴. 태섭이 엄마랑 아라는 우리가 옆에 있을 테니까.”

아이의 이름이 태섭인 모양이었다. 여자 아이답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태섭은 광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말대로 천천히 우성의 앞까지 다가왔다. 아이의 시선이 미사의 품에 안겨 우는 여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보다 어린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여자를 찾았다.

“엄마아… 나 졸려…….”

“옳지, 아라야. 이모한테 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칭얼거리자 미사가 아이를 챙겼다. 미사의 시선이 우성을 향하자, 우성이 얼결에 태섭의 손을 잡았다. 태섭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우성이 말했다. 저도 모르게.

“나, 나가자.”

낯선 향이 가득한 곳. 우는 소리가 가득한 곳. 검은 옷이 가득한 곳에서 빠져나온 우성은 집 밖까지 태섭의 손을 잡고 걸어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망설이는데 아이가, 태섭이 손을 놓았다. 우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섭은 울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어?”

태섭은 그 말만 하곤 맨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놀란 우성이 그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무슨 말이야?”

“내가… 나랑 안 놀아준다고…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해버려서…….”

“뭐?”

우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태섭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있었다. 어린 우성은 당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지금 앞에서 처음 본 여자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런 게 어디있어? 그런 말 했다고 그게 어떻게 너 때문이야?”

아이가 놀란 눈으로 우성을 보았다. 우성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 때는 그저 저 아이가 울지 않기만을 바랐다.

“너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 있으면 내가 다 혼내줄게! 그러니까 울지마. 응?”

우성이 서툰 손으로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제가 울망울망한다. 태섭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왜 울어?”

“네가 우니까 그렇잖아!”

이미 잔뜩 코먹은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우성이 훌쩍대자 푸스스 웃던 태섭 역시 다시 울망울망하기 시작했다. 태섭이 눈물을 터뜨릴까 우성이 냅다 그를 끌어안았다.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울지마아-.”

그러고는 둘이서 펑펑 울었다. 아이 우는 소리에 놀란 어른들이 나와서 둘을 데리고 들어올 때까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장례식 때 딱 한 번 마주쳤던 그 여자아이가 첫사랑이 되었던 것이.

“우성. 일어났나? 북산고 시합 볼거니까 일어나라 뿅.”

“아, 네.”

갑자기 왠 꿈이람. 우성이 깜빡 잠든 몸을 스트레칭으로 깨우며 생각했다. 출전 예정 선수들이 모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도진우 감독이 북산고의 경기 녹화본을 틀었다. 한 명 한 명 얼굴이 비쳐지고, 그에 맞춰 도 감독이 선수들을 불렀다. 4번, 센터, 채치수… 주장의 이름과 포지션을 설명하는 도 감독의 목소리를 들으며 감흥없이 화면을 보고 있던 우성이 눈을 번쩍 떴다.

“7번. 포인트 가드. 송태섭이다. 단신이지만 그만큼 재빠른 선수로…….”

‘송태섭? 송태섭이라고?’

우성이 태섭이라 불린 작은 선수를 응시하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태섭이라는 이름이 솔직히, 그래. 여자 아이보다는 저런 사내 이름으로 더 잘 맞다고 생각한다. 괜히 어렸을 적 단 한번만에 사랑에 빠지게 한 첫사랑, 그 이후로 이사 가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픈 사랑의 이름과 동명이인인 선수를 보니 가슴이 술렁이는 것만 같았다. 땀으로 푹 젖어있어 곱슬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경기를 멍하게 보았다. 이름이 같을 뿐인데. 성별부터 다른데 이러는 이유는 역시 꿈 때문일 것이다. 우성은 경기를 보면서도 그 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자랐을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보고싶어졌다. 첫사랑이라서 그런가. 꿈을 꿔서 그런가.

“킁.”

