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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사용된 설정, 단체 등은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나는 절박하다.

나는 절박하다. 그래서 이 웃기지도 않는 일에 뛰어들었다.

국가에 대한 충정? 뭇 백성을 위한 책임감? 아니.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청년이 말했다.

나는 그냥 죽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래서 널 찾아왔다.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에녹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왕세자라고 칭하며 “까마귀” 라 불러달라고 말했다. 에녹은 그러나 왕세자 저하의 생김새를 안다. 까마귀와 왕세자 간의 공통점은, 병으로 인해 노란 테가 뜬 눈동자 뿐이었다. 그는 기억했다. 왕세자 저하의 결단력있는 모습과 단호한 손짓을. 그 분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던 그 순간을. 어느 때 보다 가깝게 에녹을 쳐다보던 노란 눈동자……. 그리고 에녹은 까마귀를 다시 보았다.

사기꾼이군.

에녹. 넌 나의 명령을 받지 않았나.

그렇다면 네 본명을 말해보아라.

에녹이 다그쳤다. 까마귀는 눈을 끔벅거리다 곧 폭소를 터뜨렸다.

에녹이여! 왕족은 이름이 없음을 알지 않는가!

이번엔 에녹이 눈을 끔벅였다.

왕족은 자신의 아명만 안다. 그것은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 네가 알 리는 없고, 본명은 기록 상으로만 존재하며, 시호는 죽은 뒤의 일이지. 그건 귀족인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에녹.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기억을 해내지 못했을까.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안했다.

자네는 가끔 이런 엉뚱한 면이 있다니까.

까마귀가 키득거렸다. 에녹은 따라 웃지 않았다. 오히려 무안함 때문에 더 부루퉁해진 얼굴로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왕세자 저하는 에녹이 정신병원에 있는 중 실종되셨다. 까마귀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여왕 폐하의 뜻에 반하는 계획을 펼치려했고, 그래서 스스로 실종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에녹이 왕세자의 충실한 비밀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녹만은 이런 꼴이 된 자신의 편이 될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하죠.

그러지. 바람이 거슬리려던 차였어.

에녹은 까마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뒤돌았다. 갑자기 왼편에서 욕지거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명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죽여! 죽여버려!

한 여자가 빽 소리를 질렀고, 곧 툭탁거리는 둔탁한 발길질 소리가 들렸다. 무시할 수 없었다. 까마귀가 먼저 튀어나간 것도 있지만, 에녹의 성정상 집단 린치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까마귀는 안주머니에서 왕실의 인장을 꺼냈다. 헌병이나 쓸법한 휘황찬란하고 권위적인 인장이었다. 에녹은 순간 까마귀의 “정체” 를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헌병이 쓰는 인장이나 경찰이 쓰는 인장이나 그게 그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그들은 양 옆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는 씨앗처럼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발길질에 회색빛으로 얼룩진 흰 옷…….

페이?

에녹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분명 페이 올슨의 가짜 생도복이었다. 그리고 그 생도복 코트는……. 에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파의 눈길을 바라보았다. 화살처럼 그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썼으며, 한 여인은 머리를 쪽진 채 검은 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에녹이 까마귀의 어깨를 잡아챘다.

저 사람은 나를 탈출시키는데 도움을 준 여자요.

……, 어디서부터?

뭐?

에녹은 왕세자의 요원에서 벗어나 일반인이 되기 위해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왕세자 저하와 논의 후 결정된 사항이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어디에 들어가있는지는 알아야한다. 자신이. 왕세자 저하라. 주장하는. 남자라면. 더더욱.

일단 중요할지도 모르단 뜻이군.

까마귀는 에녹의 생각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곧 문객들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헌병 측에서 쫓던 여자이니, 군과 정부에게 맡겨달라고.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에녹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에서 그려놓는 것 처럼 너무 완벽한 술렁거림이었다. 짜증나는 인물이 둘이나 달라붙었으니 그런 것이겠지. 그리고 그 전엔, 에녹은 괜히 뒷짐을 졌다. 손은 깔끔하게 씻었다. 그러나 저 장례식 문객들이 누구를 추모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커다란 호숫가에 정신요양을 위한 병원이 하나 있네.

왕세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곳에 가서 거짓으로 치료를 받게. 정신병력이 있다면 그대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걸세.

에녹은 왕세자 저하의 앞에서 멋지게 경례를 올렸다. 왕세자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문 밖을 나갔다. 자신은 환청과 환각을 본다고 병원에 이야기를 했다. 치료가 아닌 환자들이 편안할 수 있는 병원, 최신 이론에 근거한 처방, 이런 것을 이야기하며 병원 측은 에녹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사실 필요없는 노력이었다. 에녹은 미친 척 하는 것이니까. 환각과 환청은 다음과 같았다.

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자신이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서, 군사 기밀을 유출한다.

나는 하지 말라고 주먹질을 하거나 총을 쏘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는다.

환각을 사라지게 하려고 저지르는 폭력이 다른 사람을 맞출까 걱정됩니다.

에녹 씨,

크로우 박사가 말했다.

당신의 환각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시겠나요?

키 큰 여자입니다. 저와 키가 비슷하고요, 이목구비, 사지 등은 인간 같지만 푸른 피부에 녹색 머리를 하고 있죠.

