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코스모스 summer cosmos

박병찬 x 기상호

포켓 코스모스 by r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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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쿠나 - 우주의 여름

https://youtu.be/OVt4DGlIBEI?si=V5UO-NLLibv3YVra

병찬과 처음으로 헤어진 것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2013년의 어느 초여름이었다. 새로운 통신망의 도입과 더불어 삶의 많은 형태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고 그런 움직임들은 일종의 뉴 웨이브가 덮치는 것과도 같았다. 병찬이 스물하나 상호가 열여섯일 무렵 시작되었던 연애는 병찬이 대학에 진학한 이후 자주 휘청였고 결국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이른 종결을 맞이해야 했다. 학교 담장을 따라 만개한 붉은 색의 장미꽃들과 그와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푸른 하늘이 시사하던 아름다운 광경과는 반대로 온갖 매체에서는 행성 충돌로 기인한 지구 종말이 불길하게 예견되던 2013년의 유월. 그 속에서 상호는 난생 처음 겪는 이별의 아픔을 남몰래 품은 채 계절 한 가운데를 힘겨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병찬이 빠져 나간 상호의 삶에는 새로운 부재가 생겨났다. 그러한 것들은 평소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가 불현듯 의식을 깨우곤 했는데, 잠들기 직전까지 주고 받던 무용한 내용 투성이지만 그 쓸모 없음이 마음을 밝혀주었던 병찬과의 통화의 지분이 가장 컸다. 그무렵의 상호는 주위가 고요해질수록 불거지는 내면의 소음을 가라앉히고자 밤마다 라디오를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는 각종 사연을 읽어주다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막을 내리는 채널과 자정 뉴스 채널만이 컨텐츠의 전부였는데, 사람의 삶이 으레 그렇듯 시청자로부터 넘어 와 진행자의 입을 통해 소개되는 사연이란 죄다 사랑과 관련된 상담 뿐이어서 차라리 뉴스 청취를 택하는  상호였다.

라디오 주파수를 섬세하게 맞추는 와중에도 폴더폰의 개폐를 반복하는 부산스런 손짓은 멈출 길 없었다. 유명한 여배우의 예명을 딴 장방향의 흰 색 폴더폰은 몇 년이 흘러도 세련된 외관과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이 좋았다. 그래서 주위의 친구들이 업그레이드 된 통신망을 사용하는 휴대폰으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상호는 그것을 고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안에 담겨있는 문자 메시지나 통화 기록 따위의 데이터가 소실되는 일이 싫었다. 요컨대 병찬과 처음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말을 텄을 때 나누었던 메시지 같은 것들. 상호는 마지막 연락이 사흘 전으로 찍혀 있는 병찬의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벌써 수도 없이 열어 보았던 터라 만약 종이 편지지였다면 벌써 모서리가 다 닳았을 것이었다. 네모난 칸 안에는 병찬이 고심해서 남겼을 '형이 미안해' 하는 다섯 글자가 담겨 있었다. '미안하면 헤어지자고 하질 말았어야죠' 상호가 분노를 꾹꾹 참으며 송신했던 메시지도 발신함에 고이 남아 있었다. 

연락 한 통이 없네. 대학가더니 내 같은 건 이제 필요없다 이건가. 잘 세공된 보석함에 넣어 두는 귀중품처럼 그 개수를 신중하게 늘려갔을 병찬과의 추억을 비우고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어야만 하는 날이 노도처럼 상호를 덮쳐오고 있었다. 상호는 제게 있어서 지구의 종말은 소행성 충돌이나 핵 폭발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양 뒤에 숨어 있어 관측되지 않았던 행성이 익일 지구를 빗겨나갑니다 NASA의 관측에 의하면 통칭 S-777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행성은 오늘 새벽 한국 기준 시로 대략 한 시 경 A지점에 진입하여 두 시간 뒤인 세 시에 B지점에 진입합니다 NASA가 금일 공개한 위성 사진에 따르면 수 시간 이내로 지구를 빗겨나가 익일 중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저명한 과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는 수많은 우려가 표명되는 바 종교단체의 불법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뉴스의 앵커는 여여히 소식을 보도하고 일각에서는 고위급 장관과 권위 있는 과학자가 궤도의 안정성에 관해 열띤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어딘가의 종교 단체의 수장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으리라는 것 쯤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라리 멸망해버리라지, 라디오 전원을 끄는 것도 잊은 채 침대에 발라당 누우며 생각했다. 행성이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하든지 핵 폭탄이 투하돼서 전인류가 재가 되어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그것은 단순한 일탈과는 다른 더욱 깊고 무의식과 연결되는 심상이었다.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행성의 명칭에 럭키 세븐이 세 개나 들어있다는 점도 비웃고만 싶은 상호였다. 전화 번호부에 들어가 비읍 자를 찾았다. <병찬햄>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이름 칸을 수정 버튼을 눌러 <박병찬 형>이라고 바꾸었다. 현재 제가 가능한 모든 심술을 양껏 부린 뒤 휴대폰을 다리 쪽으로 던지고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이런 와중에도 수마는 착실히 몰려왔다.

다 끝났으면 좋겠다. 목적어가 불분명한 말을 되뇌이며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지만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일 터였다. 

눈을 뜨자 꽉꽉 다물린 암막커튼 사이로 오전의 일광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길게 누워있는 상호의 배를 데워주던 볕은 인류의 존속을 두고 설왕설래 했던 지난 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광휘롭고 따스했다. 시계를 보니 지난 밤으로 부터 정확히 여덟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지구가 멸망할 거라던 칠월 삼일은 호젓하게 지나 칠월 사일이 되었고 지난밤의 소란이 모두 한 여름 밤의 꿈이라도 되는 양 유독 적막한 아침이었다.

결국 또 다시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초입에 서 있었다. 생계의 존속과 학업의 유지를 위해 일터에 출근하고 배움의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듯 저마다의 상무를 완수하기 위한 하루하루는 심상하고 고루한 빛을 띤다. 하지만 상호는 자기 자신이 오늘 하루 그 평범함조차 완수해내지 못 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화살은 오늘도 예의 감감무소식일 병찬을 향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마음과는 달리, 등굣길에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또렷했다. 그 쾌청함에 공연스레 혀 끝이 썼다.

 

나라를 들썩인 그 소동으로부터 꼬박 팔년이 지났다. 그동안 상호는 병찬과 숱도 없이 다투었다가 화해를 빚었으며 때때로 결별하고 재회하기를 반복했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쪽은 병찬일 때도 있었고 상호일 때도 있었다. 우리 사이의 지난한 분쟁과 잦은 별리는 연례행사처럼 찾아 왔고 권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그만두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마음가짐은 비단 상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병찬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들이 갈라서는 순간은 단발적인 일에 불과했지 영원한 헤어짐을 상정하는 것이 아녔기 때문이었다. 상호야 화를 참으면 사람을 미워하게 돼. 내가 화를 내는 건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야. 언젠가 병찬이 그런 말을 했었다. 결론적으론 병찬의 말이 옳았다. 그런 다툼은 상할대로 상해 잔뜩 메마르고 갈라진 마음에 아교를 발라 둘의 사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불가능할 일이었다. 녹슨 현관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상호는 오년이란 시간동안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던 병찬과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깨에 둘러맨 큰 포타린 백 때문에 현관장에 올려 두었던 화분이며 액자가 와르르 무너졌다. 쩡- 하고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너 지금 이렇게 가면 안 돼. 우리 이렇게 헤어지면⋯⋯."

"저는 이미 마음 정리 끝났어요."

 저를 따라 맨발로 나오려는 병찬을 제지했다. "오지 마요!" 처음으로 낸 큰 소리에 병찬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일순 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굳었다. 

"내일 다시 연락할게. 일단 머리 식히고 다시 얘기해보면 될 거야. 꼭 내일이 아니어도 돼,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이거 치울 때 손으로 만졌다가 괜히 다치지 말고 펜트리 아래서 두번째 칸에 빗자루랑 쓰레받기 있으니까 그거 쓰구요, 그리고⋯⋯."

"네가! ⋯⋯상호 네가 돌아와서 치워주면 되잖아⋯⋯."

"⋯⋯저 이제 안 와요, 앞으로도 영영 안 올 거고요. 그러니 연락도 하지 말고 기다리지도 말아요. ⋯⋯갈게요."

