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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도 다 뜨지 못한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는 옆자리에 잠든 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풀어진 잿빛 머리카락과 왼쪽 뺨을 가르고 지나가는 흉터, 곤히 잠들어 얌전히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 따위를 손끝으로 차례차례 훑어보고 싶은 욕망을 조금 눌러놓고서, 왜 너희는 이다지 이유 없이 사랑스러운지에 대하여.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여태까지 수백 명은 더 만났다. 널려있지는 않으나 찾기 어려운 조건도 아닐뿐더러, 성격을 덧붙여 따지자면 <—>나 【—】, 〔—〕 그 누구와도 특별히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는 예로부터 남에게서 섬겨지는 것을 즐겼으며 셋 중 누구도 그러한 행위와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기 좋은 두 가지 이유는 순식간에 후보에서 박탈되고 말았다. 얼굴도 성격도 아니라면 속궁합, 그게 아니라면 그럴만한 상황의 구축? 이것저것 근거로 삼을만한 것들을 아무리 떠올려도 ‘이거다’하고 결정 내릴만한 것이 도출되지 않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가 미미하게 흔들린 속눈썹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손을 올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넘겨주었다.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세 사람을 구분할 방법의 가짓수가 늘어난 덕에 굳이 누구냐 물어볼 필요가 없어 잠시 기다려본다. 눈 뜨자마자 말갛게 웃는 것은 <—>, 입부터 열어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이 【—】, 마지막으로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맞춰오는 것은 〔—〕였다. 미소도 인사도 들려오지 않았으니 이번에 마주한 이가 〔—〕임을 알아챈 [—]는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 커피 마실 거니. ”

건조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화창한 햇빛이 창가로부터 차차 들이치고 있었다.

***

<—>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중에도 부산스레 굴 테고 【—】라면 잔잔한 대화를 이어나갈 텐데, 가장 접점이 적은 〔—〕는 이렇다 할 것도 없이 은은하게 미소나 짓다 말고 [—]의 노골적인 시선에 커피잔을 비우며 금방 불러주겠노라는 한마디만 남긴 뒤 돌아갔다. 언제 봐도 좀처럼 알 수가 없는 놈이라며 공상에 잠길 틈도 없이 커피잔을 내려다보는 [—]의 허리에 팔이 감긴다. 익숙한 그 손길에 [—]는 고개나 시선을 위로 돌리지 않고도 나타난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

“ [—],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십니까. ”
“ ...별거 안 했어. 오늘 바쁘냐. ”
“ 별로 바쁘지 않습니다. ”

돌아온 즉답에 [—]의 입꼬리 한쪽이 비죽 올라갔다. 【—】나 [—]나 누가 더라고 할 것 없이 막중한 자리에 앉은 사람인데 특별히 바쁘고 바쁘지 않은 날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 알고도 물었으나 듣기 좋은 답변이 들려오자 그 안에 섞인 욕망인지 애정인지가 기꺼워 웃은 것이다.

“ 그럼 대충 배만 채우고 옆에 있던가. 프로젝트 도중이라 회의에 들어가야 돼. ”
“ 그러겠습니다. 오늘도 거실에서 하실 건지. ”
“ 어. 거기 소파가 제일 편하니까.... ”

이어지려던 문장이 자르듯 뚝 끊어진다.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숨결마저 느껴지자 잠시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하던 [—]가 그대로 입술을 벌리며 얇은 속눈썹이 내려가도록 눈을 감았다. 상대적으로 얇은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더니 금방 몸이 딱 맞붙은 온기와 말캉하고 뜨뜻한 감촉이 커피 향과 함께 전해져왔다. 쌉싸름한 맛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혀를 기꺼이 맞이해준 [—]의 양팔이 올라가 【—】의 목 위로 교차해 걸렸다. 밀리는 힘을 거절하지 않고 조금씩 뒷걸음질치던 몸이 식탁에 부딪치며 멈췄다. 금방 달아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작게 소곤거리듯 건네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다.

