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단편)

[백호열] 악몽과 기사

업로드 2023.10.19

* 판타지AU

* 판타지와 인간이 아닌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대부분의 연성이.. 인외였지 않을까...?

* 우정출현에 백호열러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지인플이라던가 그런게 아닌 그저 허락을 구한 것임을 밝힙니다.

** 백호군단(내용상 호열군단에 가까운) 지분이 더 많은 것 같지만 어쨌든 백호열 맞습니다 


어둠 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발 밑마저도 깊은 어둠이다. 그저 서 있으니 바닥이 있다고 '느낄' 뿐이다. 이 어둠은 위험했다. 호열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발각되면 위험하다. 도망쳐야 해. 호열이 등을 돌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달렸다. 등을 돌리자 마자 멀리서부터 하얗게 빛이 쫓아들었다. 매서운 속도였다. 호열은 이를 악문 채 앞만 보고 뛰었다. 전신이 긴장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마로부터 콧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등 뒤를 좇는 빛이 호열의 근처까지 따라붙었다. 호열의 뒤꿈치 자락까지 붙었다. 발목을 휘감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헉!"

호열이 눈을 떴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호열이 몸을 일으켰다.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잘 때 입는 편한 옷이 전신과 마찬가지로 땀에 절어있었다. 호열이 후우, 하고 깊게 숨을 고르자 이마며 코 끝이며 할 것 없이 땀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숨을 한참 고르고 나서야 창 밖을 내다본다. 검은 하늘. 호열이 마른 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목욕을 위해 따로 낸 공간 속 나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는다. 땀에 젖어 들러붙는 옷을 겨우 벗어내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끝에 고개를 젖힌다. 통나무로 만든 집 천장이 호열을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다시금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호열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도 악몽이었다.


"오늘도 못 잤냐?"

"딱 봐도 못 잤겠네. 눈 밑 시커먼거 봐."

"진짜 저주 걸렸나."

"……."

마음대로 떠들어라. 되받아칠 기운도 없어 호열이 식당 테이블 위로 이마를 기댔다. 왁자지껄한 식당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아우라에 저마다 쳐다본 파티원-이라고 쓰고 불알친구들이라 읽는-들이 호열을 내려다보았다.

"성속성 패밀리어라도 들여보는 게 어때?"

"……."

호열이 뚱한 얼굴로 몸을 세웠다. 용팔이 손가락을 튕기자 손 끝에서 주홍색 빛이 맴돌더니 손톱만한 크기의 빛덩이가 용팔의 손 주변을 맴돌았다. 빛을 뿌리며 손가락 끝에 앉는다.

"안녕, '배결'."

"안녕, 용팔! 오늘도 동그랗고 귀엽구나!"

용팔의 인사에 밝게 마주 인사한 용팔의 패밀리어 '배결'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다시 날아올라 용팔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배결'에게서 뿌려진 빛의 가루가 용팔의 어깨에 닿았다 스르륵 사라진다. 전날 전투로 상해있던 용팔의 옷이 '배결'의 빛가루에 의해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호열이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용팔과 '배결'을 보던 대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야, 용팔아. 너 잊었어? 호열이가 패밀리어를 들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잖아."

"호열은 마력이 없어서 패밀리어와 계약을 못 해! 저번에도 얘기해줬는데~~!"

'배결'이 용팔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며 소리쳤다. 용팔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호열이 빼고 다 마력이 있으니 자꾸 잊게되네. 미안."

"패밀리어가 있으면 악몽같은 것도 안 꿀 수 있어?"

호열의 대남을 보며 물었다. 대남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성속성을 가졌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리 중에 성속성 패밀리어와 계약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다 애초에 성속성이나 암속성 패밀리어는 희귀해서 정보 얻기 힘들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다만."

"정보 길드에 물어볼까?"

"아. 구식이 친구가 정보길드에 있댔나?"

"모레 누님이 구식이 너 자기한테 장가오면 비싼 정보 싸게 해준다고 하던데."

