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공격이 전체공격에 2회공격인 상호는 좋아하세요?
그런데 데미지가 왜 기상호한테도 들어가는 것 같지?
"저 햄 좋아해요."
양 뺨과 코끝까지 빨개진 상호가 입김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한참 손끝만 만지작거리던 끝에 용기를 낸 거였다. 제 마음을 처음 제대로 병찬에게 털어놓는 순간, 차마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병찬의 발끝에 고정하고 있었다.
"형도 상호 좋아하지."
"아, 그게,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랬던 상호가 돌아온 병찬의 대답에 고개를 확 쳐들었다. 거절은 예상했지만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상호는 씩 웃은 병찬을 보고는 다시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얼버무리는 말끝에 난처함이 묻어났다.
"형은 지금처럼만 지내면 좋겠어. 이해하지?"
"아⋯⋯. 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인천까지 왔는데 형이 사 줘야지."
이런 식으로 무마될 줄은 몰랐다. 병찬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상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상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병찬은 상호의 어깨에 걸친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상호를 끌어안았다. 어깨동무를 한 채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병찬과 다르게, 상호는 온몸이 심장에서부터 얼어붙는 듯했다.
"나중에 상호 너 대학 가면 이런 소리 안 나올걸?"
뭐 먹을래?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펼친 병찬은, 아주 일상적인 말을 하듯이 상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주눅 든 상호가 작게 답했다. 상호. 여자친구 사귀어 본 적 없다고 했지? 끄덕끄덕. 그래서 그래. 네가 연애를 안 해 봐서. 병찬은 완곡하지만 동시에 아주 단호하게 상호를 거절했다. 이거 맛있겠다 그치. 그래 놓고 그는 쭈뼛거리고 있는 상호가 민망할까 봐 먼저 말을 꺼내 준다.
"형처럼 되고 싶다며? 형처럼 되고 싶은 거랑 형이랑 사귀고 싶은 거랑 헷갈리는 걸 거야. 종종 그런 애들 있거든."
괜찮아. 몰라서 그런 거니까. 네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래. 상호는 가만 듣고 있다가 갑자기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병찬은 허겁지겁 놓인 티슈를 뽑아 상호에게 건넸다. 왜 울고 그래. 아니, 아니에요⋯⋯. 상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하며 눈물을 꾹꾹 눌러 찍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종종 그런 이들이 있다는 말만 안 했어도 햄의 거절을 받아들였을 텐데. 기분이 완전히 바닥 끝까지 처박혔다.
협회장기에서의 첫 만남 그리고 조형고에서의 합숙 훈련. 스쳐 지나가듯 만난 것뿐인데 그날 이후로 기상호는 박병찬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첫 출전과 첫 수비. 확신이 없으면서 뱉어 버린 또 보자는 말까지. 그렇다고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얼마 정도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우상이었다. 초고교급의 실력에 눈물 없이는 못 듣는 사연까지. 상호는 병찬을 마치 만화 캐릭터 덕질하듯 좋아했었다.
그와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병찬햄: 상호 오늘 경기 잘 했어?
[그럭저럭요...]
병찬햄: 왜 그럭저럭이야 ㅋㅋㅋ
[막는다고 다 막는데 넣는 족족 다 들어가서]
[교체될까 봐 긴장했어요]
병찬햄: 그러면 멘탈 나가지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
병찬햄: 이제 내 기분 알겠지
[아 햄~~ ㅠㅠ]
박병찬은 타고나길 인싸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도 대화를 술술 이어 나갔다. 회복하기까지는 집 밖 산책도 하지 말라고 하지, 남는 시간은 많은데 대화할 상대는 농구부원들 뿐이라며 병찬은 상호에게 먼저 연락해오기도 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도 과연 병찬햄이 답장을 해 줄까 의심했던 상호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병찬은 귀찮을 텐데 상호의 문자에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상호의 고민을 들어 주었고, 상호의 기분에 공감해주었다. 기상호는 자신에게 잘 대해 주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학교 형들보다 자연스레 더 병찬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기상호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했고, 박병찬은 정말로 친절하니까.