“ ...회의까지 1시간도 안 남았는데. ”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검은 눈동자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상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꼭 전날을 회상시키듯한 눈빛에 【—】의 눈가가 한층 짙어진다. 잠들기 직전까지 정을 나누던 때 보내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눈길을 그냥 넘어가기엔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

평소대로의 차림 대신 중국 전통 의상을 생활복으로 껴입은 [—]가 노트북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순간 커다란 회의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사무적인 인사와 보고가 이어지는 것은 언뜻 보고 듣기만 해도 대기업의 기밀에 연류된 내용들이었는데, 정작 [—]는 바로 옆에 기대앉은 【—】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 비밀스러운 회의를 이어갔다. 틈이 나면 옆으로 떨어진 잿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잡아보거나 남의 허벅지 위로 팔을 대충 얹어놓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노트북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지대에서 일어난 행위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 방도는 없었다.

“ 그럼 그렇게 진행하고, 문제 생긴 거 아니면 오늘은 더 연락하지 마.... ”

연인을 대할 때와 달리 싸늘한 어조로 일갈하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이 꺼진다. 쓰잘데없는 의견은 없었다지만 그 회의로 2시간가량을 날려 먹어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솔직한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물론 【—】도 옆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는 듯 분주했으나 이는 그것과 궤를 달리했다. 서로를 옆에 두고서도 일하는 게 일상이라지마는 오늘따라 영 거슬리는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라 생각한 [—]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 끝나셨습니까. ”
“ 일단은. ”

기다렸다는 듯 물어오는 목소리엔 또 그 주름이 펴지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는 게 우스운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노트북을 닫아 탁자에 올려버린 [—]가 【—】의 어깨에 머릴 툭 기댔다.

“ 그러는 너는 안 끝나셨고. ”
“ 다 끝나갑니다. ”
“ 하고 시간 남으면 잠깐 걸을까.... 점심은 제대로 챙기고 싶은데. ”
“ 그럼 저번에 함께 갔던 식당으로 갈까요? ”
“ 좋지. ”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취향 맞춘 선택지를 꺼내 든 【—】를 가만 바라보던 [—]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둘의 시선이 다시 허공을 가르고 맞닥뜨렸다. 아직 노트북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이 멈춘 사이에 열어둔 창문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들어온다.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검지와 중지 사이로 옮겨가더니 이내 빈 입술이 【—】의 눈가에 쪽 소리나게 닿았다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키스한 뒤엔 상대가 무슨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배를 다시 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걸로도 모자라 머리 위에 손을 턱 얹더니 가볍게 한 번 쓸어준다. 기분 좋지 않은 날이라 생각한 게 언젠데 기꺼움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 다 끝내고 나와. 차 불러놓을 테니까. ”

말한 게 무색하게 곧바로 손목이 붙잡히자 [—]의 낯에 얕은 미소가 걸렸다. 어울리지도 않게 장난기 섞여든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위로 겹쳐진 것은 【—】의 뒷모습이었다.

***

알람 없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해가 다 뜬 아침이었다. 원래라면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았던 [—]는 검은 낙서들 사이로 낙인처럼 찍힌 울긋불긋한 흔적을 손끝으로 훑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뜨길 몇 번 반복했다. 아직 전날의 피로가 다 가시지 않았는지 작게 하품까지 나왔다. 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시선을 돌리니 닫힌 욕실 문틈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빈 옆자리가 미지근하게 식어있는 걸 보면 누군지는 몰라도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은 것 같길래 더 미적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한 [—]가 발소리 없이 커피머신이 놓인 자리로 향했다. 늦은 밤에 함께 샤워했으니 【—】는 아니려나, 정도의 생각은 짧게 지나쳐 보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높은 확률로 <—>가 아닐까, 그런 의문 따위에 잠긴 채로 검게 물든 손가락이 컵을 아래에 가져다 댄 후 작동 버튼을 누른다. 지이잉, 하는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원두 향이 진하게 퍼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깨어나는지 [—]가 고개를 옆으로 가볍게 꺾고 돌려가며 몸을 풀었다. 제대로 걸친 것 없는 검은 브리프 한 장 차림으로는 아침 기온이 쌀쌀해 쯧 혀를 차는데, 타이밍 좋게 [—]의 뒤로 다가온 인기척이 습기 머금은 온기를 담고 훅 끼쳐왔다.