우성이 코를 훌쩍였다. 처음으로 겪어본 패배는 너무나도 속이 쓰리고 분한 것이었다. 눈물을 참고 있는 선수들고, 눈물을 머금고 있는 선수들도 있었다. 이 패배를 거름 삼아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도 감독의 말에 입술을 씹었다. 명헌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고, 자신들에게서, 산왕에게서 1점 차이라곤 하지만 결국 승리를 따낸 북산의 다음 경기를 보고 가겠다고 했다. 명헌을 따라 몇몇 선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성 역시도. 그러나, 산왕에게 이겼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처참하게 지는 북산의 시합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중간에 일어나 등을 돌렸다. 명헌은 여전히 그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이 코트에서 땀범벅이 된 송태섭을 노려보았다. 그 아이랑 같은 이름을 한 주제에. 한심하게…!

어쩐지 화가 났다. 패배의 쓴맛을 느끼게 한 것보다 더.

“저, 이명헌 선수. 북산고의 송태섭 선수가 만남을 요청해왔는데요.”

“뿅.”

매니저의 말에 짐을 챙기던 선수들이 명헌을 보았다. 명헌이 매니저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말했다.

“갈게 뿅.”

“저도 같이 갈래요.”

“흠?”

충동이었다. 우성이 명헌의 옆에 따라붙고, 명헌이 눈썹을 세웠다. 우성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존프레스 하고 뚫린 건 선배 뿐만이 아니라고요. 나도 얼굴 좀 보게요.”

“베시.”

명헌이 선수들에게 손짓했다. 선수들은 저마다 북산과의 경기를 복기하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당연히 우승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숙소를 예약했기에 대회 남은 기간동안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주로 보러 갈 경기는 어느 팀인지 등 이야기를 나누면서. 명헌이 매니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우성 역시 그를 따랐다. 명헌이 그를 흘끗 보다 말했다.

“경기에 져서 그렇다기엔 좀 더 흥분한 것 같은데 뿅.”

“아니에요.”

“그래?”

“…….”

우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헌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머뭇거리던 우성이 작게 말했다.

“그냥… 확인만 하려고요.”

“뿅?”

“옛날에… 들었던 이름이랑 똑같아서요. 걘 여자애였지만,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요.”

“송태섭이라는 이름을 한 여자애가 있을 수 있나 뿅. 태선 아냐?”

“아니에요. 광철이 다시 얘기해줬는데 태섭이라고 했어요. 이름이 독특해서 안 잊었다고요.”

“…우성, 어디가서 아버지 이름 그렇게 말하지 마라 뿅.”

“송태섭 선수.”

“아. 이명헌 선수… 어.”

“킁.”

매니저의 부름에 돌아서있던 태섭이 등을 돌렸다. 명헌을 보다 옆에 선 우성을 보며 멈칫한다. 우성이 코를 훌쩍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못마땅하게. 그 시선에 태섭 역시 한쪽이 삐죽 솟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보았다. 둘이 시선을 마주하는 표정을 보던 명헌이 손을 들었다.

“용건 뿅.”

“아. 죄송합니다.”

땀으로 머리가 다 젖어 흘러내려서 그렇지 인상 자체가 날렵하고 불량해보여서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제법 예의를 차릴 줄 안다고 생각했다. 명헌을 대하는 태섭의 태도가 반듯했다. 유니폼에서 교복… 교복 맞나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옷을 입고 있는 태섭의 모습은 빈 말로라도 좋은 학생의 이미지는 절대 아니었다. 규정도 그렇지만 평소에도 다들 단정하게 교복을 입는 산왕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 우성이 인상을 썼다. 그 아이는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괜히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더 세모눈을 하고 보게 된다. 그런 자신이 못나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첫사랑은 끝난 게 아니었기에.

명헌과 대화하는 태섭이 중간중간 우성을 흘끔거렸다. 우성의 시선이 따끔따끔해서 그렇겠거니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명헌이 저와 대화하면서도 마음이 콩밭에 간 듯한 태섭에게 툭 내뱉었다.

