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알행운(響謁行雲)
196X년 11월, 여명식품상점 앞에서


향알행운(響謁行雲)
노랫소리가 지나가는 구름을 멈추게 한다. 지나가는 구름도 잠깐 머물러 귀를 기울일 만큼 노래 소리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
자화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누워있던 자리에서 즉각 벌떡 일어났다.
겨울이 가까운 늦가을, 열린 창문 사이로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졌다. 누가 창문을 열어놨지? 그리고 침대에 분명 자신을 포함하여 세 명이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없었다. 이 방 주인 말이다.
자화는 나란히 자고 있던 류를 서둘러 깨웠다. 류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자기 전 얼굴 그대로 일어나서 자화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인가요?”
“라이 형이 없소.”
“네?”
“기척이 이상해서 일어났더니 형이 없었소.”
류는 잠깐 자화를 가만히 보다가, 당황한 기색보다는 평온함에 가까운 얼굴로 뻗친 머리를 손으로 정돈하더니,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자화를 뒤돌아 보았다.
“일단 나가서 찾아봐요.”
바지 한 장만 겨우 입은 상태였던 자화는 셔츠를 걸치며 류를 따라 나섰지만 솔직히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라졌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지? 어디 간 건지 알고 있는 건가?
자화는 바깥으로 나와 난간을 잡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어디선가 작게 노래 소리가 들렸다. 음질로 듣자하니 라디오 소리 같았다.
자화는 리쥔이 납치를 당했을 거라는 착각이 정말 본인만의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가게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고, 지금 라디오에서 들리는 신나는 노래가 가게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게 앞에 밤톨을 닮은 익숙한 뒤통수가 진을 치고 있었다.
“아위.”
자화가 속삭이며 그녀를 불렀더니 와이는 깜짝 놀라 류와 자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하라면서 쉬이익!! 소리를 냈다.
자화는 조금 놀랐지만 조용히 하라는 와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와이는 몸을 가게 외벽에 꼭 붙인 채 문 앞에 서있었다. 저 자세는……. 그래, 꼭 무언갈 엿듣는 자세다. 무슨 일이 있나? 저렇게 몰래 봐야만 할 정도로?
자화는 이때다 싶어 몸을 웅크려 엉덩이가 땅에 닿지 않게 앉았다. 류가 뭐하는 거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화는 류를 올려다보다 씩 웃으며 그의 창파오 상의를 살짝 당겼다. 하지만 류는 앉지 않고 가게 외벽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가게 안에는 소음 섞인 라디오 소리가 들리고, 간간히 발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노래가 고조될 때 리쥔이 통통튀는 가사를 따라하며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아침 새벽부터 가게 열 준비를 하는 건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표준중국어)인 것 같았다. 홍콩에서는 흔히 들을 수 없는 말인데다 자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종종 조직 내에서 몇몇 사람이 쓰는 것을 듣긴 했지만……. 배우거나 읽어본 적은 없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트럼펫 따위의 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노래. 노래는 담백하게 끝나고, 나지막한 진행자의 광둥어가 들렸다. 한때 상하이에서 사랑받았던 가수 周璇의 夜上海입니다, 라며 중간에 보통화로 읽은 가수와 노래 제목이 들렸지만 제목도 가수도 자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보통화 발음이 능숙한데…….”
자화가 혼자 중얼거리자, 와이가 옆에서 속삭였다.
“관관 보통화 잘하는 것 같더라. 내 이름도 보통화로 뭐라고 하는지 알려줬다?”
“라이 형이? 그래, 뭐라고 읽었는데?”
“뭐였더라……. 우, 우?”
“근데, 아위. 왜 여기서…….”
자화가 입을 열자 라디오에서 새로운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와이의 시선이 다시금 문앞으로 향했다. 자화도, 와이도, 대화는 잊고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스피커의 볼륨이 조금 더 커졌다. 리쥔이 키운 모양이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서정적인 선율이 라디오 스피커에서 꽉 차게 울렸다. 음질이 살짝 깨졌지만 노래의 선율을 느끼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간주가 끝남과 동시에 여성의 노랫소리와 리쥔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치정은 끝없는 쓰라림으로 바뀌었고…….]”
자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벌린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라디오의 노래의 도입부부터 본격적으로 한 음절씩 쌓아가는 리쥔의 목소리를 홀린듯이 듣고 있었다. 리쥔의 목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당시의 맹약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노래 역시 보통화라 자화가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 목소리를 들으면 분명 누구든 본인과 비슷한 반응을 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치정은 끝없는 슬픔으로 바뀌었고,]”
자화는 왜 와이가 여기 죽치고 앉아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몇 년을 같은 지붕 아래에서 지내면서 그의 노랫소리 한 번 못 들었을까. 듣고 싶어서 여기 있었겠지. 아니면 뭔가 눈치볼 일을 했거나?
