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짧은 평화
이미지 출처 : Unsplash
가로등 아래서, 작은 주홍빛이 짧게 깜빡였다.
희끄무레하게 청색을 띠는 불빛이 간헐적으로 껌뻑거렸다. 눈 건강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벗어나는 것이 보통의 반응일 터인데, 그 아래 서 있는 남자는 한 발자국도 뗄 생각이 없었다. 백청색 잔영 사이를 가르며, 한 줄기 연기가 구불거리며 올라간다. 남자가 한 번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불씨가 살아 올랐다가 꺼멓게 죽기를 반복한다.
“하아….”
골목 사이 내깔린 어둠보다 더욱 무거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때늦은 겨울비로 인한 습기가 옷 사이로 스며오는 감각에 몸서리가 절로 쳐진다. 남자의 눈동자가 제 발치를 향한다. 꽤 옅어진 웅덩이엔 꽤 많은 수의 꽁초들이 볼품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남자가 잘 아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러다가 폐가 썩어 들어가겠다며 듣기 싫은 소리를 뱉었을 테다. 그럼 남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습기를 핑계 삼아 폐까지 곰팡이가 필 것 같아 어쩔 수 없다며, 이래서 담배를 못 끊는다는 둥, 헛소리를 뱉었을 테지. 그리고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말이지.
남자는 담배를 잇 사이에 끼운 채 멍하니 물웅덩이를 바라보며 오늘 만날 사람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마치 어느 만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거울로 미래를 엿보는 행위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끝나기 무섭게 펼쳐질 일이었으니.
또 다른 꽁초가 다이빙을 했다. 그리고 남자의 손은 정해진 행위라는 듯 부드럽게 움직여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었다. 새 담배 한 개비를 끄집어내 입에 물고, 투박한 손으로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한 번 빨아들인 공기는 이내 매캐함이라는 회백색 옷을 자랑하며 허공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아루프는 오늘도 열심이구나?”
꿉꿉한 날씨와는 전혀 상반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로등 아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그가 뱉은 연기가 그것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덮어주기라도 한 것 같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뭐가.”
맑게 반짝이는 밤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루프라 불린 남자가 반문했다. 그러자 새로 등장한 남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약하게 곱실거리는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대답했다.
“폐 염색 말이야. 어제보다 훨씬 까매졌겠네. 다섯.. 아니 여섯 개비 째네? 나중에 염색 얼마나 잘 됐는지 꼭 보여줘야 돼.”
“보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까 볼 수 있는 놈한테 내가 굳이 왜.”
“친구 장기 구경 편하게 하려고 의사 면허 딴 건 아니라서.”
섬뜩한 대화가 이어짐에도 남자와 아루프의 얼굴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을 먼저 깨부순 것은 아루프의 헛웃음이었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자 금세 까맣게 타들어가는 담배의 하얀 몸통. 너무나 빠른 노년을 맞이해 버린 불쌍한 꽁초를 무신경하게 내버린 아루프는 칙칙한 돌벽에서 드디어 몸을 떼어냈다.
“뭐 하다가 늦었냐. 이번 거 다 태울 때까지 안 나타나면 그냥 갈 참이었다.”
“나 필요하다고 정신없이 다들 붙잡아대는데 매정하게 빠져나올 순 없잖아. 난 너랑 달리 열심히 살아가는 사회인이고 내로라하는 인재라고.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다?”
“내 알 바냐. 네 말대로 난 너랑 달라서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쓴다.”
“그래서 맨날 네가 할 일 없이 이런 데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있는 거야. 멀리서는 담뱃불 빼곤 제대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더라. 어떻게 찾아도 이런 데를 찾아서 기다려? 조만간 영화라도 찍게?”
아루프는 헛웃음을 내뱉고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박고는 느릿하고 불량한 움직임으로 몸을 돌려 제 앞의 남자를 마주보았다.