“우성에게 볼 일이라도 있나용.”

“네?”

놀란 것은 태섭 뿐만이 아니었다. 우성 역시 놀라는 바람에 삑사리가 났다. 명헌의 말에 어버버 하던 태섭이 우성을 보았다. 우성 역시 태섭을 보았다. 말없이 우성을 보던 태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를 노려보는 게 심상치 않아서 그런가 자꾸 눈이 갔나봅니다. 죄송해요. 제가 이런 시비 어린 시선에 민감해서요. 저는 오는 시비 막는 사람이 아니라서.”

태섭의 말에 우성이 움찔했다. 명헌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꿈치로 우성의 옆구리를 친다. 우성이 입술을 삐죽인다. 그 모습에 태섭이 양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한번도 패배해본 적 없는 기고만장하던 자존심이 꺾인 건데 그렇게 쳐다볼 수도 있죠.”

“뭣이?”

“난 네 잘난 포스터를 보면서 우는 모습이 궁금했거든. 보아하니 눈물 좀 났나봐?”

“익…!”

우성이 다급히 제 눈가를 닦아냈다. 명헌이 인상을 찡그리자 태섭이 미소를 그렸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산왕이 솔직히, 저희한테는. 특히 저에게는 너무 큰 파도였어서. 너무 큰 벽이었어서 저도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나봐요.”

“그 이후로 처참하게 깨지기도 했고 말이지.”

“…하하. 경기 봤나요?”

태섭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훈련 상대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싶다면 적당히 거리두고 예의 차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베시.”

“이명헌 선수에게 시비거는 건 아니었어요.”

“산왕은 나 혼자가 아니다 베시.”

명헌의 반응에 우성이 움찔하고, 태섭 역시 치켜올린 눈썹을 누그려뜨리며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드립니다.”

“뿅. 우성 너도 적당히 해.”

“…네….”

그 대화를 끝으로 셋은 헤어졌다. 태섭은 북산으로, 명헌과 우성은 산왕으로. 가야할 곳으로 등을 돌렸다.

저마다의 농구를 계속했다. 우성은 예정된 일정인 미국으로 떠났고, 농구의 본고장에서 체격차로 스몰 포워드에서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이 바뀌는 것을 받아들이고 농구를 계속했다. 원하는 포지션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분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성은 미국에서도 날아다녔다. 아시아인을 괴롭히는 놈들의 콧대를 농구로 짓뭉개줬다. 한국에서 슈퍼에이스였던 우성은 미국에서도 에이스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작은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결국 도달한 태섭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 어머, 우성아. 태섭이를 만났어? 미국에서도 만나다니 무슨 일이야~

“…엉?”

국제전화-우성이 비용을 낸다-로 집과 통화하던 우성이 갑자기 나온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사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 으응? 우성아. 너 태섭이 기억 안 나?

“으응?”

태섭이 말이야! 미선씨 작은 아들! 옛날에 네 아빠랑 같이 장례식장에 간 적 있잖아. 미선씨 남편이랑, 큰 아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사고로…….

“…작은… 아들……?”

아들? 아들이라고? 남자? 그치만 그 아이는 그 때…….

- 그 동네 전통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거 있었잖니. 열 살이 되기 전에 아들을 여장해서 키우면 장수할 거라는 거. 미선씨도 그 말 안믿는다고 했었는데, 뱃사고로 큰 아들 준섭이 떠나보내고 작은 아들 태섭이까지 잃을까봐 장례식 때 아라랑 같은 옷 입혀놨었어. 태섭이가 그 때 다섯살이었잖아. 정말 그 때 이후로 열 살까지 여장을 해놔서, 미선씨가 정말 마음앓이 심했구나 했는데. 그 와중에 태섭이가 어렸을 때는 뭐랄까, 예쁘장했잖니?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우성이 너 태섭이를 여자로 알고 있었어?

“…….”

