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안드로이드도 사랑을 알까요?
업로드 2023.11.24
* 백호열 트친 생일축하연성
* 전투로이드 백호열 시리즈 마지막편!
품 안에 잠든 호열은, 처음- 그러니까 백호가 인간이 아닌 전투로이드로 다시 태어나서 처음 봤던 때보다 시간이 지난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식된 기억에 의하면 사고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목숨을 잃었을 때가 20대 후반이고, 그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변화였다. 백호는 여전히 20대 후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아니니까.
10여년 전보다 살짝 건조해진 피부를,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려본다. 호열은 잠들기 전까지 사람들을 살려내느라 분주했다. 레스큐로이드인 소연도 지쳐보였지만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서 쌩쌩하게 날아다녔는데. 호열은 그러지 못 했다.
인간이니까.
- …….
백호는 조금 야윈 느낌의 호열을 품에 더욱 깊숙히 끌어안았다. 칭얼거리듯 작게 소리내던 호열이 자연스럽게 백호의 품을 파고든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이유를 알고있다. 연인이라는 호열은 '자신'을 마주한 이후로 진득한 스킨쉽을 취하지 않았다. 인간이었을 적 기억에 따르면 종종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호열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있는 느낌이었다. 눈 앞에서 분명히 웃고있는데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 호열은 항상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자신의 모든 것이었는데. 호열은 더이상 그 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래서. 전투로이드 강백호는 호열이 잠든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유일하게 부정당하지 않는 순간이기에.
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억 속 호열은 항상 자신을 보며 웃고있었다. 다양한 표정, 다양한 제스쳐 등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 시선 속에서, 그 미소 속에서, 그 손길에서 백호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판단했다.
전투로이드.
전쟁을, 전투를 위해 제작된 안드로이드. 적진을 향해 달려들고, 제압하고, 죽이는 무기 그 자체. 주변 상황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고 행동한다. 목표는 오로지 적의 제거 및 파괴뿐인 안드로이드가 전투로이드다.
그렇기에 전투로이드인 강백호는 양호열의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인간이었던 강백호가 양호열을 무슨 매커니즘으로 사랑을 했는지 모른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만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 존재이기에 전투로이드 강백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기억 속의 호열이 너무나도 행복해보였기에, 주인으로 각인된 호열을 지키고 싶기에. 기억을 바탕으로 호열의 눈빛, 시선, 표정, 움직임을 읽고 분석하여 그에 맞는 반응을 선보인다. 인간이 가진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부정확하게 변할 수 있는 감정이었으나 전투로이드인 백호에게 이식된 기억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전이된 기억은 백업 시스템에 저장되어 필요시 백업 시스템과 연동하여 과거의 기억을 읽어나가기에 잘못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호열은 기억을 바탕으로 반응하는 백호를 보며 이상한 얼굴로 웃을 뿐이다. 전투만을 위한 존재는 생존과 관련된 감정 외에는 제대로 분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알고리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업된 기억을 몇 번이고 다시 재생하고 재생하여 호열에게서 그때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그저 단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전투로이드 강백호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기억에 일치하는 반응을 보이는 상황인, 호열이 잠든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전투로이드는 평생 알 수 없겠지. 백호가 호열을 조심스럽게 품었다. 눈을 감는다. 잠들지 않지만 잠들어있는 모습을 원하기에 눈을 감는다.
백호는 제 앞에 선 조그만 성인용 안드로이드를 내려다 보았다. 헤어스타일도 독특하고, 뭔가 표정도 삐딱하고. 성인용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외형의 안드로이드가 북산의 장인인 준호와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소연을 제작한 치수와 자신을 제작한 대만도 모여있다. 백호는 재수탱-재수없는 서태웅이라서 재수탱. 별명은 자신이 지었다.- 과 함께 호출 받아 나온 것이었다. 성인용 안드로이드는 큰 키와 덩치를 가진 자신과 재수탱을 번갈아 본다. 잠깐, 아주 잠깐 놀란 얼굴을 하다 재빨리 숨긴다. 삐딱하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껄렁하게 본다. 백호의 표정도 따라서 삐딱해진다. 아무리 봐도 성적어필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어디서 이런 게 나왔지?
그래도 성인용으로 제작되긴 했는지 잘 짜여진 몸에 비해서는 몸이 아주 말랑했다. 따끈했다. 손 크기를 놓고 비교하다 눈 앞의 작은 손이 누군가와 닮아보여 덥썩 잡고 주물러보았다. 피부색이 달랐는데 왜 였을까. 전투로이드는 사랑을 모르기에 알 수 없었다.
