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루틸 / 카이쥬
회유, 해주
“미스라 녀석, 저주에 걸렸대.”
“어머나! 어떤 저주인가요?”
“어떤 위험한 저주인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태평해요?”
“집에 못 간다나.”
“그야 죽는 저주가 아니라고 들어서…….”
의사 가운 위로 느슨하게 늘어진 청진기가 창문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그보다 당사자가 옆에 있는데 뭘 이렇게 남일 얘기하듯 말하는 건데요? 투덜거리며 나무 책상을 통통 두드리는 검은 손끝. 의자 옆에 기대어 선 루틸이 피가로를 다시 돌아본다. 집에 못 간다면, 그러니까 집이란 건. 죽음의 호수 말씀이시죠?
“응. 공간 이동 마법으로는 죽음의 호수에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언제부터 그랬나요?”
“어젯밤부터였나….”
몰라요, 문을 열었는데 이상한 곳들만 나와서는. 대충 짐작은 했는데 피가로가 성가시게 못을 박아 줬죠. 보통 그런 건 성가시단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하는 거야. 피가로가 충고하거나 말거나 미스라의 태도는 여전히 퉁명스럽다. 내 몸에 깃든 저주의 기미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압니다. 정확하게는 몰랐잖아? 이거 왜 이런 거냐고 새벽에 다짜고짜 문 부술 기세로 쳐들어왔으면서. 나이 든 마법사들의 기 싸움이야 정말 어찌 되든 좋은 일이라, ‘귀가 방해 저주로군요.’ 스무 살 선생님의 손뼉 치는 소리에 말다툼이 갈무리된다.
“직접 보는 게 빠르겠네요.”
그러면 하나 둘 아르시무, 펑 나타난 멋진 문, 손잡이를 돌리지 않아도 알아서 벌컥 열리기에 들여다본 공간 너머로는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문에서 호숫가의 물비린내와 들풀 향이 뒤섞여 밀려 들어와 피가로의 작은 방 안이 순식간에 식물원으로 탈바꿈한다.
“와아, 티코 호수!”
날씨가 참 좋아요. 소풍 가면 좋을 텐데. 맛있는 도시락이랑 예쁜 돗자리를 챙겨서 가방 안에 담고 떠나는 거예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노을을 보면 얼마나 멋질까요? 루틸이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동안 미스라는 당신 진짜 태평하네요, 한숨을 쉬며 아르시무 아르시무, 문을 몇 개쯤 더 만들어 보았다. 루틸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거듭 들여다보면은 활기찬 분위기의 거리, 갈대 쏘삭이는 소리만 들리는 들판, 울긋불긋 노을에 물드는 산등성이가 있었으나 그 어느 문에서도 눈보라 휘몰아치는 호수 풍경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새벽에 죽음의 호수에는 왜 가 보려고 하셨던 거예요? 잠이 안 와서. 그건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허구한 날 천장 보며 양 세고 구구단 외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저주도 있군요. 아니, 정확하게는 ‘한번에’ 돌아갈 수 없는 겁니다. 내가 느끼고 기억한 그 공간의 지표를 흐릿하게 뭉개서 마법으로 연상할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결국은 마음의 문제라는 거죠?”
“뭐……. 그렇게 되나.”
마법은 마음으로 쓰는 거니까. 저주든 뭐든 근본적인 문제를 찾으려면 그쪽이지. 피가로는 가볍게 웃으며 제 셔츠 위 심장 부근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푸는 방법이 어렵진 않아. 성가신 일에 어울려 줄 사람만 있으면 돼.
“미스라한테는 어렵겠지만.”
“아까부터 자꾸 시비 거는데 죽고 싶어요?”
“피가로 선생님,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일단 그 장소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함께 그곳으로 가면서 경로를 되짚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요?”
“말 가로채지 마.”
“어차피 그게 끝이잖아요.”
“설명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넌 좀처럼 친절하게 설명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법을 통한 이동 전반은 금지. 방향 가늠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데 너무 의존하면 안 돼. 주변 풍경을 보고 따라가는 게 중요하니까. 기억을 더듬고 감각을 재구성하는 일에 집중할 것.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주변엔 뭐가 있는지,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저기, 미스라.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루틸이 더 꼼꼼하게 듣고 있잖아.
“미스라 씨, 제가 도와드릴게요!”
“거봐요. 이 사람은 이런다니까요.”
“뭘 뻐기고 있는 거야?”
피가로는 루틸이 좀 걱정됐다. 정말로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인지 모를 놈은 절대 루틸의 상대로 허락 못 해. 그럼 미스라는 양손에 마른 흙을 잔뜩 쥐어 와선 자 얼굴 대시죠, 마구 주먹을 들이댈 위인이었다. 용호상박.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니지만요? 결혼 얘기도 없었는데요? 아무튼 너랑 루틸은 안 돼. 루틸이 아까워. 피가로는 이제 세상에 없는 플로레스 씨와 치렛타의 마음을 한껏 대변하곤 했다. 가운데 낀 루틸은 그래도 좋다고 웃는다지만. 저도 대강은 길을 알거든요. 루틸, 정말 괜찮겠어? 피가로가 물으면 루틸은 햇빛 들어오는 창문을 등진 채 산뜻하게 미소 짓더니, 네, 미스라 씨를 돕고 싶어요. 딱 잘라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럼 피가로는 할 말이 없었다.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그래, 조심하고…… 사실 네가 조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미스라는 제법 루틸의 방 풍경에 익숙해져, 주인이 먼저 권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아서 빈 의자에 덥석 걸터앉았다. 손님치곤 제법 방자하여 이대로 가다간 차는 안 내오는 거냐고 먼저 물을 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려던 걸 말리고 충분히 준비해 내일 아침에 떠나자며 설득당한 참이라 미스라는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의자 등받이에 가슴을 기대어 앉고 뚱한 표정으로 당신은 이런 성가신 저주에 걸린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죠, 투덜거리는 분은 천오백 살 남짓 드신 무시무시한 북쪽의 마법사 미스라 씨랍니다.
