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상

쿨·못·미

쿨하지 못해서 미안해


경기가 끝나는 대로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갔다. 수시로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나 잔뜩 쌓인 알림들 속에 병찬의 연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읽음 표시가 뜬 메시지 창에는 변화가 없었고 부재중 전화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쁜 상상이 몸집을 불려 갔다. 상호는 병원에 도착하고도 한참 초조한 마음으로 병찬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래 기다렸지."

"병찬햄?"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차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상호가 화들짝 놀라며 문을 열었다. 병찬의 얼굴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를 보자 힘이 잔뜩 들어갔던 두 주먹에 스르르 긴장이 풀렸다.

"햄."

"응?"

"괜찮은 거죠."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들어야 할 이야기 역시 많았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병찬을 보니 말을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상호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겨우 괜찮냐는 물음을 토해냈다.

"얼른 출발하자. 차 엄청 막히겠다."

그런데 병찬은 씩 웃기만 할 뿐 상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 어린 말은 아예 듣지도 못했다는 듯, 불쑥 얼른 출발하자는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상호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병찬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앞을 봤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뒤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상호의 휴대폰에서는 계속 메신저 알림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고, 그 외에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알림 소리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 무렵. 투둑투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창에 맺힌 물방울이 빗줄기가 되어 떨어져 나갈 쯤에 대시보드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 받아?"

"네? 아, 전화요. 받아야죠."

"어머님 전화야."

"지금 받으라고요? 어, 어어. 엄마.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벨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끊기기를 반복하자 결국 병찬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는 직접 연결 버튼을 눌러 상호의 얼굴에 전화기를 가까이 대 주기까지 했다. 받을 거라는 말을 했으면서도 사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 상호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 운전 중인데 이따 하지⋯⋯ 엉? 누나가 그래?"

평범한 안부 전화였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의 통화였지만 상호는 목소리에서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 기쁨이 잔뜩 묻어나는 어머니와 다르게, 상호의 대답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마치 눈치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정도는 아이고. 에이, 처음부터 볼 필요 없다. 그냥 이따 하이라이트 올라온 거 보면 될 긴데."

수원 ST 스피드스터스의 신인 선수 기상호. 그의 휴대전화가 오늘처럼 불이 나도록 울리는 일이란 드물다. 프로 리그에서 상호는 경기에서의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선수기 때문이다. 고교 리그와 대학 리그에서 좋은 평을 받았던 상호였지만 지금껏 그에게 출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상호는 데뷔 이후 첫 정규 리그 개막을 맞고도 코트를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스피드스터스는 연패를 거듭해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오늘은 무려 지난 시즌 챔피언인 부산 조선 제과 티렉스와 수원 ST 스피드스터스의 경기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상호는 드디어 유의미한 출전 시간을 기록했다.

좀처럼 고전을 면할 수 없었던 경기였다. 시작부터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고 그 간격을 도통 좁히지 못하는 가운데 주전의 부상 이슈마저 있었다. 가비지타임이 무척이나 빨리 찾아온 경기였다. 모두가 이미 승부가 났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상호에게 처음으로 코트를 밟을 기회가 주어졌다.

사임 위기에 놓인 스피드스터스의 감독은 기상호 같은 디펜더는 아무 때나 투입하는 용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전술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활용할 수 있다며, 적절한 때가 와야 뛸 수 있는 법이라고 설교하곤 했다. 그래서 상호는 내내 벤치만 데우고 있었다. 그 '적절한 때'는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 맞나. 그래도 다음에는 어떨지 확실치 않아가. 뛰고 싶다고 뛸 수 있는 게 아이잖아."

오늘의 출전은 아주 어렵고도 우연히 얻은 기회였다. 이제 경기에 들어갈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해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상호는 갑작스럽게 빠진 주전의 빈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게임에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절대 헛되이 날려 보내지 않았다. 최고의 디펜더로 클 자질이 보인다는 평. 늘 기대 이상의 변수를 만들어 내는 플레이어라는 평에 걸맞게 상호는 성공적으로 활약했다.

