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7화

솔라가 고생이 많아...

악마의 침입을 걱정한 시도폰이 솔라를 남겨두고 가려 했으나, 프라이에가 ‘국왕 폐하와 관리들을 상대해야 할 텐데 솔라 없이 혼자 가면 힘들지 않을까?’라고 하는 바람에 솔라는 시도폰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완공된 게이트를 따라 시도폰과 솔라는 수월하게 남부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도폰이 국왕과의 대면을 통보하고 답장을 기다리지 않은 채 출발해버려서, 수도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흑색의 망토를 보고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집행자께선 가을에 오실 거라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렇게 전달을 받았는데…. 하지만 저 창과 망토는 분명 집행자님의 것이고 외모도 지난번에 본 것과 다른 게 없는데.”

수군거리던 병사들은 시도폰이 자신이 보이지 않느냐고 묻자 벌벌 떨었지만, 상부에서 알려준 것이 없어 문을 열 수 없었다. 솔라는 끝까지 문이 열리지 않으면 벼락을 내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소식을 들은 왕실 기사들이 일행을 맞이하며 성으로 안내했다.

시도폰은 말없이 흑색 망토를 휘날리며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그는 등에 멘 창을 내려놓았다. 솔라는 시도폰이 망토를 벗으려는 줄 알았지만, 창은 그대로 문 옆의 벽에 기대어졌다.

“단장님, 왜 창을 여기다가 두시려고 하십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시도폰이 짧게 대답했지만, 그 속뜻을 솔라는 바로 알아차렸다.

‘혹시 당신께서 참지 못하고 무기를 휘두를까 봐?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러자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시도폰의 창에 가까이 가며 말했다.

“창을 보관해두겠습니다.”

“되었네. 여기 둔다고 해서 누가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건드리지 말게.”

시종의 손이 창 근처에서 멈췄다. 그는 민망한 얼굴로 곧장 손을 거두고 ‘집행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라고 외쳤고 곧 육중한 나무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엔 왕이 앉아있었고 그의 오른편엔 관리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일어서서 차례로 시도폰에게 인사했고, 왕은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다며 시도폰을 손수 자리로 안내했다.

시도폰은 제 자리에 놓인 다과와 차를 한 번 쳐다보았지만,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왕에게 물었다.

“폐하. 이번 이주 정책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아무리 회의라고 하지만 개회사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니 무례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도폰은 당장 관리들을 벌하려던 것을 간신히 참고 말한 것이었고, 그가 참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의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으니 이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왕은 당황하지 않고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시도폰에게 대답했다.

“아직 교회 측에서 도착하지 않았으니 그분들이 오시면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는 길, 지치셨을 텐데 다과부터 드시죠.”

시도폰은 말을 이으려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부 교회 대변인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일부러 늦게 교회에 소식을 전했던 왕은, 예상보다 이른 도착에 잠깐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미소를 되찾고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백합 모양의 장식이 달린 나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뒤에서 나타난 이는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진정하려고 고개를 잠깐 숙이긴 했지만, 곧 자세를 바르게 하고 왕과 시도폰에게 인사한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뒤로 서류를 품에 안은 이들이 연이어 몇 명 들어왔으나 시도폰은 처음 들어온 사람만을 놀란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단장님, 다들 도착하셨으니 시작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솔라가 시도폰에게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도폰이 국왕을 바라보자 그는 얕게 마른기침을 하고는 개회를 선언했다.

의제가 의제이니만큼 사담이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고, 시도폰이 이야기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을 받은 관리들은 애써 매서운 눈빛을 피했다.

“저희 쪽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먼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민 계획이 4월 말과 5월 중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만, 실제 이민 인원이 보고된 것과 다르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진실인지 아닌지 판별하고자 합니다. 이민 인원은 전후반을 합쳐 총 400명이어야 합니다. 맞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시도폰을 향한 것이었다.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480명이었습니다. 전반에 200명이었고 후반엔 280명이었습니다.”