햄 슬램덩크 보셨어요? 이번에는 송태섭이 주인공인데 재밌더라고요 ㅎㅎ
병찬햄: 어 재밌더라~~
근데 저는 기대했던 장면이 별로 안 나와서 약간 아쉽...
병찬햄: 그래? 난 만화책도 몇 권 안 봐서 내용도 잘 몰라
상호는 어떻게든 병찬에게 말을 붙이려고 안달이었다. 시답잖은 것이라도 뭐라도 말을 꺼낼 만한 이야깃거리가 생기면 곧바로 문자를 보내기 일쑤였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그 대화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부족한 나머지 상호는 금세 할 말이 동나 어쩔 줄 몰라 했다.
병찬햄: 근데 정우성이랑 한 번 붙어보고 싶더라
와 세계관 최강자끼리의 대결이네요
병찬햄: 누가 이길 거라고는 말 안 하네?
상호가 민망하지 않도록 끊어진 흐름을 이어주는 건 병찬의 몫이었다. 아마 병찬은 정말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엉뚱한 소리만 하고 관심 없는 주제로 계속 말을 붙여 오는 상호를 다 받아 주기란 어려웠으니까.
나중에 병찬은 진작 대학에 간 또래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상호가 생각하는 만큼 주위에 친구가 많지는 않다고 설명하면서. 상호는 그제야 병찬의 친절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학교도 아닌 후배에게 그렇게 잘해 줄 이유는 없었다.
[상호 넌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요?"
[귀엽잖아. 이런 동생 있었으면 형아가 끝내주게 예뻐해 줬지.]
"에헤헤. 아, 헉! 병찬햄. 저 이제 숙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응?]
"벌써 시간이⋯⋯. 오늘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어요!"
[하하. 그래, 나도. 얼른 들어가. 또 심심하면 전화해.]
어쨌든 상호는 계속 병찬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준수 햄도 쓰는 서울말이지만 유독 간지럽게 들리는 병찬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러다가 경기에서 잠깐이지만 다시 병찬을 만나게 되니까 그를 향한 호감은 걷잡을 줄을 모르고 더욱 커져 버렸다. 자꾸 다음이 기다려졌다. 다시 같이 농구 하고 싶고, 또 멋있는 병찬 햄한테 한 번 더 가르침을 받고 싶고. 병찬 앞에서 상호는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병찬햄 빨리 보고싶어여 ㅠㅠㅠ
병찬햄: 상호 너 형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ㅋㅋㅋ
병찬햄: 우리 학교 애들도 안 이러는데
병찬이 장난스럽게 툭 던진 말을 곱씹어 보게 되면서 상호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그런가? 내가 병찬햄을 유독 많이 좋아하는 건가? 자꾸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병찬햄은 잘생겼고, 농구도 잘하고,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 아이가? 그러니까 계속 같이 있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런 기지⋯⋯.
그치만 뽀뽀도 할 수 있을까? 글쎄. 손이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잡고 싶을 것 같기도 하고.
명확한 확신이라고는 없었는데 머릿속에서 자꾸만 진도가 나갔다.그렇게 아기상호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별거 아닌 말에 두근대서 잠을 설치기도 하고, 종일 병찬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집중을 못 한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혹시 제 마음을 들킬까 종종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농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시간도, 마침내 확신을 얻었을 때에도. 상호는 병찬과 같은 코트에서 뛰게 되기를, 언젠가 그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길 고대했다.
그러다 열여섯의 (기상호는 꿋꿋이 자신이 열일곱이라 주장한다) 겨울에 겨우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졸업할 때쯤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병찬이 시간이 빌 것 같다고 한 날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개봉도 미루고 상호는 기차에 올랐다.