루틸은 커다란 가방을 어디선가 꺼내 왔다. 마법으로 작게 줄이는 건 괜찮겠죠? 경로에 손대지만 않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는 거 아니었나요. 의자 근처까지 가방을 질질 끌고 와서 넓게 펼치더니 물건 하나 담을 때마다 이거 보세요 칫솔에 귀여운 장식을 붙여 뒀어요 한 마디, 침낭은 미스라 씨 몫까지 챙길게요 또 한 마디, 거기다 대고 미스라가 자고 올 생각이에요? 질문 하나를 던지면 우르르 이어 붙는 다음 말, 빗자루로 날아가는 건데 무리하면 안 되잖아요. 짐을 넉넉히 챙기죠! 북쪽은 추우니까 옷을 미리 따뜻하게 입는 편이 좋을까요? 미스라는 둥둥 떠다니는 문장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만을 집어 올린다. ……당신,
“내가 저주에 걸린 게 기쁜 건가요?”
“네? 아뇨. 미스라 씨를 도울 수 있다는 게 기쁜 거예요.”
그렇담 그건 합당한 기쁨인지 아니면 조금쯤 불평해도 좋은 부분인지, 무게를 재려던 미스라는 천칭을 집어 던지고 미간을 긁었다. 너무 들뜬 거 아니에요? 곤란한 사람 앞에서 좋아하다니 못된 선생님이네……. 옷가지를 보기 좋게 접고 차곡차곡 자리를 만들어 욱여넣던 루틸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심드렁한 미스라의 얼굴과 마주 보았다. 어느 정도의 응석인지 어림하는 것처럼 잠깐 갸웃거리다가 후후, 웃으면서.
“미스라 씨는 제 학생이 아니고, 따지자면 선생님 같은 존재인걸요.”
또 이렇게 생뚱맞은 소리나 하고 앉은 거다. 대화가 대체 어디로 튀는 겁니까? 물으면 루틸은 다 연관 있는 얘기예요, 대답하겠지. 당신은 뜻 모를 소리만 하네요. 미스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겨우 이런 반문이나 한다.
“내가요?”
“미스라 씨가 제게 가르쳐 주신 것들이 잔뜩 있는걸요.”
대체 뭘. 지나치게 무게를 실은 탓에 앞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의자를 양발로 디뎌 붙들면서 느슨하게 얹은 손을 까딱거린다. 루틸은 언제나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건 그저 지나간 것들로 내버려 두고 싶은데 어떻게든 끌어올리지 않으면 성에 안 찬단 것처럼. 때로는 영문 모를 얘기를 폭탄처럼 던져 놓고 총총 빠져나가는 얄미운 목덜미를 덥석 들어 올려 으르렁대고 싶어지기도 했다. 결국 맥이 빠져 포기하게 된다지만. 당신은 내 자비 덕택에 살아 있는 줄이나 알아요.
“……그래도 선생님은 당신이죠.”
그렇게 말하면 이번에는 난처한 미소. 비유예요. 선생님인 루틸 플로레스의 마음의 선생님은 미스라 씨, 그런 느낌. 아시겠어요? 루틸이 웃어도 미스라는 이번에도 그냥 그런가, 하고 말았다. 정말로 그게 다 어쨌다고. 당신은 이상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해요. 이해하기 힘들다고요. 그런데도 나한테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뭘 말해도 당신이 원하는 반응은 못 줄 겁니다. 루틸은 또다시 미스라가 아주 우스운 얘기를 했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나중에는 분명 아,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게 될 거예요. 언젠가는 이해해 주실 걸 알아요.
글쎄,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코 있던 미스라는 가방 안으로 들어가는 감색 담요와 보푸라기 일어난 장갑과 사탕 봉지가 전부 두 개씩이란 걸 문득 알아차린다.
* * *
레녹스가 건네준 지도와 나침반에는 오래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파우스트 님이 쓰시던 물건이야. 조금 옛 방식이긴 하지만 방향을 살피는 데엔 이만한 게 없다고 하셨어. 레녹스가 덤덤히 건넨 말에 루틸은 얼굴을 환히 밝히면서, 정말요! 들끓기 시작하는 마음을 조심조심 억누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릴 적에 간절히 바라던 모험의 기회를 비로소 움켜쥐었다는 것처럼.
“조심해서 다녀와, 루틸. 장거리 비행은 오랜만일 테니 무리하지 말고.”
피가로나 레녹스나 쉽게 들뜨는 루틸의 성정을 잘 알았지만 곁에 미스라가 있으니 또 지나치게 염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 녀석은 과보호라고 할까, 애들은 다치면서 크는 존재인데(루틸은 이미 스무 살이지만 몇백 살쯤 먹은 마법사 입장에선 방금 태어난 부스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스라는 상처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소위 말하는 귀찮은 허풍쟁이 아버지 같은 대응을 하니까.