이미 조선 제과에서는 주전의 체력 안배를 위해 반 이상을 벤치 멤버로 교체한 상황. 그 상황에서 상호는 새로운 돌파 지점을 찾아냈다. 게임은 끝자락에 가서는 그럭저럭 접전이라고 평할 만했다. 스피드스터스는 그에 힘입어 크게 벌어졌던 격차를 점점 줄여갔다.수비 스페셜리스트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첫 행보였다.

"응.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까지는 못 바라고."

첫 출전부터 역전승이라는 기적을 만들지는 못했다. 승리는 예상대로 조선 제과가 가져갔다. 결과가 어찌 됐든 오늘은 기상호라는 선수의 입장에서 분명 성공적인 발돋움이었다. 비록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경기는 맥을 추리지 못하던 팀에게 흐름을 다시 찾아갈 기회가 되었다. 관중에게 기상호를 인식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할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병찬햄? 같이 있지. 어⋯⋯ 통화는 쫌 힘들 것 같애. 네. 들어가요. 또 연락하께."

"왜? 형 괜찮은데. 어머님 바꿔 주지. 오랜만에 목소리나 듣게."

"네?"

평소대로라면 잔뜩 들떠 있어야 하는 상호가 이 모든 일에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쏟아지는 축하를 하나도 확인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전화에도 줄곧 시큰둥했다. 기상호는 원래 애교 없는 아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상호는 병찬의 말에 코를 약간 찡그렸다. 무뚝뚝해진 태도는 그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연결해 봐."

"아녜요, 뭘 또. 이미 끊었는데."

"그러지 말고."

상호는 오늘의 활약을 좀처럼 기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계속해서 잘근잘근 깨물고 굳은 표정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병찬에게 딱 잘라 대답하는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됐다고요. 받아서 뭐 좋은 이야기 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기상호의 첫 출전은 박병찬을 대체하며 이뤄졌다.

쿨하지 못해서 미안해

거의 십 년을 사귄 병찬의 부상을 통해서.

"왜 그래 상호야. 오늘 좋은 날이잖아. 아까 얘기 나온 거 보면 어머님도 형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아까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상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번에 안마 의자도 그렇게 좋다고. 이제 막내 며느리 보는 건 안 바란다고 그러시던데? 그러니까 이번 추석 때 완전히 마음 굳히시게 해야지. 병찬이 말을 줄줄 늘어놓는 통에 하려던 말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흩어졌다.

"전화했어?"

"열 번 넘게 했어요."

"그렇네. 아까 전화했었구나. 무음이라서 못 봤네."

"문자는 읽었잖아요. 읽었으면 답장을 하던가, 연락 한 통 없고."

"아, 문자. 미안. 진료 들어가느라 답장 못 했어."

"이유가 참 많네요 그죠."

병찬은 그제야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는 상호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별일 아닌 것처럼 답하는 병찬 때문에 상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병찬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화났어?"

"화 안 났는데요."

아니. 기상호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평정심을 전혀 유지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유일한 장점이라고 여기는 침착함이 바닥난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병찬이 차에 탄 뒤로부터 점점 치밀어 오르는 감정. 그 근원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왜 자꾸 이러는 걸까. 뭐 때문에 이러는 걸까. 갑자기 울컥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병찬은 경기 중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평소처럼 잠깐 쉬면 잦아드는 정도의 통증이 아니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웠고 그는 결국 경기장을 빠져나와 도중에 급하게 병원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상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게임에 투입되어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병찬이 경기장에 없다는 사실조차도 느지막이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자유투 투구를 위해 라인 앞에 선 상호는 그제야 퇴장한 병찬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무릎을 부여잡고 있어야 할 병찬이 벤치에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수건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숙이고 있는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상호는 사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집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무실에 갔겠지 생각하며 그나마 정신을 붙들었는데, 경기가 완전히 끝이 나고서도 병찬은 돌아오지 않았다. 형 ◼︎◼︎병원이야. 그 문자를 받고 나서부터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자 한 통에 기상호는 넋이 다 나가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병원까지 무슨 정신으로 차를 몰고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형 ◼︎◼︎병원이야. 그 짧은 문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박병찬은 기상호가 가슴을 졸이며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았다. 상호를 만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찬은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딴소리만 늘어놓는 중이었다.