“너였다면 캐스팅 정도는 받아볼 수 있었겠지, 성하진.”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성하진이라 불린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머리가 조금만 안 좋았더라도 배우 한 번 도전해 보는 건데. 이 얼굴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하는 건 세상에게 있어서 꽤나 큰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오늘 환자 약 네가 대신 타다 먹었냐?”
“설마. 유능한 의사인 내가 그런 짓을 할까. 날 너무 못 믿네.”
“내가 볼 땐 유능한 척하는 돌팔이 의사로밖에는 안 보여서.”
짓궂은 농담에 하진이 팔꿈치로 팔뚝을 퍽 치니 아루프가 옆으로 넘어가는 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으슥한 뒷골목엔 두 친구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빗방울처럼 톡톡 떨어졌다.
“오늘은 네가 사는 거다. 나 두 시간은 족히 기다렸으니까 맛있는 걸로 대접해야 할 거야.”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귀한 분을 제가 어찌 함부로 대할까요.”
“잘 알면 되었다.”
굽신거리는 시늉을 하며 맞춰주는 하진 덕에 오늘도 앞머리로 드리워진 짙은 그늘은 아루프의 미소를 숨기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북적거리는 먹자골목을 헤치고 단골 호프집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좁고 테이블도 적은 데다 방이 따로 나뉘어 있지도 않은 초라한 가게였지만 음식 솜씨 하나는 입맛 까다로운 사람을 데려와도 인정할 만큼 좋은 집이었다. 하진의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이들은 어김없이 이 가게를 찾아 한동안 노닥거리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로 얼굴 튼 지 오래된 사이다 보니 가게 사장은 주문을 받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그들 앞에 시원하게 식힌 맥주 500cc 두 잔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안주들을 대령했다. 아루프는 눈짓으로, 하진은 정겨운 태도로 인사를 건네었고 사장 역시 맛있게 먹고 가라며 인사를 받은 다음 자리를 떴다.
“히야, 드디어 한숨 돌리겠네.”
외투를 대충 접어 안쪽 자리에 구겨놓은 하진이 젓가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루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외투를 벗어버리고는 맥주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직행했다.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은 빠르게 비워졌고, 경쾌한 날숨과 함께 ‘탕!’ 하고 유리잔이 테이블에 내리 꽂히자 잔에 남아있던 황금색 액체가 방울져 튀었다.
“잔 깨진다. 살살 해라.”
“깨지든 말든. 어차피 깨지면 물어주는 것도 네 돈이잖아. 네가 사는 거니까.”
“우와, 너무하네. 어디까지 뜯어먹으시려고?”
“돈 잘 버는 의사 친구가 이 정도도 안 내주면 그건 좀생이야, 좀생이.”
“어이가 없어서.”
하진이 볼멘소리를 뱉었음에도 아루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치킨 한 점을 물어뜯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튀김옷과 속살이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걸 보고 질린다는 표정을 짓던 하진은 문득 눈을 깜빡이더니 제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모자 안 벗어?”
“으어?”
불명확한 소리와 함께 아루프의 쭉 찢어진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닭 뼈를 문 채 비어 있던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더듬더니 아직까지 그 머리 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낡은 비니모자를 쭈욱 잡아당겼다. 하진보다 조금 더 칙칙하고 정돈된 머리카락과 함께, 기다랗고 뾰족한 귀가 오래 짓눌려있었던 몸을 쫑긋 세웠다.
이들이 이 초라한 가게를 단골로 삼은 것은 사장의 입이 무겁고 음식이 맛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게의 구조가 ‘ㄱ’ 자로 꺾여 있어서 가장 구석으로 들어가면 바깥과 카운터에서도 자리가 보이지 않았고 칸막이 대신 쳐 둔 기다란 커튼 덕분에 더더욱 닫힌 장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드러내기 힘든 신체구조를 가진 아루프에게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가게는 없었다.
“어쩐지 귀가 아프다 했다.”