그래도 뭐, 이번 같은 경우엔 오히려 괜찮겠지. 피가로가 한 줌 걱정을 털어내고 루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던 때에, 곁에 멀뚱히 서서는 가끔가다 하품이나 쩌억 하던 미스라가 그래서 언제 출발하나요, 효과 없는 독촉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 이상 미룰 수 없는 걸 눈치챘는지 아까부터 줄곧 우물쭈물하던 미틸이 마침내 결심한 듯 손에 쥐고 있던 걸 미스라에게 불쑥 내민다. 죽음의 호수 근처는 무척 춥다고 들었어요.
“이게 뭔가요?”
“몸에 온기가 돌도록 하는 약이에요. 도착하기 전에 마시면 십오 분 안으로 효과가 나올 거예요. 효과는 반나절 정도 간대요.”
헤에……. 대충 대답하더니만 병은 또 냉큼 받는다. 미틸의 뺨 위에서 어른거리던 홍조가 이마까지 엷게 번졌다. 줄곧 양손으로 움켜쥐어 뜨뜻미지근한 병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려 보던 미스라가 근데 이거 제대로 만든 거 맞아요? 이런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실례예요! 눈썹을 바짝 올려세운 미틸의 머리통을 붙잡아 뒤로 슬슬 밀더니 피가로가 서 있는 쪽으로 보냈다. 루틸이 기운차게 빗자루에 올라타는 동안 미스라는 그럼, 하며 냉큼 뒤돌더니 잊을 뻔했다는 듯 기어이 한 마디 덧붙인다.
“미틸을 부탁합니다.”
“그래, 잘 다녀와. 루틸을 잘 부탁해.”
말하지 않아도 루틸은 제가 지킬 거예요. 세계 최강의 보호자는 다소 뻐기는 타입. 벌써 저만치 날아오른 루틸을 뒤쫓기 위해 길게 숨을 내뱉으면 어느새 작아진 세 개의 그림자가 발밑에서 어른거렸다. 미스라는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며 나아간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가닥가닥 볕 쪼이듯 사방으로 흐드러지고, 햇빛을 피할 나무 그늘 하나 없이 순탄하게 쭉 뻗은 지평선 너머는 아직 마냥 아득해 보였다.
미스라는 한 손을 들어 눈썹 위에 얹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루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목덜미 아래로 바람이 밀려들어 풍선처럼 부풀었다 꺼지는 밀색 머리카락의 모양새가 마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새의 날갯짓 같았다. 루틸의 양 발끝이 정면을 향하고 빗자루 끝에 달린 풍성한 깃털과 구슬 장식이 물결무늬를 그리며 나부끼는 동안, 보호자는 속력을 높여 팔 뻗으면 닿을 정도까지 거리를 좁혀 본다. 루틸.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둔감한 선생님. 그럼 망토를 꽉 붙잡아야지.
“루틸.”
“깜짝이야! 떨어질 뻔했잖아요.”
“안 떨어져요. 제가 붙잡을 거니까. 그보다 당신, 너무 속도 내지 마세요.”
루틸이 고개를 기울이며 왼쪽에서 날고 있는 미스라를 쳐다본다. 자제하고 있는데, 느껴지지 않으세요?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물에다 물 탄 듯한 밍밍한 대답이 뭐가 좋다고 루틸은 또 웃었다.
“모두가 함께 가는 여행이었다면 조금쯤 속도를 내고 싶었겠지만, 이번에는 참으려고요.”
“뭐가 다른데요?”
평소보다 좀 더 목소리를 키워 대화하는 두 사람의 발밑으로는 구름과 햇빛과 날개 펼친 새, 아득한 곳의 공기, 조금 서늘한 바람이 뒤엉켜 빗자루의 느긋한 속도만큼 찬찬히 흘러가고 있었다. 미스라가 허공에다 손가락을 쫙 펼쳐 손 틈새를 부드럽게 긁고 지나가는 흐름을 어렴풋이 실감하는 사이, 그것보다 좀 더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온다.
“미스라 씨랑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니까 미아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루틸이 하늘을 종횡무진 누빈 날에는 어깨 위를 웃도는 머리카락이 온통 뒤집어져 엉킨 건 둘째치고 온몸에 나뭇잎이며 먼지 덩어리를 덕지덕지 붙이고 와서는, 커브를 돌다가 커다란 나무랑 부딪힌 거 있죠! 속을 바싹바싹 태우는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했었지. 다섯 살배기 꼬맹이와 다른 점이 뭡니까, 이래 놓고 당신이 어른이란 거예요? 거칠게 머리를 툭툭 흔들어 나뭇잎을 바닥으로 떨궈 주며 핀잔하다 보면은 이런 일련의 행위가 귀찮아 견딜 수 없어지기도 했고 다시는 약속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울컥 치밀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약속하고 그걸 또 잊어버리고, 목숨을 남의 손에 덥석 쥐여준 게 다 본인의 선택인데. 약한 형제를 탓할 시기도 원망할 시기도 한참 지났다.