"으."

정보 길드의 간부를 떠올린 구식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멋스럽게 기른 수염이 같이 파르르 떨린다. 그에 용팔과 대남이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몸 좋은 누님이 꼬시면 냅다 장가 가야하는 거 아니냐!"

"야, 말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 누님 취향이 맘에 드는 연하 애인 만들면 속옷 빼고 다 벗겨서 불가사리처럼 만들어 원판에 돌리고 그 위로 단검 던지는 고약한 취향 있다고!"

"어쨌든 살아남으면 값비싼 정보과 돈도 쥘 수 있는거 아냐? 그 누님 수인이라 실력도 좋을텐데."

"그 값비싼 정보와 돈이 내 목숨값이란다, 친구같은 원수새끼야."

"용팔이도 나한테 장가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결혼반지도 안해줬어 거짓말쟁이!!"

"아니, 너는 일단 사람만한 크기부터 키우고 얘기해야지! 이 상태로 결혼하면 미친놈 취급이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야. 대남이 너는 뭐 없냐?"

"술 만든다고 연락 없는지 벌 써 열 달 하고 열흘 지났다."

"…너 사귀고 있긴 한 거지?"

"…이번에 제조하는 술 완성되면 사귀기로 했는데 지금……."

"그거…그냥 너 방치되고 있는 거 아니냐……?"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아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네가 사람만큼 자라면 결혼 한다니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친구들과 패밀리어 하나의 목소리가 호열의 청각을 뒤흔들었다. 골이 아프다 못해 깨질 것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던 호열이 버럭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움될 거 같지 않으면 조용히 해, 이 자식들아!!!!!!"

…….

세 친구와 한 패밀리어가 입을 다물었다. 더불어 식당 안에서 떠들던 모든 사람들도 합죽이가 되어 호열의 눈치만 살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식당에 호열이 씩씩거리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아까와 달리 작게 소곤거리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민망해하며 주위에 손을 들어 작게 사과표시한 친구들이 의자에 각각 자리잡고 앉는다. 주홍빛이 빛가루를 뿌리며 호열의 주위를 맴돌았다.

"많이 아파?"

"…괜찮아."

'배결'이 호열의 주위를 맴돌 때마다 떨어지는 빛가루가 용팔의 경우처럼 흡수되지 않고 어깨를 타고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호열이 그것을 냉한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돌린다. '배결'이 조금 더 호열을 맴돌다 용팔에게 돌아갔다.

"마력이 없어서 흡수도 안 돼! 패밀리어 찾는 건 무리야!"

"진짜 정보 길드의 모레 누님한테 정보 요청이라도 해봐야하나."

"잠만 좀 자면 되는건데 그럴 거 뭐 있어."

호열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용팔과 대남, 구식, 그리고 '배결'까지 한 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어, 뭐야. 다들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구식의 콧수염이 파들 떨렸다. 대남이 어, 하며 손가락을 들었다.

"탄도 왔잖아?"

"제조가 끝나서 모레랑 한 잔 해보고 왔지~ 많이 기다렸어?"

"술 냄새……."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탄과 모레가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정보 길드의 간부와 마을의 주조 공장을 관리하며 넓게는 이 나라의 술 보급을 책임지는 존재의 등장은 식당의 이목을 모으는데 충분했다. 그전부터 은근히 붙어오는 시선은 용팔의 패밀리어인 '배결'을 향해있었다. 용팔의 패밀리어인 '배결'이 가진 주홍빛은 자연속성이 아닌 인공속성의 빛이었으니까.

"호열이 요즘 악몽에 시달린다고 잠을 못 자고 있어."

대남의 말에 모레와 탄의 시선이 차례대로 호열을 향했다. 호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가는 이벤트는?"

모레의 물음에 호열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인간 마을을 습격하는 까마귀 무리가 있다고 소탕 의뢰가 들어와서 정리 좀 했지."

"수인?"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가 흠, 하며 말했다.