수평으로 흐르는 구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보였다. 의사의 선고처럼 건조하고 담담할 뿐이었다. "상호야, 형 좀 봐 주라, 제발⋯⋯." 끝내 그 말을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러한 의지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게 상호는 놀라웠다. 병찬의 바람을 배반하고 그를 등 뒤에 남겨두고 길을 떠난다는 것이. 동시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라는 결심이 더 컸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상호는 현관을 나와 일자로 길게 뻗은 복도의 끝을 향해 걷는 동안 내내 뒤를 돌아보지 말자는 생각에 골몰했다. 절그럭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연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가 영영 연인을 잃게 된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이성조차 배반하는 어떤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터라 기차 시간표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역까지 당도한 상호였다. 십오분 뒤 출발하는 부산행 열차는 이미 만석이고 소량의 입석표만 남아 있다는 직원의 말에 그렇게 해달라고 전한 뒤 값을 치렀다. 최고 기온이 34도를 웃돌던 여름, 양 손에 캐리어와 더플백, 타포린 백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음에도 다음 시간대의 특실을 예약해야겠다거나 조금 기다렸다가 다른 열차의 좌석을 예매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병찬과 동거를 결정했을 때 별도로 집을 마련하지 않고 그의 자취방에 몸만 들어가 살았던 것이 그나마 요행이라면 요행수일까.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이 신속하게 그를 끊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속 삼백키로의 속력으로 나아가는 열차 안에서 상호는 공연히 떠올렸다. 며칠 전 선을 보러 다녀 와 놓곤 그 사실을 제게 숨긴 병찬을. 칠년을 함께 살았으면서 고작 짐 가방 세 개로 손쉽게 정리될 수 있는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 병찬이 제게 품은 애정의 크기와 그 마음의 영속성에 대해. 맞선 또한 양친의 압박에 못 이겨 다녀온 것일 테지. 잠시나마 숨겼던 이유는 병찬이 떳떳하지 못 해서가 아니라 상처받게 될 상호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는 것도. 언젠가 상호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을 거란 것 또한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병찬의 양친이 상호를 마땅찮게 여기는 것도 알았다. 병찬이 상호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을수록 그 반작용이 거세어진다는 점도. 병찬은 올해로 딱 서른이 되었는데 나이의 앞자릿수가 바뀐다는 것은 당사자가 나이듦으로써 스스로 감각하는 인지적 변화보다는 주위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나 그에게 건네는 대화같은 것으로 체감할 수가 있었다. 그무렵 병찬은 경조사에 참석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양친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맞선 이야기가 오갔다. 상호가 거실에서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으면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서 병찬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옅게 들렸고 그런 날이면 밤마다 쉬이 잠들지 못한 채 한참을 뒤척이다가 끝내 자리를 뜨고 마는 병찬의 번뇌를 모른 척 해야만 했다. 

그런 유의 갈등은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빚어 낸 불행이라기 보다는 아무도 모르는 새 어느 순간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비극에 가까웠다. 그리고 저를 제외한 모두가 자연스레 그것을 피해 지름길로 빠지곤 하는데 어쩐지 상호만큼은 그게 잘 안 되고, 그래서 그것을 온전한 비극으로 인식한다. 병찬은 어땠을까? 단 한번도 그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게 상호는 못내 후회되었다.

일주일 전,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외출한 병찬을 기다리며 늦은 브런치를 먹고 있었던 상호를 부지불식 찾아온 객이 있었다. 병찬의 모친이었다. 도어 스코프로 바깥을 내다보자 병찬의 원형이라 여겨질 만큼 키가 크고 긴 눈매와 매끈한 피부를 가진 미인이 거기에 있었다. 모친과는 상호가 단순히 병찬의 대학 후배로 소개되던 시절에 몇 번 만나본 적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는 퍽 잘지냈던 것 같다. 상호를 제 아들처럼 귀여워해 주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친절의 역사도 병찬이 상호와의 연애 사실을 드러내자 원망의 밑천만 되었을 뿐이었다.

병찬의 모친을 응접실로 안내한 상호가 커피를 대접하기 위해 찬장에서 원두 꾸러미를 찾고 있을 때였다. 의자를 요란하게 끌며 자리에서 일어난 모친이 그마저도 머무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대접은 됐어요. 그냥 할 말만 하려고 온 거야. 그래도 얼굴 보고 해야지 싶어서. 상호 학생은 아직 스물 다섯살이지? 병찬이 올해 서른이에요.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서 내버려 뒀는데 이대로면 도저히 끝이 없을 것 같애. 내가 또 나쁜 역할이지. 상호 학생도 슬슬 취업하고 자리 잡을 나이 됐잖아요. 원래 사람은 환경 바뀌면 만나는 사람도 변해요. 지금 헤어지기 딱 좋을 시기란 뜻이에요."

"그, 그치만, 병찬이 형이랑 저랑 그런⋯⋯ 지도 오래 됐고⋯⋯ 갑자기 그럴 수는⋯⋯ 무엇보다 제가 안 그러고 싶고요⋯⋯."

문장이라기 보다는 단어를 얼기설기 엮은 것에 가까웠다. 병찬과 꼭 닮은 눈동자를 차마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상호는 그녀의 목에 걸린 핑크빛의 진주 목걸이를 공연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 인내심이 바닥을 쳤는지 교양을 유지하던 모친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우묵한 두 눈을 꾹꾹 지압했다. 

"상호 학생.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백번 양보해서 내가 허락했다고 쳐. 그러면 그 다음은? 뭐 세상에 공표하기라도 할 거야? 알리면 뭐 누가 잘했다고 돈이라도 줘? 욕 밖에 더 먹지. 상호 학생은 그렇다 쳐도 병찬이는 이미 웬만한 기자들이랑은 안면까지 튼 선수인데 소란 일으켜서 좋을게 뭐 있어? 아니면 뭐 부조리한 세상에 돌멩이라도 던져 보고 싶어 이래요? 남들이 반대하는데는 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상호 학생보다 인생 몇십년이나 더 살았고 더 배운 사람들이야."

"⋯⋯."

말이 비수가 된다는 비유를 몸소 체감하는 상호였다. 고작 말일 뿐인데 이렇게 따끔할 수 있다니. 지금 이순간 상호는 다트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일정 떨어진 거리의 다트판에 뾰족한 다트핀을 꽂아 넣는 역할이다. 첨예한 다트핀이 고득점의 스코어를 갱신할수록 고통은 거세어지지만 마침내 최고 득점을 기록했을 때엔 되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무릇 역치를 넘으면 모든 슬픔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사람은 무감각해지는 법이다. 수치심인지 서글픔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소란스런 마음이 상호의 뱃속에 똬리를 틀었다.

"배우 김연지 알죠? 내 대학 동창인데 그 집 딸이 병찬이를 되게 마음에 들어 한대요. 올해로 스물 아홉인데 지 엄마 닮아 예쁘고 명문대 출신이라 뭔가 달라. 벌써 지 사업체 꾸려서 이사 직함 달고 있거든. 성격도 승부욕 있고 호전적이라 아마 병찬이 옆에서 서포트 잘해줄 거예요. 지금 집안끼리 좋은 이야기 오고 가는 중인데⋯⋯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죠? 상호 학생한테 억하심정 있어서 이러는 거 아녜요. 나도 이런 이야기 너무 껄끄러워. 더이상 나쁜 역할 안 맡아도 되게끔 상호 학생이 좀 도와줘요."

"⋯⋯예. 무슨 말씀인지 아는데⋯⋯ 그⋯⋯ 당장⋯⋯ 은 어렵고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그럼요. 그래도 상호 학생이랑은 말이 통해서 너무 좋네. 병찬이가 왜 친하게 지냈는지 알겠어. 병찬이 그녀석이랑은 말이 안 통해. 애가 지 아빠 닮아서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야. 절연한다니 뭐니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소리를 하지 않나. 다 저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야기는 다 된 걸로 알고 나 이만 갈게요. 점심 먹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녀를 현관문까지만 배웅한 뒤 거실로 돌아온 상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연거푸 마른세수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이윽고 엘레베이터 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춘 것까지 확인하고나서야 상호는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릴 수 있었다. 제가 이런 모욕을 당하게끔 만드는 병찬이 싫었고, 싫기 보단 사무쳤다. 인정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관계와 도외시되는 자신의 마음, 제가 없는 곳에서 모욕당하는 상호를 영영 몰라줄 병찬 따위를 떠올리며 이 불행의 전조를 찾아가다 보면 그 근원에는 그녀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 하나 할 수 없었던 무능력한 기상호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퇴장하는 게 맞다. 상호는 생각했다. 병찬의 집을 나온 것은 충동적인 행위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정답인 것 같았고 비록 최선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더욱 늦기 전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것도 제 이성과 지성의 결과물로 느껴져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여겨졌다. 

기별없이 내려 온 상호를 모친은 별말 없이 맞아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찬의 메신저를 차단하고 그의 번호를 삭제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대리점에 방문해 수중의 돈으로 휴대폰을 바꾸었다. 병찬과 공유 앨범을 쓰겠다고 나란히 구매했던 아이폰은 상호의 커다란 손아귀에 잘 어우러지는 큼지막한 사이즈의 갤럭시로 바뀌었고 서로의 생일로 맞추었던 연락처의 뒷자리는 낯선 숫자로 새로이 탈바꿈했다. 너무 낯설어서 상호 그 조차도 영원히 외우지 못 할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소식과 거취를 알아보지 못하게 아주 납작해져서 종내에는 사라지고만 싶은 상호였다. 병찬의 왼손 약지에서 고고히 빛나고 있을 값비싼 결혼 반지가 그의 대답이라면 기별없는 단절은 상호의 결의였다.