코지가 전해준 서류에 적혀있던 내용이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 어이가 없었다. 시도폰은 관리들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누군가가 착오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착오? 80명이나 차이가 나면 식량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을 텐데 어떻게 거기서 착오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까?”

솔라가 물었다. 국왕은 태연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착오가 있었다던 관리는 우물쭈물하다, 남부 교회에 보고가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회 측 사람이 일어서서 물었다.

“남부에서 이주민을 보내기 전, 마기 측정을 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해당 측정에 필요한 도구가 아무리 여유분이 있었다고 해도 80명의 추가 인원까지 검사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고 보는데, 추가 인원에 대한 검사는 있었습니까?”

“아니 그건… 교회에서 직접 검사했던 사항이지 않습니까? 그걸 역으로 저희에게 물어보시면.”

누군가가 말을 잘랐다.

“교회에서 직접 검사했던 건 전반 이민자들 200명뿐이었습니다. 후발대는 오순절 행사 대비로 일손이 부족해 왕실에 맡겼고요. 관련된 공문도 있으니 요청하시면 바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관리 중 나이가 지긋한 이가 말했다.

“그…. 아무래도 문서와 다르게 실무가 돌아갔을 수 있으니 그 부분은 저희가 현장 담당자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발대를 검사하는 현장에 저도 있었습니다. 공문도 거기서 주고받았었지요. 그러니 재차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리들이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자 여태 침묵을 지키던 왕이 물었다.

“…성녀께서 어찌 직접 나서셨습니까?”

이야기와 상관없는 질문이었지만, 시도폰도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마기 측정 검사에 사용되는 도구는 말단 성기사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약간의 신성력만 요구하고 사용 방법도 복잡하지 않았으니, 굳이 카리타스가 그걸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원체 다양한 일을 맡고 있어서, 왜 직접 나섰냐는 질문은 조금 어색하네요. 이 일도 그저 제가 맡은 많은 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덤덤한 대답에 시도폰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카리타스가 하던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 추가 인원에 대한 검사는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이민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는 겁니까?”

더 발뺌할 수 없었던 관리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면목이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침음을 흘렸고 시도폰은 손을 단단히 말아쥐었다. 그걸 눈치챈 국왕이 그를 진정시키고자 말했다.

“집행자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해서 담당자를 처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았으니 이만 진정하시고….”

마지막 문장에 시도폰이 국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갈색 눈이 국왕을 뚫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시도폰은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피해가 적었다고요? 내 동료가 죽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지키려고!”

그때 어느 한구석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져 내렸다. 가장 먼저 소리를 들은 이는 솔라였지만, 그는 소리의 정체를 알고 그것을 외면했다. 다음으로 반응한 사람은 카리타스였다.

“뭐 하려는 거야? 당장 멈춰!”

벽을 뚫고 들어오려던 것은 시도폰의 창이었다. 허공에 정지한 것처럼 멈춘 창은 하얀 자작나무에 막혀 부들부들 떨렸다.

창을 향해 손을 뻗은 시도폰은 여전히 비어있는 제 손을 보다가 눈알만 도르륵 굴려서 카리타스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원망을 읽어낸 카리타스는 창을 더 단단히 얽어맸다. 창이 나무를 찍어누르듯 파고들었다.

“왜 너까지 날 방해해?”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카리타스가 시도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미안, 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대로 가면 반역죄야.”

카리타스는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왕을 속으로 한심하게 보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고 있던 시도폰이 갑자기 손을 내렸고, 창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네가 내 마음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이런 건 못 할걸.”

욱하는 마음에 시도폰은 그렇게 내뱉고 자리를 떴다.

나가면서 그는 카리타스를 외면한 채 스쳐 지나갔고, 소리를 듣고 급하게 방으로 들어온 기사들에게 비키라고 명령했다. 흑색의 망토가 휘날리며 사라지자 솔라는 자리에 남아서 이걸 수습하고 가야 할지 시도폰을 따라야 할지 고민했다.

손목을 주무르며 시선을 내린 카리타스가 말했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집행자를 따라가게.”

“… 북부의 일입니다.”

