漣
유일한 파동
달칵. 집무실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우뚝 멈춰선다. 한 인영이 풍현도 화주의 인장을 들고선 결재 서류에 인장을 찍고 있었다.
인영의 정체는 늘상 그러했듯이 은퇴하고서도 끌려나오는 풍현도의 선대 화주, '신여단'이었다. 정말 하루종일 일만 하셨던 건 아니겠지. 혜성은 한숨을 내쉬고 다가가 자리에 앉는다. 아, 뭔가 따끔따끔한 게 강렬한 눈빛이 느껴지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여단이 그 둥근 눈으로 한껏 노려보는 게 아니겠는가.
"재밌었나봅니다."
"그랬죠."
"제겐 이 많은 업무를 맡겨놓고 참 잘도 놀다 오셨습니다."
"제자가 자유 좀 찾으려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네 자유 때문에 내가 휘말리니 말하는 것 아닙니까."
벼루를 집어들어 던지시는 모습에 혜성은 그것을 낚아채 흔든다. 여단도 혜성도 이런 행위 쯤은 그들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하리란 걸 너무도 잘 알았다. 알기에, 그 모습이 참 얄밉게도 보였던 스승의 손에서 붓이 두 동강이 난다. 심호흡으로 내면을 다스려도 붓 바라보며 '스승님, 기물 함부로 다루시면 곤란합니다' 하는 목소리에 여단은 의자를 힐끔 쳐다봤다.
설마 의자를 던지실 생각은 아니시겠지? 그건 아무리 저라도 잡아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물끄러미 보고 있자 곧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한가득 산을 이룬 두루마리로 시선을 돌린다.
혜성이 아니었다면 여단은 인품으로 따라오기 힘들 성인이 맞았다. 그저 상대가 그의 제자이자 류혜성이여서. 혜성 또한 그 심정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 않고 받아낸 벼루를 내려 먹을 갈고 붓을 잡았다. 이럴 때는 닥치고라도 있는 게 상책이다.
잠시간 집무실 안은 붓이 종이 위를 오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오로지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이니 글을 쓰고 도장 하나 찍는 데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걸 진짜 그만둘 수도 없고. 언월도를 내려놓고 붓에 먹을 묻히는 혜성의 손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본디 자유를 추구하는 자에게 가만히 앉아 서류나 보고 있으라 하면 답답함 어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창을 열어놓고 바람을 쐬어도 쉽게 가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여단이 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답지 않게 여러가지 참여하셨던데. 드디어 사람에게 뛰어들 생각이 들었습니까."
혜성은 풍현도의 낭도들을 떠올렸다. 대련을 부탁하던 아이들, 별 해괴한 것들을 말하는 아이도 있었고 취해 돌아다니던 낭도들도. 마지막으로 당돌하게 제게 내기를 걸었던 사람도. 픽.. 무표정하고 지루하던 얼굴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전히 시선은 두루마리에 고정된 채로 대꾸한다. 한껏 애틋해진 눈 하며 올라간 입꼬리가 누군가를 떠올린다.
"귀여웠으니까요."
여단은 그런 혜성을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승인 그도 처음 보는 표정. 낭도들에게 애틋해지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상당히 다른 무언가가 섞여 들어가 있었다. 이미 혼인하여 부인까지 둔 여단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닌데."
"?"
"아이들 성장하여 보는 그런 눈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 예."
혜성은 불경스럽게도 제 스승이자 선대 화주에게 '당신을 존경은 하지만 지금 헛소리 하고 계십니다' 하는 눈빛을 날렸다. 그것을 못 알아먹을 인물이 아니었던지라. 차마 스승에게 대거리를 시선할 수는 없었던 그는 턱만 괴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단은 굴하지 않았다. 과연 혜성을 한 두해 붙잡고 가르친 사람이었으니.
"세상 어느 화주가 그런 눈을 하고 낭도를 말합니까. 큰일나게."
"스승님, 해괴한 소리 마세요."
"저도 당신 그렇게는 안 봅니다."
"원망스레 보시죠."
그러게 누가 싫다는 사람 화주 시키랬나.
