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5화

프라이에 도착

기사들은 두코의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려던 건 간신히 막았지만 그뿐이었다. 미동도 없는 몸은 축 늘어진 채 그들에게 붙들려있었고, 누구도 그 몸을 뒤집어 얼굴을 확인해보자고 말하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건 아페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두코의 앞에 섰다.

“….”

무언가 말하고자 입을 달싹였지만, 아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뻐끔거리던 입이 굳게 닫혔고 그새 아페를 따라잡은 크로마가 늘어진 시신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크로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단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로마는 계속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활을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걸어간 크로마가 두코를 마주 안으며 받아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두코의 몸을 뒤집어, 반쯤 뜨인 눈을 감겨주었고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감쌌다. 두코를 안아 든 채 천천히 일어난 크로마는, 적막한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고 말했다.

“저하께선 주변 정화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입술을 짓씹고 있던 아페는 조용히 ‘네’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기사 중 몇은 크로마를 따랐고 나머지는 아페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충격에 빠져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으니 실질적으로 일을 한 사람은 아페와 크로마뿐이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크로마의 전언에 따라 두코의 막사에 도착한 아페는, 온갖 신성 도구들에 둘러싸인 시신을 보고 크로마에게 물었다.

“냉각 기구들을 다 모아온 건가요?”

크로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속에 자는 것처럼 누워있는 두코의 상체엔 흰 천이 덮여, 얼음 기둥이 낸 구멍을 가리고 있었다. 아페는 관 옆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곧이어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하며 치맛자락을 세게 쥐었다.

“미래를 알고도 바꾸지 못했어요. 대비를 분명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 했어. 당신도, 미들 부인도, 어째서 구할 수 없었던 걸까요.”

애써 눈물을 참던 아페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이제는 물기 어린 목소리가 갈라진 성대 사이로 새듯이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이런 저를 받아줘서 고마웠어요.”

사실 아페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께서 예언하신 것은 이런 일에 대비를 하라는 뜻이었을 텐데, 어째서 두코는 그 예지몽대로 죽었을까? 대비가 부족했다면, 어떤 대비가 부족했기에 두코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신이 빠트린 게 있었다면 어째서 신께선 그것을 알려주시지도 않으시고, 실수한 자신이 아닌 두코의 목숨을 가져가신 걸까?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아무리 이런 자책을 거듭한다고 해도 두코가 살아서 돌아올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페는 두코의 본명을 불렀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지만, 아페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화내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두코의 것 같지 않았다. 원래의 목소리는 조금 더 높았던가? 아니, 조금 더 낮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읽은 책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아페는 두코의 목소리를 벌써 잊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의 경쾌한 웃음도, 시원한 바람도, 단검을 쥐는 버릇마저 잊게 될 것이다.

잊고 싶지 않았다. 아페는 눈을 짓무를 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멈출 때까지, 눈가가 새빨개져서 보는 사람마다 안타까워할 정도로 닦아내자 마침내 눈물이 멎었다.

고개를 든 아페의 맞은편엔 마찬가지로 침울한 표정의 크로마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비애에 기력을 쏟기엔 그에게 주어진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페는 그런 얼굴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으니, 외면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아페를 보고, 크로마가 물었다. 막사의 문 앞에 선 아페는 뒤돌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분들께서 오실 테니까요. 그전에 기사단의 정비도 해둬야 할 것 같아서요.”

“같이 가겠습니다.”

“아뇨. 여기 계세요. 오늘 밤은 부단장의 곁을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간신히 울음을 참은 목소리가 답하는 걸 듣고 나서, 아페는 막사를 나섰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엔 별이 빛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원은 조용했다.

아페가 두코의 어머니, 미들 부인의 일 때문에 기절했다가 깨어난 날과 비슷한 하늘이었다.

‘내가 지금 그걸 생각해봤자 뭐 어쩔 거야. 모녀를 둘 다 죽게 내버려 둔 게 난데 내가 슬퍼할 자격이 있어?’

아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크로마의 울음소리가 막사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제 것보다 분명 크기가 클 슬픔에, 아페는 걸음을 빨리했고, 그러던 중 크로마에게 가려던 기사들을 막아서 대신 일을 처리했다.