신난 걸 감출 수 없는 얼굴로 한껏 들뜬 채 내렸던 기차역 플랫폼에 상호는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돌아와야만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고백은 아주 간단히 반려되어 버렸다. 병찬은 어른인 척이란 척은 다 해가며 상호의 감정이 착각임을 말했고, 상호는 반박 한 마디 해보지 못했다.
"다시 잘 생각해 볼게요. 킁. 정말 제가 착각한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추우니까 형이 역까지 데려다줄게."
기상호가 좋아하는 박병찬은 정말로 상냥하고 또 너무나도 잔인했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의 기차. 옆자리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상호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의견을 굽히지 않은 것이 너무도 후회됐다. 다시는 못 보게 되더라도 확실히 할 걸 그랬나 보다. 속이 다 쓰렸다. 오랫동안 준비한 고백이었는데 이토록 간단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부산역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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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런 상황을 많이 경험해본 듯,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긴 했지만 박병찬이라고 해서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건 아니었다. 또한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병찬은 상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크게 당황해 버렸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 닥칠 걸 꿈에도 몰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서도 말이다.
아무래도 그놈의 합숙 훈련이 문제였나 보다.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에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의 분위기는 정말 묘했다. 병찬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상호가 이런 착각을 하게 만들게 충분했다. 단지 친한 형인 박병찬과 사귀고 싶다거나 하는 착각을 말이다.
아기상호: 햄은 세리머니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기상호: 저희 햄들은 꼴값 떨지 말라는데 솔직히 로망이잖아요 ㅇㅈ??
아기상호: 저도 좀 이런 식으로 세리머니를 해 볼까 함
합숙 훈련 이후로 상호는 대놓고 친해지고 싶은 티를 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자꾸 연락을 해 오곤 하면서. 답장하지 않고 메시지를 넘겨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고 보내는 유튜브 링크. 상호가 보낸 영상을 보면 평소에 어떤 걸 좋아하고 뭘 보는지 훤히 알 수 있어서 웃음이 났다.
아기상호: 햄 레이업 할 때 자꾸 미스가 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기상호: 오늘도 슛없는 아기상호라고 놀림받았어요 ㅜㅜ
너희 팀에 잘하는 애 있잖아. 이상하게 그날 밤 체육관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한 사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평범한 대화인데, 상호와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병찬은 상호와 아주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박병찬이 일방적으로 기상호를 상대해 준 건 맞았지만 병찬 역시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부산에 도착했다는 말을 끝으로 상호는 연락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그냥 서서히 멀어지게 되는 건가. 차라리 상처를 주지 않고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맞겠다 싶으면서도, 막상 기다리게 되곤 했던 상호의 문자가 없으니까 허전했다. 대충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미리 끊어내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하마터면 그렇게 영영 모르는 사이로 남을 뻔했다. 병찬은 대학 입학 전까지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상호의 고백을 분명 듣긴 했지만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끝내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상호도 착각일 거란 제 말을 납득했으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병찬햄: 상호 잘 지내? 형이 요즘 바빠서 연락을 못 했다
병찬햄: 다음에 희찬이랑 형네 경기 보러 와야지
실연의 아픔을 호되게 겪고 있던 상호는, 그날도 북받친 감정에 엉엉 울다가 태성이 깎아 준 사과를 훌쩍거리며 아삭아삭 씹어먹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온 연락에 사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휴대폰을 집어 든 상호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제 뺨을 짝 내리치기까지 했다.
"저게 드디어 미쳤나⋯⋯."
태성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은 상호가 큼큼 헛기침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첫사랑에게 거절당한 뒤 상호는 혼란의 시간을 거쳐 어느새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을 굳건히 쌓은 채였다. 하지만 고백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병찬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기상호가 더 아쉬운 입장이니까 말이다. 둘의 사이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전처럼.
상호: 햄 보고싶어요
그런다고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박병찬은 기상호가 무슨 말을 하든 의식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전처럼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상호: 히차이도 햄 보고싶대요
깜짝이야. 나는 또. 그런⋯⋯ 의미로 한 말인 줄 알고. 상호 덕분에 힘든 시기에 위안을 많이 받았던 만큼 상호와 계속 잘 지내고 싶었다. 상호의 고백을 차마 받아줄 수는 없어서 거절했지만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만큼 말이다.
