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덩

[ㅅㄹㄷㅋ/백호열] 빨강, 사탕, 생각

 

 

백호 군단 앞으로 택배가 왔다. 발신지는 미국.

동봉된 엽서에는 ‘나 농구 과외 시작했다. 돈 생겼으니 늬들한테 미제 맛 좀 보여준다!’는 짤막한 통지가 적혀있었다. 그 말에 대견하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해진 백호 군단은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풀어헤쳤다. 어떤 물건은 공평히 네 개씩 들어있었지만, 어떤 물건은 싸워서 쟁취하라는 듯 하나만 덜렁 보냈다. 백호 군단은 친구의 뜻에 충실히 따라 때로는 합의, 때로는 다툼을 벌이며 물건을 나눠 가졌다. 양호열과 이용팔이 백호 팀 로고가 인쇄된 맥주잔을 두고 가위바위보를 벌이려던 차, 호열은 문득 상자 밑바닥에 있던 빨간색에 시선이 잡혔다. 잠깐만. 호열이 빨간색을 꺼냈다. 빨간 사탕이 가득한 빨간 봉지다. 포장지의 영어를 떠듬떠듬 해석하니 ‘세상의 모든 빨간 맛’이라고 적혀있다. 빨간 사탕은 이것뿐이었다. 나 이거 가질래. 맥주잔은 됐어.

이용팔은 그러라고 했고, 이로써 모든 분배가 끝났다.

친구들을 배웅하고 혼자 남은 호열은 봉지를 뜯어 한 알을 꺼냈다. 얇은 비닐을 벗겨내 빨갛디빨간 사탕을 입에 넣었다.

시작은, 무난한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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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도는 맛이 다를까?”

국내산 포도를 먹다 말고 백호가 물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질문은 이미 익숙하다. 양호열은 힘들일 것 없이 강백호의 머릿속 농구공을 받아냈다.

“다를 걸, 아마. 생긴 것부터가 다르잖아. 미국 포도는 껍질이 더 붉던데.”

“미국 포도 본 적 있어?”

“봤다기보다는… 포도 주스 보면 병에 포도 사진 있잖아. 그게 미국 포도지.”

“맛있을까, 미국 포도. 포도 주스 맛이랑 같으려나.”

“그건 나도 모르겠네.”

가볍게 답하며 포도알을 뜯었다. 플라스틱 쟁반에 담은 포도 두 송이는 어느덧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강백호도 텔레비전에 눈을 안 뗀 채 포도알을 떼어냈다.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빈 껍질을 쟁반에 도로 올렸다. 양호열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한적한 거실, 한쪽에 치워진 운동 가방과 책가방, 벽에 걸린 교복, 재방송 중인 예능 프로그램, 양호열과 같이 있는 강백호. 백호가 다시 포도송이에 손을 올렸다.

“분명 맛있을 거야. 미국은 포도가 유명하댔어. 오렌지처럼. 유명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

“어. 네 말 듣고 보니 맞는 거 같다.”

그제야 강백호가 뒤를 돌아봤다. 양호열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치? 난 이런 것도 다 안다고. 천재니까! 마주 웃어준 양호열은 강백호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돌아가길 기다렸다. 그의 등을 보며 포도알을 입술에 물었다. 작고, 동그랗고, 사탕 같은 포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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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창고 일은 재밌는 축에 속하지만 역시 퇴근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통근 버스에서 내린 양호열은 버스가 떠나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땀에 절인 몸을 식혀줬다. 후, 한숨을 쉬며 옷을 팔락였다. 오늘따라 공기에 먼지가 많은 것 같다. 호열이 정류장 옆에 설치된 자판기에 다가갔다. 뭐든 시원하고 단 걸 마시고 싶다. 빨간 캔을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지자 동전 대신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백호가 보내준 사탕이다. 일하면서 먹으려 했는데 깜빡했네. 호열은 콜라 캔과 사탕을 번갈아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어차피 날도 시원한데. 당분만 섭취하면 됐지. 뜨뜻미지근한 체리 맛이 혀 위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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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필요 없다지. 그럼 한 번에 사과 한 상자를 먹어 치우면 어떻게 될까. 도리어 의사를 찾게 될까, 거기에 그 꼴을 본 의사도 뒤로 넘어가지 않을까? 굳이 답을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호열은 사과를 다섯 알째 집어 든 백호의 손을 잡아 막았다.

“백호야. 너 그러다 탈 난다.”