악마를 소환했던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려고 했지만, 두코가 잡아서 심문하던 이는 막사 안에서 죽어있었고, 경계 근처에서도, 막사 근처에서도 악마 숭배자를 봤다고 진술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진 아페는 크로마와 함께 이주민들을 데리고 경계 근처로 갔을 때를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누군가가 악마를 봤다고 소리치기 전까진 기사들도 전혀 그것들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럴 수가 있나? 아무리 미숙한 기사라고 해도 신성력이 없는 일반인들보다는 악마들을 일찍 알아챌 수밖에 없는데.’

더군다나 그렇게 소리친 사람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지만, 각각 들려온 방향을 다르게 진술했기 때문이었다.

이주민들을 각각 심문하고 나온 아페는 급하게 자신을 찾아온 기사를 따라 두코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는 익숙한 말 두 마리가 매여있었고, 누가 왔는지 눈치챈 아페는 천천히 막사의 문을 걷어 올렸다.

“….”

막사 안에 있던 세 사람 중 이디스가 가장 먼저 아페를 알아챘다.

이디스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 가까스로 그를 받아낸 아페는, 이디스의 등을 토닥이며 프라이에의 표정을 살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프라이에나 이디스나 둘 다 땀에 절어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저하.”

숨소리처럼 쉰 목소리에 아페는 고개를 들었다. 프라이에는 그를 보지 않고 관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물었다.

“사망자는 있습니까?”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주민 셋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부상병들은 이미 자리를 옮겨서 치료를 받았고요.”

“그런가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관 옆에 자리한 프라이에는 손을 들어 두코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잔뜩 떨리는 손가락이라고 해도 그 손짓만큼은 정성스러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크로마가 두코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자백하듯 내뱉는 말에 프라이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원망스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이 애가 죽은 건 네 탓이 아니잖아. 그리고 두코는 자기가 죽을 걸 각오하고 싸웠을 거야.”

아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무리해서 전투하느라 녹초가 된 두코에게 아페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해서 남들을 지키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내지른 말이었지만, 아페는 그 말이 따지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덧붙였었다. 물론 두코는 아페의 의도를 정확히 눈치챘다.

‘전 태어났다는 이유로 많은 걸 받았습니다. 그걸 준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줄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프라이에처럼 남들을 챙기는 건 못 하니까 지켜주는 거라도 잘 해야지요.’

그렇게 말했던 두코의 표정은 지금 프라이에가 지어낸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아페는 선명하게 두코의 목소리를 떠올렸고, 또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프라이에는 눈물을 참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디스를 달래주기까지 했는데, 속상한 이디스가 제 상관에게 슬프지 않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슬퍼. 그래도 굳이 지금 눈물을 흘리지 않는 건 너희가 있기 때문이야. 집행자께서 도착하기 전까진 내가 총책임자니까, 슬퍼하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

그 모습에 크로마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달싹이는 것에 그쳤다. 프라이에는 아페와 크로마에게 전투 상황과 사후처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이라 이렇게 단정하면 안 되겠지만, 아르카눔 사건이랑 비슷해 보이는 것 같아. 기사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악마의 기척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여태까지 그가 유일했어.”

일전에 캐서린 사건 때와 다르게 프라이에는 아르카눔을 언급하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크로마는 당시 프라이에에게 진술을 요청했던 시도폰에게 두코가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해내고 무의식적으로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프라이에는 잠깐 두코를 보았다가 시선을 떼어냈다.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프라이에는 악마를 소환한 흔적은 찾아냈냐고 크로마에게 물었다.

“아직까진 찾지 못했습니다. 경계 근처에 소환되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밤에 멀리까지 수색대를 보내긴 힘들어서….”

“그럼 내가 다녀올게. 이디스, 도와줄래?”

눈물을 세게 닦아낸 이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페는 두 사람을 말렸다.

“아까 크로마가 말한 것처럼 지금은 위험해요. 날이 밝으면 가세요. 여기까지 와서 전혀 쉬지도 못하고 바로 갔다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프라이에는 아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르카눔은 목적을 이뤘으니 저희에게 더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겁니다. 늦게 갈수록 그자의 흔적을 찾기 힘들 테니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당황한 아페가 프라이에를 붙잡았다.