손으로 앞머리를 정리하며 아루프가 툴툴댔다. 그때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하진이 아직 하얀 거품이 톡톡 튀는 맥주를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웬일로 싫은 소리를 안 하길래 드디어 적응됐나 싶었는데 그냥 잊어버린 거였어?”
“배고픈 상황에서 맞닥뜨린 고기 앞에서는 장사 없어.”
“늑대가 하는 말이라서 더 와닿는 것 같네.”
“좀 더 실감 나게 해 줄까?”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켠 하진이 작게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뱉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사양할게. 난 아픈 것도 싫고 빨리 죽고 싶지도 않거든.”
그 말에 짧게 웃어준 아루프가 남은 닭다리 하나를 집어 우악스럽게 물어뜯었다.
“식사 예절 좀 지켜라. 아무리 친구 앞이라지만 다 튀기고 먹는 건 너무하지 않아?”
“반은 짐승인 놈한테 그런 걸 바라다니. 그 머리도 슬슬 갈 때가 됐나 보다?”
들은 체도 않고 뼈에 남아있는 살점을 뜯어내는 모습을 보며 하진은 이마를 짚었다.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질렸다는 투로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아루프는 입에 고기를 문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 번 비틀린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하~ 잘 먹었다. 이 가게 요리 실력은 여전하네.”
이쑤시개로 잇사이를 쑤시며 아루프가 만족스러운 탄성을 지르자 하진이 눈을 흘기더니 혀를 차며 나무랐다.
“누가 보면 나이 지긋한 아저씨인 줄 알겠네. 말투며, 행동이며…. 너 진짜 예의범절 좀 다시 배워야겠다.”
“됐거든. 그딴 걸 왜 배워? 쓸 데도 없는데.”
“쓸 데가 왜 없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 네가 아직 힘이 쌩쌩해서 그러는데 앞으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힘보다는 고운 말이 더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 후회하기 전에 내 말 들어두지 그래?”
“그럴 일 추호도 없을 테니 잡담은 그 쯤 해 두시고.”
새로 채워진 맥주잔을 제 앞으로 끌어오며 아루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내리 감겼다 뜨여진 적안은 아까와는 영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 놈들은 뭐라고 안 하든? 나랑 너랑 여전히 상종하는 거.”
그 말에 하진 역시 낯을 바꾸었다. 사뭇 진지하고 동시에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는 테이블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려놓고는 아루프의 질문에 대답했다.
“달가워하지는 않지. 다들 말은 안 해도 레지스탕스 내에서 너에 대한 평이 좋지는 않으니까.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프린스 때문이겠지만.”
“괜히 포장하려고 안 해도 된다. 전혀 신경 안 쓰니까. 내가 아니꼬운 거겠지.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리더한테 길바닥에서 굴러먹고 다니는 개새끼 한 마리가 계속 얼쩡거리니까. 아니면 질투하나?”
하진은 아루프의 정정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 귀에 거슬리는 말을 그냥 넘어갈 위인도 되지 못하였다. 고운 눈가를 구긴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든, 진담이든 너 스스로한테 그런 말 쓰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야, 아루프. 난 내가 아끼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싫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도 싫어. 불쾌해.”
“내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것 마냥 추켜 세워주시네. 천하의 성하진 대장님께서 말이야. 이야,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아루프.”
나긋한 미성이 이 정도로 얼어붙을 수 있음에 놀란 것은 아니다. 아루프는 제 친구가 화 낼 줄 모르고 마냥 착하기만 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반대였지. 그 사실을 알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손해인 지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때문에 그는 나불대던 입을 다물고 맥주를 홀짝이는 걸 선택했다. 그게 항복 사인과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그쪽 상황은 어때?”
“별 다를 건 없지.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개판이고, 이쪽은 이쪽대로 난리야. 통제 불능이라니까. 이번에 입수한 폐기물 꼬라지를 봤을 때, 그 미친놈들은 이젠 실험체의 생존 가능성이고 뭐고 신경 안 쓰고 되는대로 가기로 노선을 변경한 모양이더라. 얼마나 약물을 때려 박는지 사지가 다 녹아내려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돼. 말 그래도 속이 뒤집어지는 지경이야.