“ [—], 일어났어? ”
“ 보면 모르니.... 그래, 일어났다. ”

불퉁한 대꾸와 달리 뒤에서 몸을 끌어안은 <—>를 향해 고갤 젖힌 [—]가 머릴 기대며 눈을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떨어지는 물을 맞고 와서인지 하얀 피부는 투명해 보이고 눈동자는 반짝거린다. 막 깨어난 아침이라는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외모에 잠시 말을 잃었던 [—]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 ......가서 머리 말리고 와. 커피 내려둘 테니까. ”

설탕도 프림도 우유도 뭐 하나 들어가지 않아 시커멓기만 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 두 개가 탁자 위로 올라갔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당장 입 댈 필요는 없겠다며 문제없는 잔을 방치해둔 [—]가 기다란 머릴 말리고 있는 <—>의 옆으로 다가섰다. 물에 젖어 더 어두운색으로 보이는 잿빛이 새삼스레 눈에 걸린다는 핑계와 함께 올라간 손은 아직 물방울이 남은 머리끝을 슬쩍 붙잡았다.

“ 말릴 때마다 안 귀찮냐 이거.... ”
“ 응? 조오금~? 그래도 이제 익숙해. ”
“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
“ 나 머리 잘랐으면 좋겠어? ”
“ 아니. ”

애초에 그런 생각 따윈 이만치도 없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서 이어가는 주제였다. <—>는 [—]가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쥐거나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것을 좋아한단 걸 알고 있었고,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도 알았다. 그러니 이건 그냥 괜히 대화 한마디 더 나누겠다고 실속이라곤 조금도 없는 아무 말을 지껄여 주고받는 것에 가까웠다. [—]의 애정은 이토록이나 어설픈 것이라 몇 년이 지나도 이런 식의 방법에 머물러 있을 게 뻔했다. 물론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덧붙이는 말도 행동도 조금씩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바뀌어 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씻고 나온 직후여서인지 시가 향도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는 몸을 끌어안는 대신 검게 죽은 손끝을 붙든 [—]가 그대로 손목을 끌어당겼다. 딱 알맞게 식은 따뜻한 커피잔을 다른 손으로 직접 쥐여주고는 자신도 머그잔을 잡아 들었다. <—>, 【—】 두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 가장 달라진 부분 중 하나는 유명한 찻잎이 들어간 차 대신 블랙커피를 더 자주 찾게 된 것이었다. 차와 닮은 듯 달라 쌉싸름하게 넘어가는 끝 맛이 향기로와 나쁘지 않다며 최근에는 혼자 있을 때도 블랙커피를 찾곤 하던 [—]가 느긋한 시선을 <—>에게 얹어 놓는다. 같은 장소, 같은 컵, 같은 커피를 마시는 게 뭐 대수도 아닐진대 새삼스레 아득할 정도로 평온함을 갖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 [—],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
“ ....... 글쎄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 오늘 출근해야 해? ”
“ 아니. 집에서 일할 거야. 너도 굳이 나가야 하는 거 아니면 집에서 해. 전주엔 바쁘다고 별 지랄을 다 해서 매번 나갔잖아. ”
“ 지랄이라니, 안사람한테 말 좀 예쁘게 해달라니까는! ”
“ 매번 싸돌아다니느라 바빴을 텐데 집에 좀 처있으시라고요. ”

같잖은 말투였으나 어쨌든 존대는 존대라 만족한 것인지 <—>가 먼저 장난스레 웃자 [—]도 그를 따라 미미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한 때는 별 뭣 같은 취향이 다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고작 그거 원하는 걸 못 들어줄까 싶었기에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던 [—]는 발을 뒤로 한 번 빼는 법을 학습하고 반복했다. 그 수는 갈수록 늘어나 이제는 굳이 헤아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옷만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려 잔을 대충 내려놓는데 따라 그 옆에 잔 내려두는 소리가 탁, 짧게 울렸다. 손으로 고정하지 않고 입술부터 들이댄 탓에 자리가 조금 어긋나 입술이 애매하게 겹쳐졌다가 떨어져 [—]의 입에서 헛웃음이 짧게 터졌다.

“ 하여튼 씨팔, 이리 와. ”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렇게 덧붙인 소리와 함께 [—]의 턱이 더 올라가고 <—>의 턱선이 비스듬해진다. 이번엔 제대로 맞물린 입술 사이로 선홍빛 혓바닥이 드러나는 듯하더니 묶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이 앞으로 떨어지며 커튼처럼 그 모습을 가렸다. 분명 전날과 같은 키스인데 맛도 향도 그 모양마저도 전부 달라 [—]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움찔 떨렸다. 굳이 비교하자면 조금 더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는 혀끝이 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몸을 넘어트려 아침부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제한이 걸린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낸 [—]가 짜증 섞인 숨으로 키스를 마무리했다.