병찬과 헤어진 뒤로는 시간의 흐름이 유난히 빠르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면 한 달, 또 정신을 차리면 일 년이 지나있었다. 상호는 대학을 졸업한 뒤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데엔 실패했지만 대신 선취해둔 교직이수를 통해 부산 소재의 학교에 체육 교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항상 상위권이었기 때문에 서울에 지원할 수도 있었지만, 서울을 온전히 벗어난 것은 상호의 유일한 의지였다. 그리고는 고향집에 아주 눌러 살았다. 

재학 중에 이미 국대로 선출된 이력이 있었던 병찬은 그 후로 엄청난 계약금과 스톡 옵션을 끼고 업계 일위로 정평나있는 구단과 계약했다. 국대 선출의 기회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있었고 착실히 불린 몸값 덕분에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연봉이 눈에 띄게 오르곤 했다.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병찬을 알던 지인과는 연락을 죄 끊었기 때문에 이런 소식은 주로 스포츠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병찬의 이름 석자를 인생에서 뮤트할 순 없는 걸까, 상호는 종종 생각했지만 관심을 끄고 싶어도 늘 화제의 중심에 있는 병찬을 아주 모르고 살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화제가 되지 않더라도 병찬의 소식을 끊임없이 찾아보았을 상호였다.

상호가 그런 기행을 그만둔 것은 병찬의 이름 석 자가 박힌 헤드라인이 실시간 스포츠 뉴스 랭킹을 도배하는 걸로도 모자라 연예 뉴스 최상단마저 장식하곤 했던 스물다섯의 여름 무렵이었다. 상대는 유명한 여배우가 슬하로 둔 이남일녀 중 막내딸로, 어머니의 외모와 아버지의 사업수완을 물려 받은 그녀는 출중한 미인이며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의 사업체를 구축할 만큼 감각있는 수완가라고. 양측 부모의 주선을 통해 만났다는 이야기는 쏙 빠진 채 그들 사이에 얽힌 연애사 따위의 기승전결을 낱낱이 밝히는 기사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거기에 온갖 커뮤니티를 도배하는 찌라시들까지 화력을 더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상호는 밤새 찾아다니면서까지 읽었다. 그것은 마치 회복 단계의 가려움을 참지 못해 상처를 우벼파서 결국 피를 내비칠 때가 돼서야 만족하고 마는 종류의 비극이었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스며들 때 쯤에서야 상호는 인터넷 창을 모조리 껐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박병찬과 기상호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고. 그리고 우리가 잠시나마 중첩될 수 있었던 그 시기가 나에게 큰 자랑이자 아득한 빛으로 남을 것 같다고. 

기이한 해방감을 동반한 작은 종말이 찾아왔다. 상호는 제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그리고는 열두시간을 내리 잤다.

샤워를 마친 상호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티브이를 켰다. 손에는 퇴근 길에 사온 맥주캔 묶음이 들려 있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술과 야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영화를 시청하려다가 어쩐지 그럴 기분도 아니어서 공중파의 뉴스 채널을 틀었다. 

13년 전 지구를 빗겨 나갔던 행성 S-777이 익일 또 다시 궤도에 오릅니다. S-777은 태양 뒤에 가려져 그동안 관측하지 못했던 행성으로 13년 전 최초로 발견되어 지구와의 충돌 가능성이 제기된 이후 공전 주기 변경을 염두에 두었으나 실행까지 이어지진 못했는데요 NASA의 충돌 실험 컴퓨터에 의하면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결과가⋯⋯ 올해도 무사히 넘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천문대에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이런 뉴스는 늘 이목을 잡아 끌기 마련이다. 과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매스컴이 태양계의 새로운 정립을 앞두고 기대를 부풀리는 반면 일각에서는 지구 종말의 가능성을 내세우며 불안의 목소리를 내는 부류들이 한결같이 존재했다. 유튜브를 실행하여 'S-777'을 검색하니 다양한 종교 단체의 채널과 사이버 렉카의 영상이 떴다. 그중 후자는 섬네일에 붉은 글씨로 '우리는 내일 모두 죽습니다' 따위의 말이 불길하게 적혀있었다. 사실을 은폐하는 정치인들과 무능한 과학자를 고발을 목적으로 사실을 명명히 따져보자는, 정치적 색이 짙은 영상이었다. 그 외에도 '양심 선언'이나 '사건의 진상' 따위의 제목을 걸고 실시간 방송을 여는 계정도 적지 않았다. 호기심이 동해 클릭해봤지만 두드러지는 건 실시간 대화창을 뜨겁게 달구는 후원 행렬 뿐이었다. 좀먹은 불안을 밑천으로 포교를 하는 종교인이나 음모론을 펼치는 온갖 댓글들을 보면 각종 우려들은 미지의 행성이 초래하게 될 지도 모르는 끔찍한 결과를 두려워한다기보다 고루한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줄 만한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다니는 승냥이 떼에 가까웠다. 유쾌하지 못한 인간의 면면을 목도한 것만 같은 불쾌감이 서린 상호는 이내 창을 껐다. 

뉴스 속 앵커의 음성만 유유히 흘러 나오는 방 한복판에 덩그러니 누워있던 상호는 불현듯 데자뷔를 느꼈다. 언젠가 병찬에게 차이고 세상을 저주했던 열일곱의 기상호가 떠올랐다. 남몰래 저주를 퍼부은 다음 날 바로 병찬과 화해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생각하면 다소 치기롭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는, 이제는 낡은 과거의 일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폴더폰을 어렵지 않게 찾아낸 상호는 이젠 구하기도 여의찮아 보이는 구형 케이블을 연결시켜 전원을 충전했다. 다행히 작동에 무리는 없어 보였다. 작디 작은 액정과 특정 다이얼의 문자만 닳아있어 조악하다는 인상을 주는 키패드, 상호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감성의 유치찬란한 폰트를 공연히 바라보며 문자 메시지함을 눌렀다. 

"와⋯⋯ 이게 아직도 있네."

그곳은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박제된 세계 같았다. 상호는 겨우 200개 밖에 저장되지 않는 수신 문자 메시지함 목록을 병찬의 것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답지 않게 부지런했던 지난 날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과의 연락은 용건이 다 하면 칼같이 삭제하고 병찬이 보내는 것 중에서도 추리고 추려서 그렇게 남겨둔 200개의 메시지. 낡은 폰트로 출력된 2013 숫자는 누군가가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ㅡ 상호야 미안해. 사실 이번 달부터 벤치 신세지거든. 너한텐 항상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013/07/04 PM12:06

ㅡ 너 속이면서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는데 말야. 농구 좀 안 풀리는 것보다 너한테 거짓말한게 더 부끄러운 일이란 걸 형이 이제야 알았어. 2013/07/04 PM12:10

ㅡ 늦게 연락한 것도 미안하다. 도저히 너를 볼 낯이 없어서... 나 진짜 최악이네. 이런 못난 형도 좋아해줄래? 2013/07/04 PM12:12

좋, 아, 해, 줄, 래, 다섯 음절을 혀로 덧그리는 입 모양이 둥글게 벌어졌다. 그러면 바싹 메말라 비틀어진 영혼이 소생되기라도하는 양.

이때 회신했던 메시지의 내용을 상호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병찬과 함께 관통한 계절의 기억은 몇 년이 흐르든 연수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르곤 했으니까. 상호는 하필이면 그날 휴대폰을 가져가는 것을 잊고 급식실로 향했다. 그리운 메시지를 발견한 건 5교시가 시작되기 직전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건강상의 문제로 출전을 보류하는 게 아니라, 실력의 부진 혹은 전략상의 이유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은 병찬으로선 처음 겪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실 병찬이 원망스럽다기 보단 걱정스런 마음이 더욱 컸다. 

상호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병찬이 가졌던 나이가 되어서야 그때의 병찬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깨달았다. 스물 한 살은 법적 성인이라는 정체성과 아직 여물지 않은 미성년의 정체성이 수없이 충돌하는 격랑의 시기였고 누구도 그 나잇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이기적으로 군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나이였다. 주전에서 밀려난 스트레스를 견디고 학업을 병행하면서 어린 남자친구까지 배려해 주었던 그 시절의 병찬에 대해 생각하면 급기야 모종의 원망스런 감정도 피어났는데, 그것은 바보같을 정도로 다정했던 병찬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때에도 지금에 와서도 그런 병찬의 애정을 받기에 한없이 모자란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ㅡ 햄우째그런일이있었어요그것도모르고얼라처럼햄힘들게해서미안해요더잘할수있을거예요누구보다노력하는거 2013/07/04 PM01:05

ㅡ 내가아니까요노력도아무나하는거아니애요그리고내가햄이농구하는모습에반한건사실이지만그러면내가마이클조던따라댕기 2013/07/04 PM01:07

ㅡ 지왜햄이랑사귀고있겠어요잘난햄도못난햄도상관없이그냥햄이니까좋은거예요!!!!!!! 2013/07/04 PM01:08

와이파이랄게 보급되지 않았던 무렵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기능의 전부였던 폴더폰의 가장 작은 요금제를 사용하던 상호는 단 1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띄어쓰기를 생략하고 발송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참 멋이 없었다. 그래도 저 시절에는 제가 가진 모든 진심을 가감없이 내보였다는 걸 알았다.