“두코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 허투루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네. 집행자께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지 걱정되니 얼른 가보게. 그리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짧게 망설인 솔라는 자신이 들고 온 서류를 카리타스 옆의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카리타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시도폰을 찾으러 떠났다.

다행히 목격자는 많았다. 그들은 집행자가 그렇게 화가 난 건 처음 봤다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솔라는 대답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 저쪽으로 가시는 걸 봤어요. 그런데 저긴 막다른 길이고 아무것도 없을 텐데 왜 가셨는지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궁의 지리는 시도폰이나 솔라나 익숙하지 않았다. 아까의 일로 흥분한 시도폰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게 틀림없으리라 생각한 솔라는 시종이 알려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찾아낸 시도폰은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란할 그의 마음과 다르게 화창하고 맑은 날씨가 창밖에서 흐르고 있어, 시도폰의 갈색 머리카락이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여기 계셨군요. 찾았습니다.”

“…하.”

솔라에게 뱉은 한숨은 아니었다. 시도폰은 창틀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잠깐 뜸을 들인 그는 변명하듯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전하를 진심으로 다치게 하려고 했다든가, 협박하려던 건 아니었네. 그냥 정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아까의 사태에 딱히 유감이 없었던 솔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전하를 해치려고 하셨다면 창이 아니라 불꽃을 사용하셨겠죠. 그 방법이 더 간단하니까요.”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는 건 못 하네….”

“압니다. 너무 죄책감 가지시는 것 같아서 농담 좀 해본 겁니다.”

“자네가 농담도 할 줄 알았나?”

그렇게 말하는 시도폰은 아까보다 한층 가벼워진 얼굴로 뒤돌았다. 솔라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시도폰은 믿을 수 없다며 살짝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시도폰은 재차 한숨을 쉬고 말했다.

“돌아가지, 회의가 끝난 건 아니니까.”

솔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성녀께서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주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저를 이곳으로 보낸 것도 성녀님이십니다.”

돌연 시도폰이 머리를 감쌌다. 놀란 솔라가 그에게 다가가자 시도폰은 다시 고개를 젖혀 들었다.

“어째 매번 뒷수습을 맡기게 되는 기분이라 미안하군. 어차피 내가 지금 회의실로 돌아간다고 해도 분위기만 나빠지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저흰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 성녀께 이쪽으로 와주십사 연락을 넣든, 저희가 회의실로 가면 되니까요.”

“좋은 생각일세 그런데 자네는 응접실이 어딘지 아나? 내키는 대로 걸어왔더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네. 계단을 사용하진 않았으니 회의실이랑 같은 층인 건 알겠는데 말이야.”

순간, 정적이 흘렀다. 시도폰이 솔라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깔고 시선을 피했다. 당황한 시도폰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물었다.

“그야… 목격자와 이야기하면서 왔지요. 그런데 그들과 대화를 하느라 정작 길을 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군. 아페 저하께서 계셨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시도폰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솔라가 그 뒤를 따랐는데 어째서인지 아까까진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리저리 헤맨 끝에 사람을 발견한 시도폰은 그에게 응접실이 어딨는지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먼 여정을 다녀와 지쳐버린 사람들처럼 응접실 자리에 앉았다.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성녀의 도착을 알렸다.

“들여보내게.”

그렇게 말하며 시도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으로 들어온 카리타스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물론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한 행동이었지만, 카리타스의 뒤에서 호위를 맡고 있던 메릭은 그것을 보고 등 뒤로 숨긴 손을 말아쥐었다.

그 상태로 시도폰이 구구절절 사과와 감사를 전하자 카리타스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살풋 웃었다. 그제야 자신이 카리타스를 붙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시도폰이 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미안, 회의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가 너무 붙들고 있었네. 교회로 돌아갈 거지?”

“….”

어색하게 웃는 시도폰의 얼굴엔 아쉬움이 스쳤다. 카리타스는 고개를 저으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까 시도폰이 앉아있던 곳의 옆자리였다. 메릭은 조용히 카리타스의 뒤에 자리를 잡았고 시도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돌아가지 않고?”

