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십새끼

데스 _ 첫만남AU

B. by 비디/BD
4
0
0

“궁금하다면 알려드리죠. 찰리 스트레이혼입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잘빠진 얼굴밖에 없는 남자가 대답을 듣자마자 느슨하게 웃었다. 대충 봐도 멀끔하게 빼입은 옷차림이 이제 막 고급 병원을 차린 돈 많은 신입 의사 같았다. 찰리는 시선이 마주친 2초간, 살면서 고생 한번 안 해봤을 샌님이라고 남자를 평가내렸다. 아무튼 비싼 시계를 달고 다니는 것들은 전부 그랬다. 나름의 삶의 지혜였다. “아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가 주름을 쫙 편 정장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비싼 향수 냄새가 났다. 어떤 브랜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거운 우디향 끝에 맴도는 섬뜩한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자놈들은 저딴 걸 뿌리나 보지. 취향하고는. 차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지만 신발 밑창에 껌이라도 붙여 쫓아내고 싶었다. 그만큼 거슬리는 향기였다. 감각기관이 무음의 사이렌을 동시다발적으로 올리는 것 같은 생리적 거부감. 하지만 고작 1분 전에 이름만 알려준 상대가 이렇게나 미운 경우는 또 처음이라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성질머리가 더러워졌나. 스트레스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만악이라던데 찰리는 근래 스트레스 받을 사건이 얼마나 있었는지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짧은 침묵이 오간다. 돈벌이 좋았고, 새로운 구두도 샀고, 바텐더에게 취향에 맞는 술도 추천받았다. …등 따뜻하게 잘 먹고 잘 잤다는 결론을 내고 나서야, 찰리는 마주 웃으며 남자에게 악수를 청할 수 있었다. 단지 향수가 형편없는 것뿐이겠지. 다음에서 또 만나게 된다면 “요즘은 향수도 바가지를 씌우나 보더군요. 보세보다 못한 냄새에 명품 딱지를 붙이질 않나….” 라며 은근히 눈치 주면 그만이었다. 만날 일이 있다면 말이다. 침묵을 기다려주던 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더니 찰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데미안 러셀입니다. 눈이 참 예쁘시네요.”

“아, 네. …특이하다는 말 자주 들었어요. 예쁘다는 말은 또 처음 듣네요. 보통 ‘인간’답지 못한 걸 깎아내리는 사람만 만나와서요. 그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당신은 보통이 아닌가 봐요? 러셀씨.”

꽉 막힌 놈인 줄 알았는데. 거, 농담도 하네? 구시대적 작업 멘트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상대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며 어설픈 맞장구를 던져주었다.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친한 친구끼리 인사하는 것처럼 살가운 흉내도 냈다. 그러자 부드러운 호선을 그러던 데미안의 입가에 그림자가 짙어졌다. 역시 거지 같은 향수만 빼면 기본 이상, 아니 상당히 준수한 쪽에 속하는 남자였다. 농담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찰리는 곧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연락할 일이 있을까 싶어 구겨진 명함을 건네니, 한 걸음 내디뎌 받자마자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에게 준다. 조수로 추정되는 금발의 여자아이는 찰리에게 인사할 생각은 없는 건지 명함을 손에 쥐고 벤치에 놓인 가방으로 달려갔다. 가방을 열어 명함을 넣는 빡빡한 지퍼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하고 불러 통성명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데미안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아는 체를 하기도 뭐했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아까부터 이쪽을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코트 소매가 찢어진 걸 알아차렸나. 그래도 구두는 새것인데. 낡은 코트와 새것 티가 풀풀 나는 신발이 그리도 이상한가…….

“일단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머쓱한 마음에 얼버무리듯 중얼거리며 상체를 움직였다. 그런데 꿈쩍도 안 한다. 사지 멀쩡한 몸 움직이는 데 불편을 겪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의뢰인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줄곧 마음을 쓴 탓에 근육이 긴장한 탓이겠거니 싶었다. 한숨처럼 숨을 고른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진짜 그럼….”

……왜 안 움직이지? 그러자 하하,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천천히 감돌았다.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한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웃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불유쾌한 웃음의 원인을 찾기도 전에, 데미안은 고개를 아래로 까딱여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제야 찰리는 망부석 신세가 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손을, 아직도? 그것도 돌덩이 박힌 것처럼. 아무리 당겨도 휘청이지도 않을 정도로 강하게 잡고 있다. 곱상한 미소와는 달리 팔에는 시퍼런 핏줄이 흉흉하게 솟아올랐다. 찰리는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두통만 생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깨 마디가 아플 만큼 힘주어 팔을 당겼다.

“그렇게 해서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없어요.”

웃음을 참는 듯 미세하게 떨리는 미성이 들렸다.

“확실하게 힘을 줘야죠. 예를 들면… 밧줄로 사람 목을 조를 때처럼?”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며 뒤늦게 순순히 손을 놓아줬다. 친절하게도 ‘꼭 밧줄이 아니어도 되고요. 피아노 줄은 살짝 구식이지만, 클래식한 게 끌릴 때가 있잖아요.’ 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장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을 코트 자락으로 감춰가며 뒤로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서서히 작아지는 우뚝 선 남자의 형상을 떠올렸더니 입 속에서 욕지거리가 맴돌았다. 한참을 달려 사무실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힘없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취객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을 골랐다. 심장 소리가 잦아든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남자에게 잡혔었던 붉은 손자국이 욱신거렸다. 미치광이 새끼.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첫 만남에 저따위 행패를 부리는 건지 짐작도 안 됐다.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넘어가도 되었겠지만 경고음을 두 번이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찰리는 사무실 입구의 투명한 유리문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안간힘을 주느라 더욱 너덜너덜해진 코트를 벗어 던지던 와중,

찰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명함.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