세월이 흘러 굴지의 기업인과 유명 여배우 사이의 자녀와 결혼식을 올린 억대 연봉 스포츠 스타 박병찬과 그와의 과거를 헤집으며 밤잠 설치는 그냥 중학교 체육 교사 기상호가 여기에 있었다. 이제는 제가 과거에 병찬과 연인 사이였다는 말을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애당초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만남이 아녔기도 했고 병찬은 항상 자랑스러운 사람이었기에 늘상 그를 자랑하고픈 맘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마음과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으니까. 상호는 제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물론이고 먼 과거에도 말이다. 그래서 병찬이 기억하는 상호의 얼굴과 홀로 있을 때 상호의 얼굴은 항상 조금씩 차이를 빚었다.

인생이 참⋯⋯.

"이거 싱거운 것 같지?"

"⋯⋯예? 네? 그, 그게 내가 간장을 빼 놓고 안 넣었나? 진간장을 넣어야 하는데 국간장을 넣었나?"

국을 한 술 뜨다 말고 의자를 끌어 일어서려던 상호를 병찬이 만류했다. 

"괜찮아. 대신 찬들이 짜니까, 이게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아, 긍가, 고마워요⋯⋯." 대답하는 상호의 우묵한 눈가에 졸음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끔뻑이며 의례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다가 마침내 진의를 파악한 상호가 분연히 소리를 질렀다. 저 진짜 눈 뜨고 코 베일 뻔 했네요. 아, 진짜. 기상호. 한 치 오차도 없이 예상과 같은 반응이 돌아와서 병찬은 크게 웃었다. 눈 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데 제 밥 위에 놓인 반쪽 계란말이를 도둑질하는 젓가락 한 벌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와, 정말 짜긴 짜네요. 건강식이 아니라 수분이 죄 증발할 것 같은 맛이데요. 새로 할까요. 자신은 없지만. 아니야, 상호야. 난 이대로가 좋아. 네가 해준 그대로가 제일 좋아. 서툴고 귀여워.

병찬이 스물다섯, 상호가 스무살이던 해의 칠 월. 그날 무려 새벽 네 시 경에 전례없던 이른 기상을 한 상호는 아침 식사로 내어 놓을 미역국을 끓였다. 전날 아시안컵 국대 가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병찬이 엔트리 소집을 위해 이르게 집을 나서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굴욕을 맛 본 병찬이 무려 삼 년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재학생이 국대에 선발되는 것은 그때만 해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므로 지난 밤, 가장 먼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상호는 놀라움을 감출 길 없었다.

햄이 대단한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햄이었던 것 같다. 속내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던 걸 병찬이 핑거 스냅으로 깨워 주었다.

"햄, 이건 진짜⋯⋯ 미친 것 같아요. 비결이 뭐예요."

묵혀둔 팬심이 사랑을 앞지르는 감각을 느끼며 그렇게 물으니 의외로 웃음기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모르겠어. 그냥⋯⋯ 상호 네 덕분인 거 같아."

"에이, 제 앞에선 겸손한 척 안 해도 됩니다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병찬의 어깨를 한 번 툭 하고 쳤다. 섬유 위로 맞닿은 살갗으로부터 뭉근하게 번지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힘들어서 다 던지고 싶을 때마다 상호 네가 떠오른다? 그러면 아, 조금만 더 해보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최소한 네 앞에서 부끄러운 선수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그러다 보니까 언젠가부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애. 그리고 상호 네가 빈 말을 워낙 못 해야지."

"설마 농구 잘하는 사람 찾을거면 마이클 조던 따라 댕기지 왜 햄이랑 사귀냐고 했던?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그걸 담아두고 그래요?"

"상호야, 나는 농구를 너무 오랫동안 해 와서 나 자신의 경계를 잘 몰랐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그때 그렇게 말해줘서 오히려 참 고마웠지. 어떤 상황에도 내가 나로 있게 해 줄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으니까. ⋯⋯에잇! 고마우니까 우리 상호 소원 하나 들어줄까. 갖고 싶은 거나 원하는 거 없어? 뭐든 말해 봐."

"저 이런 거 거절 안 해요, 염치없이 받아 먹습니다? ⋯⋯근디 갑자기 생각하려니 딱히 모르겠네요, 일단 킵해둬도 되지요?"

탁한 둔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 휴대폰을 쥔 채로 몸을 뉘었는데 손샅 사이로 바람이 휑휑 부는 걸 보아하니 잠결에 휴대폰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고개만 살짝 비틀어 내려다 보자 목재 바닥 위에 낡은 전자기기가 처량한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다. 하루종일 병찬을 떠올리고 그와 나누었던 추억 따위를 자기 직전까지 복기하니 이제 수면할 때 조차 그와 관련된 꿈을 꾸기 시작한 건가 싶었다. 서서히 미쳐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상호였다. 홑이불 위로 몸을 뉘자마자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 들었는지 미처 끄지 못한 조명등이 방 안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창 밖이 소란스러웠다. 행성 관측이다 우주의 신비다 하는 이벤트는 쳇바퀴같은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모종의 일탈과 쾌락을 선사함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지구를 지나쳐 간다는 행성 하나를 보기 위해 새벽 한 시 아파트 광장에 모여 술을 마시고 떠들며 스스로의 수면권을 성실히 박탈하고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S-777가 궤도 상으로 지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지나갈 때 행성의 모습을 제법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구슬처럼 둥글고 그 크기는 달과 금성의 중간 즈음으로 추측된다고 보도하던 뉴스 앵커의 음성을 복기하며 창가의 커튼을 거두었다. 별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의 이물질처럼 끼어있는 행성은 따로 찾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을 만큼 선명한 녹빛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그것은 에메랄드 같기도 하고 먹다 남은 빵에 번식한 세균같기도 했다. 덜 식은 아스팔트의 열기와 쪽빛 야천의 빛무리때문에 행성 테두리가 희부윰했다. 과연 매스컴의 말대로 쉬이 볼 수 없는 빛깔은 그 자체만으로 진귀한 경험을 만들어 줄만 했지만 상호의 마음에는 불가해한 공포가 손을 뻗치고 있었다. 

치뜬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상호가 카메라를 가져와 사진을 찍었다. 줌인하여 포커스를 맞추고 명도를 한껏 내리자 부옇고 흐릿한 인상이었던 녹빛 행성의 표면이 점차 선명해진다. 아크릴 물감을 크레이프 케익처럼 겹겹이 두른 듯한 독특한 외견이었다. 촬영 버튼을 누른 뒤 사진첩에 무사히 저장된 것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 우주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 가장 최근접하며 이후 서서히 멀어지는 기점이 되는 시각. 척 보아도 코 앞까지 다가온 행성의 거리감이 약간은 버겁게 느껴진다. 우람한 달 같았던 것이 착실히 몸집을 불리자 마치 목성같은 느낌을 풍겼다. 차이가 있다면 이끼가 잔뜩 낀 잿빛 호수같은 색상과 잔뜩 깨져 혀를 상하게 만드는 사탕처럼 곳곳에 배치된 크레바스 정도였다. 상호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풍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지칠대로 지친 육체를 배반하는 정신은 밤이 깊어질수록 또렷해지기만 했지만 머릿속에 켜처럼 쌓인 불순물들은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방해했다. 이성이 마비되고 만물이 감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시각, 고고히 어둠을 밝히는 이방의 행성이 주는 느낌에 압도되어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기이함을 감지한 것은 상호가 세 번째로 시도한 수면을 장렬히 실패하고 멀어져 가는 행성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을 무렵이었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거리를 깨우는 오전 다섯 시였다. 작일 공개했던 우주국의 충돌 시스템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국 표준시 오전 세시를 기점으로 S-777의 궤도는 지구를 등지고 멀어지다가 오전 여섯시부터 일곱시 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고 했다. 가장 근접한 궤도라던 새벽 세시에 예견대로 진행되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지금 쯤이면 달과 비슷한 크기까지 작아진 상태여야 맞았다. 그것이 인류와 AI를 아우른 지성의 집약체가 내린 결론이었으니까.

"뭐고, 너무 큰데⋯⋯."

마지막으로 보았던 행성과 비교도 안 되게 거방져있었다. 성큼 좁혀진 거리는 그곳에 거주하는 우주인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상호는 자신의 육감을 퍽 믿는 편이었다. 선수 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블루칩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집요한 관찰력 보다는 발달한 육감 덕분이라 믿었다. 그런 감각이 제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기우를 떨칠 수가 없었다.