“ 아침부터 꼴리게 하지 마. 일 있어. ”
“ ...그거 급해? ”
“ ...씹, 조금. 저녁에 마저 해. ”

서로의 일에 대해 터치하지 않기를 굳이 입 밖으로 낸 적 없지만 [—]와 <—>, 【—】 사이에서는 그게 암묵적인 룰로 통했다. 각자 입지라 부를만한 것이 보통 큰 것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일지도 몰랐으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지켜지고 있는 덕에 셋은 아직까지 사소한 말싸움도 한 적이 없었다. 이번도 같은 경우에 속하니 여느 때와 같이 아쉬움 남은 듯한 낯으로 어쩔 수 없다며 끌어안은 <—>의 품 안에서 [—]는 처음으로 일의 불필요함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할 거라지만 지금은 한순간뿐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쪼개 보내야 하나. 그러한 공상에 잠겨 말이 없는 동안 뺨을 <—>의 어깨에 붙였다. 언제부터인가 알 틈도 없게 <—>와 【—】는 여명이라는 이름보다 그 몸집을 불린 모양이었다. 그걸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날, 한 순간에 깨닫게 될지는 몰랐는데. 심지어는 그것이 불쾌하거나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라는 게 [—]를 더 경탄하게 하였다. 문득 전날에 품었던 의문이 다시 떠오르자 [—]의 손이 붙어있던 <—>의 가슴팍을 길게 밀어낸다. 의문스러운 낯을 갸웃이며 바라봐오는 인공적인 눈동자는 어느 순간부터 더는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리도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가 말없이 시선만 보내오자 의도를 알아채기 어려운 <—>만 곤란한 상황이 됐다.

“ [—], 왜? 나 뭐 묻었어? ”
“ 조용히 해봐.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 ”

어리둥절한 얼굴이 만족스럽다. 그래, 이건 만족감이었다. 똑같은 얼굴이 무표정을 짓고 다른 사람처럼 군다고 해도 만족감이 떨어질 것 같진 않다는 확신이 들자 [—]는 드디어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건 아름다운 놈을 몇이나 한 번에 소유해서 드는 만족감이 아녔다. 그보다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놈을 몇 명이나 더 데리고 오더라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그를 사랑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리 여겼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생 최대의 사건이니 여러 일들이니 굳이 거창한 일을 들먹이지 않아도 시간만 있었더라면 분명 언제건 같은 감상을 느꼈을 것이라고 [—]는 생각했다. 제 인생 그 자체인 여명보다도 커진 존재를 눈앞에 두고서.

“ ...넌 진짜 바람이라도 났다간 내 손에 뒤지는 거야. ”
“ 어엉?! 갑자기!? ”
“ 도망이라도 치면 그날로 너랑 나랑 같이 뒈지는 거고, 알겠니. ”
“ 아니, 아니 아니! 갑자기 무슨 맥락이야?! ”
“ 대답이나 해. ”
“ 내가 설마 바람을 피우겠어 [—]한테서 도망을 가겠어?! 아니 근데- ”
“ 그럼 됐어. ”

제 마음대로 문장을 뚝 잘라내 버린 [—]가 흔치 않게 양팔을 벌려 먼저 <—>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마주 안아주는 일도 별로 없는 놈이 냅다 의미 모를 소리나 뱉어내다가 먼저 끌어안아오니 혼란스러운 <—>만 잠깐 허둥댔다. 같은 바디워시와 샴푸 향이 묻어나는 목덜미에 입술 붙이는 것마저도 평소에는 꿈도 못 꿀만큼 직접적인 태도였다.

“ 아 씨팔 진짜... 출근하기 싫어지는 건 또 처음이네.... ”

그 상태로 중얼거리는 혼잣말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로맨틱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르나 어디까지고 발화자는 [—]였다. 고작 그 한문장에서 이 상황을 읽어낸 <—>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꾸 없이 [—]를 마주 안으며 하아, 한숨을 뱉어낸다. 놀랐지 않았느냐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자 [—]는 허릴 끌어안은 팔에 힘만 더 더했다. 저 멀리서 울리는 알람음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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