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일상

보편적 일상 1

어린 유이설을 마주한 검협

“그러니까, 네 말은, 화산이 지금, 없다는 거지?”

 

화를 삭히기 위해 뚝뚝 끊어 말하는 음성이 들린다. 화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설아. 화산. 화산이 어떤 곳이길래. 유이설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말을 눈 앞의 남자에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화산은, 망했어. 근데. 다시 살릴 수 있어.

 

 보편적 일상 1

 

유이설의 생애 첫 기억은 붉었다.

붉은 꽃잎들을 가르고 아버지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팔랑거리는 꽃잎들은 나무를 가르고 풀을 베었지만 사람을 다치게 만들지 않았다. 어린 유이설은 그런 꽃잎이 신기했다. 보통의 잎이라면 작은 힘에도 짓이겨지는 게 맞을텐데. 아버지가 피워내는 꽃들은 강인하고 단단했다. 어린 유이설은, 자신의 손으로도 꽃들을 피워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나무막대를 휘둘렀다. 비록 제대로 된 검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어떠한 도구든 상관없이 노력만 있다면 나무 막대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다고 했다. 유이설은 작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꼭 쥐었다. 나도, 꼭.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숲 속에서 다짐했었다.

 

“내가 그 고생을 해놨는데 이제는 아예 없어졌다고.”

 

그렇기에 유이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나 피워내고 싶어했던, 나의 희망인 꽃이 이 남자의 손에서 피어났다. 놓치면 안된다.


“사고는 또 왜이리 어려? 몇 살인 거야?”

“...몰라.”

 

남자가 말하는 ‘사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을 칭하는 듯해 유이설은 눈치껏 대답했다.

 

“데려가. 같이가.”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퉁명스런 목소리가 뒤따른다. 유이설은 남자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상처투성이인 손에서 피가 새어나와 남자의 옷을 적셨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유이설의 손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손에 피, 이것부터 좀 치료하자. 검도 못 쥘텐데 도대체 어쩌다가 다친거야?”

 

온기가 손을 감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처음 느껴보는 온기다. 따뜻해. 유이설이 반대쪽 손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제 눈 앞에 불쑥 들어온 작은 손에 눈썹을 휙 올렸다가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이내 픽 웃는다.

 

“진짜 어린애가 다 됐네. 이리와. 손 씻으러 가자.”

“...응.”

 

남자는 익숙한 듯 유이설을 번쩍 안아들었다. 팔을 목 뒤로 감고 힘을 실어 꽉 조인다. 비쩍 마른 몸이라 티도 안 났지만. 남자는 산을 꿰고 있는 것처럼 능숙하게 걸었다. 해도 진데다 그렇다할  마땅한 길도 없는 깊은 산속이건만, 용케도 맞는 길을 쏙쏙 잘도 찾아간다. ...이러고 있으니까. 귓가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착 가라앉아 차분하다. 사고랑 처음 마주쳤을 때 생각나네. 그때도 지금처럼 밤이었잖아. 유이설이 고개를 갸웃한다. 우리 첫만남, 오늘. 응? 오늘. 아 뭔 오늘이야. 우리 그때....... 오늘? 오늘이라고? 별안간 걸음을 멈춘 남자가 곧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오늘이라고... 오늘... 오늘 처음 만났다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 유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생판 모르는 초면이다. 아니 그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자고 한거야? 사고, 혹시 아무나 막 따라가고 그래? 그러면 안돼. 내가 사파였으면 어쩔 뻔 했어. 앞으로 누가 가자고 하면 누구인지 부터, 아니, 아니야. 나한테 데려와. 내가 확인하고 판단해줄게. 아, 나는, 음.. 그래, 사부. 사부라고 불러봐. 혼자서 주렁주렁 말을 이어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낸다. 안겨있느라 눈높이가 높아진 유이설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재촉한다.

 

“...사부.”

“응, 그래, 사부. 사부.......”

 

에이, 그냥 청명이라고 불러!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마구 찌푸리다가 허탈한듯 웃는다. 청명이 웃자 유이설이 미간을 찌푸린다. 웃지마. 얼씨구.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이제보니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어린애였던 거네.

청명은 착잡해졌다. 전쟁 중 정신없이 사파를 쫓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시장통이었다. 아무도 청명을 기억하지 못했다. 화산검협으로 이름 꽤나 알린 자신을! 이곳이 섬서라는 것을 알고 기억을 되감아 화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작은 유이설이 발갛게 얼은 손으로 나무껍질을 뜯어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다. 익숙한 얼굴을 보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 조금은 가셨다. …그래봤자 였지만. 그럼 그렇지. 청명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몇살이야? 청명의 물음에 유이설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아닌게 아니라, 유이설은 진짜 본인의 나이를 몰랐다. 제 나이를 알고 있을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고, 날짜를 세어가며 살아가기에는 산이 너무 깊었다.

 

“아. 뭐. 그래.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느새 계곡에 도착한 청명이 유이설을 내리고 물 속에 손을 집어 넣는다. 손. 물 온도를 확인하듯이 손을 몇 번 휘휘 젓더니 유이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차가운 물 속에 상처 투성이 손을 집어 넣으니 따가운 느낌이 올라온다.