성인용 안드로이드는 자신을 전투용으로 개조해달라고 찾아왔다고 했다. 각인한 두 명의 주인이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다치거나 위험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준호는 그 안드로이드를 제작한 장인이었고, 성인용 안드로이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북산을 찾아온 것이었다. 전투용은 준호의 주 영역이 아니었기에.
백호는 말랑하고 따끈하게 잡혔던 손을 떠올렸다. 전투용으로 개조하기엔 턱없이 물렁했다. 자신의 크고 투박한 손을 내려보았다. 꼴도 보기 싫지만 재수탱의 몸도 아닌 척 빠르게 훑었다. 전투용 안드로이드가 되려면 못해도 자신 정도의 육체를 갖춰야했다. 그 물렁한 몸은 단단한 장갑차도 뚫을 수 없고, 맨 손으로 적진 한 가운데로 파고들어 적들의 목을 쥐고 꺾을 수도 없었다. 무리였다.
치수나 대만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는지 안 된다고 거절한다. 성인용 안드로이드와 준호가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을테니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처음부터 전투로이드로 제작했으면 됐을텐데. 못해도 경호용이기라도 했다면 이 정도로 안 되진 않았을테다.
그런 장인들을 돌려세운 것은 성인용 안드로이드의 말이었다.
-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심드렁하게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 생각하던 백호의 눈이 성인용 안드로이드를 향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저 성인용 안드로이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는 걸까. 애타는 부탁 아닌 부탁에 대만과 치수가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을 죽이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무기를 만드는 게 전문인 북산은 은근히 마음이 약했다. 보라. 그 산물이 레스큐로이드 소연과 전투로이드 자신이 아닌가. 소중한 가족의, 피해자가 잃은, 사랑하는 연인의 염원을 지나치지 못해 만들어진 북산의 아이러니.
신체의 한계로 일부 강화와 무기 탑재가 결정되고, 장인들이 준비하러 자리를 떠났을 때 백호가 성인용 안드로이드에게 다가갔다.
- 야.
- 송태섭이야.
- 그래 섭섭이.
- …?
떨떠름해하는 것을 무시하고 재수탱이 졸고있는 틈에 백호가 질문을 던졌다.
- 너는 사랑이 뭔지 아냐?
성인용 안드로이드의 눈이 커진다. 백호는 진심으로 질문했다.
전투로이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기에.
얼마만에 받은 오프인지. 호열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배를 벅벅 긁으며 산발이 된 머리로 냉장고를 향한다. 물을 꺼내기 전 식탁에 놓인 쪽지가 눈에 들어온다.
- …호출이 들어와서 다녀올게, 천재가…….
갈라진 목소리로 따라읽다 손 안에 쪽지를 구긴다. 한참을 서있다 구겨진 쪽지를 편다. 이미 주름진 쪽지가 원상복귀되지 않는다는 것을 호열은 잘 알고있었다.
호열이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 벽에 등을 기댔다. 호출받고 나간다는 쪽지를 언제 썼는지 모르지만, 저녁 늦도록 들어오질 않으니 신경이 쓰였다. 그것이 미묘한 분리불안이라는 것을 호열은 알고 있었다. 백호를 잃고 '백호'로 제게 돌아오고 난 이후 생긴 것이었다. 그가 쉽게 죽거나 다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재가 길어지면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전투를 나간 날이면 특히. 당직을 서는 날이 아니어도 응급센터 입구를 지키는 날도 많았다. 허름하게든, 멀끔하게든 제게 돌아오는 백호를 보고 나야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쪽지에 적힌 호출은 종류가 적혀있지 않은 것이었다. 급하게 휘갈겨 쓴 흔적도 없었으니 북산 내에 있을 건데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조한다. 옆에 있다고 해서 이전처럼 사랑하지도 못 하면서 무엇을 바라고 이리 멍청하게 구는가 싶어서.
그저 그의 존재 자체가 옆에 있기만 해도 되는 건가.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겉모습과 가지고 있는 기억은 그 때의 강백호가 맞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의 기억에 머물러있는, 늙지 않는 외형이 세월의 흐름을 보내고 있는 호열을 더욱 괴롭게 했다. 다시 사랑할 수 있게된다 하더라도 늙어가는 자신과 늙지않는 그 사이의 간극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태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극명해질 것이 분명한데.
