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6화

시도폰 도착...과 오랜만에 보는 얼굴

6월 8일 오후,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비가 와도 시원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사람들은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기사단의 정문에 닿았다. 프라이에의 막사로 누군가 뛰어와 외쳤다.

“집행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벌써?”

집행자가 예상한 날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에 기사들이 급하게 각자의 숙소에서 뛰쳐나왔다. 소식을 전한 기사에게 프라이에가 집행자는 어디로 향했는지 물었다.

“바로 두코 부단장의 막사로 뛰어가셨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을 겁니다.”

“젠장.”

작게 욕을 짓씹은 프라이에가 우산을 쓰지도 않고 두코의 막사로 뛰어갔다. 막사 앞엔 시도폰과 솔라,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타고 온 말이 얌전히 기사들의 지시를 따라 마사로 향하고 있었다.

말없이 막사의 천을 걷어 올린 프라이에는 관 옆에 꿇어앉은 시도폰과 그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자리에 멈췄다.

평소 침착하던 솔라도 주먹을 꽉 쥔 채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자신이 늦었다고 자책하는 시도폰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시도폰의 창은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프라이에는 그것을 주워다가 벽에 세워두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기사들 앞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시도폰이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고 했는데, 아니 애초에 자릴 비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도폰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비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잔뜩 젖은 손에 시신이 훼손될까 봐 관 가장자리만 조심스레 잡은 모습에 프라이에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제야 프라이에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시도폰이었다.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시도폰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위로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막사에 가득 들어찬 냉방기기 때문에 젖은 채 서 있던 기사들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지만,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프라이에가 시도폰을 직접 일으키며 말했다.

“시도폰, 아니 집행자. 지금 당신께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정식으로 장례식을 준비하는 건 제가 할 테니 다른 걸 해주셔야겠습니다.”

시도폰은 제 어깨를 붙든 프라이에의 손에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눈물로 흐려진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하지만 시도폰은 프라이에의 의도까지 파악할 정도로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프라이에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프라이에는 손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나는 더 오래 슬퍼하면 안 되는데? 단장님 때도 잠깐이었잖아. 이번에도 내가 없는 곳에서 누군가가 또 죽었다는데, 아니, 그래서 그러는 거야?”

“잠시만, 진정해.”

“나는 추모할 자격도 없어?”

점점 격해지는 시도폰의 어조에 프라이에뿐만 아니라 솔라도 그에게 진정하라고 일렀다.

두 사람이나 저를 붙들고 말리니 시도폰은 그들을 뿌리치지 않는 대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풀려난 프라이에는 재차 차분히 말했다.

“네 마음을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야. 지금 네가 이런다고 두코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야. 네 막사로 돌아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와.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

잔뜩 충혈된 눈으로 시도폰이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막사를 나섰다.

그 뒤를 기사들이 따라서 나서자 막사 안에는 프라이에와 두코만이 남았다. 먹먹한 빗소리를 등지고 프라이에는 눈을 감은 두코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꼭 자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는 문득 두코가 미들 부인의 장례식 후, 그의 물건을 처분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 두코는 갖가지 옷과 보석을 처분하여 거주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프라이에는 그런 두코에게 몇 개는 조금 가지고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니, 사실 고민을 좀 하긴 했는데, 역시 이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있는 게.”

여전히 걱정을 거두지 않는 프라이에에게 두코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이 심하다니까, 난 너희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너도 골라 봐, 뭐가 좋을 거 같아?”

두코는 프라이에가 좋아할 법한 물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프라이에였으나, 결국 그도 두코의 기세에 항복해 깃털 펜을 하나 골랐다.

같은 가게에서 두코는 작은 액자 틀을 하나 구매했었다. 프라이에는 나중에 두코가 그곳에 미들 부인의 초상화를 꽂아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막사에 그걸 뒀던 거 같은데 어디 있지? 봉안 전에 관에 같이 넣어주려고 했는데.’

두코의 짐을 정리해야 했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시도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두코의 책상 서랍 맨 위 칸을 열어본 프라이에는 붉은 겉표지의 책을 발견했다. 책 옆에는 옛날, 프라이에가 두코에게 선물했던 보라색 가죽의 노트가 놓여있었고 미들 부인의 초상화가 담긴 작은 액자도 그 옆에 있었다.