우성이 입을 벌렸다. 미묘한 기시감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다고?

- 아, 어떡해. 정말 여자아이로 알고 있었나보구나. 그래서 예전에 우성이 네가 물어본 거구나? 이름이 태선인 거 아니냐고. 어떻게 여자애 이름이 태섭이냐고. 어머나… 그냥 네가 이름이 헷갈려서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사의 말이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성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대로 사라졌다고 생각한 첫사랑의 존재가 같은 남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농구를 하고, 지금은 같은 땅에 있고, 최근에 시합까지 했다. 좋아하는 것에 좋아하는 것이 합쳐지니 우성의 머리가 터질듯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를 기억하냐고 물어봐야할까. 내가 그 때, 지켜준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북산고 시합에서 마주쳤을 때 알아봤냐고 물어볼까? 미국에서까지 만날 정도면 운명이 아니겠냐고 말을 해볼까? 운명을 믿냐고 물어볼까? 나를, 나를 기억할까? 너무 두근거리다 못해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던 우성에게 드디어 미사의 목소리가 닿았다.

- 맞다. 태섭이는 우성이 너 기억하고 있는 것 같더라? 고등학교 시합 때 알아봤다고 했는데. 우성이 네가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고 하던데. …우성아. 우성아? 엄마 말 듣고 있어? 우성아?

“…그래서?”

우성에게서 다짜고짜 연락을 받고 불려나온 태섭이 눈썹을 까딱였다. 상황을 죄다 설명하고 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그래서?’라니. 우성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우성을 보던 태섭이 말했다.

“여자앤줄 알았는데 남자여서 미안하다고 얘기해야하나?”

“어? 아니, 그게…….”

“누가 봐도 남자애를 여자애로 착각한 건 넌데.”

“윽.”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포지션을 전향한 자신처럼, 고등학생 시절보다 어떻게든 몸을 키운 태섭이 축 늘어진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평소에는 왁스로 머리를 올리고 다녀서 못 알아본 거였구나. 우성이 생각했다. 풀린 곱슬머리는 우성이 처음 마주했던 태섭의 곱슬머리와 똑같았다. 왜 몰랐을까. 경기할 때마다 왁스가 땀으로 녹아내려 머리가 다 풀렸었는데. 그렇게 보고도 왜 몰랐을까. 우성이 우물거리자 태섭이 한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말했다.

“내 의사는 없지만, 그래도 착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어?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거야.”

“여자앤 줄 알고 좋아했었다며? 그 첫사랑이, 여즉 못 잊고 있던 첫사랑이 같은 거 달린 사내자식이라는데 꿈이 완전 깨졌을 거 아냐. 남자의 첫사랑은 평생이라는데. 미안하지 아무래도.”

태섭의 말에 놀란 표정을 하던 우성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성큼 태섭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어? 어어.”

“그러면 책임질거야?”

“허?”

태섭의 삐뚜름한 눈썹이 치솟았다. 우성이 눈을 반짝이며 태섭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윽, 뭐야. 너무 가깝잖,”

“나 책임져!”

“뭐?”

눈썹이 둥글어지며 눈이 크게 뜨인다. 우성은 그게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우성의 큰 손이 상대적으로 작은 태섭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서로 농구공을 오래 만진 탓에 지문이 닳고 굳은살 박힌 손바닥과 손가락들이 얽혀들었다.

“내 첫사랑 지켜주고 싶은거잖아! 그러니까 날 책임져줘!”

“뭐?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너 남자 좋아해?”

“남자고 여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송태섭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우성의 외침에 태섭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이기만 해봤지 고백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책임지라는 외침이 너무나도 뜨겁게 다가왔다. 어렸을 적 보았던 얼굴과 별 차이 없는 모습에 태섭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지켜준다 하더니 책임지라고 하네…….”

“앗! 지켜주지! 지켜줄건데! 그러니까 나 책임져야지!”