“잘 아네요. 당신이 미아가 되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조심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틸을 잃어버릴 것 같지는 않다. 드넓고 텅 빈 하늘 위에서 아득하니 먼 지평선을 향해 날아가는 건 오직 저와 눈앞의 젊은 마법사뿐이니까. 다섯 걸음 앞서 날아가는 루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찜찜한 동시에 마음이 어딘가 느긋해지기도 했고, 귀에 달린 술 많은 귀걸이가 머리카락과 뒤엉켜 흩날릴 때마다 혹여 귓불에 걸려 찢어지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기도 하였다. 미스라는 최근의 걱정 많은 삶이 아주 낯설다.
불안한 동시에 한가할 수가 있나? 생각이 길게 이어지는 것조차 지루해 으레 중간을 싹둑 잘라먹고 살아왔던 여태까지의 인생에서는 이런 의문조차 문제 될 일이 없었는데. 이러다 소화불량에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형제를 만난 이후부터, 정확하게는 약속을 떠올린 시점부터 도무지 성에 안 차는 일이 많아졌다고…….
미스라는 이 여행의 연유를 떠올린다. 내가 저주에 걸렸다니. 갑자기 울컥 치미는 분노를 입 밖으로 토하기도 전에 다시 맥이 풀렸다. 햇빛과 풀과 사람과 빗자루 장식, 가까워지지 않는 먼 산과 여전히 따뜻한 가을날의 공기, 등불 같기도 하고 앞으로 뻗은 길 같기도 한 뒷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어쩐지 안도인지, 안심인지, 긴장의 끈을 놓칠 것 같아서. 틱, 틱, 팽팽하게 묶어 뒀던 끈이 풀리는 소리.
“앗, 나침반 잘못 읽었다.”
“하?”
* * *
해가 빨리 기우는 것 같아요. 산 때문일까요? 고개를 기울이던 루틸이 나침반 뚜껑을 덮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트와 로프를 집어 들었다. 반쯤 완성된 텐트를 두고 못마땅하다는 듯 그냥 마법을 쓰면 안 되나요? 물었던 게 벌써 반 시간 전의 얘기다. 이것도 여행의 낭만이에요! 루틸은 또 해맑게 완고해져서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땅에다 뭘 박고 묶고 끌어올리고 천을 펼치면서 미스라 씨는 거기서 보고 계세요, 했는데 거침없을지언정 작업 자체가 필연적으로 시간을 잡아먹는 부류라 미스라는 계속 팔짱 끼고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 같으면 그럴 시간에 그냥 돕겠어. 피가로가 있었다면 그리 핀잔을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엔 천오백 살 북쪽 마법사와 스무 살배기 남쪽 마법사 단둘뿐이었다.
“언제 끝나나요?”
“거의 다 됐어요!”
그러니까 그놈의 ‘거의 다’가 대체 언제인데. 미스라는 저러다 루틸이 망치를 제 손가락에다 들이박지는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으나 신기하리만치 망설임 없는 동작을 보고 사소한 걱정일랑 대충 접어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붉은 기운도 거의 다 가시고 사방에 보랏빛이 낭자한 들판 위로 차가운 밤바람이 가득 불어 풀 흔들리는 소리만 사방을 메웠다.
루틸이 고개를 숙이면 짧은 커튼처럼 내려온 머리카락 너머로 얼핏 밝게 빛나는 눈동자가 들여다보인다. 얘기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봐야 한다면서요. 제 일에 열중하느라 이쪽으론 시선 하나 주지 않는 무심한 그 눈이,
“남쪽에는 미개척지가 많으니까요.”
갑자기 미스라를 꿰뚫어서. 나오려던 불만도 들어가게 했다. 바람 탓에 루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메아리처럼 희미해지고, 못과 로프를 쥔 손끝은 단단하여 천이 잘 펴졌나 확인하는 동작은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살아가기 위해서 나름대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물론 그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오래 전해지는 방식 같은 것들요. 사소하게는 울타리 만드는 법에서 더 나아가선 새끼 양을 받는 법까지. 저는 그런 것들을 배우면서 자랐어요.”
수도 없이 이런 일을 겪어 보았다는 것마냥.
미스라는 문득, 아주 문득. 루틸이 저 없이 보낸 십여 년의 세월이 약간 궁금해졌고, 황량하고 초라한 남쪽에서의 생활이 대단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쓸데없는 재주를 가진 그에게 또 무얼 배웠느냐고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미스라는 언제나 표현하는 법을 잘 몰라서, 말을 정렬하는 수고를 견디고 싶지 않아서 그저,
“누구에게?”
겉도는 질문을 던진다. 루틸은 단 한 번도 그게 아니에요, 한 적이 없었으니까.
“많은 분에게요.”
한 명의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들 하잖아요. 비록 이웃집이 한참 빗자루로 날아가야 할 정도로 먼 곳에 있지만, 저는 지평선 너머에 반드시 목적지가 나타난다는 걸 알아서 두렵지 않았어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그곳에 있고, 저를 선뜻 도와주실 분들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루틸은 줄곧 굽히고 있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기지개를 켰다. 오래 기다리셨죠, 미스라 씨! 이제 따뜻하게 잘 수 있어요. 번듯하게 완성된 텐트를 앞에 둔 채. ‘그러니까 마법을 쓰자고 말했잖아요.’ 미스라는 싸늘하게 식은 살갗 위로 온기가 도는 듯한 착각에 빠져 또다시 입을 닫는다. 루틸이 무릎걸음으로 텐트 안을 누비며 곳곳에 보온 마법을 거는 동안에도, 천장에 랜턴을 매달아 불을 밝히고 이부자리를 펴는 동안에도 묵묵하게 쳐다만 보더니 베개를 두드려 모양을 만들자 냉큼 그 위로 누워 버리고 끝이었다.