“회의 결과는 서면으로만 들으려고? 그래도 문제는 없지만…, 말로 설명하는 게 더 자세할 수 있으니까…. 아, 혹시 내가 바쁠까 봐 걱정하는 거면 괜찮아.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이니까.”

‘너무 붙잡는 것 같았나?’

카리타스의 걱정과 다르게 시도폰은 그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뒤늦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올라간 입꼬리를 내렸지만,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그의 미소를 똑똑히 보았음은 틀림없었다.

“그래? 그러면 실례할게.”

시도폰은 아까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일부러 카리타스와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빈틈이랄 게 없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시도폰은 그걸 알아채고 카리타스의 눈치를 보았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도 괜찮겠지.’

두 사람이 떨어진 것은, 카리타스가 펜을 들다가 시도폰의 팔에 부딪혀 잉크가 종이에 커다란 자국을 남겼을 때였다. 다행히 문서의 여백에 떨어져서 문제는 없었지만, 놀란 시도폰은 다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이전까지 긴장한 채 서 있던 메릭이 그제야 노골적으로 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고, 그 맞은편에 앉은 솔라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오순절 당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저게 뭔 꼬라지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솔라. 여름 옷을 입었습니다. 소매가 트여있어요.


5월 20일 밤, 피데이스와 담소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가던 솔라는 그의 스승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집행자에게 알릴 생각뿐이었다. 그런 기쁨으로 가득한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누군가의 나직한 외침이었다.

익숙지 않은 목소리라 주인을 판별하는 게 어려웠지만, 밤이라 주변이 조용해 소리의 발원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점점 외딴곳으로 들어가던 솔라는 인기척을 느끼고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여긴 성녀님의 방 근처인데. 남자 목소리라니? 그 호위인가.’

아무리 호위 기사라고 한들, 늦은 밤이었다. 솔라는 대화가 이어지길 바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순간, 자신이 왜 이러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는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목소리, 낮추세요.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깨어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어쩌려고 이렇게 큰 소리를 내요.”

솔라가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성녀의 목소리였다. 그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솔라의 예상대로 메릭의 것이 맞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서운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야 항상 살피고 있습니다.”

‘못 살핀 것 같은데.’

속으로만 반박한 솔라는 혹여 들킬까 봐 기둥에 더 바짝 붙었다. 다행히 달이 밝지 않아 그의 그림자가 기둥을 벗어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더 이어졌다.

대충 들어보니 메릭이 카리타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요구하는 내용이었고, 곰곰이 이걸 듣고 있던 솔라는 문득 회의감을 느껴 자리를 떴다.

 


‘그때 들었던 것과 지금 저 사람의 태도를 조합하면 성녀께서 당신의 호위와 애정 관계에 있는 것 같은데, 왜 여전히 집행자께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내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메릭을 의심했던 지난날, 솔라는 그가 성녀와 정말 각별한 사이가 되면 속이 뒤집히리라 확신했는데 그 예상은 적중해버리고 말았다. 맞은편에서 카리타스에게 위로를 받고 있던 시도폰이 솔라에게 물었다.

“솔라,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아까 뭐 잘못 먹었나?”

빠져나갈 기회를 받은 솔라는 냉큼 그렇다고 대답하며 잠시 바람을 쐬고 와도 괜찮겠냐고 말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말랑해진 얼굴로 시도폰이 대답했다. 솔라의 속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또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멀리 나가진 말고.”

조심스레 문을 닫은 솔라는 벼락을 떨어뜨리고 싶은 것을 세 번씩이나 참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의와 성녀께서 각별한 사이가 된다면 자연스레 집행자와 멀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성녀께선 무슨 생각이신 건지 모르겠어.’

아까처럼 무작정 돌아다니지 않고, 솔라는 적당히 걸은 후 되돌아왔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왕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난번에 호위가 말하는 거로 봐선 품에 안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성녀께선 호위와 교제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행자께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 거라면….’