"똑똑하고 고약한 놈들한테 단단히 잘못 걸렸나본데. 그 놈들 중에 우두머리가 있었나?"

"우두머리?"

"어디보자……."

모레의 흰자위 위로 검은 막이 씌워졌다. 구식이 흠칫 하고 검은 막 밑으로 눈이 몇 번 움직이더니 사라져 원래의 흰자위가 나타났다. 검은 눈이 호열을 향했다.

"북산을 빠져나가는 외곽쪽에 거주하는 놈들, 맞지?"

"…모레 누님 종족이 뭐랬지?"

"궁금하니?"

"아닙니다."

웃음을 흘리는 모레에 식은땀을 흘린 대남이 고개를 저었다. 모레가 구식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며 호열을 다시 보았다.

"거기 꽤나 질 나쁜 놈들이 모여산다고 했어. 최근에 난리가 나서 조용해졌다 했더니 네 작품이었구나. 어지간히도 열 받았는지 저주로 복수를 하네."

"저주?"

"쫓기는 꿈 꾸지?"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흘린 모레에 탄이 말했다.

"잠 잘 못 잘 때는 술 한 잔이 최곤데. 대남이 친구니까 한 병 정도는 공짜로 내줄 수 있어."

"술에 의존하고 싶진 않아."

호열이 고개를 저어 거절하자 탄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모레가 말을 이었다.

"성속성 패밀리어는 구하기 힘들거야. 근본적인 해결법은 저주를 건 본체를 없애는 건데, 이미 거주지를 버리고 도망친 놈들 찾긴 힘들테고. 애들 풀어서 정보를 모으긴 하겠지만 까마귀들이 워낙 용의주도해서 얼마나 걸릴진 솔직히 장담 못 해."

"찾아주기만 해요.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면 돼."

"그럼 그 동안에는 다른 대체법이 있어야할텐데."

탄의 말에 '배결'이 모레와 탄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모레가 손을 내밀자 그 손 끝에 앉은 '배결'이 말했다.

"그럼 그걸 쓰자! '악몽 기사'!"

모레와 탄이 '배결'을 보았다. 인간이 아닌 둘의 눈에는 주인인 용팔을 비롯해 인간인 구식과 대남이 볼 수 없는 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작은 소녀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마법용품점에 가면 있을거야! '악몽 기사'!"


손님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카운터에서 판매할 물품을 정리하던 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오세요."

마력이 없는 호열인지라 올 일 거의 없는 마법용품점이 낯설었다. 호열이 주위를 둘러보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태섭의 한쪽 귀에 박힌 피어싱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마력이 없네?"

"마력 있는 사람들은 그게 다 보여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마력에 예민한 편인 사람에게는 실루엣이라도 보이는 편이죠."

"마법사?"

"마도공학자라고 불러주세요. 불덩어리를 만들어서 던져대는 것보다 장난감 만드는 게 더 좋아서."

태섭이 턱짓했다. 호열이 태섭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보자 따라 들어온 용팔의 패밀리어, '배결'이 보였다. 호열이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태섭을 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인공적으로 만든 패밀리어라도 마력이 있어야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요. 그래서, 마법용품점에 방문한 마력 없는 손님은. 뭐가 필요해서 오셨나?"

"악몽 기사가 필요해."

탄의 목소리에 태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호열의 뒤로 서있는 일행을 보다 입을 살짝 벌린다.

"유명한가봐? 술꾼과 정보길드가 같이 다니네. 탄 씨, 그김에 나도 한 병만 줘요."

"넌 술도 안 먹잖아."

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용품점 구석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검은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태섭이 카운터에서 나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만 형이 먹을 거에요."

"미츠이로 보내주지."

"보상은?"

탄이 호열을 가리켰다.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웅아."

태섭의 부름에 검은 고양이가 무언가를 물고왔다. 검은 늑대와 검은 고양이라 그런지 어딘가의 어둠속에서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게 아닌 것만 같았다. 대남이 탄에게 슬쩍 물었다.

