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class="black_back">

날 기다리지는 마

-사용된 설정, 단체 등은 모두 허구임을 밝혀드립니다.-

터져 조각조각 흩어진 살점 조각들이 꾸물거리며 한 자리로 모인다. 부러져 산산조각 난 뼈는 원래 그 곳에 있었다는 듯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두개골이 서서히 닫히고 뇌수가 황급히 들어온다. 눈알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며 지방과 살갗이 그들을 감싼다. 다 타버려 재가 된 옷이 돌아온다.

- 까마귀의 표정이 역겹게 일그러진다.

마치 무대 준비를 마치고 모든 소품들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알아보는 연출처럼, 에녹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고 뒤틀리고 바들거린다. 아냐 그 곳으로 가면 안돼. 아냐 그 정도 꺾이면 안돼. 몸이 조정을 마쳐간다. 에녹의 눈꺼풀이 잘못 닫힌 문 처럼 쿵, 쿵, 거리며 열렸다 닫힌다. 몸이 진정한다. 눈꺼풀이 서서히 열린다.

- 페이 올슨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녹의 눈이 완전히 열리고 그는 큰 숨을 들이키고 또 끔찍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몸을 미친듯이 더듬으며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처들을 찾아 헤맸다. 까마귀는 그 모습을 보다못해 무엇을 하려는진 몰라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걸 막은 건 페이였다.

에녹을 놔둬.

저렇게 고통스러워 하는데?

우리가 터치해서 저…….

페이는 올바른 말을 골랐다.

“과정” 을 흐트러뜨리면 어떡해?

폭발음이 들린다.

문상객들이 갑자기 재가 되어 사라진다.

페이와 까마귀는 천박하리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이 불 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에녹!

페이와 까마귀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재가 된 육신이 휘날리고 그것들을 감싸던 검은 상복이 바닥에 떨어져 검은 얼룩을 남긴다. 산산조각이 난 에녹만 거기에 있었다. 까마귀는 소리쳤다!

“일어나라, 에녹!” 이라는 말이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 에녹을 일으켜 세운 것인지, 아니면 에녹이 그냥 특별한 사람인건지.

에녹이 진정하고 세 사람은 둘러앉아 부활 사건에 대해 말했다.

뭇 사람이 부활이라니…….

까마귀가 중얼거렸다. 에녹은 계속 입을 열지 않고 페이와 까마귀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목소리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에녹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페이는 에녹이 멍하게 있다 문득 그들을 쳐다보는 짓을 반복하게 두었다.

그렇지. 뭇 사람이 부활이라니, 끔찍하잖아? 부활은 교회의 가르침대로라면,

그만.

나와 프레이야가 원본에 대해 조사한 것을 알고 있지.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얻은 것이 있다면, 에녹이 어쩌면 순수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는 “원본” 이라는 거야.

페이, 너무 단언하는게 아닌가?

우리는 단언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세상이 멸망해가는데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할 시간이 어디있나, 왕세자 씨?

환상을…….

에녹이 입을 열었다.

환상을 본 것 같습니다.

그 환상으로 부터 약 두 시간 전.

페이의 독촉으로 문을 열자, 그 곳에는 수염이 긴 수사가 하나 서있었다. 굽슬굽슬한 수염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만…….

자신을 쥴 수사로 밝힌 이는 구부정하게 서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건을 배달해야하는데, 이 근방의 길을 몰라 한참을 헤메다 기차를 놓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쥴 수사는 염치 불고하고 한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부탁합니다. 물건을 대신 전해주십시오. 고용인을 시키셔도 됩니다. 지도와 받는 사람 이름은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에녹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각은 못 하지만,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불쌍한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그게 불쌍한 수도사라면 더더욱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나 쥴 수사가 전달해야 할 물건을 낡은 가방에서 꺼냈을 때, 에녹은 이 부탁은 절대 지나치면 안된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에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동나무 편지함이었다. 프레이야 올슨과 교류한 것이 담겨있는 편지함.

좋습니다. 얼른 물건을 주시고 기차역으로 가십시오.

에녹은 무례할 정도로 강압적으로 말했다. 쥴 수사는 다행이 예의바른 모습 그대로 물러났다. 고용인이 문을 닫았고, 어쩔거냔 눈빛으로 에녹을 쳐다보았다. 순간 오동나무 편지함 안에 뭐가 있는지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용인을 물리고 페이와 까마귀에게 말했다.

우리가 직접 가져다주도록 하지요.

굳이?

까마귀가 물었다. 에녹은 쥴 수사가 상자 위에 얹어준 쪽지를 읽었다. 주소였다. 에녹은 말했다.

크로우 박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방금까지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요?

에녹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크로우 박사는 써있지도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동나무 편지함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면 안된다는 생각에 지배당해 에녹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은 것 보다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누군가의 집으로 갔다. 주소는 빈민가 초입부분이었다. 골목은 점점 허름해졌다.

이러니까 꼭 “지빠귀가 살린 신사” 괴담 같네.

페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종알거렸다.

기이한 수도사가 신사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해서 흔쾌히 심부름을 하겠노라 했는데, 지빠귀가 어디서 날아와서 쪽지를 떨어뜨린게 아니겠어?

알아. 유명한 괴담이지. 근데 그 쪽지에는 “이것이 마지막 인육” 이런게 적혀있었다지.

까마귀가 페이의 말을 받았다.

근데 에녹, 저명한 정신과 박사의 집이 이런 퀘퀘한 골목에 있다고?

