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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사용된 설정, 단체 등은 모두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페이 올슨이 연구원에게 달려든다. 그들은 모두 그 연구원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페이는 연구원의 목을 졸랐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까마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에녹은 그냥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페이가 손을 거두었다. 연구원은 흐물흐물하게 쓰러졌다.

지랄하지 마, 왜 난 아니야?

소리쳤다.

왜 난 아무것도 없어?

다시 소리쳤다. 에녹이 웃었다. 눈은 한심하다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이번엔 에녹을 향해 소리쳤다.

뭐가 웃기다고 쳐 쪼개고 있어? 뭘, 뭘 웃느냔 말이야!

아니, 페이 올슨.

까마귀가 에녹의 팔을 잡았다. 괜히 자극하지 마, 에녹은 그 말을 무시했다.

아니. 페이 올슨, 너에 대한 몫이 명백히 있는데 그렇게 광란을 할 일인가?

까마귀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페이 올슨은 여기에서 맡은 일이 있었다. 폐기함. 페이 올슨, 결함품으로 폐기함. 그렇게 결정이 난 것은 2년 전 일이었다. 페이 올슨은 그리고 2년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프레이야 올슨이 죽은 뒤에서야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녹은 그 사실이 너무 우스웠다. 까마귀가 눈치빠르게 말했다.

다른 연구원들이 온다. 어쩌면 경비원을 대동하겠지. 빠져나가야 해.

빠져나간 뒤에는?

페이가 으르렁거렸다.

……, 폐하께 가도록 하자.

여왕 폐하. 이 나라를 다스리는 분. 이 모든 사건의 원흉.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것들이 많다.

까마귀가 조용히 말했다. 페이 올슨이 걸음을 옮겼다. 까마귀는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 잘못된 이유에서였다. 페이는 까마귀를 옆으로 밀치고 사납게 말했다.

됐어. 나한텐 희망은 없지만 너희에겐 남아있을 것 아냐. 예전에 이 곳에 온 적 있다, 그 말인 즉슨,

페이는 익숙하게 카펫 밑에 숨겨져있던 나무 문을 찾아냈다.

내 앞에 비밀은 없다는 것이지.

2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이 프로젝트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여왕 폐하가 지시하였지만 왕세자 저하께서 진두지휘하셨다. 여왕은 왕세자가 프로젝트에 끼어드는 것을 반대했다. 여왕은……. 왕세자가 스스로 실험체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어마마마, 허나,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해류가 멈추는 것을 영구히 막지 못한다면, 다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육신을 만들어 세계를 뛰어넘는다. 그들이 하려는 일이었다. 왕세자는 그 첫번째 실험체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지휘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지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왕세자의 아명을 따 프로젝트 명을 “까마귀” 라고 지었다.

젠심 연구소에 가자.

페이의 제안에 세 사람은 각자의 비밀을 안고 연구소로 갔다. 페이 올슨은 프레이야가 어떻게 자신을 억눌렀는지를, 까마귀는 자신이 정말 크로우 박사의 복제인지, 에녹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 몰래 잠입하려고 했지만 연구소는 그들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긴 수염을 기른 연구원이 말했다. 에녹은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연구원은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연구소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알겠나. 그 분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지금 쓰는 이름과 같군.

그럴 수 밖에 없다. 당신의 무의식에 새겨진 것일테니.

……, 크로우 박사도 여기서 일했나? 나는 그 자의 복제일 뿐이고?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원은 구부정한 허리를 더 구부정하게 굽혔다. 꼬마 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네는 마귀 같았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문서가 들려있었다. 까마귀는 그 독을 받아들였다. 구깃구깃한 문서를 펴는 동안 연구원은 걸었고, 느릿느릿한 걸음이었지만 까마귀는 확실히 뒤쳐졌다.

잠시, 멈추는게 어떻겠소.

에녹이 연구원의 어깨를 톡톡 쳤다.

연구가 박차를 가했을 때는 2년 전이다. 페이와 프레이야라는 소녀를 발견한 뒤부터.

다시 한번,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 이번엔 정말로 2년 전의 이야기다.

고아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겠어요.

세상에 찌든 표정이었다. 열 여덟 살 남짓의 소녀가 짓기엔 적합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는 프레이야에요. 제 안의 페이를 없앨 수 있다면, 역시 뭐라도 하겠어요.

프레이야는 협조적인 아이였다. 다만 그의 또 다른 인격인 페이는 비협조적이고, 실험에 부적합했다. 프레이야를 “원본” 으로 임의로 칭하고, 페이를 “복제” 로 칭했다. 일단 페이에게는 “육체” 를 주겠다고 했다. 프레이야를 통해 연구원들은 기억의 억제와 분리 방법에 대해 알아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연구원들을 괴롭히던 육체 부적응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기억의 일부를 억누르면서 자아를 육신에 적응시키는 것이었다. 까마귀의 지휘자인 왕세자는 그 결과를 즉시 적응하고자 했다.

시기상조가 아닐까.