포털에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구독하는 신문사 어플에 들어가 어제자의 석간과 오늘자 조간을 검색해보았지만 유의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우주에 해박한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행성의 안전성을 보증했으니 움트는 불안은 필시 기우일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고. 상호는 보이는 것만 믿는 속편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이런 물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풍경을 다신 못 보게 된다면 어쩌지? 그때만 해도 상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도 얼룩의 위치를 재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제 방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환복을 마치고 세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목적지야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병찬을 만나러 가야 한다. 

호기롭게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위쪽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과거에 함께 살았던 병찬의 집으로 가는게 좋을까? 이미 방을 빼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당초 제가 서울로 향한들 병찬이 환영해줄까? 왜냐하면 병찬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언젠가 스포츠 일간지 1면에서 보았던 병찬의 턱시도 차림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명석한 미인일 것이 분명한 그의 아내와 어쩌면⋯⋯ 하는 심정으로 상상해 보았다가 마음에 멍울만 남게 되는 환상 속 그의 자식들도. 그러면 상호는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수면제를 먹고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한껏 액셀을 밟고 주차장을 빠져나온 뒤였다. 환영하지 않으면 어때. 세상에는 이미 의뭉스럽고 불가해한 일이 판을 치는데 상호가 거기에 하나를 더한들 크게 잘못될 것 같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통상적으로 대략 다섯시간 이상이 소요되긴 하나 필사의 각오로 서두른다면 아홉 시 전에 도착하는 것도 그리 꿈같은 일은 아닐 터였다. 그보단 운전대를 오랜만에 잡는다는 사실이 걸렸다. 병찬과 함께 살 때 주로 핸들을 잡는 쪽은 병찬이었고 그와 헤어진 뒤로는 운전석에 앉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연료의 최대치를 알리는 계기판 속 지침과 밤새 연결해둔 충전기 덕분에 전충된 휴대전화 배터리가 그나마 요행이었다. 

컨트롤 패널 옆 지지대에 휴대전화를 고정한 뒤 병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년 전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하고 고향에 내려와 번호를 바꾸었던 이후 처음 노출하는 전화번호였다. 낯선이로부터 오는 전화를 병찬이 흔쾌히 받아줄 지조차 미지수였는데, 아무래도 무색한 걱정이었는지 병찬이 지정해 두었을 컬러링이 길게 이어지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라디오를 켰더니 버즈의 미스터 탬버린 맨(The Byrds- Mr. Tambourine Man) 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등굣길에서 종종 들었던, 시사나 과학 따위를 폭넓게 다루는 교양 방송이었다. 병찬에게 또 한번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번째부터는 되려 무감각해져서 행동하기가 더 쉬웠다. 병찬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좋을지 사전에 계획해둔 것도 아녔는데 마음이 이성을 앞선 나머지 조급증이 일었다.

"형, 제발⋯⋯ 전화 좀 받아요."

끝이 뭉툭한 손톱으로 핸들 위를 톡톡 두드렸다. 평일 오전 일곱 시. 여섯시에 기상해 아침 조깅을 마치고 건강식을 챙겨먹는 그의 평소 루틴을 생각하면 이미 깨어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비록 제가 아는 병찬과 현재의 병찬 사이에는 오년이라는 시간의 괴리가 있었으나⋯⋯ 그런 습관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몸에 아로 새겨진 것이었으니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은퇴 후 저명한 팀의 감독이 된 병찬은 매일 아침 체육관에 얼굴도장을 찍어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성실한 병찬이 그에게 부여된 강제성을 순간의 나태로 기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백퍼센트였던 배터리가 벌써 육십퍼센트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러다 병찬의 휴대폰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는 것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없었기에 상호는 당분간 휴지를 둘 요량으로 마지막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치겠다, 진짜⋯⋯."

결국 병찬과 연결되지 못 한 채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마지막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한 건 병찬과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는데, 오래 살다보면 어딜가나 비슷해 보이는 서울의 거리를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 늘 설렘의 상징이 되는 곳이었다. 휴게소에 들러 이름만 겨우 들어본 프랜차이즈의 맛 없는 커피를 비싼 값 치러 구매하고 그것을 역시 잔뜩 바가지 쓴 값으로 구매한 호두과자 따위의 주전부리와 함께 먹으며 긴 운전에 지친 병찬의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했던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액셀 페달을 힘껏 밟아 속력을 더했다. 계기판 속의 지침 바늘이 한껏 오른쪽으로 기울다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공백을 채우고자 틀어 두었던 라디오 속 진행자의 목소리가 일순 뚝 끊기더니 그 위로 새로운 음성이 덧씌워졌다. 마침 재난 경보음이 불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가 보면 상호의 휴대전화였다.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는 대신 라디오의 음량을 키웠다.

금일 오전 중으로 자취를 감출 예정이었던 S-777가 궤도를 이탈하여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금일 오전 일곱 시 십오 분 경 우주 항공청 소속 연구원 A씨의 보고를 시작으로⋯⋯ 이에 NASA는 측정 오류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행성 S-777가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무려 지름 232km의 크기입니다 몇 시간 뒤 성층권에 진입하면 통신 전파의 방해가⋯⋯ 이를 두고 B기술원의 명예교수 C씨는 인류의 오만이 초래한 결과임을 밝히며⋯⋯ 지름이 수백키로인 행성의 충돌이 의미하는 것은 뭐죠? 개미 한 마리 빠지지 않고 모든 생물이 소멸함을 의미합니다, 손을 써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단 하나도 없나요? 예, 없습니다 지구는 한국 표준 시 기준 오늘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사이 소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항상 그랬다. 상호의 육감은 빗겨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이 불안, 공포, 슬픔, 두려움과 직결되는 일이라면 거의 확정적이라 봐도 좋을 만큼. 이번 만큼은 부디 아니길 바랐지만⋯⋯. 씨발, 욕설을 읊조린 상호는 운전 중인 핸들을 주먹으로 거듭 내려쳤다. 그때마다 전방위로 오고 가는 도로 위의 차들 사이로 귀를 찢는 클락션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현재 시각 오전 여덟시 오분, 종말이 예견된 열시까지는 두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아직 대전에도 도달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황 아래 그동안 운전에 소홀했던게 못내 후회스러웠다. 내가 조금 더 운전에 능숙했다면. 혹은 더 민첩하게 이변을 알아챘더라면.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환을 곱씹다 보면 결국 그 끝엔 오년전 병찬을 등지고 떠났던 아파트의 현관이 있었다.

급작스레 엔진 소리가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곧 시동이 꺼지려는 것 같았다. 여러개의 사소한 불행이 지면 아래 똬리를 튼 채 하나의 큰 재앙을 위해 태동하고 있었다. 부품이 상했나? 연료가 바닥났나? 분명 출발 전에 주유등이 최대로 차 있는 것을 보았다. 낡은 세단인 만큼 계기판 고장은 흔한 일이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고 부품이 고장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타이밍 벨트가 끊어지지 않은 게 천운이라고 해야할지. 아니, 지금은 이런 것을 따지고 드는 것은 무용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상호가 속도를 줄여가며 갓길에 세단을 주차시켰다. 종말이 선언된 와중에 보험을 불러본들 아무도 와주지 않을 거고 태평하게 기다리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시동이 완전히 꺼진 세단은 여정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와 허허벌판의 포장 도로 위에 우뚝 선 상호의 머리 위로 여름의 뙤약볕이 쏟아진다. 오전의 고속도로는 이용객이 많지 않았지만 없는 수준도 아녔다. 아득히 이어져 도착점이 확인되지 않는 도로를 망연하게 바라 보았다. 차선 안쪽으로 몸을 쭉 빼어 택시를 잡아 타는 몸짓으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현실의 냉엄함만 새겨넣어야 했다. 목표했던 차가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상호의 곁을 지나칠 때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상호라고 이 상황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침착하는 방법이 아니면 도무지 타개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뒤로도 몇 번 실패를 거듭한 상호는 뜬금없이 병찬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입술을 감쳐물고 표시판의 안내를 따라 무작정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몸이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철 덩어리 옆에 버려진 듯 서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병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십분 가량을 달린 상호의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갈 무렵이었다.

ㅡ ⋯⋯혹시 상호니.

"⋯⋯."

착신 전화를 바로 연결하긴 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꼬박 오 년이었다. 상호가 감각하기에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이라 해서 병찬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라는 법은 없었다. 그건 어쩌면 한 사람을 죽도록 미워할 수도 혹은 아주 잊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으니 그에게 전과 같은 친절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벼락처럼 마련된 해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을씨년스러운 한낮의 망망대로에서는 수화기 너머의 호흡 소리마저 선명했다.

상호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먼저 운을 뗀 것은 의외로 병찬 쪽이었다.

ㅡ 무슨 일 있어?

"옛날에⋯⋯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고작 꺼낸다는 핑계가 낡은 추억을 포로로 들고오는 짓이었다. 상호는 눈썹뼈를 문지르며 통화 볼륨을 더 높였다.

ㅡ ⋯⋯계속 말해 봐.

"저 지금 형 만나러 가고 있어요. 시간 내줄 수 있어요?"