그런 거라면 성녀의 거절도, 아까 메릭이 지었던 표정도 다 이해가 된다. 솔라는 감히 자신이 모셔야 할 분에게 다른 감정을 가진 메릭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억지로 교제하고 계신 건 아닌 것 같았어. 하지만 저 호위는 그분이 애정을 주는 순위를 매겨보았을 때, 자신이 제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는 거겠지.’

이쯤 되니 성녀가 슬슬 둘 중 한 사람을 온전히 선택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솔라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으로도 계속 경계를 지켜야 할 집행자가 성녀와 교제할 가능성이 있는가?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그럴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반면 성녀의 호위는 앞으로 별일이 없는 이상 계속 성녀의 곁에 머물 것이다. 성녀는 이미 신께 귀의해 혼인은 불가능하다. 그의 호위는 귀족 출신이라 성녀처럼 엄격한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었지만, 가주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첫째가 아니었으니 굳이 혼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거라면 승자는 뻔하지. 그 사실을 집행자께서 언제, 어떻게 알게 되느냐가 관건일 텐데.’

솔직히 솔라는 집행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 성녀와 호위의 관계를 집행자가 평생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숨기기 힘든 것이 사랑과 재채기라고 하지 않던가? 집행자가 조금만 더 눈치를 키운다면 성녀와 호위 사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하던 솔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걸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냥 밝혀지기 전에 헤어지고 깔끔하게 호위를 관뒀으면 좋겠군.’

급기야 생각하길 포기한 솔라는 힘없는 걸음으로 응접실로 되돌아갔다. 마침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솔라가 자리에 앉기 전에 시도폰이 먼저 일어섰다. 따라 일어난 카리타스는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말했지만, 시도폰은 일찍 돌아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시도폰은 솔라에게 속은 좀 괜찮냐고 물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솔라는 하루 정도는 쉬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의외라는 눈으로 시도폰이 그를 바라보자, 솔라는 다른 기사들이 힘들어할 게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하기야 나와 솔라 둘이서만 온 게 아니니까…. 카… 아니지, 성녀님, 말을 바꿔서 죄송하지만, 혹시 교회에 남는 방이 있으면 안내해주실 수 있습니까?”

응접실을 나온 걸 의식한 시도폰이 어투를 바꾸었다. 카리타스가 기꺼이 안내해주겠다며 시도폰과 나란히 걷자 메릭이 그 뒤를 다급하게 따라갔다. 숙소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풀고 각자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저는 잠시 밖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솔라의 말에 시도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그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 시도폰은 솔라에게 용건을 물었다.

“스승님께서 외부 임무 수행 중이라고 하셔서 제가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밤 안에는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런 거였군. 조심해서 다녀오게, 음… 딱히 필요한 건 없네.”

그렇게 말하며 시도폰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솔라는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진 후 시도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카리타스가 수습해주긴 했지만, 국왕을 공격하려고 했으니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지. 아니, 정확하겐 국왕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니었는데. 뭐,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옆으로 빙글 드러누운 시도폰은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여름 특유의 텁텁한 공기에 시도폰은 문득 제 옷에서 냄새가 나진 않나 걱정하며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댔다.

‘풀 냄새 말고는 딱히 안 나네. 다행이다. 여름용 소재를 쓰긴 했지만, 걱정은 됐었는데.’

아까 카리타스의 옆에서 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카리타스에게서 청량한 꽃향기를 맡았었다.

카리타스는 펜을 떨어뜨린 게 제 잘못이라고 사과했지만, 사실 향기를 더 가까이서 맡으려던 시도폰이 지나치게 가까이 달라붙어서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시도폰은 그걸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어서 모르는 척하고 다시 거리를 두었었다.

‘안 들켰겠지? 아, 내일 돌아가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솔라는 속으로 피데이스에게 사과하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두코가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이미 피데이스와 만나서 할 이야기는 다 했으니 굳이 오늘 다시 만날 필요가 없었다.

‘잠깐 나가서 한잔 하고 돌아와야지.’

떳떳하게 정문으로 나간 그는 시장으로 들어섰다.

시도폰과 다르게 자신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서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솔라는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술은 포기하고 골목으로 피신했다.