퉁명스레 대꾸하는 풍현도의 주인을 스승은 묘하게 쳐다보았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있기만 하려 했던 놈이었다.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 먹었으나 제 사람들은 지나치도록 챙겨댔다. 누가 한 대만 맞고 돌아와도 범인 찾아내어 2배로 때려주었고 풍현도에 자유란 것을 추구하게 만든 놈이란 말이다. 그런 놈이 생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품었다면….
‘살짝만 건드려줘 볼까.’
못난 제자 어리석은 짓이나 하지 않게 도와주려던 여단은 입을 떼기도 전에 말문이 막혔다.
“….”
“…누굴 떠올리고 있습니까?”
쫓겨났다.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고 본인 집무실에서 본인을 쫓아내나 보통? 제 발로 걸어나오기는 했어도 말이지…. 공중에 숨을 내뱉는다.
“그 상태로 무슨 집무를 보겠다고. 나가십시오. 나가세요. 머리 좀 정리하고 제대로 다 정리하고 오세요.”
“네? 아니 무슨…”
“나가.”
“잠ㄲ…”
“떠올린 이랑 제대로 말하고 오기까진 들어올 생각 마시죠.”
그 덕에 언월도는 챙겨나오지도 못하고 맨몸으로 집무실 밖으로 떠밀리듯이 나와야 했다. 꽃잎 흐드러져 하나하나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화랑도를 거닐어 생각을 이어나간다. 제 스승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셨더라. 어이없는 것을 본 듯한 얼굴을 하셨던 것 같다. 이거 의문점만 가득이네. 다시 들어가 왜 그러셨느냐 알려달라 말할 수도 없고.
“…누굴 떠올리고 있습니까?”
‘누구냐니. 그야,’
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
보통 이럴 때는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사람 떠올린다던데. 머릿속에서 스승님이 ‘그건 변명입니다.’ 하는 소리다 들리는 듯했다. 뭐, 어쩌라고. 뭐라도 깨달아 돌아오라는 사람에게 깨달을 것이 없다 말하면 맞아죽겠지. 성과를 가져가야 하니 일단 머리를 돌려보긴 한다.
“…근데 정말 왜 내쫓긴거야.”
생각나는 것이라곤 스승님의 너 이자식 알면서 모르는 척 하냐는 듯한 눈빛. 저를 보고 입을 다무신 모습. 붓마저 떨구시며 종이 위로 떨어진 먹. …그런 결국 내가 원인이라는건데.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다. 한숨뿐이 나오질 않았다. 이게 뭐람.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긁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저녁놀이 질 때인가. 별은 한참 후에나 뜨겠네.
눈을 감자 사위가 암전된다. 구태여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새록새록 이번 회합의 일이 상기된다. 평소와 달리 여러가지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비무야… 뭐, 그럴 수 있지. 그럼 답지 않게 왜 꾸미고 다녔으며 연인놀이는 왜 했고 받은 내기 신청을 그냥 넘기지 못했는지. 그리고… 평소라면 낯뜨겁다 피할 짓은 어째서 그리 자연스레 하였는지.
저답지 않았던 것들 투성이다.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의문만을 품은 채 암전으로 서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막 자각하기 시작한 감정에 답을 내릴 새도 없이 멀리서 제게로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곤 서서히 다시 풍경을 눈에 담는다.
“…화주님.”
혜성은 어느덧 생각하던 이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았다.
결국 끝까지 남은 것은 왜? 라는 의문이었음에 혜성은 처음으로 답을 찿지 못했다.
혜성은 제 앞에 죄인이 되어 마음을 고백하는 낭도를 보았다.
‘소원권 어디에 쓰려나 했더니. 이런 모습 봐야 했다면 괜히 줬던가.’
화주란 입장에 저러한 모습은 보기도 많이 봤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네가 그러고 있는 것만은 싫었다. 무감하게 아무 감정도 안 들기는 개뿔. 당장에라도 일어나라 손 뻗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낸다. 네가 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기다렸다. 속에서 몰아치는 것들 꾹꾹 눌러 참는 것이야 늘상 하던 것이었고 그에게는 익숙한 부류였으므로 할 수 있었다.