“사과 가져온 건 너잖아?”

“애들한테 나눠줄 생각이란 것도 말했지?”

옆집의 수도꼭지를 고쳐줬더니(부품 교체가 전부인 간단한 일이었다) 답례로 사과가 돌아왔다. 동생이 사과 농사를 해서 아주 맛있는 사과만 있다나. 사과는 정말로 달고 아삭했지만, 집에는 자신뿐인데 제때 해치우기에는 양이 과했다. 양호열은 이대로 학교에 들고 가 친구들한테 뿌리기로 결정했다. 사과 정도야 부담 없이 나눠줄 만하고 아는 얼굴도 많으니 금세 동날 터였다. 가장 먼저 백호 군단에게 한 알씩 배급하자, 받자마자 베어 문 강백호가 이거 참 맛있다며 호열에게서 사과 상자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쉬지 않고 사과를 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나 다 줘라. 오늘 안에 다 먹을 수 있어.”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한꺼번에 먹으면 탈 난다고. 기껏 병원에서 벗어났는데 또 의사 만나고 싶어?”

사과를 잡아채며 조금 거칠게 말하자 백호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호열은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이거 때문에 체해서 앓아 누우면, 연습도 못 하고 다음주 경기도 제대로 못 뛰잖아. 백호 너도 관리라는 걸 해야지. 천재 농구 선수가 되려면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하는 법이라고.”

“난 이미 천재인데.”

강백호가 뚱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또 먹겠다고 달려들지 않으니 그의 말이 통하긴 했나 보다. 호열은 손쉽게 백호에게서 상자를 넘겨받았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흥 뿜은 콧방귀에, 호열은 한 팔로 상자를 끌어안고 빈손으로 백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이제 스스로를 돌보긴 하는구나. 묘한 감상이 얼핏 들었다. 그것을 속에만 담은 양호열은 조례 시간이 다 됐다며 강백호를 교실로 떠밀어 보냈다. 자기도 그대로 옆 옆 반 교실에 들어갔다.

책상에 털썩 상자를 올리자 앞뒤 옆에서 의문에 찬 눈길을 보냈다. 호열이 웃음으로 대응했다. 사과 먹을래? 엄청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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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대체 뭔 맛이야? 혀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맛에 호열의 미간이 좁혀졌다. 달기는 한데 이건 설탕 때문이겠고, 그가 모르는 과일이라고 보기에는 어쩐지 과일 같지 않았다. 호열은 사탕을 감쌌던 비닐에서 조그만 영어 단어를 찾았다. 딸기, 포도, 체리, 사과 맛을 먹었을 때 여기서 같은 뜻의 영단어를 읽었으니 이것도 그 이름일 거다. 비트. 단어를 입안에 굴려봤다. 비트 맛이라. 전혀 친숙하지 않군. 무슨 과일이려나. 그러고 보니 사탕 봉지에는 ‘세상의 모든 빨간 맛’이라고 적혀있었지, ‘세상의 모든 빨간 과일 맛’이 아니었다. 그럼 과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미국에서는 이게 흔한 맛이겠지. 양호열은 강백호가 말한 ‘미제의 맛’을 지금에서야 접하였다고 느꼈다. 자못 심각하게 사탕을 음미했다. 생각보다 엄청 대단하지는 않고… 조금은 별로려나… 백호 넌 이걸 매일같이 맛본단 거냐….

양호열은 점심시간이 끝나가도록 미제의 맛과 강백호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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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은 백호에게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가라고 말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거절당할 걸 알아챘다. 얼굴에 다 쓰여있었다.

“미안하다, 호열아. 오늘은 좀 바쁘네. 그, 영감님 댁에 들르기로 했어.”

“그래? 알겠어. 그럼 다음에 와.”

양호열은 군말 없이 강백호를 보냈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려다, 일부러 길을 돌아 영감님의 집 앞을 지나갔다. 굳게 닫힌 대문 너머에 이어질 대화를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그는 농구부도 아니므로 두 농구인의 대화를 완전히 추측하기란 어려웠다. 어렴풋한 윤곽만 그릴 수 있지. 얄팍한 상상을 억지로 잇다 보니 벌써 제 집에 도착했다. 호열은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물에 담근 팥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팥밥 지을까 말까. 이왕 불린 게 아까웠으므로 밥솥에 팥과 쌀을 넣었다. 잘 지어진 팥밥을 공기에 담았다.