병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색색 내쉬던 미세한 호흡 소리조차 소실된 적막이 이어졌다. 상호는 통화가 이대로 종료될까봐 두려웠다. 뺨에 붙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깝게 밀착했던 액정을 고쳐잡고 거리를 벌리자 통화 중 화면이 떠올랐다. 저장되지 않았지만 병찬의 것임이 분명한 숫자 열한 개가 공연히 떠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병찬이 '허' 하고 탄성인지 헛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ㅡ 왜 안되겠어.

바통을 이어받은 쪽은 상호였다. 예상치 못한 대꾸에 할말을 잃는 것으로 모자라 한동안 숨까지 참아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호를 이해한다는 듯 병찬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ㅡ ⋯⋯나 지금 대전이야. 상호 너한테 가고 있었어. 예전에 너 졸업하고 학과장 달달 볶아서 물어 봤거든. 15학번 기상호 어디 갔냐고. 고향집 내려가서 고시 준비한다 하더라고. 왠지 아직도 거기 살고 있을 것 같아서⋯⋯ 상호 너는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추가 달린 쇠사슬에 발목을 구속당한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던 상호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 꿇었다. 저도 모르는 새 벌어진 일이었다. 안그래도 내려찍듯 앉는 여름의 더위와 공복 때문에 모래 주머니를 주렁주렁 단 것처럼 힘에 부치던 참이었으니 한계에 부딪친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아스팔트와의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도로 위에 바싹 메마른 개구리 한 마리가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지속됐던 장마 전선에 휩쓸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상호는 그 개구리의 처참하고 우스운 꼴이 곧 제게 닥칠 미래 같아서 울적했다.

입술을 감쳐문 상호가 제 뺨을 한번 내려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저 지금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발이 묶였어요. 대전에서 빠지는 차량이 많으니까 판암IC까지는 어떻게든 얻어탈 수 있을 것 같아요. ⋯⋯형.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 별로 없을 거 같아요.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할당된 지도 모르겠고 더이상 뉴스말도 못 믿겠고⋯⋯. 곧 통신도 전부 차단될지도 몰라요. 그냥 일초라도 빨리 대전역에서 만나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테니까."

ㅡ 응, 알겠어. 예전에 포항으로 기차 여행 갔을 때 대전역에서 경유했잖아. 그때 상호 네가 샌드위치 먹다가 가지 냄새 난다고 토하러 갔던 그 프랜차이즈 카페 기억해? 얼마 전에 원정 가면서 봤는데 아직도 있더라구. 거기서 기다릴게.

"그, 기억은 나는데⋯⋯ 끄응, 하필이면 제 흑역사를 들추는 이유가 뭐죠?"

투덜대듯 대꾸하면서도 만면에 미소가 한소끔 피어있었다. 팽팽하게 당기는 볼근이 제 소유가 아닌 것마냥 생경했다. 손바닥에 뺨을 깊게 묻고 파안대소하며 털레털레 걷고 있는데 그 이변을 어렴풋이 눈치챈 병찬이 다행이다,하고 안도했다.

ㅡ 이제야 좀 웃네.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걱정했어. 너는 꼭 긴장할 때마다 그러곤 하잖아. 운전하다 사고나면 그것만큼 억울할 일도 없을 테니까 이만 끊을게. 아마 내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 상호 네가 도착하면 연락주라. 꼭⋯⋯ 보자. 

"네, 꼭. 이따 봐요."

그 대목에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통화를 종료한 상호는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뒤 자신이 등지고 있는, 이제껏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버려둔 고철 덩어리는 이미 점으로도 남지 않았다. 다시 앞을 향하는 찰나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얼굴이 굳건해지고 결연함을 품은 이채가 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땀에 푹 젖어 이대로 말리면 작은 염전이 마련될 것 같은 티셔츠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신고 있는 농구화 두 짝도 벗었다. 하얀 상의와 신발 한 벌을 양손에 단단히 붙들고 당장에라도 차에 치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병찬을 만나지 못 한다는 것은 여기서 뺑소니를 당하는 것과 진배없는 까닭이었다.  

흰색 포터 한대가 상호 앞에 정차했다.

"학생!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생 고라니도 아니고 여기서 이렇게 치여 죽으려 그래?"

"예! 죽을라꼬요! 전 지금 고라니가 되거나 개구리가 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니까요!"

개구리는 또 뭐야? 운전석 창 너머로 인상을 잔뜩 그린 중년의 남자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푹푹 내쉬는 한숨에 주취가 가득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절 내려온 창문 너머로 살펴본 조수석에 사홉들이 소주병 여러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상호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원체 주량이 센 터라 이정도는 괜찮다고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있어야지, 덧붙이면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숱을 손으로 슥슥 쓸어 넘겼다. 

"나도 지금 제정신 아니고 학생도 어지간히 미친 것 같으니까 동지로서 실어다 줄게."

남자가 두 손가락으로 눈 두덩이를 꾹꾹 지압하며 뒷자석을 가리켰다. 2인용 포터는 뒷자석이랄게 따로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말하는 뒷자석은 과연 화물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수석은 안 되고, 짐칸에 타. 학생 지금 얼마나 형형한 줄 알아?" 남자는 마치 상호의 아비라도 되는 양 꾸지람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훤한 대낮이 아녔다면 귀신인 줄 알고 줄행랑쳤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상호는 옅게 썬팅된 창문에 제 얼굴을 슬쩍 비춰 보고는 남자를 전적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얌전히 화물칸에 올라 탔는데, 한 켠에 자리를 잡자마자 얼기설기 묶인 채 서너개씩 겹쌓여있는 짐이 기우뚱 기울더니 맨 위의 것부터 쓰러지기 시작했다. 운전석 창문으로 길게 몸을 뺀 남자가 소리쳤다. 학생, 그거 그냥 바깥에 던져버려. 이제 다 필요없는 것들이야.

기- 우- 뚱-

병찬을 세로로 다섯 명은 쌓아 놓은 것만큼 높고 큰 가로등이 눈앞에서 기울고 있다. 지면에 직각으로 위치해있던 것이 점점 둔각으로 벌어지며 거의 땅에 붙을 것처럼 기울다가 끝내 쓰러지지는 않고 그대로 멈춘다. 전등은 진작 필라멘트가 나간 것 같다. 

몇 분 전, 판암IC에 내린 상호는 저를 내려준 뒤 곧장 4차선 도로에 진입한 흰색 포터가 옆에서 돌진하는 화물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 장면을 하릴없이 목격했다. 화물 트럭은 포터의 옆구리를 뭉개는 것으로도 모자라 톨게이트 근처의 대형 가로등에까지 돌격했다. 포터는 가로등과 트럭 사이에 끼여 아주 납작해졌다. 방금 전까지 상호에게 인류애가 건재함을 몸소 보여주었던 중년의 운전수도 저 고철처럼 아주 납작해졌을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의 사고가 예사로운 일이 되어버린 지상의 나락을. 거리에는 수많은 사고 차량이 장기말처럼 버려져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인파 속에서 멈춰있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고 강도짓을 서슴치 않는 사람, 여자를 강간하려 드는 남자를 보았다. 상호는 제 발치까지 굴러온 출처 모를 축구공으로 남자의 머리를 조준해 힘껏 던졌다. 맥없이 쓰러진 남자의 위를 인파가 밟고 지나가는 동안 그 남자가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를 훔쳤다. 주인없는 차로 정체된 도로에서 믿을 거라곤 제 튼튼한 두 다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 기다려요."

고개를 들어 톨게이트 전광판에 투박한 글씨로 출력된 전자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아홉시 사십분. 자전거 전용 거리를 이용하면 열시 전에 병찬을 만날 수 있었다.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타고있던 자전거를 밀치듯 버렸다. 자전거 도로가 끝나는 시점에서부터는 몰려드는 인파 탓에 도보 외에 어떤 수단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여자, 동선이 꼬여 충돌하는 두 남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공허히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노파를 요령있게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쪽 어깨를 들어올려 뺨에 고인 땀을 닦아냈는데 이걸론 여의찮아 티셔츠를 끌어올려 얼굴 전체를 닦아냈다. 그러자 희부윰했던 시야가 한층 또렷해져 덩달아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전에 병찬이 일러둔 프랜차이즈 카페의 상호명이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병찬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걸려온 것이었다.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해 놓고 구태여 흔적을 남긴게 의아했다. 그 근원이 고됨인지 불안인지 모를 기이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전화를 걸었다. 쿵쿵 뛰는 심장이 어느새 고막까지 올라와 있었다. 

"형! 저 도착했어요. 지금 카페 보이니까 늦어도 삼 분 안에 도착해요."

ㅡ 상호야, 이제야 연락이 되네! 다름이 아니라 나⋯⋯.