"준수 넌 연애 같은 거 안 하냐?"
"연애할 시간이 있어야죠. 연애할 사람도 없고."
"그런가? 그래도 너 인기 많잖아. 마음만 먹으면⋯⋯."
"형 누구 만나려고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병찬은 상호와 아슬아슬하고 미묘한 사이를 계속 이어갔다. 상호가 자신을 아직 좋아하는 건지 긴가민가해 하면서 말이다. 상호도 나름 이전처럼 굴어 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는데, 미처 숨기지 못한 것 같은 감정이 가끔 삐죽 튀어나오곤 했다.
"넌 네가 좋아하는 사람 만날래, 너를 좋아하는 사람 만날래?"
"글쎄요⋯⋯."
병찬은 상호가 자신을 많이 좋아한다는 걸 느낄 때마다 기분이 오묘해지곤 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감정. 기분이 나쁜 건 절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마냥 반갑지도 않았다. 박병찬은 기상호를 절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상호에게 받는 애정을 되돌려줄 수는 없었다.
"저도 그 사람 좋아하고 그 사람도 절 좋아해야 만나지 않을까요."
"오~ 양보 못 한다 이거네?"
"그쵸, 뭐."
준수는 낯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맞아. 준수 네 말이 맞지. 누구 한 쪽만 좋아해서는 관계가 발전할 수가 없긴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병찬은 계속해서 여지를 주고 있었다. 제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 분명한 상호를 끊어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으면?"
"아니면 아니라고 딱 선을 그어야죠. 아님 호감 있는 거죠."
"그런가?"
싫지 않다는 건 상호에게 커다란 희망을 심어줄 소식이었다. 아마 상호가 그 말을 들었다면 그럼 언젠가 좋아질 수도 있는 거겠네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박병찬은 성준수의 말대로 실제로 몇 번만 더 쓰러트리면 넘어갈 나무이기도 했다.
"여보세요?"
[병찬햄! 저 아까 연습이 다 안 끝나서 전화 못 받았어요.]
"아 그래? 형 부산 내려왔거든. 준수랑."
[정말요? 준수햄이 이야기가 없어가⋯⋯.]
"내일 감독님이랑 찾아뵌다던데. 아무튼 토요일에 할 일 없으면 희찬이랑 셋이 볼까?"
[네! 희차이한테 물어보고 이따 문자하께요.]
대학농구 U-리그 예선이 끝나갈 무렵. 은사님을 찾아뵙는다는 준수의 말에 냉큼 같이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 병찬은 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생활을 하느라 바빠 정신이 팔려있는 터라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상호를 만나면 어떨지 생각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였다.
"대학 생활은 어때요? 진짜 막 프로 선수들도 만나고 그러나?"
"온다고는 한다더라. 아직은 못 만나 봤어."
"햄 여자친구 사귀었어요? 쌍호랑 내기했는데."
"야 이 자식아, 여친은 무슨 여친이야. 없어. 운동하기도 바빠죽겠는데."
"진동벨 울린다. 제가 갔다 올게요."
"어? 어어. 그래."
"병찬햄 미숫가루 라떼 맞죠?"
희찬이 미지의 대학 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걸 하나하나 다 이야기해 주는 도중에, 병찬은 상호가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호는 어딘가 가라앉은 것 같아 보였다. 상호는 병찬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톱만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벨에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떠 버렸다.
"상호 기분 안 좋대?"
"쌍호요? 아뇨? 아까 엄청 신났던데. 서면에서 논다고."
흔쾌히 알겠다고 하면서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상호의 목소리에서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기상호는 아직 박병찬을 좋아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찬이 갑자기 들이닥쳐 버린 거였다.