“아르카눔의 목적을 알아내셨다고요?”

“…아직은 짐작일뿐이지만. 그의 목표는 두코를 없애는 거였을 테니 굳이 저나 이디스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점점 더 이상한 말을 해대는 프라이에를 보며 아페가 혼란스러워하자, 크로마는 우선 그들을 보내주자고 말했다. 하지만 아페는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마저 잃을 수 없어요, 못 나갑니다!”

프라이에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아페에게 계속 괜찮다고 이야기했지만, 아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까 고개를 끄덕였던 이디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다.

결국, 아페를 이기지 못한 프라이에는 쪽잠을 잔 뒤에 경계로 가보는 것으로 합의했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크로마가 그 뒤를 따랐고 이디스는 아페를 따라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크로마는 프라이에에게 춥지 않냐고 물었다. 프라이에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막사에 도착한 프라이에는 침대에 눕지 않았다. 크로마는 작은 램프에 불을 붙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몰래 가실 겁니까? 알게 되면 두 사람 다 화낼 텐데요.”

군장을 재정비한 프라이에가 막사의 뒤쪽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잠깐 눈을 감기만 해도 그 애가 생각나는데 내가 잠들 수 있을까.”

속으로 한숨을 쉰 크로마는 아까처럼 프라이에를 따라갔다. 사람이 있는 것처럼 램프는 켜둔 채였다. 프라이에가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

“자네도 못 쉬지 않았나?”

“상관이 그렇게 됐는데 저라고 잠이 오겠습니까? 그리고 부대장만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정말 아무 일 없을 거야.”

사실 프라이에는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지만, 크로마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에 올라탔다.

작은 소리라도 날까 봐 다급히 말을 진정시킨 크로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들을 겸 해서 따라가는 겁니다.”

“…알겠어.”

들키지 않고 막사 구역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그제야 속도를 높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크로마의 눈빛에 프라이에가 입을 열었다.

“아르카눔은… 아직 그자라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로 이번 사태도 그자가 일으킨 걸 거야. 악마가 가장 가까운 인간들을 지나쳐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뭘까?”

“소환자가 여기 있거나 신성력이 강한 인간들을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단 소환자는 여기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프라이에가 말을 받았다.

“신성력이 강한 인간을 쫓았다는 것도 말이 안 돼. 거기엔 아페 저하도 있었으니까. 둘 다 아니라면 경계 근처에서 악마를 소환한 누군가가 명령을 내려서 막사까지 왔다고 추론하는 게 맞아.”

“그래서 아페 저하께 숨기면서까지 여기 와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대화가 끊긴 두 사람은 마침내 이주민들이 자리 잡은 마을에 도착했다. 말의 속도를 줄이고 크로마가 경계 쪽으로 안내했다.

“마을 건물 때문에 길이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이쪽입니다.”

프라이에는 잠깐 크로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을을 둘러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크로마는 괜찮냐고 물으려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뒤돌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프라이에는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에 손이 떨릴 정도였지만, 프라이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정말 마을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네. 그 애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돼야 했었지?’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은 프라이에는 크로마가 만들어낸 불꽃을 따라 바닥을 살피며 걸어갔다.

헤일로 단장 사건 당시에 아르카눔이 서 있던 자리에 문양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문양을 해석해내지 못했다. 프라이에는 지금 그 문양을 찾고 있었다.

프라이에에게 문양에 대한 설명을 들은 크로마도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함께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프라이에가 물었다.

“넌 내가 어떻게 아르카눔의 목표를 알아냈는지는 물어보지 않는구나. 그걸 듣고 싶어서 따라왔다고 했으면서.”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걱정되어서 따라온 게 크거든요. 물어보는 거야 나중에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 추리는 내가 먼저 해낸 게 아니야, 집행자께서 헤일로 단장 사건 때 말했던 게 기억이 나서….”

프라이에가 말을 흐리자 크로마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눈을 한 채 프라이에가 멈춰있었으니, 크로마는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흙바닥에 그려진 동그라미 안에는 빽빽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크로마가 조심스레 묻자 프라이에는 괜찮다는 말 대신 이 문양을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설마 아르카눔이 악마를 소환했을 때도….”