그러고는 소란한 음성이 뚝 끊겼다. 병찬 형? 형? 다급한 마음에 거듭 병찬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전화가 강제로 끊긴 것 같았다. 제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전부 소모된 까닭이면 차라리 양호한데 내려다 본 액정에는 '통화권 이탈 또는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하는 메시지창만 고고히 빛나며 일말의 기대조차 차단시켜 버린다. 행성이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이상 현상이 하나씩 일어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파 방해라고 라디오에서 얼핏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한때 최첨단의 대명사로서 그 명성을 자랑했을 스마트폰은 이제 한낱 전자식 시계에 불과할 뿐이었다. 남은 일생동안 불행해도 좋으니 평생 배당된 행운의 총량을 지금 이 순간 병찬을 만나는데 쓰게 해달라는 무용한 기도를 이어가며 상호는 달렸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액정이 산산조각 난 스마트폰 하나가 외로이 남겨져 있었다.

역사 근처의 카페에 서서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병찬이 들고 있던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코 앞까지 성큼 다가온 행성은 마치 공간 디자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형물 같았다. 우리가 아주 늦어서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똬리를 틀었지만 행성이 본격적으로 지구에 영향을 끼치는 사정권에 진입할 때 통신 장애가 동반된다고 했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통신이 멀쩡한 이상은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 걱정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병찬은 허브티와 율무차를 샀다. 높은 천장과 앤틱 가구가 중세 서양권의 느낌을 주었던 카페는 이미 그 원형을 잃었다. 떨어져나간 문짝으로 어디서 솟아난지 모를 개와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이미 박살나고 한때 고급 소서가 전시되어 있었던 쇼케이스도 산산조각나 거리의 쓰레기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가게의 점원만이 일상의 루틴을 반복하며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문을 마친 뒤 그녀에게 카드를 내밀었을 때 이제 돈은 받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서야 세상이 멸망하긴 하는구나 싶은 병찬이었다. 

율무차가 식기 전에 상호가 도착해야 할 텐데. 율무차는 식으면 맛이 없고 퍽퍽하니까.

일회용 컵을 양 손에 든 채 거리로 나온 병찬이 출입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볼기로부터 딱딱하고 찬기를 띤 시멘트의 감각이 전해져 온다. 바닥에 부랑자처럼 주저 앉은 병찬에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고, 아무도 알은체 하지 않는 점 하나는 좋았다. 병찬은 그제야 머리를 죄던 캡 모자를 벗어 던졌다. 드러나는 얼굴이 맑고 후련했다.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분침이 막 10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던 병찬이 카페 일층에 난 전면 통창에 낭자한 혈흔 자국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을 삼키며 카페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카운터로 들어가는 통로에 커다란 피웅덩이가 괴어 있었고 그 위로 누군가 쓰러져 있었는데, 뺨을 젖혀보니 예의 그 점원이었다. 병찬은 그녀를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옮겼다. 깨끗한 바닥에 그녀를 눕혀놓고 린넨 거즈로 얼굴을 덮어주는 것만이 병찬의 최선이었다. 사인은 자상이었는데 주위에 떨어진 흉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흉기를 소지한 채로 달아난 것 같았다. 병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저기, 헉, 허억, 여 근처에서, 키 크고 잘생긴 남자, 못 봤어요?"

대전역 카페에 도착한 상호는 출입구 옆 소담스레 놓여 있는 일회용 컵 두개와 캡 모자 따위의 소지품이 병찬의 흔적이라 확신했다. 제 흔적만 놓아둔 채 쏙 증발해버린 그를 정신없이 찾아다니는데 지나가는 행인 중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모른다기 보다는 일분 일초가 아쉬운 와중에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느냐는 식의 역정이었다. 박병찬 선수 봤어요? 그 농구스타요. 급기야 이름 석 자까지 들먹이는 상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무릎을 짚고 숙인 채 숨을 고르는 상호의 시야에 감색의 로퍼 한 족이 들어왔다. 납죽 고개를 드니 거짓말처럼 병찬이 그곳에 서 있었다.

"미안해. 어떤 꼬마가 엄마를 잃었다고 해서 잠깐."

"하아, 하아, 헉, 헉, 형은 진짜⋯⋯ 여전하시네요."

사람의 마음을 여상히 들었다 놓았다 하는 특유의 예측불허를 보니 눈앞의 인영이 신기루가 아닌 실제의 병찬이로구나 싶은 상호였다. 꼭 그런 지문같은 성정이 아니더라도 병찬은 홀로 시간과 정신의 방에라도 갇혀 있다가 며칠 전 나온 사람처럼 변함이 없는 외양이었다. 병찬 정도 되는 사람은 세월도 비껴가는 건가. 상호는 저도 모르게 그를 아래 위로 훑으며 맵시있는 자태에 감탄했다. 상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목덜미를 반쯤 덮는 기장의 머리칼을, 하얗고 동그란 뺨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가도 성숙한 어른의 느낌을 주던 그 성정을 그리워했음을 깨달았다. 그러기도 잠시, 엇갈렸으면 어쩌려고 했느냐는 타박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무용하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마침내 이렇게 재회했으니까.

"소식 다 들었죠?"

"⋯⋯그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늘 현실이 허구를 앞선다더니 이런 걸 두고 그러나보다 싶어."

"무섭지 않았어요?"

"그런 거 보다는 너를 빨리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

"⋯⋯."

"그보단 상호야 일단 한번 안아 봐도 될까? 너 보니까 긴장이 풀려서 똑바로 못 서있겠다."

병찬이 무릎을 짚은 채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녔는지 살짝 젖힌 목덜미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냥 저기 차양에 가서 앉죠. 어차피 멀리까진 못 가고 이 주변은 어딜가나 난장판이에요."

상호는 그의 손을 끌며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허공에 얽힌 두 손가락이 마치 밀랍으로 만든 것처럼 딱딱하고 낯설었지만 이 불편한 감각이 주는 생경함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상호는 여정 내내 그와 재회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건네면 좋을까 고민했고 오년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괴리를 선사했을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곁에서 제 손을 끌어와 손바닥을 꾹꾹 지압해주는 병찬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찬이 "상호야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낯빛이 정말 안 좋아. 너무 걱정돼." 라며 걱정이 잔뜩 묻은 말을 던질 때마다 손바닥을 지압하는 힘도 점차 세졌다. "손이 뚫릴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상호의 미간이 아릿한 통증 탓에 살짝 구겨져있었다. 상호는 혈관을 타고 흐르며 제 몸을 데우기 시작한 활기가 병찬 때문인지 그가 가하는 손아귀 힘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말이야, 여기를 눌러주면 잠시나마 활력이 돌거든. 손바닥 지압으로 호전될 수 있는 증상이 제법 많은 거 알아? 여기를 누르면 소화가 잘 된대. 손가락 따는 거랑은 좀 다른 얘긴데⋯⋯."

상호의 손을 제 무릎에 얹은 병찬이 본격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유수같이 흐르는 말을 오른쪽으로 듣고 왼쪽 귀로 흘린 상호가 병찬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맥없이 응시했다. 희미한 반지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 부분이 유독 도드라진다거나 하얗지는 않은 걸 보아서 웨딩링을 매사 끼고 다닌 건 아닌 것 같았다. 시선을 느낀 병찬이 텅 빈 손가락을 만지며 알은체를 했다. 방금 전의 활기는 허상이라는 듯 채도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세컨드였어."

"⋯⋯."

"와이프, 아니 이제 전처라고 말해야 맞겠지.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 동창이라 하더라구. 지금은 해외에서 둘이 가정 꾸려 살고 있어."

"어떻게⋯⋯."

"아버지 사업이 좀 휘청여서 새로운 투자처가 필요했는데 다들 망설이는 분위기였어. 그런데 그 집 내외가 정말 부자였거든. 흔쾌히 자금줄 대 주겠다 했나봐. 그 집은 명분 찾고 우리집은 투자 받고, 윈윈이었지. 난 그때 너무 지쳐서, 누구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야 싶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막상 세컨드인 거 알게 되고 집안 풍비박산 났을 때도 별 생각 안 들었어. 그냥 나더러 어쩌라고? 싶었지."

"⋯⋯."

"그뒤로 홀로 완전히 나와서 살았는데 그때부터 부모님이랑 거의 절연하다시피 살았어. 당신들 곁에 있으면 그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상호 너랑 헤⋯⋯어진 뒤로 엉망진창일 뿐인 인생이어도 내 거니까 내가 단단히 챙겨야겠다 싶었는데 그러려면 상식이라는 거에서 제일 멀어져야만 하겠더라고."

여기까지 말한 병찬이 고개를 들어 상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상호는 별로 위로를⋯⋯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다만 영문 모를 허탈감만 들 뿐이었다. 고작 그런 사람들 때문에 훼손되고 어그러진 시간들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 까닭이었다. 

"부모님이⋯⋯ 저에 대해서 무슨 말 안 했어요?"

"응, 그냥 종종 요즘 상호 네가 안 보인다고 걱정만.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상호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숨겨야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의 인간이었다. 상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드러내는 해체와 정보의 적축이 아니라 필요할 때에 눈을 가려줄 수 있는 이성의 적절한 발휘였으니까. 상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아이예요. 그냥 옛날에 저 챙겨준 거 생각나고 그래가."