그게 꼭 어딘가 토라진 어린아이 같아서, 루틸은 기억을 더듬어 제 행동을 돌이켜 보았으나 달리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없어 의아해진다. 미스라 씨. 부르려다가 그냥 옆에 나란히 누웠다. 묵묵한 등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다가 툭 튀어나온 날개뼈를 지문으로 뭉개면서, 미, 스, 라……. 공간이 넓으니 글씨도 크게 쓸 수 있어 좋네요. 루틸이 키득거리며 혼잣말하면 퉁명스레 뭐라는 거예요, 결국 마주 보는 불퉁한 얼굴.
“오래 기다린 게 싫으셨어요?”
“고작 그런 걸로 화내지 않아요.”
그러면 어느 부분이 불만이셨던 건지.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언제까지나 남쪽의 마법사 루틸 플로레스인 것이다. 미스라는 여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기다리는 나를 바라보지 않아서. 끝끝내 혼자 해내는 당신을 보고 있자니 지루하고 피곤해져서……. 그게 전부인가요, 마음을 읽고 책망하는 대신 루틸은 미스라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다.
“아직도 볼이 차갑네요.”
조금 거칠고 따뜻한 손바닥에다 볼을 성의 없이 문지르다가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굴려 비로소 그를 보았다. 빛이 포개진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텐트 천장에 매달린 랜턴이 흔들리면서 떨어질 듯 삐걱거리고, 루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희어졌다가, 마치 꿈속처럼 일렁거린다. 꿈을 꿔 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어 까마득한 일인데. 감각은 이렇게나 선명하고.
“그래도, 뭐랄까… 당신은 귀찮지 않은 건가요.”
남의 일인데 여기까지 일부러 따라왔잖아요. 말이 끝나자 루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누그러뜨리듯 작게 웃었다. 이것도 미스라 씨와 만들 수 있는 귀중한 추억이니까요.
“많이 만들고 싶어요.”
루틸은 향기 나는 주머니를 색색깔의 실로 묶어 봉하고 말린 꽃을 꽂아 장식한다. 작업이 끝나도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촘촘한 직물 자국과 이름 모를 향이 남아, 손대는 것마다 희미하게 흔적이 옮겨붙었다. 책상 위를 구르는 깃펜과 반쯤 닫힌 커튼, 문손잡이, 복도, 그러니까 허공. 두드리는 것은 옆 방 방문. 흰 가운과 검은 셔츠는 늘 구겨진 채다. 붉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는 손끝. 미스라는 코를 킁킁거리며 잔향을 좇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신, 뭔가 냄새가 나는데요……. 옷깃을 들추면 그물 모양으로 섬세하게 엮인 주머니가 아래로 맥없이 툭 떨어지면서.
이거, 숙면에 효과가 있대요.
“미스라 씨를 돕고 싶어요.”
그 얘기 아까도 하지 않았어요? 아니, 어제인가? 아니면 그저께?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런데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이 언제더라. 처음 만난 건 당신이 갓난아이였을 적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만난 날’이라고 할까요. 대체 언제부터 나를 돕고 싶다고, 행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언제부터 나를, 생각했는지…….
바람이 탁탁 튀며 천을 사방으로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불빛은 일렁이고 루틸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대신 언제나처럼 명쾌한 목소리가, ‘흔들흔들하면 미스라 씨 얼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네요’ 하며 재밌다는 것처럼 속삭이며 웃었는데, 그래요?
“난 당신 얼굴이 잘 보여요.”
“어떻게요?”
어두컴컴한 방에서 언제나 허공이며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눈동자가 밝은 빛을 구분하는 건 또 얼마나 쉬운 일인지, 햇빛 아래 있는 이 마법사는 영영 모를 것이다.
‘루틸이 태어나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
아침엔 새싹이 돋았고 정오엔 암소가 새끼를 낳았더라고. 저녁엔 별똥별이 떨어지더니 하늘이 아주 맑아서 별무리가 잘 보였어. 미스라, 누군가 사라지는 만큼 또 누군가가 새로 생기고, 우리가 죽어 돌이 되어도 그만큼 새 마법사가 태어나잖아. 루틸은 순회하는 아이가 될 거야. 집 앞 화단에 매일 물을 주고 죽은 동물의 무덤을 만들어 주는 아이 말이야. 만남에 기뻐하고 이별에 아쉬워하고 재회에 웃는 아이일 거라고.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 세상이 내게 점지해 준 아이인걸.
치렛타의 들뜬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져 메아리가 된 지 오래인데도 미스라는 그것을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 장소를 기억하던 마녀는 이제 돌이 되었고, 새로운 현자의 마법사는 저와 이마를 맞댄 채 졸음에 가물거리는 눈을 좁히며 웃고 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엷게 퍼진 온기에 취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밤눈이 밝거든요.”
루틸은 하얗게 드러난 미스라의 눈을 본다. 폭발하는 유성우.
영원히 죽어가는 별무리가 그곳에 모여 떨어지고 있었다.
* * *
“일어나셨어요?”
“그야 못 잤으니까요……. 당신 코 골던데요.”
“와, 거짓말이죠!”