너무 예전처럼 생각했나. 상황이 예전같지 않아지리란 건 예전부터 짐작했다. 그렇지만 시기가 더 빨리 왔다. 양호열은 아직 예전에 머물러있는데. 나름 뒤처지지는 않게 달렸다고 믿었지만 어차피 속도가 다르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떠날까? 아니면 국내 대학에 먼저 가나? 어쩌면 그대로 국내 리그에서 뛰다가, 거기서 또 기회가 생기면 바로 떠나겠지. 그가 아주 여기에 머무른다는 기대는 없었다. 호열은 그걸 알았다. 강백호의 얼굴, 말씨, 숨결, 모든 곳에 다 쓰여있었다.

다음에는 와준다고 했지. 양호열은 백호가 말하는 다음이 언제일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의 예상을 빗겨나갔으니 뭘 짐작하든 헛발질일 가능성이 크다. 너무 멀지만 않으면 좋겠다. 자신의 속도로는 아직 벅찼다. 젓가락을 들어 팥밥을 집었다. 전국 체전 우승 축하한다.

다음날 강백호가 호열의 집에 들이닥쳤다. 어제 짓고 남은 팥밥을 호열이 내온 고기반찬과 함께 신명 나게 먹어 치웠다. 다음이란 게 정말 빨리 올 수도 있는 거로군. 호열은 국을 홀짝이며 머쓱함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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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베이컨이다. 미국은 베이컨 맛 사탕도 만들어내는구나. 호열이 반쯤은 경이로워하며, 또 반쯤은 질려하며 침을 삼켰다. 밑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까지 합해지자 입 안에서 훈제 베이컨 축제가 열렸다. 담배를 피우던 직원이 불쑥 호열에게 물었다. 호열 형은 이 일 왜 해요? 양호열은 이번 달에 새로 들어온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쉬고 싶어져서. 직원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예?

“나 여기 오기 전에는 식당 점원 했었거든. 일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계속 사람에 치이니까… 마침 사장님이 매출 때문에 일손 줄여야 할 것 같다길래 바로 관뒀어. 그러다 여기서 사람 구한다 해서 왔지. 좋더라. 주변은 도로랑 창고뿐이고. 주택가나 번화가랑도 한참 동떨어져 있고. 여기서는 일만 하니까 좋아. 생각이 좀 줄어들어.”

“고민이 많은가 봐요.”

직원이 깊게 담배를 빨았다.

“고민은 별로 없어. 그냥 생각이 많은 거지. 그러는 너는 이거 왜 하니.”

“저야 뭐 여행 자금 모으기죠. 휴학했을 때 여행 많이 가려고요. 이번에는 해외 가고 싶어요.”

호열은 희미해지는 연기 자락을 구경했다. 미국은 어때. 그다지 진지한 제안은 아니었다. 직원도 별 숙고 없이 가볍게 답했다.

“미국도 좋죠. 좀 비싸긴 하지만. 바짝 벌면 못 갈 것도 없죠.”

대화가 끊겼다. 다행히 침묵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직원은 담배의 마지막 모금을 마셨고, 호열은 저 멀리 보이는 해안선을 응시했다. 어딜 가든 똑같은 저 검은 물을 제외하면, 이 창고는 참 딴 세상 같이 여겨졌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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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야!”

뜨거운 주방에서 막 나온 호열이 백호를 환하게 반겼다. 미리 잡아둔 자리로 안내하면서 짤막한 사과를 뱉었다.

“미안하다야. 너 내려온다는 소리 듣자마자 출근 빼보려고 했는데, 이미 다른 애가 쉰다고 해서.”

“뭘 미안해하냐. 너 일하는 거 보는 것도 재밌어.”

강백호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고는 추천해주는 대로 먹겠다고 말했다. 피망 고기볶음과 생맥주가 탁자에 올라왔다. 젓가락으로 새빨간 피망을 집는 백호를 뒤로 하고 호열은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날랐다. 일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백호 자리로 시선을 던지니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삼십 분. 입 모양을 벙긋거리자 백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맘씨 좋은 사장이 친구 주라며 교자 한 접시를 내밀었다. 사장의 배려로 오늘 퇴근도 앞당겨졌다. 호열은 마지막 손님이 가기도 전에 식당을 나와 백호와 밤거리를 거닐었다. 기름 냄새가 몸에 진동해 백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준비는 잘 돼가?”