"일 학년이 여친 만난다고 연습 짼 거에요. 그래가 태성햄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뒤늦게 눈치채고 나서부터는 병찬 역시 조심스러워졌다. 들떠 있던 분위기는 자연스레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찬은 인정해야만 했다. 박병찬은 기상호를 마냥 전처럼 귀여운 동생으로 볼 수가 없었다. 원래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닌 상호는 입을 다물고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고, 병찬 역시 상호의 상태를 살피느라 집중하지 않자 대화를 이끄는 건 온전히 희찬의 몫이었다.
"어쩌죠? 누나가 강아지 아프다고 집에 빨리 와 보라는데."
"얼른 가 봐. 오늘은 상호랑 놀고 형 올라가기 전에 다시 보자."
"네! 들어가세요 햄!"
분위기 메이커가 퇴장해 버리자 남은 두 사람에게는 하염없는 정적만이 남았다. 어색한 상태로 서면 길거리에 버려진 병찬과 상호는 바쁘게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카톡 문자 전화 다 괜찮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건 예전처럼은 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 전에 만화 카페 같이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 투움바 라면인지 맛있다며."
"여기까지 와서 만화 카페는 쫌⋯⋯ 그렇지 않나."
전처럼 허물없이 상호를 막 끌어안고 짜식아 형아가 버릇을 고쳐주마 꿀밤을 때릴 수도 없었다. 기상호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사춘기 소년이고, 자신이 짝사랑 상대라는 걸 박병찬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표정이 안 좋고, 눈치를 보고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상호에게 어떤 게 해결책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가.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할 만한 거 좀 찾아볼 걸 그랬네요⋯⋯."
한 번 차이고도 마음을 접지 못한 기상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더 잘생겨지고 어른 태가 나는 병찬을 보자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짝사랑하는 형을 다시 만나니까 이전의 결심은 어디로 가고 마음 같아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귀어 달라고 읍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겠지.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될 거다. 병찬은 이미 상호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박병찬 나름의 배려라는 것도 모르고, 상호는 자신에게 그가 벽을 치는 것만 같아 괜히 서운해졌다. 속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니 눈물이 또 날 것만 같았다.
침울한 표정의 상호를 보면서 병찬은 난감해졌다. 상호는 기분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았는데 직감적으로 지금 여기서 헤어지자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집에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정적을 견딜 수도 없고. 어떻게든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이 온통 깜깜했다.
"형 오랜만에 오셨는데 죄송해요."
"형?"
"네. 형. 왜요?"
"왜 이제 햄이라고 안 하고."
"아."
상호는 건조한 표정으로 병찬을 바라보았다가 아차 놀랐다. 병찬은 정말 서운해졌다. 사실 아까 만화 카페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할 때부터 그랬다. 언제는 서면에 그 큰 만화방 짜파게티랑 투움바 신라면이 죽인다고 살찔까 봐 자주는 못 먹지만 햄이랑은 꼭 같이 가보고 싶다더니. 그렇게 말했던 게 선명한데 말이다.
"햄이부산온다했을때 보고싶으니까오라고했는데 막상햄만나니까 어떻게행동해야할지도모르겠고 예전만큼우리가친한건지도모르겠고 형도저불편하신거같고 그래서 그래서 그래갖고 형이라고 부른거에요 절대절대절대로 병찬햄이싫어지고 거리두고싶어서그러고 그란게아이고⋯⋯."
상호는 입술을 벌렸다 뭐라 말하려고 주저하더니 그대로 왈칵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본심을 털어놓았다. 병찬은 상호가 자신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그렇다 치지만, 둘은 아직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에 서 있는 채다. 하필 머리 하나 더 튀어나와 눈에 띄는데 울기까지 하니 둘에게 시선이 전부 집중되었다.
"저 아직도 병찬햄 좋아해요. 그때 착각이라고 했는데 햄이, 그래서, 그래서 저도 착각일 거라고. 차라리 착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인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어요."