한데 그 세 개 이외에는 첫째 칸에 있는 것이 없었다. 프라이에는 뒤집힌 붉은 책을 반대로 돌려 제목을 확인했다.

“내가 가지고 싶다고 했던 책이네. 언제 이걸 구했던 거야… 미리 말해주지, 같이 읽고 싶어서 구해다 달라고 했던 건데.”

그렇게 중얼거린 프라이에가 책의 첫 장을 펼치자 책에 끼워져 있던 편지 봉투가 떨어져 서랍으로 도로 들어가 버렸다.

직감적으로 그 편지를 지금 읽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낀 프라이에는 봉투를 넣고 책을 다시 봉인했다. 결국, 그는 시도폰이 막사로 돌아오기 전까지 두코의 짐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친 비에, 시도폰은 어둑한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막사로 들어갔다. 촛불도 켜지 않고 앉아있던 프라이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여기 말고 내 막사로 가서 이야기하자.”

“…응.”

두 사람은 프라이에의 막사에서 사후처리를 논의하다가 수면 부족으로 시도폰이 눈을 거의 뜨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해산했다. 프라이에의 부축을 받아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시도폰은 침대 위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씻고 나서 시도폰의 명령으로 잠깐 눈을 붙였던 솔라가 어느새 깨어나서 시도폰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솔라는 프라이에의 눈가가 부어오른 것을 모른 척하며 그를 배웅했다.

“혼자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 나야 틈틈이 잤으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프라이에는 잠이 부족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불안한 걸음걸이를 지켜보던 솔라는 한숨을 짧게 쉬고는 프라이에를 부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는 변명하지 못하고 프라이에도 솔라에게 체중을 실었다.

 


두코의 장례는 시작의 땅에서 치러졌다. 헤일로는 기사단에 입단하고 나서도 가문에 이름이 있었지만, 두코는 스스로 가문을 나오고 나서 그의 이름도 지워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코가 생전에 작성해둔 유언장에도, 그가 만약의 사태로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가문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두코의 여동생이 남편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달리아 같은 반응을 예상했던 시도폰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꽃을 놓아둔 채 돌아서는 이를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있는 남편이 그보다 더 두코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내색하지 않은 시도폰이 두코의 여동생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그는 시도폰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뿐, 시도폰이나 기사단을 원망하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았다.

‘차라리 달리아처럼 날 원망하기라도 했으면….’

그를 보낸 시도폰은 어느새 두코의 그림 앞에 꽃을 들고 선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옅은 녹색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이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꽃을 놓고 한참을 거기 서 있다가 돌아섰다.

“…코지.”

“내가 와서 놀랐지. 두코 일을 듣고 나서 내가 대표로 가겠다고 오토 대주교님께 졸랐거든.”

“오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어물거리는 시도폰에게 코지가 말했다.

“잠깐 시간 괜찮을까?”

어차피 헌화는 코지가 마지막이었다. 기사들은 외부인사들이 오기 전에 이미 헌화를 마쳤다.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 프라이에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낮이니 어둡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려는지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묵묵히 걷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코지였다.

“네가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어. 그래서 네가 혹시 네 탓을 할까 봐 걱정돼서 와본 거야.”

“고마워. 그런데 두코가 그런 일을 당한 건 내 탓이 맞는 것 같아.”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코지가 물었다.

“두코를 그렇게 만든 악마가 그렇게 말했어?”

마찬가지로 그를 따라서 멈춘 시도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걸 어떡해. 헤일로 단장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럼 평생 경계를 지키다가 죽을 거야? 네가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모두가 죽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하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위대하신 분께서 그러라고 주신 힘이야. 내가 누군가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분께선 나를 도우시겠지.”

신까지 들먹이니 코지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시도폰이 남부로 내려오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설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코지는 가방끈을 힘주어 잡았다.

“네가 직접 이의를 제기해야 왕실에서도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솔라만으로도 충분해.”

“물론 솔라가 유능한 거 알아. 그런데 왕실에선 네 말이 아니라면 듣지 않을 거라고.”

그제야 시도폰은 코지의 안색을 살폈다. 하늘이 어둡다는 말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나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이건 너한테만 이야기할 게 아닌 것 같은데 프라이에도 불러줄 수 있어? 아, 그런데 왕실 관련된 이야기라 저하는 좀….”