“엉. 서류 제출도 기숙사 문제도 벌써 끝났으니까, 방학 때는 오히려 널널하게 준비할걸.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고대하던 미국행이 코앞이었는데 백호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간간이 비치던 긴장도 어디로 숨었는지 여유까지 흘렀다. 백호는 이런 순간에서도 성장을 하는구나. 호열이 익숙하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조심히 다녀와. 넌 어딜 가든 잘할 거다.”

“아직 가려면 조금 남았거든?”

왜 벌써 보내냐? 백호의 핀잔에 호열이 키득댔다. 미리미리 하는 거지. 네가 원체 빠르잖냐. 그다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지 백호가 부러 호열의 팔에 몸을 부딪쳤다. 웃으며 피하다 건물 벽에 닿았다. 들이마신 공기에서 교자와 술, 희미한 피망 냄새가 났다. 나 호떡 된다, 백호야. 손으로 밀어내 다시 길 한가운데에 섰다.

호열도 준비가 필요했다. 강백호를 보낼 준비가. 다행스럽게도 백호가 대학에서 보낸 지난 이 년은 충분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럭저럭 준비할 시간은 되었다. 양호열은 그날을 제법 훌륭히 맞이할 자신이 생겼다.

“다음에 방학 시작하면 바로 보자. 백호 군단끼리 여행이라도 가자고.”

그날에도 양호열은 다음을 기약할 거다. 다음이란 건 정말 빨리 올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당장의 헤어짐이 버겁지 않다. 강백호가 자신에게 가르쳐줬다.

백호가 또 몸을 맞부딪혀 왔다. 나, 아직, 여기, 있다니까. 그만 좀 보내! 아주 작정을 한 듯 밀어붙여 오는 덩치에 호열이 벽과 하나가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강백호는 곡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양호열을 납작하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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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상한 거 아냐?”

뒤에서 들려오는 대남의 목소리에 호열이 돌아봤다. 김대남의 손에 사탕 포장이 들려있었다. 호열은 비닐을 가져가 무슨 맛인지를 확인했다. 대남의 입에서 채소 우린 냄새가 났다. 호열이 소리 내어 단어를 읽었다. 적양배추.

“과일 맛만 있는 거 아녔냐. 으, 과자에 무슨 장난질이야.”

“거의 다 과일이긴 한데 네가 운 좋게 당첨됐네.”

대남은 이 행운이 기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뱉지는 않고 묵묵히 입 안에 굴린다. 호열이네에서 볼일을 다 마쳐서 대남은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요즘 강백호랑 연락하냐? 호열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잘 안 해. 잔업이 늘었거든. 집에 오면 바로 뻗어.”

“안 그래도 나한테 전화하더라. 쉬는 날에 한 번 연락해봐.”

문을 닫은 호열이 사탕을 찾아 남은 개수를 세었다. 벌써 다 먹어간다. 그동안 별의별 맛을 보면서 나름대로 즐거웠는데. 호열은 가만히 사탕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전화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미국에서 내 생각 해줬구나. 사탕 한 알을 까먹었다.

…과자가 양파 맛이라면 보통 달게 만들지 않나? 이 사탕은 어쩐지 알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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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기만 한 방학 중에서, 강백호를 독차지한 하루도 있었다. 그냥 백호가 자신을 찾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열은 백호와 동네를 거닐고 구멍가게에서 비눗방울을 샀다. 번화가로 가 파친코를 하면서 누가 돈을 더 잃나 내기했었다. 내기에 진 백호가 불복하며 난동 피우길래 거의 쫓겨나듯 가게에서 뛰쳐나왔다. 그날은 파친코의 신이 호열에게 미소 지어줬던 지라 그가 점심을 샀었다. 햄버거를 시키며 이제 미국 음식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냐고 농을 던진 기억이 난다. 호열은 자기 몫의 감자튀김을 백호의 쟁반에 쏟은 뒤 하나만 가져갔다. 케첩을 찍어 입에 톡 밀어 넣었다.

한적한 놀이터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았다. 그네의 지지대는 페인트가 벗겨져 붉은 녹이 뚝뚝 떨어졌고, 미끄럼틀은 빛바랜 분홍이었다. 두 사람은 해가 진 뒤에야 놀이터를 나와 저녁으로 새우튀김을 올린 우동을 사 먹었다. 호열의 집으로 가는 길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길래 케이크도 한 판 포장해갔다. 호열이 홍차를 우려 케이크 옆에 놓았다. 접시 두 개와 칼을 들고 얼마큼 크게 잘라줄까 물어봤었다.