병찬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상호의 축축해진 얼굴을 엄지로 연신 닦아내 주었다.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고백이 이어지자 병찬은 심장이 아주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병찬에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상호는 딸꾹질하며 병찬의 손을 밀어냈다.
"사, 상호야 나는."
"⋯⋯."
"형은 네가 불편한 게 아니고. 네가 혹시 마음 상할까 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상호가 고개를 돌려 감정을 추스르는가 싶더니 자리를 피했다. 박병찬은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주위에 눈도 많았고 귀도 많았는데 성큼성큼 멀어지는 기상호를 멈춰 세워야 해서 그 어떤 시선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 동성 커플로 보겠지. 우리는 그냥 선후배 관계인데. 그런데 지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상호야. 잠깐만 멈춰 봐. 이야기 좀 하자."
"저 착각 아니에요. 저 정말로 햄 좋아해요."
그나마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상호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은 그쳤지만 벌게진 눈이니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언제라도 다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무슨 동정심에 호소하는 전략인가. 병찬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한숨을 뱉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상호 너는 그럼 형이랑 뭘 하고 싶은 거야. 형이랑 사귀고 싶은 거야?"
예전처럼 착각이라는 말로 훈수를 두고 없는 일로 포장할 수 없었다. 더는 그렇게 무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보니 피 맛이 났다. 난 햄이랑 뭘 하고 싶지? 막연히 박병찬이 좋다고만 생각했지,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모르겠어요. 그냥 지금처럼 대화하고, 전화하고, 가끔 만나서 손도 잡고."
"⋯⋯."
"그냥 그게 다인데. 뭘 더 하고 싶어야 해요?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푸핫."
상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우는소리를 했다. 그냥 사귀어 주면 안 돼요? 그런 말을 하려는 찰나 병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그를 쳐다보면 커다란 손이 머리칼을 온통 흩뜨려 놓았다. 너 아직도 이렇게 애 같아서 어떡할래. 돌아온 말에 상호의 어깨는 다시 축 처졌다.
"손."
"네?"
"손 잡아 주겠다고."
"아, 어? 네?"
"무르기 전에 빨리 잡아."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렇게 어린애 취급을 당하고 그대로 영영 병찬과 이별인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무를 수도 있다는 말에 상호는 동아줄 잡듯 병찬의 손을 움켜쥐었다. 박병찬보다 조금은 더 큰 기상호의 손이 그를 감쌌다. 일단 손을 잡기는 잡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서 상호는 눈만 끔뻑 끔뻑거렸다.
"형 남자 만나 본 적 없어."
한참 손을 붙잡고 마주 보고 서 있다가 병찬이 드디어 입술을 뗐다. 어떠한 결심을 마친 모양이었다. 상호가 신경 쓰이고 안쓰럽다고 해서 사귀어 주어서는 안 되는데 박병찬은 어째서 그러기로 한 걸까.
"저, 저도요."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자고 할 수도 있고."
"네⋯⋯."
상호는 서럽게 울었던 건 언제냐는 듯 뺨을 붉히고 부끄럽게 웃었다가 병찬의 말에 풀이 또 죽었다. 말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꼴이었다. 병찬은 상호를 가만 쳐다보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는데 확신이 없다는 말을 하는 순간 어느 정도 형체가 갖춰졌다.
"그래도⋯⋯. 나도 상호 네가 좋은 것 같긴 해."
안쓰럽고, 신경 쓰이고. 바보 같은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고 너랑 이야기할 때 재미있고. 네가 나 좋다니까 거절을 못 하겠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면 구차해 보일 것 같아서 말은 줄였다. 그래도 상호에게는 그걸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축 처졌던 텐션이 다시 확 살아난 걸 보면.
"햄 근데 저 하고 싶은 거 생겼어요."
"뭔데?"
"저 뽀뽀하고 싶어요."
"안 돼."
병찬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세가 살아난 상호는 금세 까불기 시작했다. 이 순간 기상호는 절대 제 고백을 후회하지 않았다. 일단 지르고 봐야 하는구나.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구나. 상호의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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