아니, 진짜예요. 텐트가 떠나가라 골아 대서 시끄러워 잠을 못 잤다고요. 미스라 씨는 원래도 못 주무시잖아요.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동안 따뜻하고 흐물흐물해진 루틸이 이불을 걷고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오 분만 더, 뭉그적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이부자리를 정리하기에 미스라도 더 꾸물댈 수 없어 베개를 대충 걷어차고 일어난다.
아침은 미리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라즈베리 주스 한 잔. 두 다리를 겹쳐 모아 빗자루에 걸터앉고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양상추를 우적거리고 있다 보면, 마치 양 떼를 풀어놓고 그늘에 앉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는 목자처럼 마음이 한가해졌다. 미스라에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지만 루틸에게 있어선 일종의 여행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기쁜 내색을 보였나 싶어 달아오른 뺨을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동작으로 숨겨 버린다. 정작 미스라는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작에 다 먹어 치운 샌드위치 포장지만 손안에서 구기며 제가 가는 방향을 멍하니 노려보고만 있었다.
“루틸, 장갑 끼세요.”
물가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맞게 가고 있는 것 같네요. 그제야 미스라의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무어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대인지 반가움인지, 혹은 내심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건지, 덤덤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어떤 빛깔을 띠었다. 루틸은 그의 얼굴을 그림으로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장갑을 꺼내 낀다.
“이건 지금 마셔요.”
기다렸다는 듯 휙 날아오는 작은 유리병 안에서 보랏빛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 미틸이 만든 약이군요. 네, 뭐. 저도 방금 마셨어요. 약효는 심심하지만 나쁘지는 않네요, 제법 따뜻하고. 전 즉각적인 게 좋거든요. 끝날 만하면 이어지는 말 사이에 미미한 칭찬이 묻어 있어서 루틸은 입을 가리고 조금 웃는다. 돌아가면 미틸한테 이야기해 줘야지.
구름을 뚫고 사선으로 지상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어제보다 빠른 속력 탓인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기온 때문인지 코끝이 얼얼해지고 빗자루를 쥔 손이 곱아들었다. 루틸은 속눈썹을 파고드는 바람을 피해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저보다 앞서가는 미스라의 등을 부지런히 뒤쫓는다.
물비린내가 훅 끼칠 적에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은 밑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제법 눈에 익었다. 오가는 것이 어렵잖다 보니 그의 마음이 동하면 종종 함께 들르곤 했는데,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도 호숫가에 가만히 앉은 미스라의 옆얼굴은 꽤……. 여느 때처럼 지루해하거나 울컥하거나 심통 내는 얼굴이 아니라, 아주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보였다. 아무 근심이 없어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자신은 고향이라 칭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주기적으로 이곳을 떠올리고 종종 돌아오는 걸 보면 틀림없이 소중한 장소인 거겠지. 데워진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공기 중에서 입김이 하얗게 일어나 부서지고, 뒤이어 찬 기운이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쿡쿡 찌른다. 그런데도 루틸의 뺨은 기분 좋게 달아올라 통증을 모르고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마저 제 등을 앞으로 떠미는 순풍 같아 마음이 붕 뜰 뿐이었다.
뻣뻣한 침엽수가 곁을 스쳐 지나갈 정도로 지상과 가까워지자, 비로소 미스라가 먼저 땅에 발을 디디며 빗자루에서 내렸다. 느리게 떼어내는 걸음에서 처음 보는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어 하는 생경함이 얼핏 느껴졌는데, 그러다가도 속도가 붙어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널찍하게 찍히더니 금세 다섯 걸음이 더 생겼다. 돌아왔다는 인사를 해도 반겨 주는 이 없는 곳에서 무엇이 보고 싶었던 걸까.
죽음의 호수. 언젠가 미스라가 제게 알려 주었던 이름을 읊조려 본다.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루틸로서는 알 길이 없다. 죽음을 나르는 호수여서인지 죽음을 감싼 땅이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호수 가장자리를 감싸고 피어난 작은 꽃이나 풀, 앙상한 나무, 눈 위로 찍힌 동물의 발자국을 보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굉장히 쓸쓸한 이름이 아닌가.
루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위로 뻗은 채 하늘과 땅,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흔적을 좇다 호수 언저리까지 다다른 미스라의 얼굴은 어쩐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이 쓸쓸해 보이기도 해서.
“아.”
미스라 씨, 이름을 부르려고 했는데. 속눈썹에 보슬보슬 걸리는 것이 있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고 단지 알갱이 모양만 잔상으로 남아 어른거린다.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휘젓자 얇게 톡, 톡, 쏟아지는 작은…. 눈! 루틸은 미스라 주변을 감도는 어떤 분위기를 훅 불어 환기하는 것처럼 밝게 목소리를 높이며,
“미스라 씨, 눈이 와요!”
하고 불렀다. 우뚝 선 미스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그 뒷모습에 대고 눈 처음 보나요?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던 목소리가 곧 기운을 잃고 한숨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더니 속에서 한 번 걸려 나온 느슨한 웃음이 뒤이어 퍼진다. 정말이지…….
