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까지 읽었어요

송다빈은 정노을에게 초대 받았다.

유통기한: 7화

송다빈은 정노을에게 초대 받았다. 정노을이 초대했다. ‘이번 주말에 집 비니까, 놀러 와.’ 송다빈 맞춤형 구종 강의를 하던 중에 갑자기 툭 던지듯이. 투수는 포수가 기습적으로 던진 말을 엉겁결에라도 받을 생각 하지 못하고 얼굴에 물음표를 백 개 띄웠다. 포수는 노트에 끄적이던 9분할 면을 마저 그린 후에야 송다빈을 슬쩍 바라보며 눈으로 웃었다. ‘영상 자료 보여줄게. 너만 오는 거다?’ 송다빈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의 집 초대는 처음이었다. 송다빈의 17년 생을 통틀어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 가는 일 자체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크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기껏 초대해 줬는데 선물 하나 안 들고 왔다고 다른 아이들이 다 있는 곳에서 면박을 들었던 기억 때문에 선배 집에 갈 땐 어떤 것을 사가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빈털터리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빈손으로 갔다가 혹시라도 선배와 선배의 부모님이 뒤에서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하고 오후 내내 고민하던 송다빈을 끄집어낸 건 이번에도 그의 포수였다. [노트랑 펜만 가져와. 다른 건 말고!] 송다빈의 기우를 뻔히 다 알고 있는 듯이 날아온 문자에 송다빈은 시름을 덜고 그 자리를 기대로 채울 수 있었다.

정노을은 송다빈의 집을 안다. 송다빈의 집에서 정노을의 집까지 버스와 지하철로 2~30분 걸렸다. 사려 깊은 선배가 적어준 노선과 약도를 쥐고 송다빈은 일찌감치 출발했다. 약속 시간은 열한 시였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두 시간 전에 옷을 챙겨입고 정노을이 신신당부한 대로 두꺼운 노트와 필통을 책가방에 넣고 메고 집을 나섰다. 버스가 몇 분 늦게 오기는 했지만 큰 오차는 아니었다. 정노을 동네의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고작 아홉 시 이십오 분이었다.

약도에 따르면 지하철역에서 도보 10분. 3번 출구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다가 두 번만 꺾으면 그의 집이 나왔다. 그 짧은 길을 잃을세라 송다빈은 선배의 지도와 노선도 설명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돌렸다. 교통카드를 삑 찍고 3번 출구를 찾아 나오면서도 송다빈은 작게 입을 달싹이며 되뇄다. ‘3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직진, 세탁소에서 오른쪽, 쭉 걷다가 담벼락이 나오면 왼쪽. 파란 대문 집.’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한 번에 두 개씩 오르며 ‘직진…’을 중얼대던 송다빈에게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송다빈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연주황빛으로 부드럽게 물들었다. 시선을 내리고 몇 번 깜빡거리자 곧 익숙해졌다. 고개를 드니 정노을의 글대로 바로 앞에 공원이 있었다.

정노을은 ‘작은’ 공원이라고 했지만 송다빈의 눈에는 작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도 나무가 보였다. 작은 블럭 하나를 거의 다 차지한 넓이였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네….’ 지하철 타고 멀리 오갈 때나 남 일처럼 보았던 도심 속 숲이었다. 송다빈의 집에서 몇 km나 떨어져 있다고 공기가 다른 것 같았다.

‘…직진.’

관성처럼 입 안에 남은 단어가 송다빈을 떠밀었다. 송다빈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깐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보도블록 위를 지나 공원에 들어서자 포슬포슬한 흙이 밟혔다. 찌르륵 찌르륵, 이름 모를 새들이 사방에서 지저귄다. 내리쬐던 햇살은 무성한 나무들에 가렸다. 사이로 비져나온 빛줄기들이 군데군데 빛나는 얼룩을 만들어 냈다.

송다빈은 눈가를 가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통통하게 살찐 나뭇잎들이 햇빛을 막으며 역광을 냈다. 원래 색보다 짙을 녹색이 쨍했다. 쭉쭉 뻗은 진고동색의 나뭇가지들과 그 위에 조그만 발가락을 올리고 이따금씩 날개를 터는 작은 새 다섯 마리와, 도화지처럼 배경에 자리한 새파란 하늘이, 손 그늘에 숨긴 눈동자에 그대로 담겼다.

'바람….'

가볍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맞닿으며 사부작댔다. 송다빈의 머리카락도 미풍에 실려 떴다 가라앉았다. 습기를 머금은 흙내가 바람에 밀려 파도처럼 훅 끼쳤다 잠잠해졌다. 우뚝 선 송다빈의 곁을 허리를 꼿꼿이 세운 노인 몇이 팔을 흔들며 지나쳤다.

산책로 외의 공간에는 키 큰 나무들과 낮은 관목들이 너무 빽빽하지 않게 심겨 있었고, 잔디 같이 자잘한 풀이 깔린 공간에는 가족들과 연인들이 각자 돗자리를 깔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너덧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나무 사이를 쏘다니며 숨바꼭질하며 숨넘어갈 듯 웃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도 있었다.