"너 화났잖아."

"나올 때 전화 한 번 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까 그랬지. 안 그래도 지금 계속 연락 오는데 굳이 전화할 필요도 없고."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대한 그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괜히 아픈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병찬이야말로 지금 누구보다도 기분이 가라앉았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저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군데요."

"상호야. 알았어, 미안해. 알았으니까 진정해. 앞에 보고."

그런데 박병찬은 계속해서 말을 돌리기만 할 뿐이었다. 상호는 점점 답답해졌고, 부상 입은 그를 옆에 두고 축하 전화까지 받고 나니 더는 모르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상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높아진 언성에는 울음기마저 어려 있었다. 병찬의 부상이 상호에게 주는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왜 자꾸 말 피해요."

"그런 거 아니야.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지금 너 너무 흥분했어."

병찬이 어린애 달래듯 말했다.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찬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차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창 속에 비친 상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차 안에서 한마디도 더 나누지 않았다.

"언제부터 아팠어요."

"뭐?"

"언제부터 아팠냐고요. 오늘만 아팠던 거 아니죠?"

현관문이 쿵 소리를 내면서 닫히자마자 상호가 말했다. 신발을 벗고 있던 병찬이 그 말에 뒤를 돌아봤다. 상호의 목소리는 마치 취조하듯이 들렸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질문이 꽤 공격적이라고 느껴졌다. 병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연애만 해도 십 년이 가까워지는 두 사람이다. 병찬은 상호가 저를 아는 만큼이나 상호를 잘 알았다. 농구를 계속할지는 모르겠어. 당분간 뛸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상호는 위로나 격려에는 재능이 없어서 그런 말에는 다른 주제를 꺼내곤 했다. 아주 오래 전 조형고의 체육관에서처럼 말이다.

"상태 안 좋으면 무리해서 강행하지 말았어야죠. 햄이 뭐 고등학생이에요?"

"기상호."

"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야기할 생각 없어 보여서요."

"다친 건 난데 왜 상호 네가 화를 내고 난리야."

"화난 거 아니라니까요?"

병찬은 그런 상호 나름의 배려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심 상호가 오늘도 다른 말을 꺼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날 슛을 봐달라는 말을 꺼냈던 것처럼. 또 보자는 말로 지금의 박병찬을 있게 한 것처럼. 뭐든 좋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호는 더는 열여섯의 기상호처럼 굴지 않았다. 상호는 계속해서 병찬을 몰아세웠다.

"그냥. 왜 뛴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래요. 아침부터 컨디션 안 좋았죠?"

"참 나⋯⋯. 어, 그래. 맞아. 컨디션 안 좋았어."

"그런데 왜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뛰다 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거든."

"그게 말이 돼요?"

갑작스러운 부상에 놀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자신을 추궁하는 상호에게 치미는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마른세수를 한 병찬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답답했다. 마치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호 넌 크게 다쳐본 적 없어서 몰라. 언제 갑자기 이럴 줄 모른다고. 괜찮다가도 다치는 일이 수두룩한데 그게 무섭다고 안 뛰면 선수 생활 어떻게 하라고. 다칠 거 알았으면 나도 알아서 안 뛰었지. 내가 이런 변명을 왜 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병찬의 목소리는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상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상호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모처럼 좋은 일도 있었는데 부상에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병찬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상호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오늘 잘만 뛰었는데 왜 자꾸 그래."

"몇 분이나 뛰었다고요."

"아까부터 계속 틱틱거리잖아. 형도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까 그만하자 이제."

"아까부터 계속 그만하자고만 하고⋯⋯."