얼음이 신발 밑창을 스쳐 내딛는 걸음마다 나아가게 만들었고, 그럼 루틸은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흐름을 즐기며 앞으로 앞으로 미끄러져 걷는다. 점차 눈발이 굵어지더니 한 움큼씩 쏟아지는 눈이 얼어붙은 호수 표면 위로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문득 뒤돌면 이제 미스라는 머나먼 숲이나 눈 덮인 산기슭을 바라보는 대신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때마침 운 좋게 시선이 맞는다. 미스라 씨. 루틸은 지칠 줄 모르는 것처럼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그럴 때마다 하얗게 부푼 입김이 얼굴을 가렸다가 드러내며 성에 낀 유리창 너머로 엿보는 것처럼 루틸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이름만, 오직 이름만 메아리처럼 호수 주변을 하염없이 맴돌면서 미스라 씨, 눈보라 속에 세 글자를 가둬 버린다. 미스라는 그를 놓치기 전에 움직였다.
“정말 예뻐요! 꽁꽁 언 호수 위로 눈이 쌓이다니.”
“당신은 별거 아닌 일에 유난이네요…….”
하아……. 그렇게 살면 지치지도 않나요? 호들갑 떠는 것도 일이잖아요. 괜한 짓을 해서 기운 빠져 죽으면 곤란합니다. 기껏 가까이 와 놓고 한다는 게 이런 소리라, 루틸은 괜히 미스라의 옆구리를 주먹 쥔 손으로 툭 쳤다. 아픈데요! 투덜투덜 엄살 피우던 천오백 살 마법사가 팔짱을 끼더니, 뭐, 저한테는 이게 일반적인 풍경이니까요. 소박하기 그지없는 변명을 던져대고 만다.
“그럼 이제 저주는 풀린 건가요?”
“시험해 볼까요.”
본질은 그것. 저주를 풀기 위해 노을과 안개 그리고 추위를 이겨내고 마침내 추억의 장소에 다다른 마법사는 비로소 제 손을 허공에다 펼쳐 멋진 마법 주문을 외쳤습니다. 생겨난 문이 덜컥 열리더니 호수 저편으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 풍경을 비추어내어 두 사람은 말없이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루틸은 살며시 웃었고 미스라는 된 것 같죠, 개운하게 손을 탁탁 털며 일단락짓는다. 문이 다시 닫혔다.
거세졌다 사그라지는 눈보라 가운데 서서 반쯤 녹은 폭포를 눈 덮인 산등성이를 하얗게 삭은 나무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차례차례 훑던 시선이 도로 루틸에게 돌아오면 그는 멋진 곳이에요, 부는 바람에 베어 먹혀 사라질 것 같이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스라는 어린 마법사를 응시한다. 혈색 좋게 달아오른 뺨과 부는 바람 따라 파르르 떨리는 창백한 눈꺼풀을 보았다.
“이 풍경이 변하거나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좀 싫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셔서 여기까지 오신 거죠?”
“저주를 풀기 위해서잖아요.”
“저주는 왜 풀고 싶으셨나요?”
당신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이 얘기 저번에도 하지 않았나요? 아니, 한참 전부터 했던 것 같은데. 나한테 물어봐도 당신이 원하는 답은 줄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루틸은 걸음을 떼어내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적절한 대답이 아니라 그저 당신의 생각이라는 걸 모르고. 현답을 끌어내는 우문. 미스라가 빗맞히면 루틸이 조준하기 쉽도록 표적을 옮긴다. 차근차근, 그래요 한 걸음씩. 학교가 없어도 선생 노릇을 잘하는 그가 입을 열어서는, 하지만 미스라 씨,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효력이 생겨요.”
“……어떤 효력?”
“저주를 풀 수 있을 만한 효력이.”
저주는 이미 풀렸죠. 미스라는 문이 있던 자리를 돌아본다.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이 허공을 스치며 먼 하늘로 날아가고 숲에서 앙상한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만 스스스… 음산하게 남아 호수 주위를 감쌌다.
다시 앞을 보면 루틸은 계속해서 걷고 있다. 죽은 자의 나라를 향하여. 그를 해칠 만한 것이 주변에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제 선에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붙잡아 세워야 할 것만 같아서, 미스라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연다. 알겠으니 멈춰서 들으세요, 루틸. 휘몰아친 바람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도 기어이 입을 연다. 마법으로 걷어낸 안개가 섭리에 따라 몰아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바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짜증 나고 귀찮고……. 원래는 바로 올 수 있었던 거잖아요. 제약이 생기면 성가시다고요. 내 몸에 한계가 생기는 거니까.”
“그런데도 약속을 해 주신 거군요.”
“여기서 약속 얘기가 왜 나와요?”
앞으로도 여기에 계속 오고 싶어서 저주를 풀고 싶었어요. 루틸이 바란 답변은 이것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는 감정에다 마침표를 눌러 찍으면 정리가 된단 것처럼 굴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 사이에서 미스라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뭐…. 그때는 그게 더 중요했어요. 곧 떠날 그 사람한테… 좀 더 쓸모 있는 걸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뭐든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단순하고 평화로웠겠죠. 그걸 못 하는 인간이, 마법사가 널려 있어서 이 세계는 엉망인 겁니다. 심지어 치렛타도…… 못 했었는데요. 그 남자와 만난 이후론 달라졌던가. 당신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요? 배운 겁니까? 그러나 미스라는 물을 수 없다. 루틸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 주제는 여기서 끝내죠. 그는 귀찮은 걸 지독히도 못 견디고.