“네 말대로 할게. 잠시만 기다려.”

결국, 프라이에까지 오고 나서 코지는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단숨에 그것들을 읽어내려간 시도폰과 프라이에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코지가 말했다.

“출처는 두 사람이 예상한 것처럼 카리타스야. 내가 북부로 가본다고 하니까 이걸 구해다 줬어. 어떻게 한 건지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믿을 만한 자료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시도폰, 내려가자.”

하지만 시도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고민하던 프라이에는 마음을 굳힌 듯, 시도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녀와. 네가 없다고 해도 누가 죽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너랑 다른 기사들을 못 믿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너무 강한 적은 정말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있는 게….”

“아르카눔이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에 죽였을 거야. 그놈은 이상할 정도로 우리를 잘 알고 있어. 이번 일로 네가 남부로 직접 가는 걸 망설일 거라는 것도 예상했겠지. 그러니까 그런 놈의 기대에 부응해줄 필요 없어.”

“아르카눔이라니 무슨 말이야?”

코지가 묻자 프라이에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잠깐 나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두 사람만 남은 막사에서 프라이에는 크로마에게 했던 이야기를 시도폰에게 반복했다. 그걸 다 들은 시도폰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혀끝에서 쓴맛을 느끼며 프라이에가 말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았고 너한테 말하고 싶지도 않았어. 하지만….”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시도폰이 대답했다.

“알겠어. 남부에 다녀올게. 대신, 가기 전까지 안전 점검은 더 철저하게 하고 갈 테니까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응. 그리고 코지를 보내고 나서 이주민들 상대로 재점검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이주한 뒤에 뭔가를 꾸미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코지를 비롯해 장례식에 참석한 외부인사들을 배웅하고 나서 시도폰은 두코의 무덤을 찾았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 아래에 줄지어 선 무덤들 사이에서 두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새 십자가를 매만진 시도폰은 말없이 서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손을 떼고 돌아섰다.

“…요즘 주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아요. 물론 주민들을 과하게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너무 엄하게 대하시는 것도 집행자의 평판에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루카의 보고에 시도폰이 피곤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루카가 조용해지자 시도폰은 부른 이유가 그것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령하셨던 대로 사형집행인이 왔습니다. 이번에 잡힌 악마 숭배자 총 세 명의 형을 집행할 예정이에요.”

시도폰이 무덤덤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걸음을 돌렸다. 그의 뒤를 따르던 루카가 당황하며 이쪽은 처형장이지 않냐고 물었다.

“사형집행인이 도착했다고 하니 보러 가는 것뿐이야. 이상한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루카는 그렇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전에 자신을 죽이려던 미카가 사형당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던 시도폰이지 않은가? 물론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루카는 어쩐지 시도폰의 이런 변화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시도폰을 대신해 사형을 주관하려던 솔라는 사형집행인과 대화하다가 그 뒤에서 튀어나온 시도폰을 발견하고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는 재빨리 루카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사형집행인까지 눈치를 보았지만, 시도폰은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의 목이 바닥에 연달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시도폰은 그곳을 빠져나왔고, 태연한 얼굴로 다음날 일정을 점검했다.

루카에게 시도폰의 이야기를 들은 프라이에가 시도폰의 막사를 찾았다가 막 그곳을 나오는 솔라를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오늘 일과는 끝이라고 하셔서요. 용건이 있으시다면 내일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사실 아까 루카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마침 솔라가 시도폰의 부관이니 그에게 이야기해두면 좋으리라 생각한 프라이에가 주저리주저리 걱정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솔라는 그런 변화가 나쁘지 않다고 대답했다. 되려 당황한 프라이에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저도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그분의 성정이 모질지 못하다는 걸 저희가 다 아는데, 오늘 일도 그렇고 요즘 집행자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긴 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렇게 하시냐고 여쭤봤습니다.”

솔라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부단장께서 그렇게 되고 나서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봤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악마를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셨고, 그렇게 하려면 손속에 자비를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는군요. 주민들에게 평판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솔라, 넌 그럼 집행자가 저렇게 변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변해서 나쁠 게 없으니까요. 저는 지금 집행자의 모습이 본인을 지키기에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격한 어조로 솔라에게 따졌던 프라이에는 돌아온 대답에 반박하지 못했다. 결국, 힘 빠진 목소리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는 자신의 막사로 되돌아갔다.