어디서든 잘 자는 송다빈이지만 이곳에 눕고 싶진 않았다. 시간이 많이 남았고, 잘 관리된 풀밭에 누우면 제법 푹신할 테고, 바람도 살살 불고, 햇빛은 딱 좋을 정도로만 비치지만, 아마 소풍 나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귀찮아질 것 같았다. 송다빈은 풀과 흙 내음을 들이켰다 가늘고 길게 뱉어내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말아 쥔 손안에 꾸깃꾸깃하게 접힌 종이를 다시금 펼쳤다. 하도 접었다 폈다 했더니 종이의 뻣뻣함이 사라지고 접힌 자리마다 뜯어진 솔기 자국이 남은 천처럼 흐물거렸다. [3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서 직진, 세탁소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꺾고 조금 더 걷다가 담벼락 나오면 왼쪽으로 꺾는다. 제일 먼저 보이는 파란 대문 집!] 선배의 글씨는 빈말로라도 단정하달 수는 없지만 악필까지는 아니었다.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정도? 문장을 들여다보면 왠지 정노을의 음성으로 저절로 치환됐다. 두 겹의 밑줄과 큼직한 별 하나가 달린 [토요일 열한 시]는 정노을 특유의 강조하는 목소리가, 오른쪽 모서리에 작게 적힌 [조심해서 와라!]는 웃음기를 머금고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했다.

'세탁소, 세탁소….'

공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첫 번째 목적지가 보였다. 허름한 2층 건물의 1층에 둥지를 튼 가게였다. 건물은 꽤 오래되어 보였는데, [새빛세탁소]라고 적힌 흰색과 파란색 간판은 어제 단 것처럼 깨끗했다. 벽에 달린 굴뚝에서 흰 수증기가 폭폭 뿜어져 나오고, 주말 아침부터 옷을 찾으러 온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이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서울인데 서울이 아닌 것 같이.

세탁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트는 사이 수증기가 송다빈의 머리를 헝클고 날아갔다.

주차장 입구가 열린 2~3m 높이의 담벼락 앞에서 왼쪽으로 꺾자 공원 만큼이나 울창한 가로수 열이 보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파란 대문 집….' 가로수 옆 인도에 들어선 후에야 주택들이 보였다. '저기다…!' 벽돌 담장 사이의 새파란 대문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가다시피 걸으려던 송다빈이 순간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약속 시간은 열한 시. 지금은 아홉 시 사십 분. 너무 이르게 가도 민폐 아닌가?

다시 공원으로 돌아갈까? 벤치에서 한숨 자고 와야 시간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공원에 사람이 많아서 앉을 자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고…졸다 늦으면 더 민폐일 테고….

무엇보다 송다빈은 그 공원에서 쉴 자신이 없었다.

네거티브로 치닫는 고민 속에서 송다빈은 일단 앞으로 나아갔다. 관성이었다, 혹은 기대였든지.

'선배의 집이 맞는 지만 보고 돌아가자.'

속으로 다짐하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송다빈은 여태까지와 다르게 작은 보폭으로 걸었다. 집 안에 있을 정노을에게 발소리가 들릴세라 제법 살금, 살금….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벽돌이 빈틈 없이 쌓인 담벼락은 송다빈의 가슴 높이까지 왔다. 오는 길에 봤던 담에 비하면 활짝 개방된 수준이었다. 송다빈이 힘내서 점프하면 넘을 수 있을 만한 높이였지만, 집 처마든 대문이든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이 달린 CCTV가 빨간 점을 깜빡이고 있었다.

대문은 모서리가 살짝 녹슬고, 그 아래로 페인트를 붓질한 자국이 그대로 보였다. 누군가 서툰 솜씨로 대문에 페인트 칠을 대충 한 흔적 같았다. 모서리는 덜 발랐고. 허술해 보이는 대문 상단에 방범 보안 업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오면 즉시 출동할 것이다.

송다빈은 왜인지 이 모습이 몇 번이고 생각날 것 같았다. 익숙한 색상의 대문과 대조적으로 유독 하얀 [방범 중] 스티커와 송다빈을 향한 카메라의 빨간 눈이, 새파란 하늘과 진초록, 진고동 일색의 공원 만큼이나 뇌리에 박혔다. 아마 정노을이라는 멋진 선배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담에 붙은 주소는 정노을이 적어준 주소와 같았다. 목표를 달성한 송다빈이 어디 가서 시간을 때울지 고민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순간, 송다빈이 시선을 떼지 못했던 대문이 안쪽으로 끼이익 열렸다.

"왔어? 벨 누르지!"

'이런 대문도 손 안 대고 열 수 있구나,' 송다빈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완전히 열린 대문 사이로 선배가 보였다. 정원의 징검다리를 지나 두 계단 오르면 나오는 현관, 그 현관문을 바깥으로 활짝 열고 문고리를 잡은 채로 상체를 바깥으로 내민 정노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잘 꾸며진 정원 안의 평범해 보이는 주택, 사복 차림에 머리가 부스스한 선배의 일상적인 모습. 하필 열 시도 채 되지 않아 아직 따사로운 햇빛. 그리고 송다빈이 아직 넘지 않은 파란 철문과, 그 위에 매달린 방범용 기기들. 송다빈은 여기서 처음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송다빈은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집주인에게 인사했다. 구식으로 보였던 대문이 저절로 열려서 신기했던 마음도 넣어두고, 자신을 반기는 정노을에게 가능한 한 살갑게 굴기 위해 노력했다. 휴일에도 모자란 후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선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애썼다.

지금 당장은 그래야 옳았다. 의심을 한대도 스스로에게 먼저, 다른 사람은 그 이후에. 설사 정노을의 본심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고 해도. 송다빈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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