아무튼 주소는 이 쪽입니다.

에녹은 대충 말했다. 그들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허름한 술집과 전당포, 그리고 판잣집들 사이에서 천박한 장식의 저택이 우뚝 서있었다. 갑자기 흰 대리석으로 떡칠을 한 집이 나타났다.

저기인가봅니다. 제가 다녀오죠.

저들을 뒤에 남기고 얼른 편지를 훑어보고, 처분을 하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남겨두고. 이런 기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함을 눈치 챈 까마귀와 페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음울한 목소리로 누군가 선창을 했다. 뒤이어 후창이 들리고 째지는 울음소리가 중간중간 섞였다. 세 사람은 행렬을 쳐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행렬은 무뚝뚝한 표정의 신사들과 비틀거리며 오열하는 여인, 그리고 분위기에 짓눌린 아이들이 섞여있었다. 그들은 에녹과 페이, 까마귀를 갈라놓았다. 휘잇, 삐잇,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렵하게 생긴 새 한 마리가 에녹의 품으로 들이닥쳤다. 지빠귀였다. 에녹은 놀라 편지함을 떨어뜨렸고, 지빠귀는 에녹의 품에서 잠시 파닥이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휙 날아가버렸다. 장례미사곡이 슬프게 울려퍼졌다.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에녹은 그게 왜 편지함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굉음이 들렸다. 까마귀와 페이는 장례 행렬을 뚫고 나가려고 했다.

에녹!

까마귀가 소리질렀다.

봐, 불이 났어!

페이도 덩달아 소리쳤다. 천박하리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다.

젠장, 저기가 크로우네 집일 것 아냐.

까마귀는 침착한 표정으로 불길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봐! 그러나 까마귀는 입을 꾹 다물고 에녹을 찾았다. 저택이 불 때문에인지 폭삭 무너져내렸다. 행렬도 마찬가지였다. 육신은 재가 되고 옷가지는 비가 되었다.

환상을 봤다고?

까마귀가 에녹에게 물었다. 에녹은 지친 목소리로 그렇다고만 했다.

의미가 있는 환상인가?

의미…….

에녹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바스락하는 소리가 났다. 에녹은 무심결에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맞물린 이빨 장식. 쥴 수사가 자신의 안주머니에 손수 넣어준 편지였다. 아니, 그 환상 말고. 그 이전의 것. 에녹은 밝은 햇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낯선 방 안에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보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도 “기계” 일까? 감상에 빠진 것도 잠시 뿐, 에녹은 자신의 손목에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손목은 잘려있었고, 잘린 손목을 지혈할 천이나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이걸, 이걸 어떡하지?

겁에 질렸다. 하늘에서 작은 장난감이 나타났다. 장난감에서 인간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호자! 이럴 시간 없는 거 아시잖아요!

마치 자신의 손목이 잘린 것이 유희나 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에녹은 눈을 끔뻑였다. 쥴 수사가 뒤에서 나왔다. 그러자 배경은 장례행렬이 지나간 빈민굴로 바뀌었다. 행렬은 거의 90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너에게 줘야할 것이 있다.

수사님, 아니 쥴.

에녹이 물었다.

저들이 페이 올슨을 린치한 자들인가? 근데 왜 열 배 가까이 불었지?

육신을 준비중에 있다.

쥴 수사의 낡은 가방에서 오동나무 함이 나왔다. 에녹의 편지함이었다. 에녹은 그 편지함을 탐욕스럽게 열었으나, 재들이 한가득 피어올랐을 뿐이다. 남은 것은 편지 한 장이었다. 쥴 수사는 편지를 들어올려 에녹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재는 항상 돌아온다.

프레이야?

페이가 에녹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 함에 있던건가? 폭탄 말고 다른……. 아니다, 내놔, 에녹!

페이 올슨은 편지를 낚아챈 뒤 소리내어 읽었다.

나와 페이 올슨은 크로우 박사의 실험체가 되었고, 거기서 추출한 이론을 기반으로 크로우는 자신의 육신을 만들려 한다……?

됐어. 가자.

까마귀가 돌아섰다.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긴 했지만 여긴 볼 게 없어, 애초에 저 집은 크로우의 집도 아니었다. 안그런가 에녹?

무게 잡지 마, 개새끼야.

페이 올슨이 이를 으득 갈았다.

젠심 연구소에도 크로우 박사의 이론은 없었어, 너도 알잖아? 깨달은 자라고 너희가 부르는 이들은 사실 크로우의 “원본” 인것을. 근데 왜 그 사람의 논문은 한 권도 연구소에 없는거지?

그 곳에 언제 침입한거지?

그게 중요해? 까마귀, 아니 왕세자 저하……. 우리에게서 뭘 숨기고 있는건지 낱낱이 말씀하시는게 좋을겁니다.

에녹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페이 올슨을 밀치고 까마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페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에녹을 쳐다보았다. 왕자의 실종. 크로우 박사의 사망. 까마귀의 등장. 그리고 육신. 정직한 척 하는 페이 올슨도, 헌신적인 척 하는 까마귀도, 그리고 에녹 자신도 모두 비밀을 손에 쥐고 있다. 그 비밀은 어마어마한 것이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용도로도 쓰일 수 있었다.

까마귀. 페이 올슨처럼 복제품인 것이군요.

끔찍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만에 까마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무엄하다. 나는 고결한 이다. 그럴 리 없어.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