 


“오늘도 늦게 들어오시려나 보네요.”

루카의 말에 이디스가 막사 밖을 내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7월의 해는 늦게까지 빛나,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미 해가 떨어지고도 시도폰과 다른 기사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더 못 하겠다며 자리에 앉은 이디스가 말했다.

“요즘 정말 걱정된다니까요. 오늘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디까지 가신 건지 모르겠어.”

남부로 가기 전까지 악마들을 뿌리 뽑겠다며 시도폰은 자주 토벌을 나갔다.

처음엔 경계 근처에서만 움직이던 그는, 그곳에 악마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자 더 멀리 나갔고, 그렇게 점점 제망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당연히 돌아오는 시간은 점차 늦어졌고 다른 기사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들 피곤할 텐데, 아무도 돌아가자고 말 못 하겠죠.”

뒷목이 뻐근한지 자꾸 목을 주무르던 루카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은 시도폰에게 이만하고 돌아가자고, 며칠째 이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시도폰이 한 번 휘두른 창에 악마 머리가 여섯 개씩 떨어지고, 한 번의 발화에 열두 마리가 불탔다. 그런 기세로 끊임없이 악마를 죽여나가는 걸 근처에서 보고 있노라면 누가 악마인가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프라이에나 크로마, 아페에게 혼신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냈지만, 효과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솔라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 세 사람도 시도폰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시도폰이 악마를 죽이지 않으면 그 울분을 어디로, 어떻게 발산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대신 프라이에는 기사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 교대 근무를 시키는 방안을 제안했고, 시도폰은 별 이의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도폰은 매번 빠짐없이 토벌을 이끌었다.

아페의 걱정이 날로 커졌지만, 시도폰이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참견할 만한 핑계도 없었다. 이디스와 루카가 기사들을 걱정하며 막사를 들락날락하던 게 다섯 번쯤 되어서야 그들이 돌아왔다.

잔뜩 지친 얼굴의 다른 기사들과 달리 시도폰은 약간 피곤한 정도로 보였다. 그는 루카에게 갑옷을 주고 바로 씻으러 간다며 사라졌고 프라이에는 크로마의 부축을 받았다.

크로마는 시도폰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프라이에에게 속삭였다.

“이정도 했으면 그만하자고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크로마의 예상과 달랐다.

“미안, 나도 사실 시도폰의 방식이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크로마가 그를 쳐다보자 프라이에가 말했다.

“처음엔 나도 시도폰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말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지칠 정도로 싸우고 나니까 누굴 생각하면서 슬퍼할 힘도 없네. 저 애도 비슷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프라이에가 침묵하자 크로마가 말했다.

“이게 정말 괜찮은 방법일까요….”

당연히 답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슬슬 주민들이 시도폰의 자비로웠던 모습을 잊어갈 때쯤,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악마를 소탕하기 위해 나온 기사들은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시도폰이 타고 있던 말이 날뛰었고, 그것을 진정시키려던 시도폰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어떻게든 허리나 목으로 떨어지는 건 막았지만 부상은 피할 수 없었고, 신성력 때문에 몸이 금방 회복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진 않았기에 시도폰은 그날 일정을 취소하고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낙마의 원인은 바로 밝혀졌다. 악마 숭배자로 처형당했던 이의 가족이 시도폰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숭배자가 고발당했을 때, 죄인의 집에서 각종 증거품이 나와서 일가족이 전부 처형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사단이 철저히 조사한 끝에 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었다.

그리고 이런 수사는 시도폰이 명령한 것이었으니, 그로선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꼼짝없이 자리에 누운 시도폰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두코가 계속 생각이 나는데, 일어날 수가 없어.’

그는 루카를 불렀다. 한동안 시도폰이 예민하게 굴었던지라 루카는 요즘 시도폰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시도폰은 그제야 루카가 자신을 어색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 아직 그렇게 앉으시면 안 돼요. 적어도 사흘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걸어 다니지는 않을 거야, 괜찮아. 루카, 죄인의 가족들은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지?”