마피아 쪽은…, 그걸 잠자코 보기만 해야 하는 게 부아가 치미시는지 몇몇 놈들이 프린스를 재촉해서 당장 뒤집어엎어버리자고 난리야. 참을성도 생각도 없는 놈들. 뒤처리나 주변에 미칠 영향은 전혀 고려 안 하지. 하긴, 나나 그놈들이나 짐승이 대가리 굴리는 게 거기서 거기지.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어서 별로 놀랄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래도 프린스가 목줄 잘 잡고 갈 줄 알았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나 봐. 조만간 일 하나 크게 터질 거야.”
“일이라 함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짓누르며 한숨을 뱉듯 하진이 물었다.
“알아 들었잖아. 테러지, 뭐겠어.”
“하아….”
다시 뱉은 한숨은 땅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수인 해방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음에도 되도록 평화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레지스탕스와는 달리 마피아는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수단만을 사용했다. 언제나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되돌릴 수 없는 살육의 흔적이 짙게 남았다. 무고한 자가 관련되어 있어도 무지 역시 죄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보이는 족족 죽이고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에만 급급한 그들의 방식을 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용납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효율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매번 골치 아프게.’
이럴수록 연구소의 방비는 단단해지고 수인들을 해방시키려는 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여론은 나빠지기만 한다. 마피아가 그들의 행실로 인해서 욕을 먹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일로 항상 레지스탕스까지 묶여서 피해를 보는 건 하진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대로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발이 묶인 채 레지스탕스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어떻게? 안 그래도 적은 자원을 이 이상 나누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할까?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와중, ‘딱딱.’ 하는 소리가 들려 하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언제나처럼 시큰둥한 낯을 한 아루프가 팔을 뻗어 하진 앞의 테이블을 두드린 것이다. 하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또 한참 있었나 보네.”
“아니, 그건 아닌데. 슬슬 그럴 것 같아서 미리 노크 좀 했다.”
“그래, 고맙다.”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루프가 다시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마시는 것을 잊어 방치된 맥주는 김이 다 빠진 데다 유리잔 표면에서 흘러내린 물로 테이블에 흥건한 웅덩이가 생겼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프는 잔 손잡이 윗부분을 엄지로 문지르더니 무성의하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선빵은 언제 칠래?”
“뭐?”
아루프가 잔을 입에 대기 전에 혼잣말처럼 흘린 말은 하진에게 뒤통수를 후려친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정작 말을 꺼낸 본인은 태연하게 몇 잔 째 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기 바빴다. 시원하게 탄성을 내지르며 잔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은 아루프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프린스한테 선수 뺏기기만 하는 건 영 꼽잖아, 안 그래? 이참에 우리가 선빵 쳐서 그 콧대 좀 눌러놓자고. 그럼 당분간은 사리겠지. 그 자식이 아무리 속 시커먼 뱀대가리 요물이어도 간은 작아서 지 목덜미를 늑대가 물고 있는 게 버젓이 보이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아.”
“그게 무슨…, 너 프린스한테 우리 쪽에도 붙어있는 거 말했어?”
반사적으로 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예 양손으로 테이블을 때리듯 짚고 일어나 경악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친구를 아루프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애초부터 난 네 밑 아니면 아무 데도 갈 생각 없었어. 마피아에 들어갈 때도 난 프린스 따까리가 아니라 엄연히 프리랜서로 들어온 거라고 못 박았었고. 그러니까 마피아 내에서의 내 처지가 걱정돼서 안된다느니 하는 김 빠지는 소리는 일찌감치 치워라.”
“너, 정말…. ...아니, 됐다.”