“으, 으아! 일단 좀 떨어져!”

얘 원래 이렇게 저돌적인가? 돌격은 잘 하는 것 같았는데. 돌격대장은 난데. 태섭이 우성을 겨우 밀어내며 외쳤다.

“이, 일단은 친구사이부터 시작해!”

“뭐어? 왜!”

“왜긴 왜야! 우리가 옛날에 한 번 보고 한 번도 안 본 사이인데 갑자기 책임지네 마네 이런 말이 나오는 게 억지지!”

“앗!”

우성이 멈췄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우성을 보며 태섭이 숨을 돌렸다. 우성이 놓지 않은 손에 시선이 갔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무 감정 없었는데. 그저 그 때 마음 속은 혼자였던 자신에게, 자책만 할 줄 알던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줬던 게 고마워서. 자기도 엉엉 울면서 지켜주겠다고 얘기하는 게 고마워서. 그 모습이 한참 기억에 남았더랬다.

이사를 가게되어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산왕전에서 다시 만난 게 반가웠던 것 뿐인데. 상복으로 치마를 입었던 자신을 여자로 착각하더니 첫사랑이라며 이제는 책임지라고 외치는 키와 덩치가 산만한 녀석을 보는 태섭의 시선이 복잡했다. 이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이 정의할 수 없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정직하게 사랑을 외치고 달려드는 이를 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첫사랑을, 오해인줄 알았으면 정리할 수도, 아니지. 정리해야할 첫사랑임에도 직진으로 달려오는 걸 마냥 아니라고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근데 그렇잖아.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벌써 책임지네 마네를 언급해. 외형으로는 안 그래보여도(?) 태섭은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우성이 계속 밀어붙이면 못 이긴 척 책임지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기에 너무 어색하고 먼 사이잖아. 그러니까, 친구부터 시작하자는 거였다.

“우우…….”

입술 댓발 나와가지고 불만 어린 표정을 보이는데 누가 다 자란 성인이라고 생각할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태섭이 손을 살살 흔들어 우성의 손을 놓은 뒤, 제게 고개 숙인 우성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일단 친구부터 하자. 응?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그때. 그때가 되면 네 말대로 내가 널 책임질게. 안된다는 게 아니잖아.”

“…흥.”

“나 안 지켜줄 거야?”

“——!”

우성이 태섭을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태섭의 발이 달랑 들렸다. 벌크업을 그렇게 했는데도 피지컬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켜줄 거야! 평생 내가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나 책임져야 돼! 알았지!”

결국 태섭에게서 웃음이 터진다. 우성이 여전히 불만 어린 표정으로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웃는 태섭을 얄밉다는 듯이 노려보다 그 역시 웃고 만다.

그리고, 2년 후.

“큭큭.”

“응? 무슨 생각해?”

상의를 벗어던지는 제 아래에 누운 태섭이 웃자 우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모든 옷을 탈의한 상태인 태섭이 말했다.

“아. 너랑 다시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아!”

우성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태섭이 그런 그를 보며 팔을 뻗었다.

“이리와.”

순순히 태섭에게 몸을 낮춘 우성이 태섭의 품에 안겨들었다. 태섭이 단단하고 넓은 그의 등을 껴안았다. 우성이 몸을 살짝 일으키고, 눈이 마주친다. 태섭이 눈썹을 까딱하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애가 아니어서 아쉽지 않아?”

“전혀.”

내가 얘기했지? 내가 좋아하는 건 송태섭 그 자체라고.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태섭이 씩 웃었다. 우성의 얼굴이 태섭의 얼굴에 가까워진다.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태섭의 손이 탁상을 더듬거리다 무드등의 전원을 껐다. 곳곳에 입을 맞추는 소리가 간지러운 밤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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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게임하는 고슴도치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보고싶었던 이야기를 뮤가님의 글로 읽을 수 있는 새롭고도 행복한 경험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소중히 보고 또 보게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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