힘이 빠진 듯한 시도폰의 목소리에 루카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루카는 그 건에 대해 솔라와 이디스가 이야기 중이라고 보고하고는 시도폰의 등에 쿠션을 몇 개씩 끼워주었다.

“고맙네.”

눈을 감고 그곳에 기댄 시도폰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잠든 줄 알고 나가려던 루카는 자리에 멈춰서 명령할 게 있냐고 물었다. 풀벌레 소리가 지나가고, 머뭇거리던 시도폰은 입을 열었다.

“아니, 명령할 건 없고. 잠깐 이야기 좀 들어줄 수 있겠나?”

“…당연하죠!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아예 루카가 침대 옆에 작은 의자를 끌고 와서 앉자, 시도폰은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내가 과하게 훈련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계속 내가 두코를 구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나.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경계의 벽을 좀 더 철저히 관리했으면, 아예 내가 남부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이런 침입 자체가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루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페도 비슷한 문제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중에 이것도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한 루카는 계속 시도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걸 계속 생각하다 보면, 내 힘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까지 되짚어보게 돼. 단장도, 두코도 구하지 못했는데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진 사람들을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 언젠가는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시도폰이 말을 흐렸다. 당황한 루카는 그에게 손수건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흘러버린 눈물을 닦아낸 시도폰은 손수건을 세게 쥐고는 말을 이었다.

“두코 일 때문에 남부로 내려갈 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냐는 생각뿐이야. 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하,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닌데.”

“회복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물론 몸 자체는 금방 낫지만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시도폰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낙마 사건도,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느슨하게 사람들을 봐주는 바람에 두코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서 지금처럼 했는데 오히려 반발을 살 줄은 몰랐어. 이렇게 하는 게 나랑 안 맞는다는 걸 알게 된 것 외에는 소득이 없었네.”

“그런 걸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자책하시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당신께선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계시고, 저뿐만 아니라 기사단은 다 그 사실을 알고 당신을 믿고 따르고 있어요.”

“하지만….”

시도폰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것을 루카가 잘라먹었다.

“매 상황에서 어떤 길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께선 어떠한 상황이든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선택을 하셨잖아요.”

“….”

“기사단은 집행자께서 슬픔을 이겨내고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요. 당신께서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언젠가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어느새 루카는 시도폰의 한쪽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단장님과 부단장님 일을 슬퍼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분들을 추모하는 일이라면 기사단도 말리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께서 너무 괴로워하고 있으시니까 다들 걱정하는 거고요. 실제로 무리하고 계시고….”

시도폰에게 옮았는지 루카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렸다. 당황한 시도폰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꾹꾹 펴서 건넸지만, 루카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이야기를 뱉고 나면 으레 그렇듯이, 두 사람은 침묵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 막사 밖에서 인기척을 내자 시도폰이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부관 솔라입니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들어오게.”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로 들어온 솔라에게 루카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솔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한 게 아니냐고 물었고, 시도폰은 대화가 막 끝난 참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솔라라면 이걸 듣는다고 해서 내게 실망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부관한테 이런 걸 들키면 조금 부끄러울 것 같아….’

루카는 시도폰의 목욕 시중까지 드는 사이니 숨길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솔라는 시도폰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사단에 들어와 제 부관까지 올라온 이가 아닌가? 이런 사람에게 언제나 대단한 사람으로 있고 싶은 건 딱히 이상한 바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시도폰은 태연한 척 솔라의 보고를 들었다.

“이상입니다.”

“수고했네. 누워있느라 시간 가늠이 잘 안 되는데 늦은 밤이라는 건 알겠어. 돌아가서 푹 쉬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솔라는 막사를 나갔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보다 한층 편안한 얼굴로 그를 배웅한 시도폰은 루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시도폰의 바람과 다르게 솔라는 시도폰과 루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분의 성격과는 확실히 안 맞는 행동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직은 무리인가…. 그래도 가능성은 봤어.’

프라이에에게 말했던 것처럼 솔라는 시도폰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고 남몰래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을 달성하기도 전에 시도폰이 멀쩡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건 낭패였으니, 그는 루카와 시도폰의 대화를 방해하거나 막으려고 들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며칠 후, 경계의 성벽 점검까지 완료한 시도폰은 남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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