풀썩, 하진의 몸이 떨어지자 낡은 가죽이 밭은 숨을 뱉었다. 제 몸을 소파에 더욱 깊게 욱여넣은 채로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하진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지만 행선지는 알 수 없었다.
“선빵이라…, 이래서야 마피아랑 레지스탕스가 경쟁하는 사이라도 된 것 같네.”
“똑같은 목표를 두고 각자의 뜻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면 결국 경쟁할 수밖에 없어. 잘 아는 놈이 왜 갑자기 순진한 척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아루프는 비어버린 잔을 높게 치켜들어 입을 벌렸다. 바닥에 몇 방울 고여있던 것까지 다 털어 마시고서도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신 그는 잔을 내려놓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누구는 죽일 줄 몰라서 안 죽여? 부술 줄 몰라서 안 부수냐고. 왜 우리가 앞뒤 사정 머리 빠져라 고민해 가면서 골치 아프게 느릿느릿 움직이느라 속 터지고 있는데. 근데 말이다? 바깥놈들은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안 써. 좆도 관심 없다고. 이래도 저래도 욕먹을 거라면 최소한 억울하지나 말자고. 애초에 우리가 그런 소리 들을 일을 줄여버리던가, 아니면 거기 가서 이득을 취하던가. 그럼 되잖아. 그게 맞지 않아? 안 그래?”
“가끔은 네 대책 없는 단순무식함이 부럽다.”
“부러우면 머리통 까고 뇌 바꿔 끼우시던가.”
“그건 싫어.”
싱거운 자식. 쳇, 하고 혀를 차며 볼멘소리를 내는 아루프였다. 그 목소리에 하진은 방금 전까지 머리를 아프게 하던 잡념들이 싹 날아가는 것 같은 개운함을 느꼈다. 핏, 하고 얕은 웃음을 흘린 그는 소파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다시 총기가 가득해진 밤색 눈동자로 제 친구의 흐리멍덩한 붉은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래, 좋아. 네 의견 수용할게. 대신 이번엔 나도 같이 간다.”
이번엔 아루프가 놀랄 차례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급히 몸을 일으켜 한 팔을 책상에 걸친 그의 몸이 하진 쪽으로 기울었다.
“미쳤냐? 힘쓰는 일이랑은 상종 한 번 안 했던 샌님 주제에 가긴 어딜 가?”
“왜? 나도 네 막무가내 들어줬잖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이게 바로 상도덕 아니겠어?”
“상도덕은, 우라질….”
오만상을 찡그리고 꿍얼거리면서도 반박은 하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에 하진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만끽했다. 참 소중한 친구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구석에 박아뒀던 외투를 집어 일어났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갈 거야. 그렇게 알아.”
싱글싱글 미소를 띤 채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하진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아루프도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모자를 꼼꼼히 눌러쓴 뒤 커튼을 걷고 나가려다 말고 그는 다시 하진을 돌아보고 경고하듯 말을 붙였다.
“나중에 가서 잘못돼도 난 책임 안 져.”
그러나 하진은 겁을 먹기는커녕 코웃음을 치며 아루프를 지나가며 대꾸했다.
“언제는 그 말 안 했어? 더 이상 말하면 입만 아파. 빨리 나오기나 해.”
이젠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루프 역시 하진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차갑고 가벼운 공기가 두 남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하진이 양팔을 잡고 부르르 몸을 떨자 그걸 보고서 킥, 하고 짧게 비웃은 아루프가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 치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가자. 데려다줄 테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골목 밖으로 걸음을 떼는 칙칙한 사내를 회색 머리의 사내가 바쁘게 뒤쫓았다.
“기왕이니까 옷도 좀 벗어 줘. 얼어 죽겠어.”
“바라는 것도 많다. 그냥 걸어. 안 죽으니까.”
“너무하네, 정말~”
장난기가 가득한 두 목소리가 옥신각신 오가는 골목은, 앞으로 다가올 일은 꿈에도 모른 채 불빛과 온기로 물들어 기분 좋게 북적이기 바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