루틸은 미스라가 보았던 모든 풍경을 눈 안에 담는다. 얼어붙은 호수. 발아래 저 먼 곳에서 흐르고 있을 차가운 물과 뻐끔거리는 아가미, 올라오는 물거품, 뼈, 망망대해 위 난파선처럼 떠 있는 작은 섬. 세상이 변하는 것에 하등 관심이 없는 오래된 동식물, 주린 배를 채워 줬을 나무 열매. 빠듯하게 높이 자란 침엽수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사방으로 가지와 나뭇잎이 어설프게 휘어져 있었다.
루틸에게 겨울이란 잘 타는 장작과 화로 근처에 남은 그을음, 오븐에서 꺼낸 칠면조 기름, 혹은 덜컹거리는 창문과 잘게 떠는 커튼 그림자, 미틸을 꼭 껴안으면 잠옷 소매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살 내음……. 그래, 아침에 문을 열면 느껴지는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에 가까웠다. 전부 울타리 안쪽에 있어 손 베일 일 없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단지 계절 중 하나, 실감하는 동안 지나가는 기쁨일 뿐이었는데.
그의 키다리 아저씨는 아마도 이것만이 겨울. 하염없이 눈보라 흩날리고 안개가 끼어 흐릿흐릿한 시야의 사위, 저를 둘러싼 정적을 견뎌야 하는 시간. 혼자 우는 들짐승, 떠도는 영혼의 속삭임. 오직 쏟아지고 매장되기만 하는 장소에서 느끼는 감각만이 온전한 겨울이었을 터. 화려한 전구와 장식을 매단 나무도 없고 머리맡에 선물 상자 대신 삭은 뼈가 놓인 죽음의 호수에서.
“죽음의 호수는 미스라 씨의 고향인가요?”
익숙함이 언제나 권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에게 이 장소가 낯익다는 건 어쩌면 그리움과 맞닿아 있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미스라는 루틸을 따라잡기 위해 평소보다 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그 앞으로 나아간다. 헛돈 바람이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기침이 났다. 미스라는 공연히 콜록거리며, 몸살 따위를 모른다는 것처럼 스스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루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밝게 웃어주었다. 그렇군요. 저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방금 그걸로 알았어요.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그래서 장갑도 담요도 목도리도 두 개. 루틸은 작은 가방에서 녹색 목도리를 꺼내더니 미스라를 마주 보고 서서는 장갑 끝으로 슬쩍 그의 목덜미를 톡 건드렸다. 고개를 조금 숙여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하면 하란 대로 또 하는 키다리 아저씨. 아마 루틸이 어릴 적에도 이런 식으로 안아 주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구부정해진 미스라의 목에 다정한 손길이 한 바퀴 반 오가고, 솜씨 좋게 목을 감싼 목도리에선 루틸이 언제나 어루만지던 것들… 그러니까 풀이나 과일, 꽃다발과 비슷한 향기가 풍겼다. 미스라는 코를 훌쩍이고 도로 허리를 바로 세운다. 고향. 혀 위에서 달착지근한 단어를 굴려 보면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잠깐 정적. 미스라는 폭풍이 멎은 발끝에 익숙한 흙이 밟히는 것을 알았다. 어느 새에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등 뒤를 돌아보자 기슭이 아득하여 제법 멀리 있다. 루틸은 두 걸음을 더 걷더니 빙글 몸을 돌려 미스라와 마주 보며 걷기 시작하고, 그러면 미스라는 위험하다는 말 대신,
“때가 되면 돌아오고 싶어지고, 그러다가도 다시 떠날 마음이 생기고…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리고 다시 떠나고요.
떠나는 것은 돌아올 장소가 있기 때문에. 덜 녹은 눈이 루틸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하얗게 쌓여 가는 모습을 본다. 커다란 결정이 보릿빛 머리카락 위로 촘촘히 박히는 모양을. 당신, 지금 이 풍경에 박제되고 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루틸은 미스라의 밋밋한 손 위로 제 손바닥을 맞댔다. 그럼 차가운 가죽의 감촉……. 차갑고 미지근한 체온이 박제된 거죽 너머로 느껴지고.
눈이 내리는 호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살아 있었다.
“다음에도 또 데려와 주시겠어요?”
“그래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발아래의 뼈를 피하느라 춤을 추듯 움직이는 루틸의 손을 잡아당기며, 당신 지금 우스워요, 미스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연두색 눈동자는 흐려지는 일 없이 그저 매섭게 얼어붙은 호수와 잠깐 그친 눈보라 사이에서도 이정표처럼 발광한다.
“당신 얼굴, 역시 잘 보이네요.”
그림이 아니라 현실, 지금 여기. 발 묶인 망령이 흐느끼는 호수 위 섬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저주가 풀린 마법사는 고개를 들어 백마 탄 왕자도 검을 쥔 용사도 아닌 작은 아이를 본다. 하찮은 일에 유난 떨고 쉽게 웃고… 다정한 말투로 뺨을 어루만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조곤조곤 속삭이는 약한 마법사를. 목숨의 증거를.
그러나 루틸이 미스라를 잘 모르듯 미스라 또한 루틸이 어떤 마음으로 저에게 이야기하는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건너, 흩날리는 눈에 파묻힐 듯 작은 뱃사공에게 이 말을 건넬 수 있길 얼마나 염원해 왔는지도 모르고. 하얀 세상에서 허공에 뜬 핏방울 하나가 루틸의 시야를 영원히 간지럽히고 보석처럼 빛나는 그 눈이 미동도 없이 이쪽을 응시하면 입술이 떨렸다. 이제 당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시죠…….
“저도 이젠 미스라 씨가 잘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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