여왕이 형식적으로 반대했다. 그도 이제 이 기괴한 실험에 푹 빠져있었다. 왕세자는 빙긋 웃고만 말았다.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실험체로 보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었다. 왕세자는 자신을 세 개로 나누었다. 왕세자의 “원본”, 통칭 까마귀. 왕세자의 “복제”, 크로우 박사. 그리고 대외용 아바타. 대외용 아바타는 특히 아름답게 만들어져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쓰일 수 있게 해놓았다.

내가 틀렸군.

에녹은 실망했다. 까마귀는 왕세자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됐지?

페이가 버릇없이 물었다. 뺨을 쳐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그런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에녹은 알 수 있었다. 에녹은, 이 멸망의 중심에 서있는 자였다. 연구원이 페이에게 종이 쪽지를 하나 주었다. 페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 쪽지를 받았다.

[페이 올슨 폐기함]

프레이야가 성인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며 페이 올슨을 억제하였다.

기억 나?

프레이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기억에게 물었다.

우리 해군이 되고 싶었잖아.

여자는 해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명예 생도가 되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프레이야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프레이야는 멸망의 주변부에 서있는 자였다.

그 자리에 너는 없다.

연구원이 페이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까마귀가 달려왔다.

다들……. 어디까지 알고 있지?

까마귀는 바닥에 널브러진 연구원을 보고 놀란다. 아닌가? 까마귀는 도착했고, 페이 올슨은 연구원에게 달려든다. 이게 맞다. 연구원의 목뼈가 경쾌하게 부러지고, 까마귀는 눈을 감고, 에녹은 페이 올슨에게 비웃음을 날린다. 경쾌한 비웃음을. 에녹은 그래도 된다. 다들 에녹에게 “너 쓰레기 같아.” 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 내가 쓰레기지?

페이는 마음 속으로만 의문을 던져야한다.

프레이야와 함께 했던 때를 기억 못 하는 이유가 애매해졌군.

에녹이 말했다. 대화의 주도권은 에녹에게 있다. 다들 그것을 알고 에녹의 건방진 말투를 참아냈다.

프레이야 올슨에게 뽑아낸 데이터로 내 기억을 봉쇄했다는 것인데.

첫째, 왜 기억을 억눌렀는가. 둘째, 그럼 에녹이 본 환상은 무엇인가? 까마귀가 에녹의 주도권에 다리를 달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무슨 환상인데?

에녹은 잠시 생각한다. 맞은 뒤통수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나에게 뒤통수를 맞는……. 돌인지 방망이인지로 뒷통수를 가격한 사람이, 나였어.

그러나 이제 물어볼 수 없다. 페이 올슨이 분개해서 연구원을 죽였으니까. 그 환상은 무엇인지, 굳이 넣어야했는지. 까마귀는 머리를 굴려보다 아무 말이나 던졌다.

너는 연구원에게서 받은 것이 없나?

에녹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사람들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길은 언제 끝나지?

무슨 길?

페이가 되물었다.

무슨…….

그러니까, 무슨 길?

까마귀도 되물었다. 무슨 길이었는지 에녹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고보니 젠심 연구소에서 어쩌다 여왕의 알현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기이한 장례행렬을 보고 페이가 말한다.

에녹, 조용히 해봐. 우리 여왕을 직접 찾아가서 묻는거야.

에녹은 할 말을 잃는다. 까마귀의 눈동자가 방황한다. 페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듯한 계획이라고 까마귀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점점 말이 안 되고 있다. 이대로 놔둬서는 안된다! 에녹은 그걸 고칠 능력이 없다. 자신의 환상에 대해 물어야한다. 기괴한 기계들이 즐비한 자신의 방. 동동 떠있던 작은 장난감. 그리고, 종말. 에녹은 그걸 고칠 능력이 없지만,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왜인지 알고 있다.

자. 다시 시작해보자.

까마귀는 젠심연구소를 뒤지고 있다. 페이도 그렇다. 에녹만 전전긍긍하게 서서 연구원이나 경비가 오는 것이 아닌지 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말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까마귀라는데.

무슨 프로젝틉니까?

원본과 복제, 그리고 기억에 대한 프로젝트이고, 목적은 그리하여 다른 세계에서 사용 가능한 육신을 만드는 것이래.

이 세계를 뜬단 말입니까?

에녹이 까마귀를 힐끗 쳐다보았다. 까마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 하고 말했다. 문서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페이 올슨이었다. 페이는 까마귀에게 문서를 건네고 다른 것을 찾아 읽었다. 까마귀는 왕세자였다. 크로우의 복제가 아니었다! 까마귀는 고결한 사람 그대로였다. 까마귀는 거기서 묘한 안도를 느꼈다. 환한 미소를 띄고 까마귀는 고개를 들었다. 페이 올슨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제가 말한 부활 전 환상에 대한 정보는 어디있습니까?

저마다 자신이 “복제” 인지 아닌지에만 집중하던 두 사람이 그제서야 움직인다. 페이가 툭 던진다.

넌 좋겠다, 복제일지 걱정 안 해도 되어서.

약간의 비아냥이 들어가있었다. 에녹이 뒤돌았다. 뭐라고 나무라기 전,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에녹의 눈이 희게 넘어갔다. 그대로 쓰러졌다. 페이가 소리를 지르며 경비의 목을 졸랐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명찰에는 쥴이라고 적혀있었고, 까마귀가 물었다.

……,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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