 

“따가워? 좀만 참아. 해 뜨면 약 사러 가자.”

 

약? 작은 제 손을 닦아주고 있는 투박한 손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유이설이 고개를 들어 청명을 본다. 어, 약. 이거 나으려면 약 발라야지. ...검 잡으려면 힘도 길러야 되니까 밥도 먹고. 앞으로 지낼 곳도 있어야 되니까, 그러니까. ...화산으로 가자. 전각은, 남아 있겠지. 목소리가 힘없이 흐려진다. 아버지의 옷에 그려져 있던 꽃무늬가 이 사람의 옷에도 그려져 있다. 화산의 사람일까. 이 비급만 있으면, 이설아, 화산을 다시 살릴 수 있어. 매화를 피울 수 있는 검수가 많으면, 그러면, 이설아. 화산의 재기를 꿈꾸는 아버지의 표정은 생기를 잔뜩 머금고 빛났다. 그러니까 내가 완벽한 매화를 피워내야만 해. 아버지의 다짐은 곧 유이설의 다짐이 되었다.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아이는 가까운 어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유이설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어른은 아버지였다.

 

청명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이설은 그저 먼 발치에서 청명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청명이 허리춤에 있던 빼낸다. 네 검으로 해주려고 했지만... 가만히 서 있는 유이설을 힐끔 흘겼다. 아버지의 검을 양 손에 꽉 쥐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피나니까 밑에 내려두라고 했건만.

“네 검은 네 딸한테 줬어. 저 검으로, 매화를 피울거야.”

 

유이설이. 청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천천히,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검이 움직인다. 검이 파르르 떨리며 매화 꽃이 후두둑 떨어진다. 매섭지만 포근한 기운이다. 검 끝에서 나온 매화꽃과 나무에서 떨어지는 매화꽃이 섞여 아름다운 꽃비를 만들어낸다. 유이설은 손을 뻗었다. 닿을까? 다홍색 꽃비는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서만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청명의 검 끝이 다시 한번 진동한다. 검이 만들어낸 파장에서 매화꽃이 피어난다. 피어난 꽃들은 유이설에게 향한다.

 

“닿았다...”

 

유이설의 손바닥에서 꽃잎이 부서진다. 아버지가 그렇게 집착했던 꽃이다. 손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그런.

 

“여기.”

 

사라지지 않는 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청명을 올려다 본다. 화산이 피어내는 꽃은 금방 사라져. 뭐, 어차피 중요한 건 그 꽃을 피워내기 까지의 과정이니 상관이야 없다만. 사라지는 꽃은 아쉽잖아.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뭐든 지속되는 것이 좋으니까. 근데, 화산은, 사라져도 계속해서 피워내야 해. 그리고 사고가 그렇게 해줄 거고. 안 그래? 빙긋 웃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유이설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의 그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날이 밝자마자 찾은 화산에는 빈 전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화산까지 오면서 들은 이야기가 여럿 있었다. 화산의 전각이 팔린다고 했다. 이미 모든 게 끝났고, 다음날이면 전각이 허물어진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진짜랜다. 청명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으니까. 안 팔리게 하려면 할 수야 있었지만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다. 유이설을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청명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제 사고와, 사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사파들과의 전쟁에서 지친 마음을 잠시 회복하라고 청문진인이 보내줬나보지. 청명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청명은 유이설을 안은 채로 빈 전각 안을 하염없이 둘러보았다. 망하기 직전의 모습까지는 봤어도, 진짜 망해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다짐했다고는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불쑥 솟았다. 왜, 하필.

“청명.”

얌전히 안겨있던 유이설이 옷깃을 붙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분노와 원망으로 잠식되어가던 눈동자가 차분함을 찾았다. 망한 화산을 보며 분노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차선책을 실행하러 가야한다. 청명은 장문인 처소의 문을 당당히 열어재꼈다.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장문인들.”

껄렁이는 목소리가 빈 공간에 울린다. 화산이 아무리 망했어도 이 비동은 열렸을 리가 없었다. 현종 시절의 사람들이라면 청명이 이미 꿰고 있었기에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면? 으흐흐. 물러나있어. 다친다. 새겨진 검로를 따라 청명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청명이 비동에서 귀중품들을 들고 나올 때까지 유이설은 가만히 앉아 청명의 검을 떠올리고 있었다. 막힘없이 흘러가는 검이다. 날카롭고 섬세한 검로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양 손에 꽉 쥔 아버지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뭐해? 이리와. 나가자.”

“떠날거야?”

“응. 여기를 떠나서 이곳저곳 다닐거야. 유람이라고 해야 하나.”

…유람.

응, 유람.

나도, 가?

어, 사고도 갈 거야.

검을 꽉 쥔 유이설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다. 너무 세게 쥐었는지 붕대 사이로 피가 비친다. 내가 손에 힘주지 말랬지. 이리줘. 싫어. 어쭈? 어차피 못 쥐고 있어. 내려가서 다시 잡아. 꽉 쥔 손에서 빼낸 검을 허리춤에 차고 유이설을 안아든다. 화산의 전각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가는 청명의 허리춤에 두 개의 검이 맞부딪히면서 경쾌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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