자화가 앞서 앉아있던 와이의 등에 손을 올렸다. 본인도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와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자화는 한참 리쥔의 노래에 빠져있었다.
“왜?”
“[당시의 은애는 눈앞의 연기처럼 변했습니다]”
“왜 불러!!”
자화가 대답이 없자 와이가 소리지르는 듯한 속삭임으로 자화를 불렀다. 자화는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가서는 와이를 보며 슬쩍 웃었다. 와이는 떨떠름하게 자화를 쳐다보더니 ‘왜 이래?’라고 말하듯 쳐다보다 다시 가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봄날의 꽃망울이]”
점점 높아지는 선율에 자화는 웅크려 앉길 포기하고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손바닥을 뺨으로 감싼 채 입까지 덮으며, 한참 감상에 빠졌다. 그러다 가만히 말도 안 하고 서있는 류를 고개들어 바라보았다.
“[피기도 전에 지고]”
자화가 올려다보니, 류가 눈을 감고 듣고 있다가 자화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뜨고 자화를 내려다 바라보았다. 자화는 입모양으로 류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소?’
“[줄이 끊어진 연처럼…… 소식이 없습니다]”
류가 입모양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자화에게 몸을 숙였다. 류의 귀와 가까워지자, 자화는 천천히 속삭였다. 알고 있었소? 라이 형님이 노래 잘 부르는 거. 자화의 말을 알아들은 류가 귀를 문지르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화는 역시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보고 감상에 빠졌다.
“[저는 묻고 싶어요, 당신의 마음은 왜 철석같이 딱딱한가요?]”
아침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푸르스름한 가운데 저 아래, 노란 태양이 천천히 둥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뭐야. 거기서 다들 뭐해요?”
리쥔의 노래 소리가 멈췄다. 세 사람의 시선이 가게 문 앞에 선 린에게 향했다. 자화와 와이는 하나라도 된 것처럼 입 앞으로 검지를 가져다 린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쉬이이익! (류는 일행이 아닌 척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가게 앞에 나타난 린을 발견한 리쥔이 가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어, 린 씨.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차 사러 오셨어요?”
[저는 묻고 싶어요, 당신의 마음은 왜 쇠돌처럼 차갑게 식었나요?]
라디오에서 아직 노래가 나오는 가운데, 이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방향으로 리쥔이 고개를 돌리자 리쥔은 문 앞에서 노래를 몰래 엿듣고 있던 삼인방(?)을 발견했다.
리쥔이 퍽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노, 노래 잘 부르던데!”
와이가 벌떡 일어나서 어색한 말투로 열린 문을 짚었다. 문이 흔들려 문에 달려있던 종이 함께 흔들리는 바람에 살짝 딸랑거렸다. 자화도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와이랑 똑같은 자세로 서서는, 문에 먼저 짚은 손 위로 손을 턱 얹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좋더니만. 잘 들었소.”
류는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벽을 짚고 섰다. 리쥔은 그런 류를 마지막으로 보고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노래 더 불러줘!”
와이가 꽉 쥔 주먹으로 의견을 주장하듯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무슨 큰 용기라도 냈다는 듯한 말투라 자화는 웃음을 참았다. 그러면서도 와이와 똑같은 자세로 주먹을 치켜들며 말했다.
“불러주시오. ……리우 형 뭐하시오. 어서 드시오. 어서.”
자화는 류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고이 말아 준 뒤 팔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화를 쳐다본 류가 손을 떨치지 않고 얌전히 잡혀줬다. 자화가 빙글 웃으며 다시 리쥔을 바라보았다.
리쥔은 무척 멋쩍고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 그거 부르면 될까요?”
“어!”
“그럼 들어오세요. 린 씨도 듣고 가요. 린 씨 주려고 찻잎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준비해놨거든요.”
“아.”
금방 사르르 녹은 표정을 지은 이린이 제일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와이, 류, 자화 순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모두를 다 앉힐 수 있을 만큼의 의자는 없었지만, 리쥔은 그래도 모여서 노래를 듣겠다는 이들을 테이블 앞에 두고 노래를 시작했다.
“[치정은 끝없는 쓰라림으로 바뀌었고…….]”
일출, 변함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태양이 떠오른 어느 날 아침이었다.
본문 내 리쥔이 부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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