주먹 쥔 손에 들어간 힘을 풀기 위해 팔짱을 꼈다. 허튼 짓이라도 할까. 말할 기회를 빼앗을까봐서.
혜성은 말을 쉬이 잇지 못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당신을 동경했기에 화랑을 꿈꿨고, 당신의 뒤를 좆고 싶었기에 이곳에 들어왔다는 그 말 하나만큼은.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어요.”
“….”
‘이젠 알아. 네가 진심이었다는 건, 안다.’
혜성은 율서휘를 보았다.
가엾게도 무심한 저에게 마음을 준 제 사람을. 그럼에도 애틋하고 열이 오르는 듯한 체온은 무엇 때문인가. 다시 선을 끊은 의문이었다.
대회이자 회합이 끝나기 전, 나는 왜 동요했던가. 무엇에 벽을 허물고 있었지?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도 깨끗한 마음이었고, 떳떳한 나의 순애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마음을 찾아가기 위해 이리 화주께 고합니다.”
“….”
“사랑해요. 또한 죄송합니다.”
“….”
난 네가 말하는 순애가 좋았다. 그러니 죄송하단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네게 스며들었을 마음에 어째서 죄인된 것처럼 굴어야 하는가. 어째서 두려움을 겪어야 하는건지, 저는 모르겠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연緣은 이리 굴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이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그리하지 않았으면 했다. 당당하게, 당돌하게. 언제나 제게 그러했듯이. 그런 마음을 담아 주었던 이름이었다. 그것이 지켜지지 못한 지금, 저렇게 생각하게 만든 저의 자리가, 위치가 조금 원망스러울지도.
그리고 깨닫는다. 아, 나는 네가 곁으로 오기까지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 자리에서…. 혜성이 정말 길라잡이라도 된 것 마냥, 그렇게 있고 싶었나보지. 조소가 새어나온다. 결국에 혜성은 붙박여 있을 수 없음인데. 기다리기에는 제 성질은 급했다. 붙박여 있기에는 저는 지금 다가가고 싶었다. 손을 잡고 길을 알려주는 것 또한 나름 괜찮은 길잡이가 아닐까.
그 하나의 결심으로 많은 것이 변화한다.
처음은 漣이고 緣이었으나 지금은 戀 또한 함께라.
잔잔한 물결 위 스스로도 쉬이 낼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킨다.
지금처럼.
‘…답지 않은 일 하나만 더 해볼까.’
어쩌면 계속해서 하게 될 생각을 품고 당신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려놓는다.
“한 가지 짚고 가자.”
나는, 희망보다 체념을 말하는 네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처분을 내릴 생각이 없다. 대답을 들려줄 생각이거든.”
바닥에 무릎 꿇어 앉아 있는 당신에게 한쪽 무릎 바닥에 대어 가볍게 웃는다. 의문이 풀린 사람처럼 후련하게.
“제자된 도리로 스승에게 마음 품은 것이 세간의 시선엔 괘씸하긴 하나 그건 고했으니 넘길 일이고. 게다가 마음 받은 스승이 괜찮다는데 뭐 어쩔테야. 누가 뭐라 한다면 대충 화주 권력 남용이라도 해보지. 가지고 있는 것 쓰지 않으면 뭣해.”
제 명성따위,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욕을 들어먹는다 해도 어쩔텐가. 상관없었다.
화주 자리 또한 미련 남는 것이 없었다. 그저 내 것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자리였기에 이제껏 잡고 있었던 것 뿐.
고귀하다? 그 모두 타인이 정한 것이었다. 결국 ‘류혜성’이라는 인간은 남들이 뭐라든 그것이 제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를 둔다.
“듣기 싫어도 들어. 시작은 네가 끊었으니 끝맺음은 내가 내게 해줘.”
누가 너만 그 감정 품었다 말했던가.
“기대에 차보지 그래.”
“난 그에 응할 생각인데 네가 기대 없으면 어쩌나.”
신애, 애정, 호감, 사모… 무엇보다도 은애. 그 모든 것이 뒤섞이면 내리지 못했던 질문에 답을 써내려간다.
—연모한다, 율서휘.
바야흐로 우리는 봄의 서막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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