과거는 있는데 현재와 미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차라리 혼자였으면 곱씹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그래도 있는 게 나은걸까. 백호가 제 옆에 존재하고 자리하는 것이 옳은 건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로웠다. 함께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함께 눈 감고 싶었다. 죽는다면, 차라리 함께 죽고싶었다.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산다면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안드로이드는 사랑을 알까. 호열의 주위엔 안드로이드가 없었다. 지금이야 전투로이드부터 시작해 레스큐로이드도 있고 경호용 안드로이드도 있고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그들을 보았을 때 사랑이라는, 폭넓게 애정하는 마음을 볼 수 없었다. 느낄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당장 옆에 서있는 백호만 봐도 그랬다. 호열이 백호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백호는 분명 자신을 보면서 웃고, 말하고, 사랑을 속삭이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눈빛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읽을 수 없었다. 그 순간마다 호열이 절망했다. 스러져갔다. 슬퍼했다. 너무도 사랑한 사람인데 사랑할 수 없음이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이 속삭이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음에 절망했다.
껍데기.
껍데기와 기억을 덮어씌운다고 해서 정말로 사랑하는 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무쳤다. 무너지게 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옆에 없으면 허전했다. 매번 절망하게 해도 옆에 있었으면 했다. 사랑했으면 했다.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음에 슬펐다.
안드로이드는 사랑을 알까.
낯선 얼굴과 대화하는 백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직 볼 일이 끝나지 않는 듯 해 다시 뒤돌아 벽에 기대섰다. 백호 뿐만 아니라 북산의 세 장인과 백호와 같은 전투로이드 태웅도 함께 있어 무슨 일 있긴 한가보다 할 뿐이다. 그래도 북산 안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안도가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오래 걸릴 것 같으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격한 외침에 호열이 번쩍 눈을 떴다. 소란스러워진다. 호열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낯선 얼굴이 있다 했더니 그 역시 안드로이드인 모양이었다. 북산에 있는 안드로이드라면, 역시 전투와 관련된 안드로이드겠지. 사랑도, 무엇도 모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이 어째서인지 진정되지 않았다. 호열이 몸을 돌려 낯선 안드로이드를 보았다. 아. 소리 나지 않는 탄식이 터져나온다.
호열은 낯선 안드로이드의 얼굴에서
사랑을 보았다.
사랑을 읽었다.
사랑을 느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그것을 느꼈다.
안드로이드는 사랑을 모를텐데도.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호열에게 닿아왔다.
- 나, 그 사람들이 좋아요. 너무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 그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낯선 안드로이드가 준 울림이 호열의 안에 깊게 침투했다. 그가 성인용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지만, 호열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안드로이드가 호열에게 답을 주었으니까.
안드로이드도 사랑을 안다고.
- 만만.
- 뭐냐.
- 부탁이 있는데.
답지않은 저자세의 백호에 대만이 그를 보았다. 불러놓고 한참을 우물거리던 백호가 말했다.
- 나 변할 수 있게 해주라.
- 뭘 한다고?
반응을 한 것은 치수였다. 태섭의 개조 이후로 북산에 종종 찾아오던 준호의 시선도 백호를 향해있었다. 대만이 수리 작업을 멈추고 다시 백호를 보았다.
- 무슨 뜻이야? 그거.
대만의 물음과 동시에 준호와 치수가 백호에게 다가왔다.
- 호여리가, 혼자 변해가는 게 싫어. 그 녀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혼자 남겨지는 것도 싫어. 나를 볼 때마다 변하지 않는 나와 변해가는 자신을 비교하면서 슬퍼하는 것도 싫어. 나는 섭섭이 같이 인간의 욕망과 애정을 위해 태어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서,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이었을 나도 호여리가 혼자 변해가는 걸 원치 않았을 것 같아. 지금의 나도 호여리가 혼자 변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같이 변하고 싶어. 호여리가 나를 껍데기만 강백호인 게 아니라 온전한 강백호로 봐줬으면 좋겠어. 호여리가 죽으면…….
잠시 숨을 고르던 백호가 말을 이었다.
- 나도 함께 멈추고 싶어.
백호의 말에, 자세에. 귀를 기울이던 세 장인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소를 그렸다. 어려운 숙제를 던졌건만, 그래도 미소를 지었다.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준호가 말했다.
- 백호야,
그게 바로 사랑이야.
안드로이드도 사랑을 알까요?
정답은,
YES.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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