둘은 현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말꼬리를 잡는 상호가 이렇게까지 피곤할 수는 없었다. 시작된 말싸움은 몇 번이나 원점으로 복귀했고, 결론이 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병찬은 그저 오늘 하루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상호는 이 논쟁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상호. 너 대체 뭐가 불만이야.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서 화풀이냐고! 너 그냥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대체 기분이 왜 안 좋은 건데? 오늘 잘 했잖아. 어머님도 그렇게 좋아하시더만. 나더러 뭘 더 어쩌라고. 이런다고 형이 다친 게 나아지기라도 해?"

참다못한 병찬은 결국 버럭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다치고 나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오늘은 상호가 준수한 성적을 거둔 날이니까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상호에게 곧이곧대로 짜증을 부리는 것보다 기분을 전환하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참고 억누르려고 노력해도 기상호가 하도 속을 살살 긁어오는 통에 어쩔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화 안 내려고 했는데."

"⋯⋯."

"형이 상호 사랑하는 거 알지. 나 정말로 너랑 싸우기 싫어."

"그런데 왜 말을 안 해요. 저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고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서 병찬은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상호의 어깨를 붙잡고 아까보다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사과를 해 봤지만, 입술을 꾹 다문 상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병찬이 상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끌어안으려고 하자 상호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오늘 왜 다친 건지. 어쩌다 다친 건지. 아니 애초에 경기를 왜 뛴 건지도 모르겠고. 내는 왜 햄 다칠 걸 못 알아차렸는지 모르겠고. 아까부터 계속 상태 어떤지 말을 안 하잖아요. 왜 그러는데요? 이번 시즌 더 못 뛰어요? 큰 수술 해야 되는 거에요? 얼마나 상태가 나쁘길래 이렇게 계속 말을 돌려요."

병찬의 가슴팍을 밀어낸 상호는 목이 메인 채로 말했다. 말하는 도중에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그러다 상호는 결국 말이 끝나는 대로 엉엉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상호는 원래 이렇게까지 구는 녀석이 아닌데도 그랬다.

상호가 연인 사이에 아주 사소한 비밀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박병찬을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다. 병찬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굳이 갈등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병찬의 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상호가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병찬이 상호를 처음 만난 날 다시 무릎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간절한 건 기상호도 마찬가지였다. 코트 위에서 처음 만난 병찬을 다쳤다고 해서 봐주는 것도 이상했고 말이다. 그렇지만 박병찬이라는 사람을 알아가면서, 기상호는 재발한 병찬의 부상에 어느 정도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뭐길래 말을 못 하는데요."

사귀게 된 뒤로 병찬이 수술과 재활을 거치면서 고생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봐 왔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의 사건에 병찬은 오히려 담담했지만 그의 부상은 상호에게 단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상호는 숨이 가빠져 조금 씩씩대기까지 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냥, 그냥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한두 달은 못 뛸 것 같대. 쉬는 것도 그래봤자 얼마 안 돼."

"그리고요."

"그리고⋯⋯. 수술은 시즌 끝나고 하기로 했어. 진짜 이게 다야."

계속 말을 돌리던 병찬이 결국 사실을 이야기했다. 수술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엉엉 우는 상호를 앞에 두고 더는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축축해진 상호의 뺨에 손을 가져가더니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상호를 다시 끌어안아야 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 응?"

"⋯⋯."

"기상호. 그만 울라니까."

"정말 햄이 아픈 걸 왜 못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몰랐는데.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숨을 내쉬는 병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덩달아 감정이 격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험악해졌던 분위기가 누그러들었다. 상호는 병찬에게 안긴 채 말했다. 병찬은 상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면서 대답했다. 상호의 마음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이상 열심히 해. 너한테 기회가 생긴 거잖아."

"팀에 민폐는 안 끼치게 할 거지만⋯⋯. 그래도 제가 얻어낸 기회는 아닌 걸요. 전 햄이랑 코트 위에서 나란히 뛰고 싶었던 거지, 이런 식으로 경기하고 싶었던 적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어차피 경기 들어가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 거 알잖아. 내가 못 뛰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뛰어야 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있었는데 상호 네가 뛰게 된 거고."