긴 다리를 구깃구깃 접은 채 구부정히 앉아 있던 자세 탓에 슬슬 다리가 저려오고 있었다. 상호가 그렇다면 병찬은 그 정도가 더 심할 것이었다. 한데 불만 하나 없어 뵈는 그의 멀건 낯을 보니 괜스레 속이 탔다. 먼저 일어난 상호가 병찬의 손을 끌어 당겼다. 조금 트인 장소로 나가요. 여기서 뭣도 모른 채 있는 건 싫으니까요. 상호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호를 순순히 따라주는 병찬은 그저 방긋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호와 병찬은 근처 분수대 앞에 나란히 앉았다. 분수는 더이상 솟지 않았고 그새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지만, 이곳을 등지고 보는 시야가 탁 트여있었기 때문에 고른 장소였다. 게다가 원형으로 둘러진 높은 단 덕분에 앉은 자세로도 다리를 펼 수 있어 편했다. 어떤 건물과 조형물로도 가로 막히지 않은 도로의 끝에 녹빛의 행성이 가득 떠올랐다. 하늘과 땅을 경계지었을 지평선은 그 우람한 규모에 가로 막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병찬이 운을 떼었다. 이런 생각 불온할 수도 있는데⋯⋯.

"지금 행복하다고 하면 미친 걸까?"

병찬의 가정사를 들은 직후여서일까 어떤 말을 꺼내도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 까닭에 차라리 침묵을 택했던 상호가 움찔 튀었다. 그의 말이 놀랍다거나 이상하게 여겨진다거나 하는 차원의 감상 때문은 아녔다. 제 머릿속이 그대로 읽힌 사람 고유의 경악이었다.

"⋯⋯그러면 전 지금 미쳤다는 말로도 부족할걸요."

"너는 정말 변함 없구나."

병찬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상호는 그의 말이 옳으며 심지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병찬과 헤어진 뒤로 상호의 삶은 그와의 기억 속에 갇혀 버렸으니 말이다. 누군가 말하길 산사태나 해일 같은 자연이 선사하는 엄벌 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기억 속에 사는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어떤 재앙이나 재해 보다도 무서운 것은 이제는 흐르지 않는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에 갇힌 상호가 그때와 다름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형. 만약에, 아주 만약에요, 이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요, 우리가 만난게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면 어떡해요?"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저는요, 형을 처음 봤을 때 말예요. 도무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상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병찬의 표정을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은 두 손을 둥글게 말아 주먹 쥐었다. 그 위를 병찬의 손바닥이 사붓하게 감싸 왔다. 딱딱한 굳은살과 그와 대비되어 유독 부드럽게 느껴지는 손바닥 살갗이 상호의 손등에 닿았다. 힘을 주었던 손가락이 그의 손길을 따라 하나 둘 부드럽게 펴진다. 그것을 병찬이 위에서 꼭 맞잡았다. 손샅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가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고 있으면 촌각도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니 열 시 오 분이 막 지난 시각이었다. 공기가 전에 없이 달궈져 있었고 인류가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시켰을 기계들은 그 사명을 다했다. 언젠가 도시의 삶에 지친 상호는 기계가 발생시키는 세상의 잡음이 없어진다면 그 세계는 무척 평화로울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한 적 있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비록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상호만큼은 예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야 말로 불온하다고 생각했다.

"상호야, 그거 별로다."

"네? 뭐가요?"

"호칭 말이야. 네가 잘 쓰던 그거 있잖아, 그거."

"아, 햄! 이거요? 너무 오랜만이고⋯⋯ 그 사이에 병찬 혀,햄이 절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고, 그래가."

"응. 난 그게 좋아."

불현듯 언젠가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사정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자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재난 영화였다. 일년 내내 빙하기가 지속되었고 모든 전기가 차단되었으며 지구상의 동식물은 사라진지 오래인 2136년의 서울. 반평생 타인처럼 살아야 했던 자매의 재회는 한 줌의 생존자들이 공동체를 꾸려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서울 외곽의 모 교회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전례없는 규모의 대지진이 대한민국을 덮치고 뒤이어 발생한 쓰나미에 의해 생존자들은 전부 죽게 된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내용이었는데, 이 영화가 유명해진 것은 결말부 10분에서 보여지는 자매의 태도였다. 수평선 너머 덮쳐오는 쓰나미를 발견한 그곳의 생존자들은 숙성 와인과 아껴두었던 시가를 하나씩 꺼내 물고 베토벤의 운명 따위를 들으며 품위를 유지하고 그것이 인간다운 최후라고 믿는다. 밖으로 빠져 나와 교회를 등지고 선 자매는 바다가 잘 보이는 절벽 위에 앉아 그들이 어린 시절 즐겨했던 끝말잇기를 주고 받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상호는 신입생 시절 수강했던 교양 수업의 기말 리포트 작성을 위해 그 영화를 시청했다. 재난 영화라 함에 있어 으레 기대되곤 하는 클리셰 요소가 하나도 없어 중간에 몇 번 졸기까지 했다. 블록버스터인줄 알았는데 흔하디 흔한 로맨스 영화보다 더 지루했다. 그것이 철학을 논하는 예술 영화라는 걸 알게된 것은 빈 종이에 뭐라도 끄적이기 위해 시사 사이트를 드나들던 중 유명 평론가의 기고를 펼쳤을 때였다. 철학과 심리학 용어가 난무하는 그 평론을 해체하듯 읽어 보았지만, 상호는 애당초 속엣말이 많은 편은 아녔기 때문에 종내에는 이런 궁금증만 남았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잘도 저런 말이 나오는구나.

그리고 우리는 형이니 햄이니 하는 호칭의 호오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그것보단 조금 더 나은 말을 건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병찬을 끌어 안고 나누는 내세와 운명에 대한 꿈결같은 다짐과 상호가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대한 애정어린 이야기들 말이다. 한데 고작 추억을 조금 헤집은 게 전부였다.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저 멀리 병자성사를 하는 신부와 그 뒤에 끝없이 이어진 줄 따위를 망연히 보았다. 주위는 인파의 아우성과 저마다의 고해성사로 소란스러웠지만 왠지 물 속에 잠긴 채로 듣는 바깥 세상의 소리처럼 아득히 느껴졌다. 

그간 저를 두렵고 힘겹게 만들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허무하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상호는 지금 이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가장 무용한 일에 골몰하려 애썼다.

"너무 오랜만에 써가 아직 입에 잘 안 붙어요. 다음에는 완벽하게 적응해서 올게요."

응, 꼭. 기대할게. 병찬이 시선을 내리자 속눈썹 모양의 차양이 생겼다. 다음에 또⋯⋯. 상냥한 말투가 이어졌다. 맞잡은 손등 위를 쓸어주는 깃털같은 손길이 선선한 여름 바람 만큼이나 간지럽고 상쾌했다. 우리가 다음이라는 말을 당연히 나눌 수 있다는게 기뻤다. 병찬과 아쉬운 오늘을 반성하고 더 큰 기쁨을 끝없이 미래로 유보하며 다음을 기약하다보면 이 삶은 지속되고 결말 없는 책의 엔딩을 수없이 고쳐쓰듯 영원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호는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맞게 될 무한한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러면 가슴이 은하수의 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그곳으로 떠났다가 귀환한 인류가 전무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에 무섭고 처음 디디는 여정이기에 두렵지만 기대감으로 완성되는 역설적인 감정이었다. 

오래 전 도서관에서 읽었던 서적 하나가 떠오른다. 죽음과 우주와 순환에 대해 여러 과학자와 종교인의 견해를 한데 묶은 과학 월간지였다. 인간은 유형의 육체와 더불어 생각, 감정, 경험, 의식 따위가 집약된 무형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육체가 소멸한들 그 정신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종교적 관점이 인용되었지만 결국 의식의 불멸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궤는 동일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상호는 생각했다. 하지만 병찬을 처음 만났을 때 상호가 느꼈던 기시감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겪는 미지의 감각이었지만 그 마음에는 분명히 실체가 있었다.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지구가 완전히 삼켜지면 우리의 영혼은 우주를 떠돌게 되는 걸까.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켜준다면. 영혼의 근간이 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실체가 없는 마음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수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건 그의 손을 잡을 때마다 목적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던 과거의 젊은 날들로 충분히 증명된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기억함으로써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왠지⋯⋯ 따뜻하고⋯⋯ 졸려요⋯⋯."

"졸려? 형 어깨에 기대서 눈 감고 있어⋯⋯."

어느새 겉면의 질감이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비교적 가까이서 보는 행성은 온색의 아크릴 물감을 뭉텅으로 발라낸 듯한 외견이었는데, 일견 유화의 한 부분을 목도하는 것 같았다. 깊이 패인 크레바스 속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온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이다. 저 멀리서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뜨겁고 건조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노도처럼 몸을 감싼다. 작렬하는 광휘 아래서 두 눈을 꼭 감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눈을 뜨는 날에 무척 보고 싶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또 보자고, 감히 말해도 될까. 지구가 멸망하고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마음일테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희생자가 아닌 순교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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