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heart

크라그

*혈계전선 크라우스 드림

“알겠나, 마음을 단단히 먹는 거다.”

 

앞장서서 걷던 크라우스는 자신의 스승을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고 두 볼은 움푹 패였지만 짙은 눈썹 아래 두 눈에는 형형한 안광이 맺혀 있는 모습은, 약간의 초췌함을 제외한다면 평소의 에이브람스다.

 

그러나 거리낌없이 등을 밀어주던 평소와는 달리 몇 번이고 주의를 주는 시점에서 이번 일의 막중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크라우스는 “그 말도 벌써 다섯 번째십니다.” 하고 지적하는 대신, 처음과 다름없이,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거대한 신전을 앞두고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수해 속, 반얀나무로 뒤덮인 신전의 외벽엔 빼곡하게 외설적인 상징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상징 위에 덧깎은 상징은 어지럽다 못해 일종의 발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더욱 기묘한 감상을 불어넣는 것은, 그토록 고색창연한 신전 복판을 가로지르듯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문구였다. 친절하게도 영어로 적힌 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RISK OF FIRE.

 

불조심.

 

텅 빈 검은색 스프레이 통이 문 앞에 놓인 가운데, 문장의 ‘O’ 부분은 재치있게도 뻥 뚫린 문이 대신하고 있었다.

 

크라우스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두꺼운 기둥과 기둥 사이, 건물 한가운데 네모낳게 뚫린 검은 구멍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단순히 문 너머가 아니라 더 먼 곳과 이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좋았어, 들어가자.”

 

에이브람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펑”에 가까운 큰 소리가 났지만, 크라우스의 단련된 체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독려의 뜻만은 분명히 전해졌기 때문에 크라우스는 또다시 신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

 

 

대 블러드 브리드 연구는 여러 집단에서,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집단도 있었다.

 

“그들이 영원히 되살아난다면, 영원히 불태울 뿐이다. ……라던가.”

 

불꽃은 가장 원초적인 정화의 수단 중 하나였다.

 

포말하우트 서버즈, 고대 페르시아의 배화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이계의 신화와 결합해 변질한 불꽃의 신봉자들.

 

“그러나 포말하우트 서버즈는 전멸했달지, 전소全燒했다.”

 

의식에 가담했던 인물이라면 손을 씻은 한때의 조직원조차도 예외 없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영문 모를 인체발화를 일으키며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타죽은 것이다.

 

당시의 사건은 “앞면”에서도 제법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뉴스 기사로도 다루어졌지만, 여느 때처럼 몇 가지 음모론을 들먹이고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번듯한 홈페이지도 갖춘, 언뜻 봐서는 인텔리 집단으로만 보이는 포말하우트 서버즈가 원시적인 인신공양을 통해 그것이 “건너오는” 값을 치렀다는 것은 뒤늦게야 밝혀진 사실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지. 결국에 책임을 따져 물을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었고, 골칫덩이만 남은 셈이니까.”

“그렇게나 위험합니까?”

 

크라우스의 물음에, 에이브람스가 단언했다.

 

“세계멸망방조기구 레벨의 위험이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황당하다는 투로 혀를 내둘렀다.

 

“줄줄이 설득에 실패한 게 당연하지. 신전의 방문객은 모두 시체로 나왔다고. 말 그대로, 불꽃에게 인류를 구해달라고 비는 일인데, 가능할 턱이 없지!”

 

이때, 크라우스는 신전 앞의 스프레이 통과 삐뚤빼뚤한 글씨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예고도 없이 곁에서 울리던 발소리가 끊기고…… 크라우스는 어둠 속에 홀로 있었다.

 

그는 어떤 예감을 느꼈고 그 즉시 스스로를 정의했다.

 

“나는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요.”

 

비로소 그는 분리된 객체가 되었고, 목소리에서부터 시작해 무게와 질량을 지녔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소개이기도 했다.

 

“अग्नि.”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울려퍼졌다. 예리하게 갈고닦인 감각으로도 방향을 특정할 수 없었으므로 이는 영적인 것이었다.

 

“아그니.”

 

크라우스는 그 이름을 발음했다.

 

그러자 마치 부름에 응하듯 불꽃이 피어올랐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 불꽃은 거리감도 없이 존재했고,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가도 아득하게 멀리서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초대 없는 방문을 용서하시오.”

 

이윽고 가느다란 한숨이 들렸고, 불꽃의 형체가 분명치 않은 것처럼 섬뜩하게 일렁이던 목소리는 한 갈래로 수렴했다.

 

“완고하군. 나를 인격체로 정의했어.”

 

유혹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섬뜩할 정도로 요염한 목소리였다.

 

불꽃의 정수精髓라는 표현이 걸맞을 듯했다.

 

크라우스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 다정한 경고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여길 것이오.”

 

짧은 침묵.

 

“너는 어떤 말로 나를 설득하러 왔지?”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소.”

 

지체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불꽃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 상투적이군.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건조했고, 아무런 흥미도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내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격을 증명한 자에게는 권리가 주어지지. 선택해라.”

 

의례를 주관하는 신성처럼, 불꽃이 물었다.

 

“무엇을 대가로, 무엇을 불태우겠나?”

 

크라우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의식에 참여한 사제들에게는 모두 같은 질문이 돌아갔던 것이라고.

 

그들은 인간의 육신이 감당치 못할 권능에 파멸했던 것이다.

 

고민은 짧았다.

 

그는 결단했고, 지불했다.

 

“내 심장을 바치겠소.”

 

그리고 대가를 적는 부분을 빈칸인 채로 되돌려주었다.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불꽃이 그에게 깃들었다.

 

 

*

 

 

“크-라-우-스으으! 자네 어디 갔었던 건가!”

“하하.”

 

크라우스는 큰 덩치를 어색하게 구기고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에이브람스의 표정에 드리웠던 안도감은 크라우스의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고개를 쑥 내민 형체를 보는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모래빛 육신, 신기루처럼 하얗게 일렁이는 머리카락.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아득한 인상이다. 이건 아무리 낮잡아보아도 화신化身이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한 에이브람스가 속으로 진땀을 흘리거나 말거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취한 그것은 태연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네. 내 이름은 아그니. 크라우스의 계약자일세.”

“……대가는?”

“그의 심장.”

 

뻣뻣하게 굳은 에이브람스를 향해 히죽 웃어준 아그니는 크라우스를 돌아보며 밀어를 속삭이듯이 속삭였다.

 

“나는 이제 그대 심장의 불꽃이지.”

“잘 부탁하네.”

“아니아니, 아니아니아니!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에이브람스가 드물게 쩔쩔매는 태도로 나서거나 말거나, 아그니는 느긋한 태도로 물음을 던질 따름이었다.

 

“불꽃에게 주권sovereignty을 선물하다니,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러나 아그니,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유로울 권리right to liberty가 있네.”

 

스스로의 행동을 만행이라고 정의하는 흡혈귀 사냥꾼이 말했다. 아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투였다.

 

아그니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고는, 그를 뒤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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