"늑대가 술을 마셔요?"

"늑대는 원래 모습이고.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어. 일종의 사역마라고 보면 돼."

"마도공학자라는데 소환도 해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고 꼬여드는 운명이라는 게 있지. 이 녀석을 집어삼킨 저주처럼."

호열을 가리키는 모레의 대답에 대남이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고양이, 태웅이 입에 물고 온 것을 퉤 하고 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카운터로 향했다.

"…이게, 악몽… 기사?"

"애들이 좋아할 법하게 생겼는데……."

호열을 비롯한 친구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였다. 애옭. 검은 고양이가 작게 울더니 태섭의 뒤로 뛰어내리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태섭이 태웅의 침이 묻은 악몽 기사를 닦아 호열에게 내밀었다. 호열이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멋진 검을 들고, 망토를 휘날리며 자신 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코믹스럽게 그려진 붉은 머리의 기사였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용팔이 호열이 쥔 악몽 기사를 들여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특별한 힘은 없는 것 같아."

모두의 시선이 태섭을 향했다.

"밤에, 당신이 악몽을 꿀 때에만 본 모습을 나타낼 거에요. 악몽 기사는 말 그대로 악몽을 물리치는 기사죠. 지금같이 밝은 낮에는, 당신이 낮잠을 자는 게 아닌 한 나타나지 않을거에요."

호열이 악몽 기사와 태섭을 번갈아보더니 악몽 기사를 챙겼다. 탄을 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에 의뢰 받을 일 있으면 그 미츠이라는 술 값만큼 빼고 해드릴게요."

탄이 피식 웃었다.

"너 그럼 공짜 의뢰 몇 번이나 해야하는 줄 알아? 됐다. 대남이만 오늘 내가 빌려가면 돼."

"저요?"

"이번에 제조하는 술 다 만들면 사귀기로 했잖아."

"그거 술김에 얘기한 거 아니었어요?"

"흠. 그럼 나도 정보값으로 구식이 데려갈까."

"해결책 제시는 '배결'이 했는데요?!"

"해결책 제시를 걔가 한거지 어쨌든 정보를 주긴 줬잖아."

대남과 구식이 어째서인지 간절한 눈으로 용팔과 호열을 보았다. '배결'이 튀어나와 용팔의 머리 끝을 당기며 외쳤다.

"재밌겠다! 나도 갈래! 가자! 용팔아!"

"아! 알았으니까 잡아당기지 마! 야 호열아! 우리 간다!"

이걸 간다고 해야할지 끌려간다고 해야할지. 호열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안 모두 우르르 마법용품점 밖으로 나가버린다. 멋쩍은 얼굴로 호열이 태섭을 돌아보았다. 태섭이 말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부디 좋은 꿈 꿀 날 오길 바랍니다."


밤이 찾아왔다. 호열은 침대 맡 작은 탁자 위에 악몽 기사를 올려놓고 팔짱을 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태섭은 이 악몽 기사를 '백호'라고 불렀다. 악몽 기사에도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채 상체를 숙여 악몽 기사를, '백호'를 들여다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태어나기를 마력없이 태어난 호열은 손에 무언가를 제대로 쥘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검을 잡고 활을 잡았다. 손으로 잡는 온갖 무기를 들고 훈련했다. 친구들과 파티를 맺어 의뢰를 수행할 때 호열은 맨 앞에서 커다란 방패로 친구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마법을 사용하느라 발이 묶인 친구들을 위해 뒤를 노리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멀리 있는 적을 노리기 위해 활도 쏘았다. 다양한 종류의 장비를 가지고 다녀야하는 만큼 몸이 무거웠지만 친구들이 경량화 마법을 걸어주면 그마저도 괜찮았다.