외계인이군요! 혹시 소설 즐겨 읽으십니까?

에녹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하하 웃었다. 크로우 박사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에녹 씨, 당신은 미치지 않았고, 환각은 실제 있는 사람이죠.

예?

이런 흐름은 옳지 못하다. 에녹은 자세를 고쳤고 크로우 박사는 그것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사인이라고 착각했다.

당신의 환각은 원본의 복제품일 뿐입니다. 그래요……. 저는 환각의 “원본” 을 찾았습니다. 당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크로우 박사가 환하게 웃으며 간호사에게 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얼마 뒤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에녹은 멍하게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새하얀 생도복을 입은 여자, 페이 올슨.

기쁘지 않습니까? 당신은 미치지 않았-

그래서 왜 제 집인거죠?

에녹이 할 수 있는 불만 표시는 그게 전부였다. 까마귀는 에녹의 집에 페이 올슨을 데려와 상처를 꼼꼼히 치료해주고 있었다. 에녹은 그 주변을 정신사납게 오가고 있었다.

그냥 경찰 측에 넘기면 되는 일입니다.

정말?

까마귀가 에녹을 바로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 그런가, 에녹?

당신. 내가 어디에 들어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네, 코트가 왠지 저 여인이 입고 있는 생도복 같은데.

까마귀는 에녹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에녹은 예의상 한 발 앞으로 끌려주었다. 페이 올슨, 까마귀가 소리내서 읽자 페이가 정중한 인사를 하는 척 해보였다.

자네의 생도복이 아니었군.

아. 그 쪽도 지루한 소리 하는거야? 에녹 양반도 나만 보면 “여자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데!” 하면서 뭐라 했지. 정겹네.

페이 올슨, 나는 이 나라의 왕세자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프레이야 올슨의 살인자들이라 칭해주길 바라?

까마귀는 뭔가 항변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곧 고개를 떨구었다. 해류가 멈추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있었다. 여왕 폐하, 왕세자 저하를 비롯한 각종 “타겟” 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을 죽이면 해류가 조금씩 돌아왔다. 여왕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대책을 찾기까지는 타겟들을 죽이기로. 왕세자는 그 더러운 일을 도맡았다. 그의 비밀 요원들에게 타겟을 뿌리면 요원들은 타겟을 죽였다. 왕세자는 까마귀, 비밀 요원은 에녹, 그리고 프레이야 올슨은 타겟.

페이 올슨, 그러면 넌……. 프레이야의 자매인건가?

에녹이 물었다.

우리에게 복수하려고 나타난 것이고? 하지만 그런거라면 잠시만 마음을 접어다오. 이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뭔 소리야.

페이가 픽 콧웃음을 쳤다.

그딴 새끼 뭐가 예쁘다고 복수를 해?

복수, 가 아니라고?

까마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녹과 마찬가지로 까마귀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페이 올슨은 그게 재미있다는 듯이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프레이야 올슨과 페이 올슨은 한 몸을 나눠쓰는 두 개의 자아야.

이중인격 말인가?

뭐, 크로우 박사는 대충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에녹.

에녹도 치료를 받는 중 얼핏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한 몸에 여러개의 인격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나. 그런데 문제라면, 한 인격을 남기고 나머지 안격들을 죽이는 법은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면 나머지 인격들을 다른 몸에 옮겨태우거나. 에녹의 지적에 페이 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이중인격이란걸 치료하기 위해 크로우 박사의 이론을 공부했어. “원본” 과 “복제” 말이야.

프레이야 올슨과 페이 올슨은 둘 중 누가 원본이고 복제인지 구별해내 원본이 원래 육신을 차지하고, 복제품이 복제된 육신을 차지하기로 했다. 복제된 육신, 그러니까 자아가 없는 고깃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누군가에게 방법을 전해들었다. 그래, 원본과 복제를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크로우 박사를 찾아갔고 -

그 이후로 내 기억은 없어. 그게 벌써 이 년 전 일이야.

그러면 어째서 이 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네가 나올 수 있었던거지?

뭐긴 뭐야, 네가 죽였잖아, 탕탕탕! 꿱!

에녹은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에 대한 끄덕임이었을까? 에녹은 안타깝게도 기억을 잃었다. “올슨” 을 죽인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그것도 뒤죽박죽이었다. 단기기억상실증이라 곧 기억이 돌아올거란 의사의 낙관론에도 “정확히 한 달” 분량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 올슨과 자신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오동나무 편지함에 그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신사 여러분,

페이 올슨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프레이야 올슨이 종말을 눈치채서 죽은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년 동안의 기억이…….

에녹 씨, 프레이야 올슨에게 당신이 보낸 편지가 남아있었죠. 아마 당신에게도 있었을텐데?

까마귀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에녹. 타겟과 교류를 했다고?

왕자 나으리, 에녹을 너무 볶아대진 마시죠. 자, 그래서. 세상이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저는 좀 급하거든요. 아저씨들은 내가 어떻게 생도복을 입고 있는지에나 관심을 쏟으시는데, 여자의 패션 센스에 말을 얹으면 신사답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제안을 하자면…….

페이 올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가능했다. 쾅쾅거리는 다급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고용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페이 올슨은 씩 웃었다.

……, 가서 문을 열어줄까?

세상이 멸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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