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반스웨인] 댄스 파트너
리퀘
생애 다시는 없을 수정장미의 축제라더니, 라며 자르반은 고개를 저었다. 축제를 장식하고 있는 수정 장미들은 아름답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축제의 참석자들도 대개 일국의 귀빈들이며 명사였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성대한 축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르반은 그 축제에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일국의 왕자인 몸으로 그가 주인공인 축제가 개최되기를 수십번, 그 외의 연회에 초대받았던 적은 일백번을 넘는다. 이제와서 그가 새로운 감회를 느낄 요소는 없었다.
결국에는, 지루한 것이다. 자르반은 연회장을 빠져나가며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정원, 그저 그런 풍경, 그리고 어딘가에는 식상하게도 연인들이 밀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괜히 목격했다가는 입장이 곤란해지고 만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동안 새하얀 새들이 놀라서 이리저리로 날았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새들을 쫓아버리곤 정원에 나있는 외길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는 또하나의 불참자를 발견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마치 달빛으로 자아낸 은사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인다. 몸의 모든 부분을 수정으로 세공해서 만든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저 남자일 거라고 자르반은 생각했다. 어떻게 세월의 풍파를 맞은 사내가 저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온통 불가사의함 뿐이다.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침없이 뻗던 발은 어디에도 없고, 자르반은 머뭇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스웨인에게로 옮겼다. 그가 뒤를 돌아본 것도 마침 그 순간이었다.
"왕자님, 이로군."
짧게 내뱉은 말에선 이미 그가 올 것 쯤은 알고 있었다는 여유가 배어난다. 자르반은 그의 인사답지 않은 첫 마디에 약간 안도하며 대답했다.
"알고 계시는 대로, 데마시아의 자르반 라이트실드입니다. 축제의 개최자에게 인사 드립니다."
한 팔을 뒤로 뻗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왕자된 자가 표하는 예의로는 이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스웨인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한쪽 무릎을 살짝 숙이며 코트를 드레스 자락 마냥 펼쳐보였다. 코트에 아로새겨진 자수 실에서 빛이 일렁였다.
"알고 있는 대로, 제리코 스웨인이오. 연회장에서 이 외딴 곳까지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소."
"그렇다기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만."
"새들이 시끄럽게 속삭이는 통에 눈치챘지. 제법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거든."
그제서야 저 멀리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새하얀 왕관앵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르반이 그쪽을 바라보자, 새들은 딴청을 피우며 깃을 다듬기 시작했다. 스웨인 말마따나 정말로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다.
"그나저나, 왕자님께서 이렇게 자리를 비우다니 연회장의 여성들이 섭섭해하겠군."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다른 곳을 보며 말했지만, 스웨인은 자르반에게로 시선을 흘긋 돌렸다. 자르반은 귀를 조금 발갛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의 의미요. 데마시아의 자르반 라이트실드 왕자, 이 축제에서 왕자님의 지나가는 시선이라도 한 번 받아보려고 애쓰는 숙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순수한 왕자님께선 모르는 모양이지만 말이오. 운 좋게 왕자님의 댄스 파트너라도 된다면 그건 그 아가씨 인생에서 제일 가는 자랑이 되겠지."
스웨인이 자르반에게 성큼 다가서더니, 장난스레 자르반의 귓가를 툭 건드렸다. 안그래도 부끄러움으로 물든 귀가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 자르반은 황급히 스웨인이 건드린 쪽의 귀를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과장이군요. 이 축제엔 신분과 세력에 관계 없이 이 자리를 빛내는 신사분이 여럿 계십니다. 그리고 제 신분이 왕자라고 하나, 그것도 이 자리에서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개최자인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워낙에 순수하신 왕자님이라 어느 쪽인지 맞추기가 어렵소만, 방금 내 말은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소. 아직 혼처가 없는 왕자님께는 좋은 기회일거요."
"짓궂은 말씀이군요."
처음 만난 외국의 귀빈에게 하는 말로는 다소 선을 넘었다. 스웨인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비웃음이 보인다면 자르반은 그 즉시 무례를 지적했을 테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하게 정제된 얼음같은 표정으로 자르반을 대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의 혼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데마시아인이 아닌 그가 왕자의 사생활에 집착해야 할 이유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에 자르반은 더욱 아리송한 채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대는, 어째서 회장을 나와 있는 겁니까? 한창 축제가 무르익을 와중에 개최자가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습니까."
이번엔 자르반 쪽에서 그의 사생활을 찔러 본다. 스웨인은 의외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르반은 그의 반응에 더욱 자신감을 얻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한 방을 먹여주고 싶었다.
"연회장에는 개최자님과 한 곡 추고 싶어 기다리는 이들이 잔뜩이더군요. 저에 비한다면, 축제의 주인공께서 더 많은 시선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계속 기다리라고 자리를 비웠소."
"......예?"
"축제의 주인공같은 광대 짓에는 어울려주기 싫어서 말이지."
스웨인은 보석으로 된 의수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순간적으로 보석이 품은 광채가 그의 뺨을 뒤덮었다. 광채는 눈가를 타고 흘러 그의 눈동자 속을 가득 채웠다. 에메랄드? 옥 구슬의 표면? 어느 쪽의 빛이라고 하기에도 묘한 색채로 녹색 눈동자가 빛난다. 자르반은 그 모습에 사로잡혀 스웨인이 어떤 말을 한 것인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말의 의미를 해석해내고 나서야 그는 입술을 뗄 수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축제를 연 것입니까? 주인공에도 관심이 없다면, 무슨 이유로."
"어째서인 것 같소?"
고개를 비뚜름히 돌리며 스웨인이 이를 드러내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자르반은 그것을 제 좋을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저와 만나기 위해서일 지도 모르겠군요. 개최자인 그대도 축제에 관심이 없고, 참가자인 저도 관심이 없으니 그게 답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르반이 스웨인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손가락은 면장갑을 뚫고 전해질 정도로 차가웠으나 자르반은 그것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스웨인을 향해 생긋 웃어보인다. 그에게 무언가의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되어야 했으나 그럴 마음이 없었던 자들끼리의.
스웨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르반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의수에서는 아무런 촉감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단호히 붙잡혀 있는지는 자르반의 손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의수 끝에서 이유모를 따뜻함마저 전해져 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스웨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보다 훨씬 순수해 빠진 왕자님이었군."
"이것도 인연인데, 어울려 주십시오."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는 강아지같다고, 스웨인은 생각했다. 자르반은 스웨인의 속을 모르는 채로 여전히 밝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청람색 눈동자마저 기대의 빛을 품고 반짝이는 가운데, 스웨인은 잡혀있는 손을 되려 제 가슴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자르반이 놀라서 눈을 흠칫 떴으나 스웨인은 그와 반대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매서운 포식자같은 눈빛으로 자르반을 올려다 보았다.
"한 곡 춰보고 결정하겠소.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스웨인은 자르반의 손을 들어올려 그 손등에 입맞춤했다. 장갑이 피부와 피부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입술의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자르반은 크게 움찔거렸다. 본인이 춤을 신청하며 손등에 입맞춤한 숙녀는 여럿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그것도 사내에게 당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팔에 전기라도 튄 것같은 기분이었다. 자르반은 우물쭈물거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스웨인."
이번에는 자르반이 무릎을 꿇고 스웨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투명한 보석 위에 그의 입술 모양대로 작게 김이 서렸다. 자르반은 그 차가운 수정에 자신의 온기가 스며들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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