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와타 / 엔드롤

야아, 재밌었습니다! 기대 이상이네요. 와타루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상영관 출구 쪽 복도를 세 걸음 앞서 걷는다. 구둣발이 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또각거리며 그가 가는 방향을 알리고, 하염없이 길기만 한 머리카락은 끄트머리만 살랑살랑 흔들리며 주황색 조명 아래에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토모야는 부지런히 쫓아간다. 유메노사키에 입학하고 나서 토모야는 와타루의 얼굴보다도 뒷모습이나 천장에서 쏟아지는 머리카락이 더 익숙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포스터만 보면 그저 그런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였는데 말이에요."

"수많은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답니다, 토모야 군."


그런 것쯤이야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히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보다도 어디서 어떤 상을 받았고 어떤 영화제에 초청받았고 평점이 얼마나 되는지 적어 놓은 게 더 많았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으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도 어쩐지, 아 그렇게 대단한 영화인가, 그럼 나도 맘을 다잡고 봐야 하나. 그런 마음이 들어버린단 말이죠. 와타루는 몸을 빙글 틀어서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하는 팻말 너머의 토호 시네마 간판을 제 머리로 가리면서, 토모야를 보곤 활짝 웃었다. 오늘따라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나 보네요!

길게 떠든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뺨을 엷게 물들인 토모야가 와타루의 등을 괜히 톡톡 쳤다. 후배가 기껏 길게 얘기했으면 장단 좀 맞춰 줘요. 토모야는 할 수만 있다면 저 얄미운 입꼬리를 쭉 잡아당기고 싶었다. 아플 만치 늘린 다음에 어쨌든 놓아 주기야 하겠지만. 비유래도 찢고 싶다거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다. 어쨌든 토모야는 와타루가 웃기를 바랐다. 우는 것보다야 그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무빙워크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타고는 와타루는 흐흥, 코로 웃는다. 그래서, 토모야 군도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죠? 응. 어떻게 생각하면 뻔한 연출인데 카메라 연출이랑 배우들 연기로 색다르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카메라 연출 하니까 후반부의 그 장면이 떠오르네요. 아, 말하지 마요! 내가 먼저 대답할 테니까. 진실이 밝혀지는 중요한 순간에 표정을 잡는 것보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마치 관조하듯 덩그러니 혼자 선 걸 보여준 연출이 좋았던 거죠? 오답입니다! 와타루는 손뼉을 치며 가볍게 딱 잘라 말하더니, 하지만 나쁘지 않다곤 생각했어요. 독백이니 굳이 표정을 유심히 잡을 필요는 없지만요. 그럼 선배가 좋다고 느꼈던 장면은 어딘데요?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잘도 떠든다. 그야 히비키 선배는 목소리가 크잖아. 

서로의 영화 취향을 알아차린 건 졸업 직전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런 식으로 대화하게 됐다. 나쁘지 않아. 아니, 좋을지도. 와타루나 토모야나 영화는 제법 들춰본 축에 속했으니까. 그게 싸구려 삼류든 허접한 b급이든 제작자의 애정이 녹아 있다면 비판할지언정 헐뜯고 비웃지 않는, 그야말로 배우에 어울리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주말에 만나 영화 한 편을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약속을 잡은 순간 토모야는 데이트 같잖아, 생각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생각을 털어냈었다. 이제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그만 좀 해야지. 어디까지 어설퍼 보일 셈인지. 그런 주제에 나가기 삼 분 전까지도 머리카락에 물을 묻혀 뻗친 부분을 괜히 슬슬 쓸어내질 않나, 옷이 너무 촌스럽지는 않은지 고민도 해 보고, 그러다 늦을까봐 후다닥 뛰쳐나온 거였다. 약속 장소에 나와 보니 와타루는 화려한 패턴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평소와 같이 잘 어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토모야는 살짝 눈동자를 굴려 와타루의 옆모습을 본다. 밀려드는 인파에 서로를 놓칠까, 토모야는 괜히 와타루의 곁에 바싹 붙어 걸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히비키 선배는 여기서 날 잃어버리면 언제쯤 눈치챌까?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는 거 아냐? 그러면서도 토모야는, 열기구 위의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절 알아보고 손을 흔들던 와타루를 떠올리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희망까진 아니고 아무튼 비슷한 무언가. 또 기대할 건 뭐람. 한숨을 쉬듯 입을 쭉 내밀었다가 닫는다.

단정한 얼굴. 따로 무대화장을 하지 않아도 배우란 역할이 참 잘 어울리는 생김새다. 토모야가 와타루에게 이끌린 건 그가 만든 연극 때문이었다지만 얼굴도 그중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빛을 받으면 자수정처럼 반짝거리는 보라색 눈동자. 물결치듯 사르르 쏟아지며 얕은 그림자를 만드는 긴 머리카락. 어딜 가나 시선을 몰고 다니는 남자. 올라간 눈꼬리는 아주 냉정해 보이기도 하는…

그러고 보니 멋모르고 연극부에 입단했다가 히비키 선배의 스파르타식 교육에 못 이겨 며칠도 못 돼 나간 놈들이 있었다. 어설픈 각오조차 꼴사납다고 말하잖는 사람인데. 호쿠토와 토모야만 남은 연극부 부실을 보고 와타루는 화내는 대신 활짝 웃었다. 이제야 좀 해볼 만하겠네요! 끈기 있는 아이들은 싫지 않아요. 도망친 몇몇은 히비키 와타루가 냉혈한이니 어쩌니 떠들어댔지만, 그들은 아마 아직까지도 모를 것이다. 실상은 정반대에 가깝다는 걸. 잔인하지 않으니 내칠 수 있는 거고 사람을 좋아하니 믿는 건데도.

그렇다곤 해도 결국은 흥미 본위지. 부장은 인간을 사랑한다기보단 궁금해하는 거고, 궁금해하다 보면 꼭 시선을 끄는 사람 한둘이 나와 그를 지상에 묶어 둔 거였다. 히비키 부장이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지 않는 이유는 그뿐. 명확하지 않나. 언젠가 흥미가 떨어진다면 얼마든지 손을 탁탁 털고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 버릴 거라고. 적어도 그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와타루가 연극에 흥미를 잃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 적도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을 외치면서 정작 사랑 그 자체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부장에게 주제넘게 대들기도 했다. 울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울고 있냐 물었을 뿐이었다. 모모타로 얘기는 어릴 적에 골백 번도 넘게 읽었는데. 그가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모두가 돌아간 백스테이지에서 혼자, 그러다 토모야를 보고, 찾아오고, d열 23번에서, 이상하죠? 아무도 기뻐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예요?

털어놓았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날아가려고?

저기, 여전히 사람을 사랑해?

사랑할 예정이야?


열심히 할 테니까 버리지 마세요.


프로듀서를 비롯한 한두 명의 사람이 알고 있단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맨 처음이 저였단 것도. 토모야는 얼떨떨하게 그때의 얘기와 백스테이지의 주황색 조명과, 그리고 가면 너머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속을 부여잡으며… 평소처럼 연극부로 향했었다. 지켜봐 달라고 했었으니까.

히비키 와타루는 배우다.

무대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걸 안다. 어느새 와타루가 눈동자를 맞추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웃고 있었다. 토모야 군, 제 생각을 하셨군요!


"아니거든!"


그래도 괘씸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토모야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린다. 숨기려고 해도 꼭 들춰 본다니까,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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