교회에서 술을 금기시하진 않지만, 기사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걸 일반 백성에게 보여봤자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을 환기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자신을 위로하던 솔라는 인적이 드문 길 한복판에서 사내 두 명이 여자 한 명을 막아선 것을 보았다.

그들과 솔라의 거리가 가깝진 않았지만, 워낙 대화 소리가 커서 솔라는 다가가지 않고도 어떤 상황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 사내 중 한 명이 손을 치켜들자 여자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감쌌다. 살짝 한숨을 쉰 솔라가 달려들었다.

“윽! 이 자식 뭐 하는 놈이야, 뭔데 끼어들고 난리야!”

사내의 손이 내려치려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꺾이다시피 튕겨 나갔다. 그걸 본 다른 사내가 솔라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솔라는 시장 상인에게 받은 과자를 입에 물고 있었기에 사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솔라는 말없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칼집으로 자신의 머리를 후리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사내는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며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그는 기사가 자신을 폭행한다며 소리쳤고, 그 소리에 반응한 사람들이 골목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솔라는 속으로 낭패라고 생각하며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아까까지 다툴 때는 아무도 안 보더니.’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한 사내가 재차 외쳤다.

“이, 이 자가 내 팔을 이 꼴로 만들었다고! 왕실 병사에게 신고 좀 해주게!”

누군가가 대답했다.

“자네 팔은 아무리 봐도 멀쩡하네만? 뭔가 잘못 본 게 아닌가?”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지금 이게 안 보이는….”

사분지 일쯤 돌아갔던 사내의 팔이 멀쩡해져 있었고, 솔라는 모르는 척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시비를 걸었던 무리는 그제야 자신들이 건드린 사람이 평범한 부랑 기사가 아니라 성기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솔라는 눈짓으로 그들에게 꺼지라는 뜻을 전하고 제 등 뒤로 보냈던 여자 쪽으로 돌아섰다.

“솔라…씨. 맞죠?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일단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죠.”

솔라의 말에 바구니를 소중하게 안은 여성이 길을 안내했다. 그는 거주관 아이들의 간식을 사기 위해 나왔다가 이런 낭패를 당했다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제 이름은 코지에요. 지난번에 두코 언니의 장례식 때 처음 뵀던 것 같은데…시, 아니, 집행자의 부관이시죠?”

어느새 입안의 과자를 다 먹어버린 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었습니까?”

“아뇨, 여긴 다 장사를 오래 하신 분들이라 저런 시정잡배들은 드물었어요. 그런데 빈민 구역에서 설치던 놈들이, 이주 정책 때문에 자금줄이 없어졌다고 여기까지 들어오더라고요. 하… 왕실 병사들은 모르쇠 하는 것 같아요.”

“어쩐지 아까까지 사람들이 신경도 안 쓰던 이유가 있었군요. 돌아가기 전에 교회 쪽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코지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솔라에게 고마워했다.

“참, 그쪽은 이주민 관련해서 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나요?”

카리타스의 부탁이긴 했지만, 관련 서류를 직접 전하러 제망까지 온 코지였다. 코지의 바구니를 대신 든 채, 솔라는 기밀 사항을 제외하고 대략적인 내용을 코지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구나. 제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바구니가 이렇게 무거운데 안에 간식 말고 뭐가 더 있는 거 아닌가요?”

“아,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칠 때 쓸 판이에요. 종이를 매번 쓰긴 그래서 거기에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거든요.”

이후로 코지는 솔라에게 거주관의 일상에 관해 이야기하며 시장을 안내했다. 솔라는 시도폰이 공부를 싫어했다는 이야기를 그때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솔라 씨께 문자를 배워보라고 한 게 집행자셨다고요? 가르친 보람이 있었네요.”

한껏 긴장이 풀린 말투였다. 코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시선을 따라간 솔라는 길거리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솔라가 아는 사이냐고 묻자 코지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음…. 어디까지 이야기하고 있었죠?”