마력이 없다고 해서 호열이 세상 사는데 불편을 겪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악몽은, 호열로써도 어찌할 수 없는 분야였다. 결국에는 마법의 힘인가. 호열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레의 정보 길드가 빌어먹을 까마귀 무리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주길 바랄 뿐이다. 호열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천천히 눈이 감긴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어둠이 호열을 반겼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끝까지 닿아있는 어둠은 위도, 아래도, 좌도, 우도 없었다. 멀리서부터 스스스슥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소리. 이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호열이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점차 커지며 등 뒤가 환해졌다. 빛이 호열을 따라 달렸다. 당장에라도 호열을 집어삼킬 듯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펼쳐지며 빠르게 물들어갔다. 호열이 순간 악몽 기사를 떠올렸다. 악몽을 없애준다더니, 이게 뭐야. 순 불량이잖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거칠게 호흡하며 호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빛에 주먹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뒤돌아 빛을 향해 주먹을 뻗으면, 그 주먹에 빛이 산산조각 나며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현실은, 아니, 사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악몽이지만. 식은땀에 젖어있을 자신이 그려졌다. 호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백호!!"

악몽 기사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호열은 알지 못했다. 땀에 젖어 밤을 지새울 자신을 생각하니 무의식이 강렬하게 악몽 기사의 이름을 끌어올렸다. 그대로 입 밖으로 이름을 외친다. 이름 한 번 부른다고 달라질 것도…….

"천재 등―! 장―!"

"…어?"

앞을 향해 달리는 호열의 뒤로 묵직하게 바닥을 내려찍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 겨를도 없던 호열이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붉은 머리, 등 뒤로 펄럭이는 파도빛 망토, 호열을 쫓는 빛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나는 검까지.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호열의 팔과 다리가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나가고, 돌아보는 검은 눈이 크게 뜨인다. 악몽 기사가 검을 들어올린다. 다리를 살짝 굽히고, 달겨드는 빛을 향해 검을 사선으로 내리긋는다. 천천히. 천천히.

유형의 검과 무형의 빛이 맞닥뜨리는 순간.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강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앞으로 달리던 호열의 몸뚱이가 강하게 밀려 그대로 발이 떠올랐다. 산산히 부서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악몽 기사가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아.

눈이 마주친다.

"허억."

땀에 젖지 않은 몸이 가볍게 깨어났다. 호열은 눈을 끔벅였다. 위로 비추는 빛은 악몽에서 보았던 빛이 아닌 햇빛이었다. 호열의 위로 비추기만 하고 얼굴로 비쳐지지 않는다. 어째서? 호열의 침대는 창가에 위치하고 있는다. 호열은 제게 드리워진 그늘을 느낌과 동시에 몸을 감싼 무게감을 느꼈다. 호열의 눈이 주위를 살피고,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이 누군가의 가슴팍임을 인지한다. 편한 일상복. 호열이 눈을 깜빡였다. 슬그머니 올려다본다. 호열은 집에 혼자 살았다. 그렇다면 이 존재는 누구인가. 호열은 자신이 함께 다니는 파티원들인 친구의 덩치를 생각해본다. 이 덩치에 맞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대체?

"깼냐."

"…어?"

"더 자. 아직 피곤할건데."

"????????????"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의심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터운 팔뚝이 저를 고쳐 안아온다. 단단한 가슴팍과 팔뚝 사이에 끼었는데 어째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지. 호열은 처음 듣는 목소리에서,

처음?

호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분명히 검은 고양이가 입에 물어올 정도로 작았는데. 느껴지는 생명력도 없었고. 그랬던 악몽 기사는, 자신보다 더 큰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자신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마력을 가진 것은 다 이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호열이 눈을 깜빡였다. 단단한 품 속에서 온기가 느껴지자 호열의 눈이 점차 느려진다. 몸을 조금 움직여 편한 자세를 취하더니 곧 잠이 든다.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악몽 기사가 눈을 뜬다. 제 이름을 부르던 주인을 보며 작게 속삭인다.

"앞으로 네가 꿀 악몽은 내가 모두 부숴버릴게. 너는 이제부터 편하고 즐거운 꿈만 꾸도록 해."

호열아.

-fin.

*** 악몽을 물리쳐주는 인형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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