“응, 문자로 쓰인 게 전혀 없어서 아무도 이 문양의 뜻을 해석해내지 못했어. 그래서 시전자가 누구인지, 소환해낸 악마가 누구인지, 악마에게 무엇을 명령했는지 같은 걸 알아낼 수 없었어.”

“하지만 이런 문양을 사용하는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면 시전자가 누구인지만은 추론할 수 있는 거군요.”

프라이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아까 이야기하다가 말았는데, 아르카눔은 등장할 때마다 특정한 누군가를 죽이고 사라져. 여기까진 다른 악마 숭배자들이랑 다를 게 없지.”

“그렇죠. 악마를 소환하는 놈 중 대부분은 누군가를 해치는 게 목적이니까.”

여태 마주쳤던 범죄자들을 회상하며 크로마는 몸서리쳤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또는 단순히 거슬려서, 아니면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쳤던 인간들은 언제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그리고 당한 사람도.

크로마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르카눔은 뭐가 다른 겁니까?”

“동기.”

단호한 대답에 크로마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헤일로 단장과 두코 부단장이 아르카눔에게 살해당한 동기가 일반적인 사례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원한이나 원망이 아니라 다른 동기로 인한 살인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프라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도 내가 생각해놓고도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서 계속 말 못 하고 있었던 거니까.”

잠시 입을 다물고 침을 삼킨 프라이에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마. 근거 따윈 없는 내 추론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아르카눔이 두 사람을 콕 집어서 없애려고 든 이유는… 집행자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행자가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거지.”

크로마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고, 스산한 숲속에선 간간이 일찍 깬 새들이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목소리를 낮춘 크로마가 그러면 프라이에도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프라이에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날 죽일 거였으면 내가 경계를 맡았을 때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때는 날 가만히 놔뒀으면서 두코가 경계를 맡게 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난 죽일 이유조차 없었다는 거겠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잠깐 말문이 막힌 크로마가 헛기침을 한 후에야 다시 말했다.

“그땐 아직 경계가 불안정해서 집행자께서 남부로 내려가지 않으셨을 때잖습니까. 이번 일도 집행자께서 자리를 비워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내가 아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분을 탓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두코가 여기 있었다면 안정화가 더 빨리 됐을지도 몰라.”

“하, 만약 정말 당신의 추리대로라고 하면 아르카눔이 집행자를 곤란하게 하는 게 목적인 건가요.”

프라이에는 대답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이건 집행자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성가신 방법이야. 자기가 부재중일 때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면 집행자는 경계 근처를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이상해.”

크로마가 말을 받았다.

“집행자께서 계속 경계에 계시면 악마들이 쳐들어오기 더 힘드니까요.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시켰다고 하기엔 부른 악마의 숫자도 적었잖습니까.”

어느새 프라이에의 등 뒤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밝아지고 숲이 깨어나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미약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프라이에가 말했다.

“솔직히 아르카눔 정도라면 더 많은 악마를 불러모아서 집행자가 없는 동안 마을을 전부 쓸어버리고 진격할 수 있었을 거야. 이렇게 한 사람만 죽이고 끝나는 건 이상하지. 집행자가 계속 경계에 남아있음으로 인해서 아르카눔이 얻을 이득이 뭘까?”

“해석하지도 못하는 소환식 말고 경고문이라도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렇게 아무 근거도 없이 추리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군요.”

“아무것도 알려주기 싫다는 거겠지. 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렇게 말하는 프라이에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다.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크로마는 그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어진 프라이에의 말엔 조소가 담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어라, 뭐 그런 건가? 사람들이 자기 명령 때문에 죽고 그러니까 절대적인 존재가 됐다는 효능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이쯤 되니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요. 그놈의 성정이나 이딴 변태적인 취향은 제쳐두고 집행자가 경계를 계속 지키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느새 밝아진 주변을 돌아보던 프라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 아까처럼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갔고, 여전히 대화는 이어졌다.

“두 사람! 한참 찾았는데 설마 벌써 다녀온 건가요?”

“죄송합니다. 저하.”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페는 말이 멈추자마자 프라이에게게 외치듯 말했다.