그럼, 강백호의 미국 진출을 축하합시다― 습관이 돼버린 대사를 읊었다. 강백호가 포크를 들다 말고 호열을 빤히 쳐다봤다. 그거 나 갈 때까지 계속 그럴 거야? 호열은 백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갈 때까지 계속 잘 가라고 말하다가, 가고 나면 뭐 할 거야? 포크가 식탁으로 돌아갔다. 백호가 머리를 떨구었다. 그대로 날 잊을 거야?

호열이 급히 백호의 손을 잡았다. 내가 그럴 리 없는 거 너도 알잖아. 요즘에는 모르겠어. 강백호가 양호열의 말을 부정했다. 보면 너 요새 날 아주 보내버리고 잊을 것처럼 군다고. 이미 날 떠나보낸 사람 같기도 해. 절대 그렇지 않아. 호열이 백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자 백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호열아.

“내 생각 많이 해 줘. 절대 나 잊지 마.”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할 말을 고르려던 호열은 백호의 날카로운 시선에 혀가 둔해짐을 느꼈다. 침묵이 길어졌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이건 제법 곤란한 요구다.

사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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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그리 잊고 살려는 건 아니다. 수도 없이 박치기당해도 사라지지 않은 기억인데 어떻게 잊겠는가. 하지만 양호열은 글쎄, 강백호 생각을 덜 하고 싶긴 했다. 지금은 너무 많이 하고 있으니까. 우애와 의리로 꽉꽉 채워진 친구라 쳐도 너무 많이 강백호를 생각하니까. 백호가 떠나고 나면 호열의 생각도 일부 떠나갈 것 같았다. 백호를 따라 비행기를 타 그대로 미국에서 살아줄 것 같았다. 백호 생각을 덜 하는 자신이 기대되기도 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 호열이 어금니로 와그작 사탕을 깼다. 끈적하고 비릿한 맛이 입에 가득했다. 맛대가리 정말 없네. 양호열은 강백호가 가고 나서도 그를 생각했다. 정말 지조 있게 생각했다. 하기야 이별보다 먼저 몸에 밴 습관이었다. 이 좁은 동네 어딜 가든 강백호의 흔적이 가득해서, 장소를 바꾸면 약간은 달라질까 싶었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지금 강백호 생각하는 걸 보니 제대로 글렀다. 이건 양호열의 특성이 되었다. 어딜 가든 똑같은 바다처럼.

백호의 부탁을 들었을 때 호열은 얘가 초를 치는구나 싶었다. 아주 그냥 잘 살지 말라고 고사 지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말을 했기에 호열이 지금까지 백호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를 잊을 가능성마저 백호가 원천 차단한 거다. 호열은 통근 버스에 몸을 실은 내내 어떠한 가능성을 고려하느라 백호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온 호열이 사탕 봉지를 확인했다. 이제 한 알만 남았다. 저녁 준비를 하기도 전에 사탕을 먹었다. 낮에 먹은 것과 다르게 향긋하다. 하지만 무슨 맛인지는 긴가민가했다. 익숙한 향기긴 한데…. 의자에 앉아 천천히 기억을 뒤졌다. 손안에 쥔 포장지가 바스락거렸다.

골똘히 상념에 잠기려니 전화가 울렸다. 사탕을 볼 안쪽에 밀어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딱딱한 기계 목소리가 먼저 운을 뗐다. 국제 전화입니다.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여보세요? 양호열!

‘너 왜 요즘 연락 없어. 어디 아프냐?’

“별문제 없어. 그냥 바빠져서….”

시답잖은, 하지만 애정 어린 대화가 오간다. 양호열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백호의 말에 맞장구쳤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사탕이 치아에 부딪혀 달그락 소리가 났다. 그걸 또 들었는지 백호가 물었다.

‘밥 먹던 중이었어?’

“아니. 사탕. 네가 보낸 거 먹고 있었어. 그나저나 너 별 신기한 걸 다 보낸다. 무슨 맛 들어있는지는 확인해봤어? 대남이도 이거 먹더니 오만상을 다 찌푸리던데.”

‘김대남이 그걸 먹었어? 그걸 걔가 왜 먹어!’

그거 네 건데! 갑자기 발끈한 백호에 호열이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왜 내 거지? 백호는 예의 단순한 엽서 외에 따로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택배 잘 받았다고 전화했을 때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었다. 있는 대로 담은 물건을 되는대로 나눠 가졌는데, 따로 주인을 정해뒀었나? 호열은 백호의 의중을 짚기 위해 조심히 문장을 골라냈다.