어색하게 웃은 코지가 화제를 돌렸다. 무엇을 말하려던 건지 솔라는 예상할 수도 없었지만, 코지가 말하고 싶지 않아 보여 그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거주관에 코지를 데려다준 솔라는 품에 음식을 가득 안은 채 돌아갔다. 코지의 추천대로 시도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잔뜩 골라서 담은 것이었다.

숙소의 문을 열자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내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솔라가 가지고 온 음식에 흥미를 보였지만, 솔라는 집행자에게 드릴 거라며 그들을 물리치고 시도폰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에 취한 목소리라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응? 이건 다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혹시 코지나 다른 거주관 애들을 만났나?’

어느새 말똥하게 눈을 뜬 시도폰이 솔라에게서 음식 봉투를 받아들며 물었다. 그는 동시에 간식을 몇 개 꺼내어 솔라에게 권했지만, 혼자 드시라며 거절당했다.

“시장에 들렀는데 우연히 코지 양을 봤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있으셔서 시장 안내도 해주셨고요.”

그렇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도폰의 볼엔 간식이 터질 것처럼 들어차 있었다. 깔끔하게 입술에 묻은 것까지 닦아낸 그는 다음 간식을 꺼내들려는 솔라를 제지했다.

‘코지를 만나러 가는 거였으면 굳이 거짓말을 안 해도 됐을 텐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시도폰은 솔라가 나가 있는 동안 계속 누워있지 않았다. 원체 활동적인 성격이라 너무 오래 누워있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던 그는, 솔라가 나가고 나서 교회 내부를 산책했다.

그러다가 그는 만나버린 것이다. 솔라가 만나기로 했다던 피데이스를.

그를 보자마자 시도폰은 솔라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아채고 충격에 휩싸였다. 결국, 그는 산책을 중단하고 숙소로 돌아와 드러누웠고, 솔라가 오기 전까지 꿈속에 빠져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뒤숭숭한 생각을 한 탓에 꿈 내용도 엉망이었다. 시도폰은 꿈속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혼자 맛있는 간식을 먹으러 간 솔라를 보고 슬퍼했는데, 다행히 현실의 솔라는 자신을 위해 맛난 것들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다.

입에 있던 것을 다 삼킨 시도폰이 솔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라는 간식을 더 달라는 줄 알고 봉투에 손을 넣었지만, 시도폰은 고개를 젓고, 한숨을 살짝 내뱉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혹시 코지와 밀회를 하러 가기 위해 나한테 거짓말을 했나?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내가 그걸 방해할 리가 없지 않은가. 궁금한 게 있는데… 얼마 전에 첫눈에 반한 건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이 없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정신이 아득해지는 헛소리에 솔라는 봉투를 떨구고 말았다.

다행히 시도폰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서 방 밖의 다른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비밀을 알게 되어 신난 아이처럼 시도폰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얼른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이마를 짚은 솔라는 그런 의혹을 전면부정했다.

“저는 단순히 환기 목적으로 외출을 하려고 했던 건데 집행자께서 혹시 걱정하실까 봐 스승님 핑계를 댄 것뿐입니다. 코지 양과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랬나? 오해해서 미안하네.”

미안하다는 것치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솔라는 제 상관의 눈치가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확실한 건, 이 정도라면 성녀님과 호위 사이의 관계는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알아챌 일이 없겠군.’

부하의 속이 뒤집힌 건 알아채지 못하고 시도폰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산책을 하겠다며 일어났다. 솔라가 뒤를 따르려 하자, 시도폰은 이미 돌아다니고 왔을 텐데 쉬라며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혼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아, 알겠네. 거기 자네, 한가하면 나랑 같이 산책이나 좀 하지.”

시도폰이 기사를 지목해 데리고 나갔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솔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늘어졌다. 시도폰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는 신전이니, 그가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한다거나 시비에 걸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솔라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혼자 다니시다가 성녀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어야지. 물론 집행자께서 성녀님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물리면 곤란해지지만, 그렇게 물린다고 해도 내가 모르는 척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솔라의 철저한 대비가 먹힌 탓인지, 시도폰은 무사히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모든 볼일을 마친 시도폰과 기사단이 경계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8월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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