언제나 상호는 자신에게 야박하다. 좋은 일이 있어도 절대 제 덕으로 돌리는 법이 없었고 반면 나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자신을 탓하곤 했다. 오늘의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상호는 오늘의 공로를 단지 병찬을 대체한 것으로만 생각했고, 부상의 징후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본인에게 책임을 돌렸다.

"자책하지 마. 형이 말했잖아. 상호 너 그렇게 재능 없는 것도 아니라고."

"알았어요."

그건 앞으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을 버릇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호는 병찬의 말에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내 주면서 병찬은 깨달았다.

이런 녀석이 오늘 제가 퇴장하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초조한 가운데 연락이 되지 않는 제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불안을 없애주기는커녕 말을 돌리는 자신이 얼마나 야속했을지.

"나도 앞으로는 아픈 거 안 숨길게. 너한테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이러나 봐. 항상 멋진 형일 수만은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래."

"햄 충분히 멋진데⋯⋯."

"이런 꼴 다 보고 나서도?"

아프다는 말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상호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 약한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병찬햄은 언제나 멋있는걸요⋯⋯."

상호가 중얼거렸다. 푸핫. 정말로? 병찬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상호의 말에 안도했다. 안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질거리고 애틋한 기분이 들어 병찬은 미소 지었다.

"저도 화내서 죄송해요."

"아니야."

"냉정해질 수가 없었어요. 햄이 다쳤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어요."

상호의 말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서로에게 사과하고 나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런 둘은 눈을 마주치고는 속절없이 입술을 붙였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불붙었던 싸움은 얼마 가지 않아 애초부터 없었던 일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신발만 겨우 벗은 채 다투던 두 사람은 금세 침대에 도착해 있었다. 상호는 병찬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고 병찬은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햄 언제 엄마한테 안마의자를 보냈어요? 왜 엄마가 나한테 말을 안 했지?"

"형이 비밀로 하라고 그랬어. 알면 또 왜 보냈냐고 닦달할 거잖아."

"아니, 그게. 보내는 건 좋은데 너무 빈번하다는 생각 안 해요?"

"그게 뭐 어때서. 형은 아직 점수 더 따야 돼."

상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까는 다른 생각에 매몰되어 있느라 병찬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넘겼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병찬은 보고 있던 영상의 재생을 멈췄다.

"누나한테 가방 사 주고, 형한테는 컴퓨터 사 주고. 햄 이렇게 물량 공세 하는 거 비겁해요. 저는 아직 신인이라 햄 친정에 뭐 해 드릴 수도 없는데!"

"상호 네가 얼른 활약해서 돈 많이 벌면 되지."

"아니야. 이상해. 이쯤 되면 엄마아빠가 약간 일부러 반대하는 척 한 거 같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아니, 반대할 거면 계속 반대해야지 왜 갑자기 박 서방이래?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니까요."

"음⋯⋯. 그런가. 아닌 거 같은데."

"진짜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약간 의심되는데."

상호가 갑작스럽게 제기한 의문에 병찬은 큭큭 웃었다. 아니야. 그때 아버님이 형 죽이려고 한 건 진짜였어. 상호 네가 울면서 말리던 거 아직도 생생한데. 아 그른가. 반대하기엔 너무도 큰 돈이었다 이런 건가. 상호가 중얼거렸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상호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내일 전화해서 물어봐야겠어."

"상호야."

"네?"

"한 번 더 하자."

"안 돼요. 햄 빨리 나아야죠."

"응? 상호야아."

"유혹하지 마요. 제가 어떻게 참냐고요 이걸."

기상호 앞에서 박병찬은 멋있을 수 없고 박병찬 앞에서 기상호는 냉정해질 수 없었다. 쿨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두 사람은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었던 법. 마냥 멋있고 싶은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정말로 멋있어 보였고 쿨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쿨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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