가만히 있겠다고 말해놓고 몰래 나다닌 것은 두 사람이었으니 프라이에는 군말하지 않고 바로 사과했고, 이디스는 다치진 않았냐며 두 사람을 꼼꼼히 살폈다.

크로마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아페는 프라이에의 안색이 좋지 않다며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게 맞냐는 의심을 쉽게 풀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프라이에가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하. 그보다 지금 이야기해야 할 사항이 있으니 긴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하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요.”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디스와 함께 마을을 살피고 온 뒤에 프라이에가 기다리고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자리에 모인 사람을 둘러보던 프라이에는 크로마와 이야기했던 것을 아페와 이디스에게도 들려주었다.

한참을 귀기울여 듣던 아페와 이디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중간에 프라이에의 이야기를 끊은 이디스가 말했다.

“잠시만요, 이대로 이야기하면 이단 취급받기에 십상이라고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피고 이야기했어야죠.”

이디스는 막사 천막을 들어 주변을 매서운 눈으로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자리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망보는 아이가 있었다며 이야기해준 이디스는 뒤늦게 아페의 눈치를 보았지만, 아페는 못 들은 척 프라이에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계속하죠. 그래서 저는 아르카눔이 헤일로 단장과 두코 부단장을 살해한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추측이 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집행자를 괴롭힐 방법이라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거고, 집행자를 경계에 계속 머물게 함으로써 아르카눔이 얻을만한 이득은 없을 테니까요.”

이어서 크로마가 아까 자신이 제시한 의견도 얹었다. 아페가 그것까지 다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저도 크로마의 의견에 동의해요. 아르카눔은 확실히 목적을 가지고 두 사람을 살해했지만, 그 목적을 추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거잖아요. 악마를 소환했다고 추정되는 문양도 단지 두 사건의 범인이 아르카눔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었고요. 그러니 지금은 집행자를 경계에 붙잡아뒀을 때 아르카눔이 얻을 이득을 생각해보는 게 더 좋겠지요.”

잠깐 뜸을 들인 아페가 다시 말했다.

“집행자를 경계에 두는 게 아니라 남부로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디스가 말을 받았다.

“남부 교회와 북부 기사단의 연결을 느슨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연락은 집행자께서 직접 가지 않으셔도 편지로 충분히 가능한 데다가 다른 사람도 이동할 수 있는 것을요.”

“그건 그렇죠.”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아페였지만, 그는 말도 안 된다며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아르카눔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집행자와 성녀 사이를 알고 있진 않을 거 아냐.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뭐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보았지만,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아르카눔이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경고한 적도 없었거니와, 헤일로와 두코가 죽는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저희는 순찰이나 하고 올게요. 두 분은 여기 계세요.”

이디스가 아페를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크로마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이미 다녀오신 분한테 또 시킬 순 없죠.’라며 거절당했다.

프라이에는 여전히 아르카눔을 생각하느라 표정이 좋지 않았다. 크로마가 그의 옆에 다가가 집행자께서 도착하시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아까 아르카눔의 동기에 관해 이야기했던 거… 집행자껜 말씀드리지 마. 그분이라면 혼자 거기까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 알겠습니다. 나중에 이디스와 아페 저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일로 단장과 두코 부단장 모두 자신의 부재 상황에서 사망한 상황이니 두 사건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는 순간 집행자의 마음이 어떻게 무너질지 몰랐다. 프라이에가 물었다.

“집행자께선 언제쯤 도착하시나?”

“남부에서 아마 바로 출발하셨을 테니 3주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2주 정도 남았습니다. 물론 급하게 오실 테니 그것보단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그동안…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까. 내가 냉각 속성이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프라이에가 괜히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죽은 사람이 시신이 온전하다고 돌아올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프라이에는 시도폰이 두코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제대로 하길 바랐다.

‘시도폰이 그렇게 하고 나면 나도 두코를 보내줄 수 있겠지.’


고개를 든 아페의 맞은편엔 마찬가지로 침울한 표정의 크로마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비애에 기력을 쏟기엔 그에게 주어진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페는 그런 얼굴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으니, 외면할 수 없었다.

-> 여기서 아페가 떠올린 사람은 미들 부인의 장례식 때 자신을 대신해서 일했던 카리타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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