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Convallaria

골짜기 백합

주인 없는 꽃다발을 샀다. 가끔 그런 날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요근래 종종.

두려움 위로 덮힌 외로움의 살갗을 꽃으로 덮는 일이 종종 생겼다. 상처가 난 곳을 새살이 덮으며 올라오는 것으로는 차마 세상의 따가운 것들을 전부 막아낼수는 없으니. 꽃들을 집에 잠시 손님으로 들였다가, 다시 땅에 심을 수 있으면 라벤더 안식처의 작은 텃밭에 심거나, 그대로 시들어도 땅에 조심스레 묻는 행위를 반복한지 한 달 즈음 됐다. 가진 돈을 정리하는 글을 적어 내리다가 문득 깨닫는 건, 어느새 그 꽃을 덮는 데에 쓰인 금화가 내 위를 채우는 양보다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다시 문 밖을 나서는 까닭은, 언젠가 그 꽃다발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거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혹은 더 이상 손님으로 두지 않아도 괜찮던가.

“아제마 장미를 같이 넣어드릴까요? 그렇게들 많이 하시더라고요.”

순박한 낯의 상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멋쩍게 작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혼자 취미로 사는거라서.“

“아, 그럼 이걸 같이 드릴게요!“

상인의 손에는 환술사 길드의 의식에 써도 될것 같은 누가봐도 활짝 핀 은방울꽃이 들려져 조심스러운 손길로 포장되고 있었다. 지금 산 안개꽃 다발을 다섯은 더 사야 할 것 같은, 척 보기에도 비싼 꽃을 보고는 고마웠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양심이 방금 막 가시길 위를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귀한 걸 그냥 받기만 해도 되는가 몰라.”

에이, 그런게 다 장사 수완이죠! 라며 씩씩하게 대답한 상인은 고심 끝에 하얀색 포장지를 고르는 것 같았다. 손길에 분주히 꽃다발이 만들어져 가는 것을 보고 주변의 꽃들을 눈으로 훑으며 잠시 기다리자, 그 사이에서 포장을 마친 상인과 시선이 맞았다. 그러자 상인은 가까이 와보라는 듯 가볍게 자기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의아하면서도 모자를 벗고 상체를 살짝 기울이자,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실… 아주 예전에 음악당 이전하기 전에… 공연하신 걸 본 적이 있어요!”

조금 놀라 흠칫, 하며 몸을 살짝 떼어내니 상인은 급히 사과의 말을 먼저 건네었다. 음유시인이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자, 그 상인은 기쁜 듯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보기 좋게 새하얀 머리와 눈 아래의 점이 참 아름다웠어요. 그땐 아마 혼자 계신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음유시인은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땐 악단이랍시고 친구들이랑 트리오를 했었죠.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그걸 기억하시네요?”

“그 뒤로 공연을 종종 갔었어요. 실은 그 날 연주하셨던 노래는…”

말꼬리가 흐려지는 것을 보고 음유시인은 조금 즐거운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긴장한 듯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얼굴이 참 투명한 맑은 물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괜히 속에서 짓궂은 마음이 들어, 익살스레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웃고는 농담을 건넸다.

“실력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었죠.“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 날 연주하신 노래가 제가 좋아하던 노래였거든요…”

이번에는 화들짝 놀라다가 또 양 뺨이 살짝 상기된다. 그것을 보며 농담을 건넨 음유시인은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그래서, 그 날 뒤로 공연을 될 수 있을 때마다 보러 갔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그 공연을 보러가던 길에 지금 남편을 만났거든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공연을 하시면 꼭 뭔가 전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인연을 이어 주신거니까요! 하지만 그 뒤로…”

금새 상대의 투명한 수면 위로 먹구름이 비춘다. 말끝처럼 흐려진 낯빛에 따라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붉은 하늘과 용신의 포효. 땅이 울리고 뒤집히는 나날들과 비탄과 절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들. 말하지 않아도 이 땅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정이다. 시선을 잠시 상인의 뒷편으로 던졌다. 몸에 가려져 있던 탓에 보이지 않던 탁상용 작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안에 들어간 그림의 인영, 액자의 옆에는 양초를 켜놓은 것을 보면 부러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초점을 다시 가까이 두면,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가 보였다. 그것이 폭포가 되어 이내 쏟아지기 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곧 수호천절이라 그땐 바쁘실 것 같고, 성가대 공연은 자주 보러 오시나요?”

“네?”

놀란 듯 크게 떠진 맑은 눈망울. 화답하듯 눈을 접어 싱긋 웃어보였다.

“…제가 기회가 닿아서, 올해도 거기서 노래하게 될 것 같거든요. 괜찮으시면, 들으러 오실래요?”

그 이야기에 마치 너무 놀라 숨을 멈추기라도 한건지 허억, 하고 숨을 들이키던 은방울꽃이 환하게 웃었다. 제 손에 쥔 꽃다발과는 비교도 안될, 활짝 핀 웃음이었다. 그리고 미소는 널리 퍼진다. 마치 꽃향기처럼.

“네…! 물론이죠! 세상에, 아마 그 이도 있었으면 정말 기뻤을텐데….”

“언제나 함께 계실거에요.”

포장지를 쥐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자 내 정신 좀 봐! 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음유시인은 널리 퍼진 꽃향기가 간지러워서 웃음을 지었다. 조금 구겨진 포장지를 금방 솜씨좋게 펴내고, 꽃들이 상하진 않았는지 살피던 눈이 이내 다시 이쪽으로 마주한다. 마침내 내밀어진 손끝에는 하얀색 포장지에 만개한 은방울 꽃과 안개꽃의 다발이 있었다. 앞의 탁자에 대금보다 조금 더 많은 동전을 내려놓고, 꽃다발을 손에 조심스레 들어보였다. 너무 많이 줬다는 말에는 손사레를 가볍게 치며, 인사 대신 상체를 살짝 숙이며 품에 안고 있던 모자를 다시 머리에 썼다. 또 오세요, 라며 등 뒤에서 발랄하게 인사하는 상인에게서 몸을 돌리며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던 음유시인은 품에 안은 포장지 속에 아름답게 있는 안개꽃 다발, 그 사이의 하얀 은방울꽃을 잠시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중얼거림을 바람에 흘려보내고, 품에는 꽃다발을 안은 채 평소라면 아파트로 곧장 돌아갔을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 급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갔던, 칼라일 카페 아래의 비공정 승강장에서 탑승 수속을 밟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있는 곳에 가야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쏘아보내고 흘려보낸 네 빈자리를 꽃으로 채우러 향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충동 뿐만 아니라, 이 꽃을 마지막으로 어떠한 결심이 나에게 세워졌기 때문이다. 너를 잊는 것이 어렵다면, 나는 그것을 안개꽃에 실어 물에 흘려보낼 것이다. 그것이 비록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그러니 이것은 첫 걸음에 대한 결심이다. 나의 마지막으로 배우는, 이별하는 방법에 대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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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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