“이게 왜 내 거야? 나 사탕 잘 안 먹는 편인 거 너도 알면서.”

‘빨간색이니까! 빨간 건 당연히… 호열이… 네 건… 데…….’

씩씩거리던 목소리가 급격히 잦아들었다. 말하던 도중 뭔갈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말끝이 흐려졌다. 급기야 찾아온 침묵에, 호열은 문득 흘려 넘긴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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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볼 때마다 널 생각할게.”

호열은 백호의 손등을 꽉 쥐었다. 백호의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어 보였다.

“갑자기 왜 빨간색이야?”

“매일 같이 생각하겠다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손을 떼 포크를 잡았다.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푹 찍었다. 지휘봉을 잡듯 흔드는 포크를 따라 백호의 눈이 움직였다.

“백호, 네 생각을 매번 할 수는 없겠지만, 빨간색이 눈에 들어올 때면 무조건 널 생각할 거야. 약속할게.”

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인 거 알지? 호열의 입 속으로 딸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백호의 시선이 호열에게 돌아왔다. 백호가 끙 입술을 비죽였다. 분명 호열의 일상에서 빨강을 마주할 순간이 얼마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일 테다.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는지 아까보다는 표정이 풀렸다. 약속 꼭 지켜라. 백호는 드디어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크게 한 조각 퍼냈다. 그 모습에 호열의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어차피 곧 멀어지는데 거짓말 좀 쳐도 되겠지.

빨강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는 건 거짓이다. 매일 같이 생각한다는 쪽이 진실이다. 하지만 호열의 예상대로 백호가 진실을 믿지 않았으니 이 거짓말이 나은 방책이었다. 호열은 과연 자기가 하루에 빨강을 얼마나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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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니, 기억하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강백호가 듣고 싶었을 말 아닌가. 그거 때문에 빨간 사탕을 고른 것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 그 정도 귀염은 떠는 녀석이었으니까. 설명 없이 덜렁 보내놓고는 알아서 파악하길 바란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렇지만 이 침묵은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굴까. 우리가 이런 걸 부끄러워할 사이는 아닌데.

백호의 생각은 농구공 같다. 종잡을 수 없이 튀어 오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흐름이 있다. 저기서 던지면 여기로 튀고, 이 정도 세게 던지면 저만큼 솟아오른다. 하지만 지금 이 흐름은, 백호의 행동은 예상 밖 급습이다. 뭐 때문이지? 뭐가 달라진 거야?

판이 바뀌었나?

농구공이 마구잡이로 튀어 나간다. 강백호가 맥락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니, 그, 아무튼, 사탕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네. 어어, 호열아, 나 이제 끊어야겠다. 건강 잘 챙겨라. 안녀엉. 달카닥 전화가 끊겼다. 양호열은 수화기를 든 채로 석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강백호가 양호열에게서 도망쳤다. 도대체 왜? 왜 목소리가 떨린 거니. 왜 말을 더듬은 거야. 그것도 내 앞에서. 네가 그러니까 꼭…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침을 잘못 넘겨 사탕까지 삼켰다. 가슴께까지 내려온 사탕에 속이 엄청나게 갑갑해졌다. 목구멍이 조이고 머리에 열이 올랐다. 손은 물론이요, 발까지 뜨끈해졌다. 심장이 세차게 아우성쳤다. 호열이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번호를 눌렀다. 연결되는 신호음이 한세월 같았다.

‘…호열아?’

한참 뒤에야 강백호가 받았다. 주저하다 결국 정면 돌파를 선택했을 그의 심정이 궁금하다. 방금 그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지, 도대체 이 이변이 언제부터 생긴 건지 죽을 만큼 알고 싶었다.

“백호야. 나 사실 거짓말했다.”

‘…어어?’

“나 빨강 볼 때마다 네 생각 안 해. 그냥 매일 같이 네 생각을 해. 빨강을 보든 안 보든 난 그냥 언제나 널 생각해.”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호열은 어디로든 돌진할 수 있었다. 기꺼이 불길에 몸을 맡겼다. 그래, 불꽃. 마지막 사탕의 이름은 불꽃이다. 오래전부터 들러붙어 결코 떼어내지 못했던, 커다랗고 거칠면서 그에게 따스함을 주었던 불꽃이다. 마침내 불꽃이 그를 집어삼켰다.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마저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웠다.

수화기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똑같은 열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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